|
혁명의 지속이냐, 혁명의 단속이냐?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모든 통치기구의 존립 근거 자체를 잘라버린 것이다.” 공리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J. 벤담은 당시 미국혁명의 근본문제를 그렇게 지적했다. 누구나 국가를 뒤엎고, 지도자를 몰아낼 수 있다면 반복되는 혁명 속에서 통치의 근간이 해체된다는 비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부도 유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벤담은 개탄했다. 그가 말한 혁명의 자기파괴성은 독립 이후 미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고갱이었다. 어떤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혁명을 완수하는 길인가. 결국 미국은 정치·경제의 기득권 집단, 즉 엘리트 지배층이 주도하는 반쪽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진다. 반혁명이다. 그것이 미국 사회의 기본틀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내 반란에 직면한 ‘독립전쟁의 영웅’ 워싱턴 대통령
1794년 7월,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고 재선된 이후 2년차인 시점. 피츠버그 인근, 펜실베니아 남서부 지방 농민들이 조세납부를 거부하며 민란을 일으켰다.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펜실베니아 농민봉기다. 농민들은 그 이전인 91년부터 벌써 4년째 집회와 시위, 대책위원회 구성, 항의서한 전달, 세리 추방 등 여러 방식으로 세금 거부운동을 벌여오고 있었다. 그러다 7백여 명에 이르는 농민과 민병대원이 드디어 집결, 연방정부의 조세집행관, 그와 동행한 소수의 연방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했고 반란 지도자 중 한 명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훨씬 유리한 농민군이 승리했고 며칠 후 이들은 피츠버그 공격을 위해 전진, 8월 1일에는 목표까지 불과 1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만 남겨 두었다. 반란군의 수는 가족과 함께 한 여성들까지 9천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서부 최변경이었던 그곳의 인구는 다 합해야 1만 7천이었다. 사회적 지위고하나 출신국가를 막론하고 남성들은 다 모인 셈이었다.
재무장관 A. 해밀턴으로부터 납세를 거부하는 무장봉기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받은 워싱턴은 먼저 평화협상팀을 구성, 현장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일방적 항복을 요구하는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9월 25일, 워싱턴은 계엄령을 내린다. 정확히 말하면 민란을 진압키 위해 뉴저지, 메릴랜드, 버지니아, 펜실베니아 주지사들에게 민병대 동원령을 내린 것. 상층 엘리트 중심으로 편성된 자원병과 많은 돈을 주겠다며 모집한 도시빈민 용병 등, 모두 1만 3000여 명의 진압부대가 만들어졌고 경기병과 대포부대까지 편성됐다. 진압군은 각 주에서 출발했고, 워싱턴 본인과 수행부대는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서 피츠버그로 진군했다.
진압부대를 사열하는 워싱턴을 그린 유화작품(F. 케멜마이어, 1795년 경).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야전에서 군을 지휘·인솔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월한 무력으로 진압을 확신한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로 돌아갔고 연방군은 10월 초 피츠버그에 도착했다. 우려했던 유혈사태는 없었다. 대규모 연방군 앞에서 반란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펜실베니아 농민봉기는 그렇게 끝났다.
봉기의 배경은 세금
핵심 문제는 세금이었다. 1783년 파리협상까지 8년에 걸친 독립전쟁으로 미국은 산더미 같은 국가채무를 안았다. 당시 돈으로 7500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대략 20억 달러). 사실상의 정부였던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는 세금을 부과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설령 권한이 있었다 해도 부당한 세금부과가 전쟁의 직접 원인이었는데 다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대신 각 주와 연방정부는 화폐를 발행하고 기존 관세수입을 전용하는 한편, 차관을 구했다. 국내적으로는 국가채권도 팔고 군인 급여도 차용증으로 지급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 네덜란드 은행들로부터는 거액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이자까지 쌓인 더 많은 빚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심 끝에 워싱턴 정권은 술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명 ‘위스키세(whiskey tax)’를 도입키로 했다. 그때까지 연방정부의 세수는 해외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import tariff)가 전부였다. 정부는 술, 그것도 위스키라는 약간은 고급한—럼, 테킬라, 진 등에 비해—품목에 붙는 세금이기 때문에 반발이 심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금주운동을 벌이는 사회단체에서는 그것을 ‘죄악세(sin tax)’라 부르면서 정부의 과세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791년 국내 생산품에 연방정부가 최초로 세금을 부과하는 위스키 과세법이—공식 명칭은 ‘재정 충당법(Funding act)’—통과됐다.
당시 봉기한 농민들과 깃털씌움을 당한 세리의 모습을 그린 삽화. 이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No Tax’ ‘Down with Tax (세금을 철폐하라)’라고 쓰여 있다.
바로 문제가 터졌다. 술은 도시의 양조장과 농민들이 만들었다. 도시의 경우는 크게 문제될 것 없었지만, 농민들은 달랐다. 이들은 수확하고 남은 밀, 보리 등으로 소량의 위스키를 만들어 도시에 내다 팔았다. 술은 부피가 큰 곡식보다 보관은 물론 운송이나 판매 면에서 훨씬 수월하고 유리했다. 때문에 위스키는 그들에게 현금과 다름없는 별도의 추가소득원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운송비를 포함해 세금을 내고 나면 변방의 위스키는 도시의 위스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수입원도 소득도 줄었다. 그런데도 세금은 내야 했다. 소득세 제도 자체가 없었던 시절, 이는 농민에게만 부과되는 일종의 역진 소득세였다. 게다가 금이나 은 같은 현물(hard currency)로만 납부해야 했다. 종이돈조차 보기 어려운 변방에서 귀금속은 감당 불가능이었다. 또 세금 민원을 호소하자면 도시의 관청까지 나가야 했다. 도로도 변변치 않은 시절, 그것은 또 다른 추가비용이자 장벽이었다. 먼 변방에서, 주나 연방정부로부터 변변한 보호조차 없이, 원주민 인디언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생계를 꾸리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위스키세는 억울함과 불평등의 상징이었다.
