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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크리스토교(영어: Christianity in Japan 일본어: 日本のキリスト教史)는 일본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또 0.5%에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는 일본에서의 소수 크리스토교 종파이다.
전도 활동에 제한 없이 오늘날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크리스토교파로는 로마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이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많으면 300만 명의 일본의 크리스토교인이 있을 수 있으나
일본의 크리스토는 수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로 갈라져있다.
일본 교회의 70%는 평균 착석률이 30명도 채 되지 않으며 등록된 성도수는 그 두 배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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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신학수업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 왕국에서 고위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바라를 지배하려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간의 전쟁(1512년 ~ 1524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바라의 하급 귀족이 되었고,
형들도 몰락한 왕국의 군인출신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하비에르는 9세때 사제인 미켈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미켈 신부로부터 신학수업에 필요한 헬라어, 라틴어문학과 문법을 배운 하비에르 소년은
이들 언어로 된 가톨릭 문헌을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신학이 깊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 학교(1530년 입학) 학생시절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알게 된 그는 예수회 창립일원이 되었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인도 선교활동
하비에르의 선교 여정
교황 바오로 3세가 1540년에 예수회를 정식 승인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에게 성직자를 자유롭게 임명해 파송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왕 주앙 3세가 인도 식민지에 보낼 선교사를 구하자
평소 선교 소명에 가득차 있던 하비에르를 추천하였다.
청빈, 정결, 순종을 서약한후 선교사가 된 하비에르는
1541년 4월 7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가톨릭 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을 했으며,
1542~48년까지 인도반도 연안, 세일론섬, 말라카, 물루카제도에까지 정력적으로 포교여행을 하였다.
일본 선교활동
종교개혁 후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들의 전도를 막기 위해 직접 선교에 나선
그는 포르투갈사람인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 사쓰마 국 태생의 일본인 부시(武士) 야지로를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바오로 디 산타후에), 야지로의 동생(요한네스), 야지로의 부하(안토니오)에게 크리스토교 교리를 가르쳐, 1548년 3월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야지로가 포르투갈말을 잘하게 되자,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 사제, 수도사, 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 최남단 사쓰마 국과 오스미 국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하비에르 일행은 이곳에서 다카히사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가톨릭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당시 하비에르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문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가톨릭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
이를 읽고 감명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얼마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 1백명에서 1백 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다카히사가 크리스토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야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가기로 했다.
1551년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섬과 나가토국, 스오국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스오 국에 되돌아갔다.
예수회는 스오 국주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하자 이에 크게 기뻐하며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활동을 도와주었다.
하비에르의 죽음
중국 선교를 하기위해 1552년 8월에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30마일 떨어진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하였다.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 때문에 대륙에 바로 입국할 수는 없었다.
상천도에 체류하던중 중국 상인에게 에스파냐 은화 200을 주고 광저우 진입을 약속받았으나
변심한 상인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상륙에 실패하였다.
그러던중에 1552년 12월 20일 밤, 외딴 섬의 한 천막 속에서 열병으로 쓰러진후 객사하였다.
그의 시체는 상천도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에 말라카로, 1554년에 다시 고아로 이장되었다.
그는 사후 가톨릭 성자(聖者)로 시성(諡聖)되고, 상천도는 천주교의 성지로 되었다.
명 , 청대에는 그곳에 기념비와 기념 성당이 있었다.
하비에르 기념교회
하비에르가 전도활동을 한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교회가 있다.
야마구치의 하비에르 기념교회는 1952년 전 세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의 건축 헌금으로 세워진 교회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가고시마의 하비에르 상륙 기념교회는 1908년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어
1949년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기부금으로 재건되었다.
건축양식은 고딕양식이다. 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오로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크리스토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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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근세 유럽에서 활동한 스페인 제국(현재의 스페인) 태생의 가톨릭 사제이자 선교사, 예수회 창립 멤버, 가톨릭의 성인.
일본과 인도 등 아시아에 천주교를 전파한 주역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국 천주교의 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표기에 따라 교회 라틴어 표기와 스페인어 표기를 혼용한 방식이며 이전에는 중국어 팡지거(方濟各 / 方济各 / Fāngjìgè)와 이탈리아어 사베리오(Saverio)를 혼용한 표기인 '방지거 사베리오'라고도 했다. 하비에르는 바스크어 에체베리아(etxeber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로운 집'을 뜻하며 성인이 태어난 출신지를 가리키는데,
향후 일반적인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자비에르의 어원이 된다.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F. 하비에르'로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본명은 바스크어로 프란치스코 야추 아스필리쿠에타(Frantzisko Jatsu Azpilikueta).
원래는 바스크 지방 귀족인 요아네스 야추(Joanes Jatsu)의 아들이었지만 집안은
이미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선견지명이 있던 아버지에 의해 고등교육을 받고 유학을 가며
선진적인 시각을 키웠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출세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했지 선교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 도중에 만난 사람이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그에게 감화받은 하비에르는 말 그대로 종교에 홀딱 빠져
일신 영달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어 인도, 동남아 등지에 변변한 지원 없이 선교 사목을 시작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던 중 말라카에서 죄를 짓고 해외로 추방되어 있던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그에게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반드시 그 땅에 선교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1549년, 폭풍우를 뚫고 일본에 도착한 그는 사쓰마국/오스미국(가고시마), 히라도 섬, 나가토국/스오국(야마구치) 등을 전전하며 선교하여 나가토국의 다이묘인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선물하고 선교 허락을 받아내 당시 폐건물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절간인 다이도우지를 기증받아 교회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본토가 오닌의 난 이후로 사정이 난리 법석인지라 여유있게 선교하지 못했고, 결국 실패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일본에서 선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수인계를 후배 선교사들에게 확실히 하고 갔다.
