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금불초, 꼭두서니빛 님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요번 자료집에 실을 예정이오니
본인이 거부하지 않을 경우엔, 문단 띄어쓰기 약간 수정 후 바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웬만하면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카페 회원 가입 순으로 게재 예정)
■ 운문(韻文) 작품 (회원 加入順)
늦 여 름
김 진 국 (분당춘란회 부회장)
맴맴맴
플라타너스 넓은 이파리 사이로
늦은 여름이 매달려 운다
바람 한 무리 우르르 몰려가고 나면
여름의 껍질 몇개
마당 귀퉁이에서 딩굴고
파아랗던 이파리 노릇노릇
마지막 더위에 익어가고 있다
맴맴맴
더위에 겨워 지친
늦은 여름이 매달려 운다
낙 엽
김 진 국
낙엽하나
여름을 물고 떨어진다
거기 물든 단풍은
지난여름
치열했던 삶에 대한 흔적이겠지
나도
저렇게 고운 모습으로
질 수 있을까
그리고
저렇게 아름다운 끝맺음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가을엔
더욱더 가을엔
나를 사랑하고 볼 일이다
그 리 움
김 진 국
마음속에
그리운 사람하나 담고 살면 언제나 넉넉한 들판이 된다
익어 영그는 고추처럼 빠알간 생각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벼논을 나는 참새 떼처럼
바람 한 자락에도 우르르 가슴이 열리는...
마음속에
그리운 사람 하나 담으면 외로움은 언제나 남이다
홀로 걸어가는 내 걸음에 따스한 손 하나 언제나 곁에 있다는 행복
이 넓은 세상
온통 가슴을 열어놓고 불어오는 바람을 다 받더라도
마음속에 그리움 하나 담고 있으면
바람쯤이야 서럽지 않으리
오늘
그리움이 있는 내 가슴은 따뜻하다
흐 린 날
김 진 국
이런 날이면
이렇게 흐린 날이면
추억을 떠올리는 일보단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자
대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빗자루를 들고
타작마당을 돌며 쫓아가던 그 고추잠자리
아직도 날고 있겠지
이슬에 젖은 논둑길 끝에
꼬르랑 꼴랑 흐르던 그 시냇가
아직도 그 피라미는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잠방이 둥둥 걷고
바위 밑을 뒤져 건져 올리던 붕어는 새끼를 많이 낳았을까
이렇게 흐린 날이면
추억을 떠올리는 일보단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자
겨 울 햇 살
김 진 국
벗은 나뭇가지 위에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따스한 온기
행여 조그만 흔들림에도
흩어져 버릴까봐
겨울엔 나비가 없나보다
봄 날 에
취 산 최 정 순
맵고 사나운 겨울바람에 시달리던 관악산이 기지개를 켠다연둣빛 신록은 나날이 달라지고나무가 뿜어내는 상쾌한 공기와자극적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다양한 새봄의 들꽃들이잠자고 있던 내 마음과 영혼까지 흔들어 깨운다.늦은 오후의 적막함을 달래려고 뒷산을 오르니엇비슷한 실력으로 성공을 향해 달리던 사람들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산길을 걸어간다.떠맡은 책임과 쌓인 피로로산의 무게보다 더 둔한 뒷모습수행자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물기 없는 딱딱한 가슴은생명이 여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후에야 깨닫는 것일까?숲은 봄의 향기를 내뿜는데 사람들의 얼굴에는곱지 않은 붉은 가을 단풍이 들었다.제한속도를 잊어버린 잰 발걸음 따라빠르게 전진하는 육신에 그들의 영혼은 따라올 수 있을까?느릿느릿 나중에 오는 행복과시간에 쫓기는 그들은 마주치지 못할 것 같아마음이 무거워 진다. 산에 오르는 것은그 무게만큼 고요한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다.풀꽃처럼 조용한 것은 아름답다.
언제나 소리 없이 다가오는 그리움도침묵이 해결해주지 않던가.나이를 먹다보면궁금해지는 일도 많아지고섭섭한 일도 많아지고때로는 노파심에 말도 많아진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존재는 아름다운 것이다.내가 내 삶의 주인이지만삶의 빛깔은 다양하게 진행 된다생기가 넘치는 맑은 빛색이 바래고 점점 녹슬어가는 누런 빛자신의 빛을 잃으면모든 것이 허물어지고다른 존재보다 더 일찍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삶도 존재도 영원하지 않다슬픔과 고통에 견딜 수 없는고달픈 순간 저편에침묵하고 있는 희망이 있다참기 어려운 순간도어차피 지나가기 마련이다.사람은 누구나 애달프고늙고 죽는다.오늘 만이라도 봄의 숲 길을 거닐며침묵의 희망을 생각하자.
세 번
취 산 최 정 순
하루 세 번 그리워지는사랑은 참으로 오묘하지그대와 내가마음을 열면 들리는 노래결코 기다리지 않는 그 노래살며시 돌아와다시 들으면 어떠리숲이 노래지면 또 어떠리.
땔 나 무
취 산 최 정 순
겨울 숲을 어슬렁거리다 쓸쓸한 나무를 주웠다아궁이에 불을 피우니단풍나무도 아닌데 빨갛게 달아오르고밤나무도 아닌데 군밤 냄새가 난다할 말 하지 못해이리저리 자꾸 뒤척이다속내 이글이글 타오르는 적막한 겨울나무 아뿔사나를 만나기 전에는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은풀씨였는지도 모른다.
