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숍 일원의 그랜드마더 볼더를 등반하는 김희조씨.
7월22일 월요일, 뜨겁게 달아올랐던 국제 초청 볼더링 대회인 고지게임(Gorge Game)에서 예상 밖에 저조한 재용형의 성적으로 형뿐 아니라 희조와 나는 새로운 대상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활기보다는 뭔가 조심스럽고 지친 분위기로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많은 짐을 들고 사흘동안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차를 빌리기로 했다.
버클리 REI 장비점에서 요세미티와 비숍의 자료를 구하려 했으나 마땅한 자료는 찾지 못하고 부식을 사러 들어선 슈퍼마켓에서 구한 조잡한 지도를 돛대 삼아 떠난다. 미지로의 불안감은 지도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일까? 아무튼 오늘 요세미티에 도착하면 빛나는 별빛 아래 숲향기 속에서 술 한 잔 하고 싶다.
그런데 결과는 캠프4에 도착하자마자 피로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 그리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무단야영으로 벌칙이 가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추스르고 야영장비를 정리하던 중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코앞에 번개 모양에 하얀 백묵 자국이 뚜렷한 미드나이트 라이트닝(Midnight Lightning·V9)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목표였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엘캐피탄이 바위 뒤에 서 있는데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재용 동작에 질린 외국 클라이머들
▲ 고지게임에서 선전하는 이재용.
커리빌리지의 장비점에 가서 그레이드북과 제법 값도 비싸고 우리 덩치보다도 큰 크래시 패드를 구입하여 미드나이트 라이트닝 앞으로 돌아왔을 때, 등반 욕심 많은 재용형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스타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몸 풀기 위하여 바위 후면에 재용형이 가볍게 했다는 루트를 시도해 보지만 홀드들이 잡히지 않는다. 또 말려들었다는 생각에 쉬워 보이는 바위에서 다시 몸풀기로 하지만 V4급이 될 듯 말 듯한 루트를 희조는 세번만에, 나는 다섯번만에 겨우 해낸다. 어처구니 없지만 고지게임에서 세팅하느라 피로가 누적돼 있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본격적으로 미드나이트 라이트닝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큰 키의 흑인, 작은 키의 백인 여자, 보통 키의 백인 미국인들, 우리보다도 작은 듯한 멕시코 소년 등이 같은 루트를 시도하고 있었고, 우리들까지 끼어 들면서 클라이밍이란 국경, 인종, 성별의 차별 없이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공통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슬로 모션을 보는 듯한 재용형의 정적인 동작과 희조의 액션은 역시 군계일학이었다. 모두들 놀라고 있었다. 어느새 재용형이 첫번째 크럭스인 점프에 성공한 뒤 벽에 그려진 번개와 같은 모양의 홀드에서 손 바꾸는 부분과, 다시 오른손 사이드언더에서 왼손 푸시 동작으로 이어지는 동작을 해결하면서 볼더 위로 올라서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질린 표정이다. 허공에 매달린 채 발도 보이지 않는 자세에서 푸시로 이어지는 동작은 보는 이의 모든 세포가 떨릴 정도로 공포를 자아낸다.
희조도 다섯 번만에 완등하자 함께 어울리던 몇몇 클라이머들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크래시 패드를 챙겨 자리를 옮긴다. 그들 중에는 며칠째 그 루트를 시도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에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뭔가 빠진 듯한 나의 불균형한 등반은 결국 첫번째 크럭스에서 막혔다. 미국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하루만에 끝낸 V9급 3개와 V10급 1개, 그리고 대회 때 만들고 완등한 몇 개의 V9급과 결선의 V10급을 해냈기에 최소한 V11급을 해내리라는 꿈이 무참히 깨지고 만 것이다.
가슴은 쓰렸지만 그래도 재용형과 희조의 등반에 위안 삼으며 누군가가 제안한 부근의 또 다른 고난도 루트로 옮겨갔다. 같은 출발지점 왼쪽에는 V11급의 더 포스(The Force)가 있고, 오른쪽에는 V10급의 스릴러(Thriller)가 있다. 보기에는 V10급까지 나올 것 같지 않은 스릴러는 상단부에서 이름처럼 살 떨리는 동작들이 나왔다. 홀드가 커 보이면서도 균형과 힘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곳을 안내한 알렉사는 전에 나와 같이 루트세팅을 했다며 거기서 오는 동질감 때문인지 우리가 다음으로 이동할 목적지인 비숍과 다시 돌아가야 할 샌프란시스코에 대해 상세하고 친절하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지친 우리 모두 조금은 쉽지만 피드백할 수 있는 지역으로 옮기기로 하고 아쉽지만 크래시 패드에 장비를 주섬주섬 주워담았다.
개척의 손길 기다리는 버터밀크
▲ 미국 볼더투어 개념도
[그림을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킹볼더 전면에 더 킹(The King·V8)이 왼쪽 모서리에서 가운데로 이어져 있고, 가운데에 인상적인 비헤이브(Behave·V9)가 보였다 멕시코 친구가 먼저 하겠다고 암벽화로 갈아 신는데 나는 오늘 종일 등반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세팅 이후로 무언가 고갈된 듯 무기력한 기분이다.
