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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항 오천읍을 고향으로 둔 사람의 안동과의 인연은 교직에 몸담은 첫 발령에서 비롯했다. 안동중학교와의 인연이 안동 삶의 시작이었다. 안동중학교 앞 도원교회 뒤편 마을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짧다면 짧은 안동인연이 만들어졌다. 높고 훤칠한 키에 뽀얗고 고운 미소년의 얼굴이었던 한 예술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두고 풀어내는 이야기는 여러 갈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새로 길을 내기도 하고 토끼가 낸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열린 듯 하다가 끊기기도 하고 더러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흩어진 길의 가닥을 묶는 일을 포기하고 아예 그냥 흩어지듯 쏟아놓은 듯 그렇게 또 길을 나서본다. 1992년에 전우익 선생을 만나 대화를 나눈 글을 보면 정영상 시인의 마음자리가 훤히 내다보인다. 질문을 던져서 불편할 내용은 짐작으로 미루며 헤아렸던 것인데. 보호감호소에 30년 이상 갇혀 지내다 풀려나 자살한 사람 이야기나 빨치산 관련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을 터이나 정작 전우익 선생에게는 그 어느 질문도 하나 던지지 않고 혼자 정리하며 묵묵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정영상 시인 말대로 “시시콜콜 무엇을 더 여쭈랴”,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리는 걸 무지 잘했을 시인이다. 당시 안동에 머물 때 문학청년들에게 술을 사주며 독려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단지 문학청년만 그랬을 리가 없다. 영향을 끼친다는 말의 의미처럼 은혜가 미치고 입혀지고 후세까지 남아있는 것들, 그래서 시인 정영상을 두고 만감을 꺼내드는 것 같다. |
![]() 2. 그 낭만의 뿌리는 찾아가기가 버겁다. 대신에 공주사대 시절 문예반 흔적을 담아둔 신현수 시인의 시를 통해 대신하기로 한다. 대체로 예술의 낭만성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술’이다. 요즘처럼 술이 얼큰해지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앉던 문화가 없었다. 60-70년대 혹은 80년대 중반 정도까지 대학생들의 문화에서 통기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기타 반주의 노래는 낭만의 중요한 코드가 되었으며 시적인 노래가 많이 불렸다. 이런 대학문화 울타리에서 좀더 낭만성이 짙은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술을 인생 삼아 마셨다. 이 범주에 드는 사람 중에 시인 정영상도 한 자리에 놓인다. 학교 때 우리는 낭만주의자였다. 봄이 되면 벚꽃 흐드러진 공주산성에 올라가 떠나간 문우이자 시인을 기리는 글 막바지에 이르면 비장함이 가득하다. 공주사대를 주 무대로 선술집으로 몰려다녔던 문청들은 금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봄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대낮에도 취해 살았다. 그렇게 시를 살아가던 문우들이 졸업을 하면서 교사가 되고 낭만은 말라가기 시작한다. 학교에는 비민주적인 현실이 있었고 그 부당성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다 교직에서 쫓겨났다. 많은 해직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영상 역시 학교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다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아픈 현실을 두고 신현수 시인은 ‘현실주의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로 추모의 정을 대신한다. 조재도 시인은 「봄비」에서 그리운 정영상을 부른다. 이 글을 보면 마음이 그리 짠할 수 없다. “오래 전에 죽은/시인 정영상/슬픈 눈/큰 키 /생각나네 진저리치며 내려놓던 /소주잔 /그가 부른 노래, 망향/망향이라는 노래 /염소가 울던 /금강, 빗속을 거닐며 불렀던 /노래” 생전의 시인 정영상이 즐겨 마셨던 술이 ‘진저리치며 내려놓을’ 생존의 무게였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술잔에 담았을 쓸쓸한 삶의 구석들이 함께 아픔을 나눈 문우를 통해 전달된다. 교육문예창작회를 같이했던 문우의 포착은 놀랍다. 그리움과 미움이 크게 요동칠 때마다 마음이 한점씩 깎여나갔을 아린 술잔,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들고 살다 죽음까지 이른 시인의 진저리쳐지는 삶을 떠올려 본다. |