봄 편 지
취 산 최 정 순
그리움이 뭐 그리 대순가앞산의 잔설을 꾹꾹 밟아봤네 여기저기 등처럼 켜지는 얼굴눈 위에 꽃을 그려접동새 편에 보내니마음이 식기 전에술이나 한잔 하세
도회지 속 옛골
조 정 희
세월에 무게만큼 투박한듯 고운 옹기같은
인생의 대 선배님의 호령과 함께
선선한 바람에 실려 옛골에 유인된다.
까실하게 등치를 가늠하지 못한 무르디 무른
옛 물건들에 현기증이 일어나는데
희석되지 않은 먹물처럼 틈도없이 컴컴한
우리들의 보릿고개 유년의 밤을 밝혀주던 남포등
허기진 배를 달래려 뻘겋다 못해 까맣게 물어대던
젖꼭지 닮은 홍롱불에 유년이 비춰진다.
길드란 구유통은 넉 나간듯 입을 벌리고
하릴없이 시끄러운 소음만 들이키고있는데
짠순이 간장단지가 국민소득의 목표를 다하고
여유롭게 도심을 배회하다 포근히 내게 안겨온다.
청아한 하늘은 가을 채색을 꺼내놓고
먹을 갈듯이 구름위를 미끄러져 가는데
좀처럼 끌러지지않는 단단하게 묶인 삶의 보따리
부여안은 가슴팍엔 어떤 진한 빛깔이 베어있을까?
엄숙하게 한상 차려진 다기방의 은은한 향기에
일상에 지쳐 터지고 갈라진 메마른 입술을 축여본다.
젖 어 보 는 길
조 정 희
맞을 만하게 내리는 빗방울을 뿌리칠 수 없어서 몇 발자욱 디뎠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느새 가을인가! 벌개미취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는 보라빛 표정이 어찌나 예쁘던지 순간 얼굴이 만져지는 것이 내 게도 눈물나게 아름다운 저 같은 꽃 띠가 있었던가! 가지런하게 곱게도 내리는 빗방울 뜻밖에 촉촉한 만남이 되었구나 무작정 맞서버린 초가지붕 집씨락 머리엔 통통하게 맺힌 물방울이 힘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러운 입자들을 흩뿌리는데 금싸라기 땅에 멀대같이 서있는 건물들도 젖은 옷을 금시 갈아입을 수는 없다. 레드카드는 신호등에 박혀 반칙없이 살아온 내 발목까지 묶어놓는데 잠시 퇴장 당해 추적추적한 마음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한눈 팔지않고 바쁘게만 달려온 길 아득히 지나간 날들이 뿜어져 나오는데 기러기가 眼標로 남겨놓은 발자욱을 내리는 눈이 덮어버리듯 인생 여로의 자취도 덧없을 것을...... 한 걸음에 어디라도 닿아버릴것만 같은것이 이대로 보고파서 그리운 고향까지 갈까부다
나 이 ! 계 절 ?
조 정 희
매섭게 쌩한 바람은 누더기나마 겨우 걸치고 있는 터지고 갈라진 앙상한 곳을 기어이 들춰내고야 만다. 혹독한 겨울을 어찌 견딜까 해도 만물은 겪을걸 겪어야 성숙 해 진다고 지구는 열두시 종을 금방 울릴 것처럼 숨넘어가듯 예견하고 不惑을 유혹되지 않는 나이 耳順을 귀가 트이는 나이라며 계절로 짚어 댄다. 미련없이 떨궈내고 맨 몸으로 맞서는 그네들의 당당함을 우리의 한평생으로 교훈삼으면 조금은 잘못된 인생도 몇번이고 교화되며 살수 있는 것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노 루 발 풀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임이란 걸 느껴본다. 눈이 시리게 빛나는 아침을 나서자 묻혀있던 감각기관에 생동감이 스민다. 딱히 시선이 가는 무엇이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괜시리 아침해가 비치는 거리가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눈앞을 어지럽히는 황토바람이 다소 짜증스럽다는 자괴감은 있었지만... 병아리 고갯짓 같은 조울림속에 하루내내 비교적 고요한 밝음이 흐르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아득한 어둠너머 아련한 보안등 불빛들이 유라창에 반사되어 훨씬더 생기있게 느껴진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인데도 내마음이 온종일 포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춘기시절... 버스 옆자리에탄 여학생에게서 느껴지던 샴푸내음 같은 설레임 탓은 아니었을까? 때로는 칼바람이 살을 저미고 모진 삭풍이 살속에 묻힌 한점의 수분까지 앗아갔지만 화단 한켠에서 묵묵히 버티어낸 국화의 새순 같은 아련한 추억들과 희망이 있었으므로 이 겨울도 그렇게 맥없이 사라져 가는가보다. 머지않아 이 봄이 가고 그리고 또 여름이 올테지. 그리고 우린 또 하나의 계절을 잃어버릴 테고..... 그러면서 절망에 부대낀 여린 가슴으로 우린 또 한번 서러움에 겨운 이별을 하게 될 테지......
들 꽃
야 생 초 고을래라 고을래라 이리도 청아 한지 이리도 소박 한지 화려함도 접어두고 짙은 햗도 내려놓고 다소곳이 숙인 얼굴 나를 자만의 굴레에서 내려놓고 경망의 요동에서 잠재우니 차마 녹을새라 손끝 스치기도 안스러운 지극히 작은 몸으로 핀 너 삼라만상의 뜻 고히 받아 적막한 산 자락에 홀연히 핀 네 앞에 발길머춘 나는 너의 작은 얼굴의 한 조각이려니...
