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역사 속의 사건인 한국전쟁 그 발발 전에 한반도 의 남측은 이미 전운을 느끼고 있었다
5월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군대가 38선 근처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되면 한국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쪽 발은 남한에, 한쪽 발은 바깥에 놓고 있다."
또 그 무렵 북은 38선 도처에서 벌이던 도발 및 전투를 감소 시키면서 평화 통일의 의지가 있고 또 대화를 나누자고 화해 무드를 제의한 상태 였다 하지만 그들의 음모가 있음을 느낀 이승만은 전군에 비상 경계태세를 내리게 된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냥 평화 로운 세월을 보내다가 일방적으로 북에게 얻어 맞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승만은 당시 북에서 활동하던 정보원들이 보내온 정보에의해 곧 전쟁이 일어날거라 믿고 줄기차게 무기및 체계화된 군발전을 미국에 요구 해 봤지만 번번히 묵살 돼고 말았던 것이다
1950년초부터는 편성된 진지에서 총격이나 포격이 계속되었으나 월경행위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4월부터는 총격사례도 차츰 줄어들고 6월에 들어서는 일과처럼 되어있던 욕설 방송마저도 없어져, 침묵을 유지하며 평화를 가장하였다
6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20일을 전후하여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고, 그들 진지의 여러 고지상에 간부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자주 나타났으며, 22일 밤부터 그 익일 여명시까지 해주방면에서 취야로 이동하는 차량의 대열이 계속되었는데, 해주와 취야의 중간 지점부터는 방광하에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부대이동을 은폐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적의 움직임과는 달리 육군본부에서는 5월말부터 내려진 특별경계령을 6월 23일 24:00부로 해제하고, 그간 영내에 묶여있던 장병들에게 휴가, 외출, 외박 등을 허용하였다. 17 연대장은 그간 적의 동향을 육군본부에 수차 보고한 바 있었는데도, 이와 같은 조치가 취하여진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전 부대에 계속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무렵 UN 한국위원단 요원 5명이 17연대를 방문하고, 연대장으로부터 근간 증가일로에 있는 적정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받은 다음, 각 관측소를 시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날따라 전 전선이 조용하고 북한군의 그림자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데 반하여, 아군의 각 중화기중대 중기관총과 81mm 박격포가 전방으로 추진 배치된 것을 보고 동 위원단은 "38°선상이 이렇게 평온한데 긴장감을 조성케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뿐, 특별경계태세를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고 지적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허나 당시 국군과 북한군의 병력 상항을 다음과 같았다 저 상황을 모르고 있을 미국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왜 북한군의 도발 징후를 애써 외면 하려햇을까??
출처- 국방부 전사, 정훈 자료, 육군 지휘학 등 여기저기 내용을 조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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