그러나 재용형과 희조는 등반에 굶주린듯 정면의 비헤이브를 슬리퍼만 신은 채 발 한 번 떼지 않고 끝내 버린다. 그들의 끊임없는 정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른한 만족감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은 푸근하고 정겹게까지 느껴진다.
주차장에서 우리는 내일 요세미티에서 3~4시간 거리에 있는 서부 최대의 볼더 지역인 비숍을 둘러보고 3일간의 렌틀 기간이 끝나기 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로 잠정적으로 약속하고 알렉사와 내일 밤 그녀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캠프4에는 샤워장이 없기도 했지만 등반 외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할 만큼의 여력을 남겨두지 않았기에 우리 몸은 땀과 야영장의 흙먼지로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엘캡 맞은편 계곡의 차디찬 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 속에서 며칠 묵은 때를 불리겠다고 얼마나 버텼던지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버린 뒤에야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비숍으로 떠나려는데 희조가 안경을 잊어버렸다며 여기저기를 찾아다닌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안경을 쓰고 물속으로 뛰어들게….
결국 찾지 못해 아쉬워하면서 비숍으로 향한다. 비숍으로 이어지는 395번 도로는 작렬하는 태양으로 녹아내릴 듯하고, 신기루가 아른거리는 황무지의 연속이다. 황무지의 작은 마을 비숍이 클라이머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다 남은 돌무더기를 모아놓은 듯 지천에 널린 볼더들 때문이다. 버터밀크(Buttermilk) 들머리의 유일한 마을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보기 어려운 다양한 볼더링 용품들이 비숍 유일의 장비점인 윌슨 이스트사이드 스포츠에 모여 있다. 그곳에서 두 블럭 지나 웨스트라인이라 부르는 168번 도로를 타고 버터밀크로 향한다.
우리가 가야할 볼더링 지역은 버터밀크로 향하는 168번 도로에서 보통의 미국표식이 그렇듯 아주 작은 녹색의 ‘Buttermilk RD’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야 한다. 여기인가 싶을 정도로 황량하고 거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길 옆으로 커다란 바위 무더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한참 가다보니 거대한 공룡이 엎드려 있는 듯한 바위능선이 나오고, 10여 분 뒤 오른쪽으로 거대한 공룡알 같은 바위가 나타났다. 유명한 V10급의 에볼루션이 있는 그랜드 파(Grand Pa) 볼더였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볼더가 무궁무진한 가운데 크게 해피(Happy), 새드 볼더(Sad), 버터밀크, 드루이드 스톤(Druid Stone)으로 나누는데, 현재 1,059개 볼더가 검증되어 있다. 작년 여름 등반한 프랑스의 퐁텐블로가 아기자기하다면 이곳은 스케일이나 루트의 다양성 면에서 대단했다.
비싼 대가 지불한 요세미티 볼더 여행
저녁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야 하기에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린다. 그러나 지친 희조 대신 운전대를 잡은 재용형이 요세미티 공원을 관통하다가 끝내 사고를 쳤다. 못 다 마친 등반을 하루 더 하자는 것이다. 알렉사에게 오늘 간다고 약속했고, 또 어쩌면 내일까지 렌터카를 반납해야될지 모르기에 조바심이 생겼지만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재용형은 희조와 함께 도미네이터(Dominator·V12)를 시도했다. 요세미티를 다녀갔던 수많은 도전자들 중 단 3명에게만 완등을 허락한, 어떤 이들은 V13급이라고까지 부르는 와인볼더의 악명 높은 볼더다. 둘이서 지치고 뜻대로 되지 않자 짜증났는지 모두 함께 한숨 자다가 희조는 전에 빠뜨린 안경을 찾으러 간다고 하고, 재용형은 매트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더위에 지친 나는 매트를 침대 삼아 낮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주위를 살펴보다 재용형을 찾으러 간다. 도미네이터 옆의 스틱잇(Stick It· V11)에서 고전하는 중이다. 나도 응원차 시도해 보지만 홀드 4개가 전부인 이 루트는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정말로 끝낸 사람이 있는지 궁금했다. 노곤할 만큼 했고, 내일 귀국하려면 오늘은 꼭 돌아가야 하기에 짐 챙기러 야영장으로 돌아왔더니 희조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짐을 챙기던 중 아까 낮잠 들기 전 희조의 배낭이 다람쥐의 습격(?)으로 구멍이 났었는데 그 안에 재용형의 셔츠 또한 여기저기 구멍이 생긴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다.
갑자기 돌변한 재용형, 재빨리 가방에서 우리의 주방도구로 쓰인 칼을 꺼내더니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 다람쥐들을 향해 일격을 날린다. 그러나 맞아야할 다람쥐는 맞지 않고 그 동안 신세진 광운대팀의 텐트를 찢고 지나간다.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 기다리던 희조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물안경까지 구해서 안경을 찾으러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키를 차안에 넣고 문을 잠그는 바람에 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 우리에게 알리러 온 것이다. 각주구검-, 물에 빠뜨린 것을 여러 시간 지나서 어찌 찾겠느냐고 웃었는데 차키까지…. 물안경 값에 차 문여는 데 든 50달러까지 소비한 우리는 귀국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김동현 국제루트세터·실내인공암벽 크림프 대표)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