흔 적
야 생 초작은 풀꽃 하나로 이 세상에 와 봄비 달콤한 사랑 노래에 눈 귀 멀었네 작열하는 햇살 내 육신 불사르고 가을 바람 살가움에 사랑 열매 옹골 찬데 쫓기는 무서리에 대공만이 앙상하니 백설 같은 눈꽃 속에 내 흔적 간곳 없네
2 월
금 불 초
겨울과 봄을 한 몸에 잉태하고 있는 2월은 아직은 은빛이다.
강 가 마른숲에 웅크리고 겨울을 지새운 청동오리도 떠날 채비를 하면 겨울은 조금씩 물빛으로 풀린다. 밤은, 미처 보내지 못한 겨울의 알갱이들을 품안으로 불러모으고 새벽안개 속에서 기지개를 펴는 하늘은 하얗게 서리꽃으로 내려오고 언 땅을 가볍게 두들겨 깨면서 겨울을 견디어 낸 풀 소리를 캐내는 촌 아낙의 손끝에서 겨울은 녹아내리고 헤쳐진 땅 속으로 햇살은 봄을 쏟아붓는 작업을 한다. 2월은 버드나무에 푸른 옷을 입혀주고 겨울잠을 자던 초목이 뿌리를 조끔씩 밀어낸다.
불 꽃
月 川 꼭두서니빛
언제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던 걸까
불꽃은 그 굵은 참나무토막들을 하얗게 태우고도 신열처럼 뜨거운 몸속에서 하얀 알갱이들을 눈꽃송이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눈부신 허공, 바라보고만 있어도미간이 넓혀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사는 동안 무언가에 끌려 가슴이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순간이 있었으리라.어느 것은 마음을 데우기도 했었고 쏜살같이 달려와 별똥별 된 순간도 있었으리라.섬광과도 같은 그것들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을까.지금쯤 삶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마음 한쪽에 이미 길이 나 있었던 것 같다.마치 등대 불처럼 깜박이며 어떤 일이든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나는 오늘 마치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처럼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내 손을 맞잡아 준 따뜻한 이들과 함께 모닥불을 쪼이고 왔다.밤을 하얗게 밝혀서라도 기어이 불타올라야만 하는 불꽃불꽃처럼 운명인 듯 그렇게 나도 내 삶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싶다. 어떤 순간에도 별처럼 부서져 내리리라. 삶을 사랑하며, 고마운 이들을 생각하며. * 복정동 사거리의 <명문가든> 모닥불가에서 문우님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
네 잎 클로버의 추억
月 川 꼭두서니빛
약수터 옆에
꽃피우고 앉아 있는
토끼풀 무더기
아침이슬에 더욱 새파랗다
풀밭에
살며시 쪼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만져보는
아직도 잊지 못한 내 사랑하나.
푸르던
지난 날의 네잎클로버
청보리밭 바람처럼
아득한 그리움으로 밀려오더니
순간
그 기억의 작은 풀꽃들은
내 가슴에 물 흐르는 소리 남긴 채
영롱한 이슬방울 떨군다.
■ 산문(散文) 작품 (회원 加入順)
고 정 차 이 야 기
취 산 최 정 순
우리들의 선조들은 쓰고 떫은 맛을 내는 나뭇잎이나 뿌리를 가공해 몸을 치료해 왔고 평상시 즐겨 마시는 차로 발전시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해 자연의 새로운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연유로 한 잔의 차 속에는 윗대의 조상들이 남긴 정신과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인스턴트 음료가 미각을 길들이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에는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차 마시는 법이 까탈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을 때 마시는 차 한 잔을 감로차라고 부릅니다. 달콤한 아침이슬이 밤기운에 늘어진 생물들을 깨우는 것처럼 잠을 물리치고 마음을 상쾌하게 두들겨주기 때문에 일컫는 것입니다.
정신을 흔드는 아주 쓴맛을 가진 차 중에 중국의 고정차가 있습니다.
하나의 잎으로 만든 차이기 때문에 일엽차(一葉茶)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선처럼 몸이 가벼워진다고 하여 선차(仙茶)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등소평이 즐겨 마신 차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가 아니라 고로(皐蘆)나무 잎으로 만든 차인데 곰쓸개처럼 매우 써서 한 잔을 마시면 졸음이 확 깹니다. 중국의 중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은 통증을 완화시키고 콜레스테롤을 낮추며 감기, 배탈을 낫게 하고 살을 빼고 만병을 치료하는 차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의약품이 아니라 대용차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고로나무는 심회원(沈懷遠)의 “남월지(南越誌)”, 육우의 “다경”, 초의의 “동다송”,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기록되어 있는 차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과로(瓜蘆), 고등(苦登), 고정(苦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동청과(冬靑科:겨울에도 푸른 식물)의 교목(喬木)나무입니다.
남월지가 쓰인 해가 서기 589년이고 육우가 다경을 편집한 해가 서기 774년이니까 고정차의 역사도 참 오래 되었습니다.
위의 고서에서는 고로(皐蘆)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석명(釋名): 과로(瓜蘆), 고등.
서기 589년 심회원(沈懷遠)이 남쪽 지방 토착민들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남월지(南越誌)에 이르기를
용천현에 과로가 있으니 일명 고로라고 하는데 잎이 차(茗)와 비슷하다. 과라(過羅)라 이르고 혹은 물라(物羅)라 말한다. 서기 493년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를 완성한 도홍경(陶弘景)이 말하기를
남방에 과로가 있으니 차와 비슷하다 만약 그 잎을 따 가루해서 삶아 마시면 바로 밤새도록 잠자지 않는다. 남쪽 사람들이 채취해 차 음료로 하는데 극히 중히 하기를 촉 지역 사람의 음차와 같다. 고로는 잎의 상태가 차와 같으나 크기가 손 바닥만해서 주물러 부숴 우려 마시는데 가장 쓰면서 색이 탁하여 풍미가 차에 비해 미치지 못함이 멀다.
