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케이션의 도시 부산에선 카메라가 멈추지 않는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심장 부산에서 한창 촬영 중인 세 편의 영화 현장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과거 부산은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번화한 도시 또는 최대의 항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오늘날의 부산은 지존의 ‘영화도시’다. 비단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산이 강한 지역색을 바탕으로 한 개성넘치는 도시라는 증거다. 옛 도심에는 70년대로 시간을 건너온 듯한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부두와 컨테이너는 잿빛 항구의 이미지를, 해운대 신도시와 광안대교는 최첨단 신도시의 위용을 뽐낸다.
그래서일까. 부산에서는 쉴 새 없이 카메라가 돌아간다. <친구>의 영도다리와 범일동 삼일극장, <엽기적인 그녀>의 을숙도 갈대밭, <달콤한 인생>의 주 무대였던 호텔 크라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태풍>에 담긴 광안대교, 부두 액션 신이 인상적인 <사생결단>의 감천항 등. 이제 영화에 담기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영상도시 부산을 만드는 데는 부산영상위원회의 노력도 밑거름이 됐다. 로케이션 전담팀을 꾸려서 3만여 장의 사진을 갖춘 온라인 DB의 구축과, 요청을 받아 로케이션 장소를 물색하는 정보력, 도로 통제나 경찰 협조 등 촬영을 성사시키는 행정 지원 시스템은 영화 하기 좋은 도시의 토대가 됐다. 부산에서는 지난해에만 43편의 장편영화가 촬영을 했다. 올해는 현재까지 30편이, 지금도 6편의 장편영화가 촬영 중이다.
지금, 부산을 무대로 맹렬히 촬영 중인 세 편의 한국영화 현장을 다녀왔다. 부산 경성대 출신의 안권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예전에 <태풍>을 촬영했던 팀이다. 한석규와 차승원의 만남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범인 검거율 100%를 자랑하는 강력반 형사 백성찬(한석규)과 대담한 범인 안현민(차승원)이 펼치는 범죄 스릴러물이다. 부산 영화 스튜디오와 해운대 일대를 비롯해 부산에서 총 60% 이상 촬영된다.
안성기, 조한선이 주연을 맡고 <슈퍼스타 감사용>의 김종현 감독이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마이 뉴 파트너>도 사하구의 산동네 마을과 사직구장, 통도 환타지아 등 총 촬영분의 60~70%를 부산과 그 일대에서 촬영한다. 내사과 형사 아들(조한선)과 능글맞은 풍속반 반장 아버지(안성기)가 등 돌린 지 8년 만에 사건해결을 위해 뭉치며 벌어지는 드라마 위로 액션이 가미됐다.
<핑크 토끼>는 부산지역 영화로는 최초로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독립장편영화다. 자해공갈단 출신 50대 퇴물 건달 백한근(권철)과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퇴물 에로배우 출신 다해(고다미)가 각자 고통의 페달을 밟고 있지만 서로의 존재가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준다는 스토리의 로맨스 코미디. 100% 부산에서 촬영하며, 부산의 영화제작 여건을 확립하기 위한 야심만만한 시도이다.
숱한 한국영화에서 근사한 그림을 보여준 도시 부산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다. 이곳처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여러 가지 표정을 만들어내는 도시는 많지 않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카메라가 돌아가는 이유다.
찍는 사람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변덕스런 날씨답게 햇빛과 잿빛이 교차하는 9월 12일, 부산 영화 촬영스튜디오의 주차장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촬영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실 촬영 스케줄에 잡혀 있지 않은 촬영인 데다, 전날 밤 거하게 벌인 배우 오광록의 생일잔치 여흥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상황. 그럼에도 바지런한 스탭들은 아침부터 찌뿌듯한 몸을 이끌고 나왔다.
찍히는 사람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할 장면을 찍고 있다. 금괴를 탈취한 중간 브로커가 형사들에게 잡혀서 화물칸을 뜯어보니 금괴가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 힘겹게 붙잡은 형사들도, 몰래 운반하던 중간 브로커도 머릿속이 하얗게 어리둥절한 상황이 연출된다. 트럭 안에 설치된 카메라 앞에서 거친 몸싸움과 연기를 펼치면서도 좁은 화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보이지 않는 신경을 쓴다. 부산에서 찍고 있지만 극중 배경은 제주도. 사실, 영화는 다 이런 속임수다. 제주도임을 믿게 하기 위해 저 멀리 관광버스도 대절해 배치하고 여행가방을 끄는 여행객 엑스트라들도 포진했다. 가방을 끌고 가는 엑스트라들의 위치와 속도까지 몇 번의 확인을 거친 다음에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영상도시의 메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부산 해운대 수영만 요트장 내 부산 영화 촬영스튜디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는 이곳이 부산 로케이션의 핵심이다. 유난히 변덕스런 날씨 탓에 매 테이크를 갈때 마다 노출을 맞추기 위해 조명판을 이리로 저리로 들어 옮기며 설치한다. 이 모습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마이 뉴 파트너>의 애니메이션 버전(3D)
전무후무한 롤러코스터에서의 액션 신을 위해 <마이 뉴 파트너> 현장에 CG 업체인 인사이트 비주얼의 동영상 콘티가 동원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청연> 등에서 가치를 입증한 바 있는 동영상 콘티는 열차와 사람을 따로 찍어서 합성하고 사전 헌팅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배우들과 무술감독, 스탭 모두 동영상 콘티를 보면서 동선과 CG 컷을 미리 예상하고 확인할 수 있다. 인사이트 비주얼의 손승현 실장은 “국내 최초 롤러코스터 액션 신을 위해 보다 쉬운 이해와 효과적인 촬영을 위해 사전 답사하는 등 2개월을 투자해 3D 동영상 콘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2대의 크레인이 동원되는 촬영인 데다가 아찔하리만큼 높은 롤러코스터 레일에서 진행되는 위험한 촬영인 만큼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일등 공신으로 사랑받고 있다.