![]() 3. 참감나무에 열리는 감은 제사용으로 특별한 관리대상이지만 어머니 눈을 피해 따먹던 일이나, 밤을 먹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밤을 까다 가시에 찔린 이야기는 즐겁다. 특히 밤 껍질을 까기 위해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칼처럼 사용한 것이나, 살구는 먹고 살구씨로 공기놀이를 하고, 또 찐빵이 먹고 싶어 살구와 바꿔 먹은 이야기도 흥겹다. 구슬치기에서 맨날 잃고 구슬빚까지 지자, 어머니 몰래 닭 알을 꺼내 가져가다 깨트린 이야기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구슬빚 갚는 일은 얻어맞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가장 맛있는 살구나무가 있는 친구의 비위를 잘 맞춰야 했고, 예쁜 여자아이를 두고 경쟁적으로 좋아하기도 한 귀여운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망개나무 열매는 먹고 씨는 실에 꿰어 목걸이, 염주, 팔걸이(팔찌)를 만들었다. 또 소나무 속껍질을 벗기고 송기(松肌), 솔밥(어린 솔방울), 솔순 등도 먹었다. 겨울이면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아버지가 땅에 묻어둔 밤을 몰래 꺼내 먹거나, 쥐똥나무로 새총을 만들고,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닥나무로 활줄을 만들어 한번도 잡지 못한 참새, 토끼잡이를 나서기도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데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것이며, 부모님이 한밤까지 새끼로 가마니를 짜는 소리가 마음 아팠다는 추억이며, 추운 겨울이면 곡식이 든 가마니에 들어와 새끼치고 사는 쥐들이 있었고 어른들은 그 쥐를 낫으로 죽이기도 했던 유년이 있었다. 또, 호박벌을 잡아 꿀을 빼먹던 이야기, 노루 사냥을 구경하면서 노루의 목숨과 노루고기를 두고 이중적인 생각을 했던 것 등이 유년의 기록에 남아 있다. 시대의 가난에 불우했던 유년이지만 배고픈 환경에서 먹을 걸 찾아내는 놀이를 쉼 없이 지속하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생명성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었다. 배가 고파 주눅 들거나 힘없이 늘어진 아이는 보이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그날의 먹을 것을 향해 함께 움직이고 나눠먹고 그러다 다투고 다음날 다시 만나 먹을 것을 함께 찾아내는 아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마음의 바탕에서 시도 있고 예술도 있었지 않았을까. 정영상 시인이 말한 대로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나뭇잎과 햇살, 아침과 저녁, 밤과 낮에 대해 투시하는 고뇌 없이 대뜸 문학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것인가. 어린 시절 고향풍경과 일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 바로 「유년」이다. 아마도 다 자란 콩나무의 키쯤 되었을 시절 어렴풋한 기억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다락논밭에 엎드려 일을 했을 것이고 당시 어린 꼬마들도 어느 집에서나 심부름으로 자기 몫의 할 일이 있었다. “다 큰 콩 키만할 때까지도/나는 팬티라는 것을 몰랐다/국민학교 입학할 때도/팬티라는 것을 입어보지 못했다/그저 아버지나 형이 입던 바지를/가랭이만 끊어내고 입거나/조그만 고추를 달랑거리며/미루나무 늘어선 고개 너머 콩밭까지/물 주전자 술 주전자 심부름을 했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술 심부름을 다니다 만나는 뱀은 위협적이거나 보기 불편한 불청객이었고 그러면 끝말잇기를 하면서 그 겁나는 길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
![]() 4. 복주여중 교사 시절 교육현장을 담은 작품에는 가슴 아픈 절절한 교육현실이 등장한다. 집안이 가난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를 퇴학 처분해야 했던 일, 시험성적이 나빠서 바보가 되어야했던 아이 이야기는 어제의 일만이 아닐 것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기회부여의 균등성인데 교육 자체가 차단된 아이들은 어떻게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심각한 사회 불균형을 만들고 있다. 이런 문제적 현실을 생각할 때 교육시는 분명 운동의 차원이 필요했고 변화라는 중요한 목적을 가진 글이어야 했다. 