본초강목에는 무독하지만 옆(葉)의 기운이 한(寒)하여 위가 냉한 자는 쓰지 못한다. 다려 마심에 목마름을 그치고 눈을 밝혀 사람을 잠자지 않게 하고 담을 제거하고 인후(咽喉)와 소변에 이롭다.
작년(1996년) 6월에 중국 광동(廣東)지방의 서초산(西樵山)을 여행하는 중에
차 가계 주인의 소개로 처음 맛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차나무로 만든 차로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큼 대엽종의 푸르고 고운 잎이 보기 좋아서 여행하는 동안 즐겨 마셨습니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은 뒤에도 쌉쌀한 떫은맛이 더부룩한 속을 진정시켜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고로나무는 광동, 사천, 귀주, 호남, 강서 지역에서 자라는데 각 지방마다 만드는 고정차 맛에는 그 지역만의 특색이 있습니다.
광활한 중국은 어디를 가나 신화와 전설이 풍부합니다. 고정차를 마시게 되는 전설도 빠질 수 없지요.
서기744년(당 천보 3년) 당 현종은 천하의 절색인 양귀비를 얻은 후 불노의 비결을 찾으라고 신하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때 양광정이 사공산에서 채취한 과로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무상사(無相寺)의 주지 사공본정선사는 과로로 만든 차(고정차)를 양귀비에게 진상했으며 심신의 활동력이 왕성해지는 효험이 있어 현종은 해마다 사공산 고정차를 공물로 바치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위 전설과 유사한 기록이 불서에도 남아있습니다.
사공산(司空山)은 호북성 장현에 있는 산입니다.
사공본정(司空本淨:667~761)선사는 육조 혜능대사의 제자로 사공산의 무상사(無相寺)에 머물며 “도는 닦을 것이 없다”(道本無修)라고 가르치고 있을 때 중사(中使)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양광정이 찾아와 선사에게 도를 물었다고 합니다.
“나에게 절을 하지 마시오. 그대는 부처를 구하는가, 아니면 도를 구하는가?”
“제자는 지혜가 얕아서 부처와 도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부처를 구한다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도를 알고자 한다면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다.”
양광정이 거듭 묻기를 “어찌하여 무심을 도라 합니까?”
“도는 본래 마음이 없지만(道本無心) 무심을 도라 이름 한다.”
“무심이란 곧 무물이고(無心卽無物) 무물은 천진이며(無物卽天眞) 천진이 바로 대도이다(天眞卽大道). 일체 법은 모두 공적(空寂)하여 얻을 바가 없다. 만약 얻을 바가 있다면 바로 유위의 마음(有爲之心)이 일어난 것이다. 다만 마음에 막힌 바가 없이 무심으로 노력하면 자연히 도에 합하여 모름지기 깨닫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무심이 도(無心是道)라 한다.”
도를 가르치던 본정선사는 양광정에게 그만큼 쓴 고정차 한 잔을 권하고 양광정은 당 현종에게 진상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기록입니다.
과로나무의 새 잎은 자홍색을 띠고 다 자라면 녹색으로 변합니다. 특히 해남지역의 과로나무는 잎의 길이가 20여 센티에 달하고 넓이는 10여 센티에 달할 만큼 크고 두껍습니다. 그래서 해남의 고정차와 광동이나 광서지역의 고정차는 차이가 있습니다. 해남의 고정차는 일년 4계절 내내 채집할 수 있고 제다하는 방법도 차나무와 같이 살청, 유념 등 여러 가지 순서를 거쳐 완성이 됩니다.
근래의 고정차는 이름과 종류가 참 많아졌습니다.
사천지방에서 생산되어 청산녹수(靑山綠水)라고 부르는 고정차는 과로나무와 비슷한 여정나무 잎으로 만든 차인데도 고정차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합니다.
광활한 지역의 환경을 살려 문화를 축적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판로를 개척하는 중국의 노력에 주목하고 경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쓴 고정차 한잔을 마십니다.