레일 위의 오감충족 <마이 뉴 파트너>
<마이 뉴 파트너>의 오늘 촬영분의 최대 관건은 부산 인근의 양산에 위치한 놀이동산 ‘통도 환타지아’에서 벌어지는 국내 최초 롤러코스터 액션 신. 냉철한 내사과 형사 영준(조한선)의 팀이 부패한 경찰(정찬)을 잡기 위해 놀이동산에서 잠복근무를 벌이는 영화 타이틀 시퀀스의 한 장면으로, 롤러코스터의 레일 위를 달리는 추격 신이 펼쳐진다. 롤러코스터를 타기만 해도 아찔한데 그 곡선 주로 위를 달리는 것이 오죽 어려운 일일까. 아니 그곳까지 올라가는 것조차 와이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가능하지도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용감한 정예 스탭들은 보무도 당당히 올라가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귀환했다.
도플갱어 <마이 뉴 파트너>
영준 역의 조한선과 그의 대역 강풍 무술감독. 피부 톤에서부터 수염, 복장이 똑같은 이들을 도플갱어라 할 만하다. 강풍 무술감독이 이날 오전 액션 신 촬영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앰뷸런스 신세를 졌던 조한선에게 몸 상태를 물어보며 다음 촬영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재명 무술감독에게 사사한 강풍 무술감독은 <화려한 휴가>의 무술을 맡으며 떠오른 신인 무술감독. 크레딧에는 올라가지 않지만 후배를 돕기 위해 관록의 신재명 무술감독이 베스트 액션팀과 함께 현장에서 실감나는 액션을 만들었다. 오전에 부상당해 병원으로 후송된 조한선은 링거만 맞고 현장으로 복귀해 “점심 반찬은 뭐냐”며 촬영을 재개하는 열의를 보였다.
현장의 슈퍼스타 <마이 뉴 파트너>
<슈퍼스타 감사용>의 김종현 감독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동파' 감독이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걸친 김 감독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대신 카메라 옆에서 몇 번의 테이크가 진행되는 동안 매번 배우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지도한다.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다. 롤러코스터 레일 신을 촬영하기 전에는 강풍 무술감독과 신재명 무술감독, <무사> <중천>의 김영호 촬영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됐다. 특별출연하는 배우 정찬은 촬영장을 찾은 반가운 얼굴.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답게 힘든 액션 신도 척척 해낸다.
소풍과 같은 현장 <마이 뉴 파트너>
영화 촬영현장은 그 어떤 곳보다 긴장감이 감돌지만, 지난한 기다림과 여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총 예정된 57회차 중 이날은 17회차. 매회 강행군을 펼치는 스탭들에게 밥차를 다녀오는 시간은 너무나 달콤한 휴식시간이다. 한적한 놀이동산인 통도 환타지아에서 스탭들이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영화공장을 꿈꾸며 <핑크 토끼1>
<내 여자의 남자친구> <묘도 야화>의 고다미가 독립영화 <핑크 토끼>의 다해 역으로 출연 중이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번외상을 수상한 <검은 땅의 소녀와>의 서용우 PD와 유하 감독 연출부 출신의 신인 김회근 감독, 싸이더스 소속 스탭진과 부산 최고의 동시녹음 전문가인 이성철 기사, 부산 배우협회회장인 연극배우 권철이 함께하는 다부진 영화다. 3억 5천만 원 규모의 작은 영화지만 2007년 부산영상위원회 장편영화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돼 내년 초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월과 사람이 만든 세트 <핑크 토끼2>
극중 백한근(권철)의 집인 부산시 사하구에 위치한 다대포 1주공아파트. 25년도 훨쩍 넘는 연식으로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낡았지만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이곳을 부산영상위원회의 행정 지원으로 힘겹게 얻었다. 10평 남짓한 좁은 아파트 두 채를 빌려 PD와 스탭들이 손수 도배도 하고, 꾸몄다. 이례적으로 사하구청에서 제작발표회를 연 <핑크 토끼> 현장에선 인근 주민들과 사하구 소속 동장들이 돌아가면서 야식과 간식거리를 갖고 오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사진 김지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