부당한 조세 둘러싸고 빗발치는 민란
워싱턴에 이어 1797년 당선된 2대 J. 애덤스 대통령은 ‘주택 및 토지 재산세(House and land tax)’ 제도를 도입한다. 프랑스와 높아진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국의 긴장사태는 독립전쟁 빚의 상환을 워싱턴 정권이 중단하자, 프랑스가 미국의 상선을 나포하기 시작한데서 비롯한다. 그 무렵 미국은 20세기의 대공황을 능가하는 엄청난 경기불황에 빠졌다. 전쟁으로 인한 농지와 재산의 손실, 사망·부상 등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 영국의 교역 방해로 인한 해외 수출시장 상실, 국가의 재정능력 부족 때문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무려 65%까지 치솟았고, 주와 연방에서 발행한 화폐는 사실상 가치 없는 종이에 불과했다.
이 와중의 도입한 재산세 제도는 물론 부유층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계산이 달랐다. 투기꾼의 유휴지보다 농민의 경작지에 더 높은 세율을 매겼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는 530만 정도였고 이중 83%가 농민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 생계유지 수준의 소농에 지나지 않았다. 위스키세에 이어 토지세까지, 농민의 입장에서 정부의 조세제도는 대(노예)농장주와 동부 해안도시의 상공인, 토지 투기꾼, 금융업자 같은 기득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혁명의 자금책(financier of the revolution)’이라 불리면서 전후 대륙의회 재무장관 역할을 담당했던 R. 모리스는 ‘가난한 자들보다 부자들이 국가에 더 생산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뒤를 이은 해밀턴, 애덤스 정권의 월콧 같은 재무장관들 역시 사고나 정책에서 모두 모리스의 직계 제자뻘 되는 인물이었다.
민란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펜실베니아보다 이미 4년이나 앞서 ‘셰이의 반란(Shay’s rebellion: 1786-87)’이, 농민봉기 5년 후 펜실베니아에서는 다시 ‘프라이스의 반란(Fries’s rebellion: 1799-1800)‘이 일어났다. 이 뿐 아니라 애팔래치아 산맥을 끼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메릴랜드,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당시 연방을 구성하는 13개 주 중 절반인 6군데에서, 또 1792년 주로 승격한 켄터키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조세저항 사태가 벌어졌다.
자유의 푯대(liberty pole). ‘자유’라고 쓰인 깃발을 달고 있는 미국 독립전쟁과 혁명의 상징물이다. 봉기한 농민들과 지지자들은 곳곳에 푯대를 세웠다. ‘투쟁으로 확보한 자유’ ‘우리가 원하는 자유’를 뜻한다.
정부의 부당한 세금에 맞서 적잖은 인민들이 무장봉기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반란군에게 대중의 지지가 쏟아졌다. 주와 연방정부 모두 반란 진압을 위한 병사모집에 난항을 겪었다. 할 수 없이 정부는 사태가 진정되면 돈을 주겠다며 군인을 사야만(?)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강제징집에 나서자 징집반대 폭동까지 일어났다. 반란군의 수가 독립전쟁 때 모인 자원병보다 많은 경우도 있었다. 반란군이든 진압군이든 이들 병사들은 대부분 독립전쟁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 급진파들은 미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맞서 미국이 독립했듯, 우리도 미국의 부당한 과세에 맞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명쾌한 논리였다.
인민의 물음 “미국 정부는 대표없이 과세해도 되는가?”
1761년, 독립전쟁이 시작되기 15년 전, 매사추세츠 변호사인 J. 오티스는 당시 영국의 ‘스탬프법(인지세법)’ 집행을 반대하면서 5시간에 걸친 법정에서의 논고를 이어갔다. 요약하면 대표자 없이 영국 의회의 결정만으로 미국에 세금을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 즉 ‘대표 없는 과세는 폭정이다(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is tyranny)’라는 것이었다.
보스턴에 있는 J. 오티스의 묘비. 영국 정부의 ‘과세 집행명령서(Writs of assistance)’에 대한 법정 반박논고로 널리 알려진 애국자·웅변가라고 쓰여 있다.
젊은 시절, 법정에서 그의 논고를 들었던 훗날의 2대 대통령 J. 애덤스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필라델피아나 첫 번째 독립전쟁 전투가 벌어졌던 렉싱턴·콩코드가 아니라 오티스의 연설이 혁명의 기원이라고 말했을 만큼, 오티스의 발언은 미국인들의 가슴에 독립의 불씨를 심어준 선언이 되었다. 그런데 독립을 쟁취한 이후 새 정부는 인민을 위한 혁명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혁명을 오히려 단속하기 시작했다. 인민의 눈에 새 국가는 식민지 시절의 영국과 그리 다를 것 없었다.
혁명 정부와 인민의 대립, 혁명 정부의 반동적 행태, 더 크게 말해 혁명에 이어지는 반혁명이라는 역사의 어떤 철칙 같은 것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것일까?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그 이야기는 다음에…
출처 : 미국 민주주의는 시작부터 반쪽이었다 ①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