삼의 계곡 마곡사를 다녀오다
금 불 초 (카페 회원)
일행을 태운 미니버스가 고속도로를 접어들었다. 집 나오기 정말 잘 했다는 말을 소곤거리면서 소녀 마냥 들뜬 가슴이다. 장마철 이라 은근히 날씨 걱정이 되었는데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날씨는 비도 오지 않고 또 뜨거운 여름날씨도 아닌 적당히 흐려서 활동하기에 안성이다 조금 늦게 떠난 것 같다. 점심 공양 시간에 맞춰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다들 집 나온 즐거움에 들떠 점심때를 잊었나 보다. 마곡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자 제일 먼저 우리일행을 반긴 것은 아름다운 꽃 들 이다. 비록 화분에 심겨져 식당 앞에 내 놓아진 꽃 들 이지만 경기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꽃들이 활짝 웃으며 반긴다.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문 안으로 들어서자 극락교가 보인다. 죽어서만 건널 수 있는 극락교를 나는 오늘 살아 건너고 있다. 극락교를 건너면 이곳은 그야말로 극락일까? 저 아래 일주문을 들어설 때 속세의 마음은 버리라 하였거늘 나는 속세의 욕정을 버리지도 못 한 체 극락교를 넘어서고 말았다. 종무소에 들려 공양접수를 하였다. 보철화상이 설법을 전 할 때 사람들이 마치 삼밭의 빼곡한 삼처럼 들어섰다 하여 마곡사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 마곡사 자리는 주변 산과 물의 형태가 태극형이라 하여 '산태극 물태극(山太極 水太極)'으로 불리는데, '정감록', '택리지' 등에서도 기근이나 전란의 염려가 없는 삼재팔난불입(三災八難不入)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마곡사를 가로지르는 태극천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져 태극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마곡사는 임란과 병란을 거치면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마곡사는 태극천이라 부르는 계곡을 끼고 있고, 태화산에 둘러싸여 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 다운데, 특히 봄이면 왕벚꽃, 산수유, 자목련 등이 꽃을 피우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옛부터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뜻의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마곡사는 태극천을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져 있다. 입구 쪽에 해탈문, 천왕문, 명부전, 영산전, 매화당 등이 있고, 태극천에 놓인 극락교를 건너면 범종루, 심검당, 오층석탑, 응징전,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이 있다. 이중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유명하다.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은 상륜부가 다른 탑과는 다르다. 상륜부에 청동제의 둥근풍마동(風磨銅)을 올려 놓았는데, 이는 원나라 말기 라마교 양식을 본딴 것이라 한다. 이런 형태의 탑은 현재 세계에서 3개밖에 남지 않은 귀중한 것이라 한다. 오층석탑 앞에 자그마한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바로 김구 선생이 심은 나무이다. 김구 선생이 1896년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이곳 마곡사에 숨어 있어는데, 해방 후 마곡사를 다시 찾아 은거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심은 나무라 한다. 오층석탑 뒤로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802호)이 있다. 조선 정조 12년에 세워진 팔작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안정감을 지녀, 뒤에 대웅보전이 따로 있지만 이 대광보전이 마곡사의 무게중심처럼 느껴진다. 대광보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이 비로자나불은 인도에서 가져온 향단목으로 조성했다고 하는데, 대광보전의 정면 중앙에 봉안되어 있지 않고, 보전 왼쪽인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봉안되어 있다. 이는 중생이 비로자나불을 보기 위해 서쪽을 바라보며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라 한다. 대광보전 옆의 정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이층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측에 서방아미타여래, 동쪽에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으며, 모두 목불이다. 날씨가 흐리긴 하였지만 여름이라 자연히 발길이 계곡 쪽으로 저절로 향한다. 부처님 전에 삼배하고 계곡으로 이어지는 곳에 다다르니 돌다리가 놓여 있다. 아이들은 신나라 먼저 물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고 있다. 돌다리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상류쪽은 어떨가 생각해 본다. 시원한 물 소리에 가슴속의 응어리마저 깨끗하게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다. 다음 행선지는 부여 궁남지이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서동요의 촬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궁남지에 도착 한 시간은 마곡사를 떠난 지 한 시간 쯤 후였다. “와!!! 연꽃이다” 탄성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연꽃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연꽃은 처음 이다.심청이 타고 동해 바다위로 떠올랐던 연꽃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또한 깊다. 연꽃은 왜 고여 있는 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볼 때 연꽃의 뿌리는 물을 정화 하는 작용을 한다. 부처님의 은은한 설법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기에 고인 물 속에서도 썩지 않고 꼿꼿하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단체사진을 찍고 서동요가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먼 이야기 속으로 잠시 시간 여행을 다녀온다. 그들의 사랑이 연꽃처럼 진흙물 속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로 내게 전해진다.
모 데 미 풀
月 川 꼭두서니빛