이 첫 일본 선교에서 4명의 일본인 청년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는데,
이 중 베르나르도(일본명 불명)는 인도를 거쳐 로마까지 건너가 일본 최초의 유럽 유학생이 되었다.
총명하고 신앙심이 깊어 현지 예수회 수사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고,
교황 바오로 4세를 알현하기도 했으나,
장기간의 여행으로 지친 나머지 병을 얻어 1557년 포르투갈에서 선종했다.
1551년,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출발했지만 진입하지 못하고,
그의 나이는 향년 46세.
사후 그곳에 묻혔다가 1553년 3월 22일 말라카로 이장되었다가 같은 해
1637년 12월 2일, 부패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은과 유리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그의 유해 중 오른쪽 발가락들은 유해에서 분리되어 성유물로 각국에 보관되어 있다.
흔히 일본 및 인도의 사도로 칭해지며,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서강대학교에서는 예수회 인물이나 가톨릭 성인의 이름의 특징에서 건물 이름을 따오는데,
예전 문과대 건물 이름의 정식 명칭이 하비에르관이었다.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이라는 점에서 주로 영문과(영미문화계)나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및
중국문화계가 구비된 건물 이름을 차용한 듯하다.
지금은 문과대는 2011년에 완공된 정하상관으로 모두 이전하였고,
법학전문대학원과 지식융합학부가 하비에르관을 이용하고 있다.
보통 Xavier의 앞글자를 따서 X관이라 부른다. 2013년에는 정하상관 옆에 프란치스코관이 완공되었다.
동명의 이름을 딴 프랑스계 외국인학교인 하비에르 국제학교(Lycée International Xavier)가 있다.
프랑스 교육사도직을 목표로 구성된 사도생활단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가
1980년대 한국에 진출하여 2002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학교를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인 12월 3일이 개교기념일이다.
2021년 3월 미얀마 군부의 민중 시위대를 향한 무력진압 전면에서 용감하게 나선
앤 로사 누 따웅(Ann Rosa Nu Thawng)수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녀회(Sister of St. Francis Xavier) 소속이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St. Francis Xavier's Apostolic Community)와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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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복음 불모지로 손꼽히는 나라다.
'800만여개 우상의 나라'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범신론이 기승을 부리고 하루가 다르게 각종 신흥종교가 생겨나는 나라다.
일본의 크리스토교 역사는 1859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햅번과
성공회의 윌리암스 등 개신교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시작돼
올해로 148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복음화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이후 일본 선교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복음화율 1%에도 못 미쳐
일본개신교회(The Protestant Church in Japn)에 따르면
2002년 11월 현재 일본의 인구(1억2700만명) 가운데 크리스토교인은 54만여명으로 0.41%다.
크리스토교 인구 중 주일에 교회를 나가는 인구는 27만여명으로 0.21%다.
1%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전체 교회수는 7765개로 2001년보다 40개가 늘었고,
1992년부터 10년간 649개 교회가 개척돼 교회 성장률은 9.1%를 보였다.
2007년 현재 복음화율도 0.5%를 넘지 못했고
주일 성수 크리스토인수도 0.23%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복음주의협회(JEA) 등에 따르면 전체 도시 692개 중 10개시에는 교회가 단 한 군데도 없고, 86개시에는 교회가 각각 하나뿐이다. 읍단위로 내려가면 전체 2407개 읍 가운데 1633개 지역에 교회가 없다. 전체 목회자수는 1만여명에 그친다.
선교사의 무덤
일본 최초의 선교사는 스페인의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다.
1549년 8월15일 일본의 가고시마에 사비에르 신부가 도착하면서
일본 선교의 역사는 시작됐다.
가톨릭이 시작한 선교 사역은 1579년까지
약 13만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1612∼1868년)에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본 땅에서 '선교'는 자취를 감췄다.
1858년 일본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다시 선교 역사는 시작됐다.
1859년 미 북장로교회의 햅번과 성공회 윌리암스,
개혁교회 브라운, 버베크 등 개신교 선교사들이 일본 땅을 차례로 밟았다.
일본에는 현재 전세계 90여개국에서
3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돼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148년이 지나도록 복음화율은 1%도 넘지 못하고 있다.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본복음선교회(JEF) 고광선 총무는 "물질만능주의와 800만개의 우상숭배 및 범심론,
천황제와 조상숭배,
1960년대 이후 한해 100개씩 생겨나는 각종 신흥종교로 일본 사회는 혼탁하다"며
"또 일본 교회내서는 교단간 대립과 반목이 심각한 문제여서
선교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일본 선교 현황
일본복음선교회에 따르면 2003년 일본에 파송된 한국인 선교사는
재일대한기독교회가 100여명, 교단선교부가 400여명,
평신도 선교사가 200여명으로 700여명 선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일본선교회와 영락교회의 일본선교회
기독교감리회의 일본선교회 등이 교단 및 교회내 선교회로 활발히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