정영상의 첫 시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의 호소력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험 점수나 등수 때문에/자신이 바보라는 걸 깨닫게 된 건/정말 처음이라던 혜영이 (중략)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피맺힌 유서 남겨 놓고 목숨 끊은/어린 열다섯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르고/이 나라 푸른 하늘 보기가/그만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아이들 다 돌아간 후」) 해직되고 아이들과 학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한 「환청」이란 시가 있다. 죽령재 너머 단양 시인의 집에까지 들리는 안동 복주여중의 수돗물 흐르는 소리에서 먹먹한 감이 든다. 그리움이 깊어 헛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그리움이 짙어지자 마음이 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인은 마음과 몸이 병들지 않았을까 싶다. 체육 시간이라 급한 김에 그만 누가 수도 꼭지 잠그는 걸 해직교사들은 복직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했는데 출근투쟁이란 것이 있었다. 학교로 가게 되면 막아서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입씨름, 몸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학교를 훔쳐보러 간다」는 시에서도 도둑이 될지라도 학교를 훔쳐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보인다. ‘전교조 해직교사’는 무서운 사람인 시절에서 “짜장면집에서라도 좋다/너희들 불러모아 놓고/수업 한 시간 하고 싶다/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더니/내 편지는 수상하다고/수상한 것은 빨갛다고 되돌아오는데/십자가는 왜 저렇게 많은가” 「내 편지는 빨갛다고 돌아오는데」 80년대 안동풍경 중 하나, 정영상 시인에게 포착된 것은 김만철 가족의 소지품 전시회와 목성동 성당의 집회와 데모이다. 청진의과대학병원 의사였던 김만철 씨는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탈북했는데 그들이 입었던 속옷, 양말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했던 시절이다. 그때 시청 지하실 전시장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안동시 초,중,고 학생들은 단체로 전시회를 관람했다. 또, 목성동 성당에서 농민회의 농성을 저지하는 전경과 체루가스의 시절을 담고 있다. 1986년 9월3일 저녁미사가 있는 수요일 성당에서 농성하다 거리로 쫓겨나고 목성동 성당에는 전경들이 가득 찬 그때, 안동의 민주화가 진행되던 역사의 한 장면을 담았다. |
![]() 5. 길지 않은 안동체류, 시인과 인연 있었을 현장이란 술을 많이 나눴을 대석식당, 첫 발령지 안동중 그리고 하숙집, 해직을 당한 복주여중, 목성동 성당으로 돌아봤다. 식당 대신에 대석다방도 보이고 대석길 표지판도 보인다. 안동중 입구 도원교회 뒤 동네는 언덕이나 산을 올라야 한 눈에 들어올텐데 2층 주택들이 키를 맞춰 나란하다. 그리고 복주여중 빈 운동장을 돌며 수돗물 소리를 떠올려 보고, 새로 지은 목성동 성당을 올라봤다. 소박한대로 이 무대를 배경삼아 정영상 시인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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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정영상 시인에 관한 글다운 글이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고 올렸네요. 이 글을 쓴 한경희 님에게 무지 고마움을 표합니다. 정영상 시인! 살았으면 좋은 시를 많이 썼을 텐데...
3주전 대학에 들렸더니 시비가 그 자리에 없었어요. 임시 건물이 들어섰고. 물어 볼 사람이 없어 못 물어 봤는데.... 어떡하지...
시비는 그 옆 건물 도서관 앞으로 옮겼고,,, 그 전 자리엔 아마 헌혈센탄가 뭔가가 들어섰을 걸...
시비는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렀던 그 옆자리로 옮겨 자리하고 있던데요. 저는 그걸 보고 감탄햇어요. 정형의 시비가 현재의 헌혈센터 자리에 있으면 시비에 새겨진 시의 내용이 어린 대학생들에겐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제가 걱정한 적이 있었는데요. 몇년 후 적당히 비껴 잇는 자리에 옮겨져 있어서 좋았어요. 만일 정형이 살아 계신다면 "내 시보다 사람 살리는 헌혈센터가 더 중요하지싶다!"라고 한 마디로 꿑내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을 거예요. 정형은 그렇게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었죠. .. 그래서 저는 시비의 자리가 바뀐걸 보았을 때 "정형이 원하는 자리에 시비를 옮겼구나! 신기하네!"하고 미소지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