들꽃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모데미풀이란 여러해살이 식물을 알게 되었다. 한라산과 금강산 사이의 높은 산 계곡 주변과 습기가 많은 숲 속에 자라며 모데미풀 한 종이 모데미풀속을 이룬다는 것과 하얀 꽃이 불쑥 피어있는 모습이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학교에 입학 하던 때의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 같았다. 옥색 한복 곱게 입으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날 나는 봄나들이 가는 것처럼 마냥 신나했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처럼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있었으며, 구령대에 올라오신 선생님 호각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나란히"를 하였다. 주루르 뒷걸음쳤다가는 다시 앞으로 종종걸음으로 앞, 뒤, 옆의 간격을 맞추던 모습을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응달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자꾸만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괜찮아 괜찮아 하시는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입학식이 끝나 어머니를 비롯한 부모님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고 다른 반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가버렸는데 내 반만 운동장에 덩그라니 모여 선생님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연세가 좀 많으셨던 걸로 기억되는 선생님은 간단하게 인사의 말씀을 하시더니 우리들에게 나뭇가지를 하나씩 나누워 주시고는 땅에다 글씨를 연습하라 이르시고 자리를 비우셨다. 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운동장은 글씨연습장으론 더없이 훌륭하였다. 책받침도 지우개도 필요 없었다. 그림을 그리듯 몇 글자씩 또박 또박 써보곤 나뭇가지로 마른 비질을 하듯 흙을 쓸어 덮거나 신발로 쓰윽 문지르면 다시 새 연습장이 만들어졌다. 그 때의 가방 안에 있던 공책들과 연필들은 내 등뒤에서 봄 햇살을 받으며 쿨쿨 잠자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아이들은 글씨쓰기에 싫증을 느꼈는지 그때까지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하였고 장난기 많은 몇몇의 아이들이 제자리를 떠나 뒤편에서 놀더니 얼마 후엔 아예 들판에 핀 모데미풀처럼 삼삼오오 흩어 앉아 저마다 흥미 있는 놀이에 열중하였다. 아랑곳 나는 내 있던 자리에서 글씨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또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넘어졌기 때문에 옷에 흙이 묻고 손에도 묻었다. 어머니가 지켜보고 계셨다면 어리광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흙을 털고 뒤돌아보니 저만치 나아가서 다리싸움을 하고 있던 아까 그 남자아이였다. 내가 입을 삐쭉이며 쳐다보자 눈을 한번 크게 치켜 올려 뜨더니 씨익 웃고는 함께 놀던 아이들 곁으로 가버렸다. 한 여름 내내 땡볕에 혼자 그을 린 것 마냥 피부가 유난히 새까맣고 눈동자마저도 새까만 아이였다. 초등학교 내내 잡아당김의 내 긴 머리카락의 수난은 그 남자아이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태어나서 한번도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길었다. 내 딸이 대여섯 살 되었을 때 맞벌이를 하느라 얼마동안 어머니께서 돌봐주셨었는데 딸애의 머리를 손질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얼마나 나를 정성껏 키워주셨는지는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은 교실 안에서 앉을 자리를 정하였는데 나는 3분단 앞에서 네 번째 줄에 앉게 되었고, 우연의 일이였는지 내 뒤에 서있던 어제의 그 짓궂은 남자 아이와 짝궁이 되었다. 이름은 이 동칠. 가까이 앉아 보니까 그 애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더욱 새까맣게 빛나보였다. 피부가 대조적인 우리를 보고 아이들은 “밀가루 푸댓속”과 ‘까마귀’라고 놀려대었다. 동칠이가 싫은 건 아니었만,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니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더욱 새침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애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내 옆에 바싹 몸을 붙어 앉았다. 정확하게 책상의 반을 줄 긋고 의자를 옆으로 당겨 앉아도 보고 신발주머니로 둘 가운데 놓기도 하였지만 내 자리는 좁아져만 갔다. 엉덩이를 반쯤 붙이고 있으려니 힘들었다. 게다가 동칠이는 아이들과 낯익어가면서 더욱 장난이 심해져서 수업도중에도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꾀꼬리.. 선생님께 이르고 말았다. “이 동칠, 너 자꾸 까불면 이 똥칠이라고 부를 테야, 아니, 한번만 더 걸리면 이 똥팔이라고 부를 테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선생님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쇠 똥파리처럼 빛나보였다. 동칠이는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몸을 기대어오는 일 말고는 순박하였다. 연필도 깎아주고 미술 시간 오린 색종이를 풀로 붙이는 일을 도와주었다. 동칠이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던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한 여자아이와 함께 들어오셨다. 그 아이는 교장선생님의 무남독녀 외딸이고 이름은 선화, 나이는 우리보다 한살 어리다고 했다. 내년에 취학하는데 보내달라 떼를 써서 데리고 왔다고 하시면서 우리 분단 맨 앞줄에 앉히셨다. 그리고 갑자기 날 선화의 짝꿍으로 지목하셨다. 얼떨결에 가방을 챙겨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선생님께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교장선생님은 교실을 나가셨다. 수업은 다시 시작되었고 칠판에 써 놓은 글을 공책에 다 옮겨 적은 후 나는 잠시 책상위에 엎드려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였다. 선화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는 바람에 어디가 많이 아픈 줄 알고 놀란 토끼마냥 사색이 되었고 선생님께서 달래어 이유를 물어보니 햇빛에 칠판 글씨가 잘 안보여서 내 공책을 보고 적으려했는데 내가 엎드려서 울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선생님은 선화가 한 살 더 어리니 언니처럼 잘 보살펴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좀더 고학년이였다면 선화를 이해하고 잘 대해주었을 텐데...
욕구불만이 생기면 선화는 그대로 엉엉 울어버렸다. 어느 땐 선생님까지도 당황하셔서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시고, 교장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우유병을 들고 오시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한편 귀엽고 쾌활명랑한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를 언니라 부르며 잘도 따랐다. 방과 후에 학교 내에 있는 선화네 집에 놀러 가기도 하였다. 그곳엔 사슴과 공작새, 타조, 십자매, 토끼, 다람쥐..등 초식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랑 서울 나들이 갈 때 창경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슴을 학교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좋았었다. 학기 초의 서먹함으로 끼리끼리 모여 놀던 아이들은 서로에게 점점 익숙해져서 모두들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피어오르는 개구쟁이 나팔꽃 같았고 교실안의 분위기도 사뭇 자유스러웠다. 동칠이도 다행이 새 짝꿍이 마음에 드는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을 뿐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일은 없었다. 그 애 대신 선화가 내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내 가슴에 파고들기도 하였다. 조금 귀찮기도 하였지만 친해지니까 선화랑 노는 것이 즐거워졌다.
