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들은 대지 위의 인디언들을 '야만'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그들이 마주했던 대지는 영험한 것이었고 장엄미의 극치였다. 그것은 거칠다고 여겨지기 보다는 따스하고 안정감있는 어머니 품 바로 그것이었다. '선곰(Luther Standing Bear)'이라 불리던 한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백인에게만 자연은 거친 '황야'였고 오직 그들에게만 대지는 광포한 '야생동물'과 문명에서 동떨어진 '야만인'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디언들에게 자연은 어머니 품같이 아늑하고 길들여져 있는 온순한 것이었다. 대지는 기름졌고 우리는 위대한 신비가 내려주는 가득한 축복 속에 있었다. 동쪽으로부터 털많은 사람들이 와서 광기어린 잔혹감으로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수많은 불의를 자행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겐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일이었다."
Frederick E. Hoxie and Peter Iverson (eds.), Indians in American History : An Introduction, 2nd ed., (New York : Harlan Davidson, 1998) cf.
인디언 벽화-출처:빈하늘님의 플래닛
그렇다. 대지 위에 살던 인디언들은 거친 황야에 살았지만 결코 '야만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숭고함과 장엄함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백인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도 결코 보거나 느끼지 못하고 외면해버렸던 대자연의 장엄함과 숭고함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느낄 수 있던 마음의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된 채 뉴멕시코주와 아리조나주 등 미국 남서부에 집중되어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에 갇혀 살고 있는 인디언들은 그 허울좋은 보호구역 내에서 카지노같은 전매화된 도박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장신구와 문양섞인 담요 등을 만들어 팔아 호구지책을 삼는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땅의 충만한 기운을 느끼며 살았던 그 어머니 품같은 대지에서 격리된 채 떨구어진 거대한 고아집단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힌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 속에 그들 조상들이 가졌던 어머니 품같던 대자연 안에서 자연스레 습득했을 엄숙미와 장엄미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말이 없다.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지만 거기엔 그 옛날 황야를 질주하던 호쾌함도 대자연 안에서 침묵으로 말하던 그 엄숙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혼(魂)의 흐름이라 여기는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낸시 우드(Nancy Wood)가 그의 시를 통해 언급했듯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 모른다.
"백인 구경꾼들은 열심히 주변을 둘러 보지만 먼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춤판에 오기는 하지만 언제나 사진을 찍고 싶어할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비밀을 평생 공들여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머리로만 생각하지 마음으로는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로 모든 것을 가름하지만 침묵이 갖는 더 큰 위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인디언들의 땅을 찾아 나선 여행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땅과 풀, 나무와 햇살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혼이 있었고 우리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던 진정함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것들이 혼과 진정함의 기운을 점점 잃어가며 이제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는지 조차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내게 전생(前生)이 있었다면, 나는 대지 위의 인디언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스스로가 인디언임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대자연의 품 안에서 어머니 대지가 흘려주는 젓을 마시며 대지의 정령들이 단련시키는 용사로서의 꿈을 안고 대지 위에 우뚝서고 싶다. 때로 홀로 나무가 되고 돌이 되어 자연과 이야기하며 자기의 좁다란 알집들을 깨나가고 싶다. 그래, 나는 다시 인디언이다. 내 마음에 어머니의 품같은 광활한 대지를 되찾자.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힌 금광을 접고 숭고함과 장엄함이 감도는 인디언들의 땅으로 돌아가자. 나를 있게 했던 바로 그 땅으로 말이다.
첫댓글그들에게는 백인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도 결코 보거나 느끼지 못하고 외면해버렸던 대자연의 장엄함과 숭고함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느낄 수 있던 마음의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다시 인디언이다. 나를 있게 했던 바로 그 땅으로 말이다. 우리도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자!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죠. 남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 광기어린 잔혹감으로 수많은 불의를 자행했을 때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디 브라운 저, 최준석 옮김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 미국 인디언 멸망사' 프레스 하우스 刊, 1996.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알게 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프론티어 정신의 구현이라 선전하는 서부 개척사를 뒤집으면 바로 미국 인디언 멸망사가 되니까요.
첫댓글 그들에게는 백인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도 결코 보거나 느끼지 못하고 외면해버렸던 대자연의 장엄함과 숭고함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느낄 수 있던 마음의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다시 인디언이다. 나를 있게 했던 바로 그 땅으로 말이다. 우리도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자!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죠. 남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 광기어린 잔혹감으로 수많은 불의를 자행했을 때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디 브라운 저, 최준석 옮김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 미국 인디언 멸망사' 프레스 하우스 刊, 1996.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알게 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프론티어 정신의 구현이라 선전하는 서부 개척사를 뒤집으면 바로 미국 인디언 멸망사가 되니까요.
그렇지요. 청교도 미국 건국사는 같은 몽골반점을 가진 황인종인 인디언의 멸망사였죠. 인디언 박물관에 가면 우리와 똑같은 문화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긴 모습도 비슷하죠
사족인데, 시애틀 추장이 '미국 대추장'으로 부터 받은 서신에 답하는 서신이 명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