방과 후 우리는 사슴에게 배춧잎을 주면서 소꿉놀이도 하였다. 나는 무조건 엄마였고 선화는 애기였다. 그러고는 내게 어리광을 부렸다. 안아달라는 둥, 업어달라는 둥..일곱 살 먹은 애기가 어디 있담.. 옆집 아줌마 몰래 두 살 된 애기 홍란이를 업어주려다가 땅바닥에 메다꽂기를 얼마나 했었는데.. 놀이엄마가 된 나는 선화를 업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금 얄밉기도 했던 선화.. 쓰고, 읽고, 듣고, 말하기에 익숙해지고, 받아쓰기 시험 볼 때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공부하는 재미와 기쁨으로 받아드려질 무렵 우리 집은 영등포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댁 가까이 이사 가게 되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헤어짐이란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친척집에 작별인사하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있던 나는 그 기다란 뚝길에서 그만 울음이 터졌다. 만나주지 않았던 선화가 야속했다. 콧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우고 나를 가만히 안아주셨다. 친척집에서 이별주를 드신 아버지의 목덜미에서는 시큼한 산국향기가 났었다. 어린 날의 헤어짐이란 알듯 모를 듯한 슬픔이 갑자기 몰려오는 거였을까. 작별 인사하러 집에 갔을 땐 문 꼭꼭 걸어 잠그고 내다보지도 않더니 차를 타고 시내 나올 때 어디선가 나타나서 눈이 퉁퉁 부운 얼굴로 나를 부르던 선화처럼, 나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살자고 어머니께 떼를 쓰며 엉엉 울었었다. 한 학기도 마저 채우지 못하고 헤어진 친구들과 그리도 많은 정이 쌓였던 걸까. 짧은 기간 동안 사귄 친구들이였기 때문에 지끔껏 살아오면서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웠는지 모른다. 떼쟁이 귀여운 악동이었던 선화는 지금은 나와 비슷한 중년의 여인이겠지. 순박한 흑진주 동칠이는 여름 날 호박덩굴에 쇠 똥파리가 날아들 때면 어김없이 생각났었고, 업어준다고 땅에 메다꽂았을 때 울지도 않고 생글거리던 홍란이는 아주 오래전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한번 만났었는데, 예쁜 중학생이 되어 있었고 기억에도 없는 고향언니지만 말만 듣고도 이뻐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었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어느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함께 뛰놀고 싶은 친구들. 그 그리운 얼굴들 닮은 모데미풀을 알게 되었서 기뻤다. 꼭 한 종을 구해다가 꽃누르미하여 하얀 손수건처럼 가슴에 달고 싶다.
어 린 날 의 추 억
月 川 꼭두서니빛
남 문희. 여자아이 이름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오빠. 오빠의 첫 사랑이 나였음은 확실한데, 나의 첫사랑이 오빠였다고는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 같다. 사랑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오빠가 우리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중학교 1학년이였고,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였다.오빠는 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 대학교 부속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서울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때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오빠 집으로 내려왔다. 장학금을 받는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하는 동네 오빠구나 생각했었다. 우리 집 앞에 사각의 넓은 공터가 있었고, 오빠네 집은 우리 집과 마주 바라보는 곳에 있었다. 사각의 귀퉁이마다 골목길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일 참이면 삽시간에 이삼십명은 족히 모여 들었다. 구슬치기, 땅따먹기, 자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기마놀이,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등등, 놀이란 놀이는 다 할 수 있는 방과 후의 학교 소 운동장 전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그 공터는 우리들에겐 더 없이 좋은 추억의 놀이장소였다. 남자 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 각자 친한 친구들과 놀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 시끌벅적한 곳에서도 벽에 기대어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고 있었던 한 소년이 있었다.
내가 오빠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6학년 여름 방학 때 부터였다.그 날도 오빠는 벽에 기대어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고, 때때로 나와 눈이 마주치곤 하였다. 나는 옆집 아이와 공기 놀이를 하다가 흥미를 잃어, 둘이서 하아모니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 갑자기 노래를 부르다 멈춘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어머, 저 오빠가 너 좋아하나봐." 그 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오빠가 웃고 있었다. 아주 환하게.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오빠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컷고, 체격도 좋았다. 얼굴에 작은 주근깨가 많았으며, 씨익 웃을 때는 장난 끼도 많아보였다. 오빠는 낮 동안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오빠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 쬐그만 여자아이 가슴속에서도 누구를 좋아한다는 설레임이 영악스럽게도 움트고 있었던 걸까. 오빠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서로 마주 바라보기를 몇날 며칠일이 지나가고. 어느 날, 오빠의 큰 형이 책을 사주겠다며 함께 서점에 데리고 갔다. 그 후부터 오빠와 나는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여름방학 숙제인 곤충 채집을 위하여 매미 체를 들고 오빠와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가기도 했다. 오르막길에서 힘들면 손도 잡아주고, 가파른 곳에선 번쩍 안아서 내려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뒷동산에 올라가 풀숲에 누워서 책을 읽기도 하였다. 또 어느 날은 책을 빌려주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하였다. 지극정성의 오빠 앞에서는 나는 언제나 순한 양이였다. 오빠한테 칭찬 받는 것이 너무 기뻤고, 오빠의 다정한 관심이 마냥 좋았다.
땡볕이 내리쬐던 여름 날 오후 오빠의 자전거 뒤에 타고 비행장 근처에 있는 시냇가로 멱을 감으러 갔던 일도 기억난다. 그 시절만 해도 물이 아주 맑았기 때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빠는 둥글납작한 돌을 찾아다 내가 앉을 수 있게 돌 방석을 만들어 주었다. 오빠랑 옷을 벗고 물놀이를 즐겼다. 하나 부끄럽지 않은 그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이랴. 다슬기도 잡고 돌 성도 쌓으며, 즐겁게 물놀이를 하다 한기를 느끼면, 물에서 나와 옷을 입고, 그 위 언덕 풀숲에 앉아서 옷을 말렸다. 물에 젖어 접힌 부분은 빨리 마르도록 오빠가 손으로 들어서 바람과 햇빛에 말려 주었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했다. 햇볕이 뜨겁다 느껴질 때면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쉬기도 했는데,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어주면 나는 오빠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 해가 어스름 해 질 무렵에야, 오빠와 나는 집에 돌아 갈 생각을 했다. 자전거 뒤에 타고 오빠의 허리를 꼬옥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얀 런닝 바람의 오빠 등이 아늑하고 참 좋았다. 오빠는 짓궂게도 일부러 돌이 많이 박힌 울퉁 불퉁한 길을 곡예하듯이 달리며, 무서워하는 나를 놀려대었다. 그러면, 나는 오빠 허리 살을 살짝 꼬집었다. 아얏 소리를 내면서도 오빠는 뭐가 그리 좋은지 큰 소리로 웃었다. 날이 갈수록 오빠와 나는 다정한 오누이처럼 정이 깊어만 갔다. 아름답고도 아름답게 시간은 흘러서 6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을 맞이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빠와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임예진, 이덕화가 주연한 <진짜 진짜 좋아해>라는 제목의 하이틴 영화였다. 피부가 하얗고 초롱한 눈을 가진 예진 언니가 너무 예뻤고, 학생복을 입은 덕화오빠가 멋져 보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를 중간 쯤 보았을 때, 오빠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순간 나는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오빠랑 늘 손잡고 다녔어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 일로 충격을 받았다거나, 오빠에 대한 싫은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그 후로 오빠를 만나면 마음이 예전처럼 편하질 않았다. 오빠가 만나자고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내도 난 방안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그 때가 사춘기의 시작이었을까 시간은 잘도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오빠도 고등학생이 되었겠지.. 문득 문득 오빠가 생각이 났었지만, 학기 초의 분주한 학교생활로 점차 잊혀질 무렵, 다시 오빠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찌 할 줄 몰랐다. 휘파람소리가 커질수록 내 가슴은 더욱 더 두근거렸고,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오빠를 만나고도 싶은데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국 오빠는 나를 포기하고 돌아갔다.그 후 오빠네는 아주 흑석동으로 이사를 갔다. 영영 만나지못 할 이별이였다. 나는 바보였을까. 오빠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나. 오빠는 나의 변화된 마음을 모르는 채 갑자기 새침해져버린 내가 밉기도 했을 것이다. 나를 만나려 했던 그 순간에 오빠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우편함에 넣어두고 간 두툼한 편지에는 사랑했었다는 말이 수도 없이 적혀있었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 오빠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나처럼, 오빠도 지금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을까. 어느 하늘 아래서 오빠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보고 싶은 그리운 오빠.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오빠에게 고백할 텐데. 사랑한다고.
남한산성의 박새들
月 川 꼭두서니빛
― 새야, 새야 ―
어어, 요녀석 보아 그새 주린 배를 다 채운거니. 그 익살스러움이란.
내 손바닥위에서 잘게 부스러진 땅콩 입에 물다 휘익 던져 놓고는
푸르륵~ 저 멀리 높은 하늘로 날아가는 작은 새야,새야. 연한 부리로 콕콕 찍어대던 속 살 간지러운 귀여움과 갸우뚱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의 신비함으로 가느다란 휘파람 새 소리에 귀 기울여 내게로 날아왔듯이, 작은 숨소리 푸르게 튀어 오르는 너의 숲으로 나를 데려가 주렴.
그 곳에 가면 어쩐지 내 그리움의 저편 깊고 푸른 호수가 있을 것만 같아.
지난 겨울 내내 산에 다니면서 새들하고 친해졌지요~
남한산성 입구에서 커피를 파는 여인이었던가요. 방송에도 나오던~ 산을 오르내리면서 그 여인처럼 깐 땅콩을 두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잘 불지도 못하는 휘파람을 불며 새들을 불러 보았지요. 그랬더니 정말 새들이 하나 둘 씩 모여 들어서 땅콩을 물고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얼마나 신기했던지요~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하고 싶은 아주 귀엽고 앙증맞은 박새였어요. 새들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었어요. 박새들은 주로 회색빛과 검은빛의 단조로운 무늬를 가지고 있었는데 목에 검은 띠 줄이 있는 박새가 가장 민첩하고 건강한 새였지요. 멋진 비행을 즐기며, 땅콩을 여유롭게 물고 가지요. 그리고 민무늬의 회색빛 박새는 매우 소심해서 일단 내 가까이 있는 나무에 날아와 앉아 있다가 내 손바닥위에 날아와서도, 내 손가락 움직임이 심상치?않은 느낌을 받으면 얼른 날아가버리지요. 날아와 앉을 때 새들도 나의 체열로써 내 심리상태를 가늠하나 봅니다. 내가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새들도 편히 날아올수있다는 것을 감지했지요. 사람들의 손에 익숙한 새들은 먹이를 물고 숲 어딘가에 저장해 놓곤 다시 날아옵니다. 땅콩 한 알이 작은 박새가 먹기에는 좀 클 것 같아서 잘게 부스러뜨려서 주었더니 하하, 큰 것만 물고 가고 남은 땅콩부스러기는 물고 가려다 휘익 집어 던지지 뭐예요 그 모습이 얼마나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웠는지요~
숲을 비추는 한 줌의 따뜻한 겨울 햇살도 좋았구요~ 찬 겨울 바람에 손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교대로 손을 녹여가면서 참 즐겁게 새들에게 먹이를 주었던 지난 겨울이였네요. 남한산성 근교에 사시는 분은 새들의 속살거리는 귀여움을 한 번 체험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이곳 들꽃마을사람을 만나서 무척 기쁩니다.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첫댓글 일부 줄바꿈이 이상하지만 원고에서는 잘 정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