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밑뿌리를 잘라낸 일본
일본의 한국사 파괴 공작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식민주의 사관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이다.
조선인을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묘사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군사적으로 준비함과 동시에 자국의 쟁쟁한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결국 한반도 지배를 위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의 식민 사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1854~1922),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1942),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1874~1930), 등이다. 이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를 파헤쳐 꺼낸 유골과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 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대부분 불신한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정신에 따라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 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이후 그들은 만철滿鐵조사부를 세워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다.
마침내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식민주의 사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폭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면서 그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일제 관학자들은 조선 역사를 본격적으로 변조하여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의 불리한 사실은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태왕비의 비문과 칠지도 명문을 조작하는 등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손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일본이 왜곡한 사례 중에서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한민족사의 밑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것으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작한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1903년 동경제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조선에 파견된 이마니시 류는 조선 역사를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역사로 깍아 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내 조선의 한 사서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사서가 바로 앞서 말한 [삼국유사]이다.
그는 조선 중종 1512(임사)년에 간행된 [삼국유사] 임신본에 적힌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시켰다. '국'자와 '인'자는 서로 비슷하여 변조하기가 쉽기도 하지만, 일연이 붙인 '제석을 말한다謂帝釋也'는 주석에 힘입어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과감히 변조한 것이다. 이리하여 환국을 불교 신화에 나오는 나라로 둔갑시키고,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 고대사의 핵을 도려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사의 영혼이 뽑히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7천 년 상고사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통탄스럽지만,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마저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환인ᆞ환웅ᆞ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전락시킨 것은 더욱 가슴아픈 일이다. (정기원영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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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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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4년]
눈부신 5천년, 고조선부터~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강역사 날조 목적. 일왕 부(父)와 자식(子), 요시히토와 히로히토의 명령으로 #조선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수회 를 조직하고 #조선사35권(+2)을 편찬했다.
우리 고대
#가락국ㆍ가야ㆍ금관국 역사도
그 '조선사'를 토태로 일제 관변 식민사학자가 조선인에게 '국사'라며 가르쳤고, 해방 후 #조선사편수회 출신 매국노 #이병도ㆍ신석호 에 의해 한국 교ㆍ강단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이 그 뿌리를 깊이 새겨왔다.
한 번도 #청산 이 거론된 적도 없다.
어제 '우리 시각', 우리 #문헌사료 (삼국유사ㆍ삼기사기)를 토대로 바른역사를 연구하는 #청마역사연구회 첫강의가 열정적인 집중속에 열렸습니다.
유투버 영상《일왕의 명령 #조선사편수회 를 조직하라! 》
해방된지가 어언 77년이 지났고,
#경술국치 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혼을 아주 교활하게 비하시킬 목적으로 왜곡ㆍ조작 편찬된 사료집 #조선사편수회 의 #조선사35권, 날조를 보니 썸뜩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아는 만큼만 본다!
'대한민국 고대 남부는 일본 임나다', '가야국은 임나'라고 일본 학생들에게 지금도 가르친다.
이런 #왜구ㆍ토착왜구(강단식민사학자)는 용서할 수가 없지요!
#식민사관청산 가야사전국연대!
#기록이역사다!
#김영진 #창원중앙고운영위
#일제식민 국사교과서 폐기!
#대한민국 국사책 편찬해야!
옳고 바른 #역사교육이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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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덕의 역사산책]『일본서기』의 임나·신라·백제·고구려, 대부분 한반도 국가 아니었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라고 주장해 왔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CE 532년에 김해의 금관가야가 멸망한 데 이어 CE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한반도의 가야제국(加耶諸國)들이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CE 575년이면 가야제국은 한반도에서 그 흔적마저 소멸해 버린 상태인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CE 638년까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임나」는 처음에는 대마도, 나중에는 규슈의 북쪽에 있었던 작은 나라들의 이름이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나라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등 모두 열 나라인데 “통틀어 말하여 ‘임나’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모두 낙동강 유역의 가야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세운 나라 이름들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아래 기록들은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다.
1) 민달(敏達) 5년(575년) 4월에 吉土金子를 신라, 吉土木蓮子를 임나, 吉土譯語彦을 백제에 사신으로 각각 보냈다. 2) 추고(推古) 8년(600년) 2월에 신라(新羅)와 임나(任那)가 서로 공격을 하였다. 천황은 임나(任那)를 도우려고 하였다.
3) 추고(推古) 9년(601년) 3월에 大伴連?于를 고려(高麗)에 보내고, 坂本臣糠手를 백제(百濟)에 보내어 ‘속히 임나(任那)를 도우라’고 하였다. 4) 서명(舒明) 10년(638년) 10월에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조공하였다.’
한반도의 백제는 CE 660년에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CE 668년에 없어졌다.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조공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와 고구려는 일본 열도에 있었던 백제와 고구려의 분국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것이다.
1) 천지(天智) 7년(CE 668년) 4월, 백제가 말도사부(末都師父)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2) 천지 7년(CE 668년) 7월, 고구려가 월로를 사신으로 보내 조를 바쳤다.
3) 천지 10년(CE 671년) 2월, 백제가 대구용선(臺久用善)을 보내 조를 바쳤다. 4) 천무(天武) 2년(CE 673년) 8월, 고구려가 상부(上部) 위두대형(位頭大兄) 감자(邯子)와 전부대형(前部大兄) 석간(碩干)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5) 천무 4년(CE 675년) 3월, 고구려가 대형 부간(富干)과 대형 다무(多武)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6) 천무 5년(CE 676년) 11월, 고구려가 대사 후부(後部) 주부(主簿) 아우(阿于)와 부사 전부(前部) 대형(大兄) 덕부(德富)를 보내 조공하였다.
7) 천무 8년(CE 679년) 2월, 고구려가 상부대상 환부(桓父)와 하부대상 사수루(師需婁)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일본의 역사학자들 또는 한국의 일부 사이비 강단사학자들은 이것을 보고도 『일본서기』의 임나,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반도의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였다고 배웠던 그들의 제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배종덕 역사칼럼니스트)
첫댓글 일제 역사가들은 식민사관을 확립하여 한국 제자를 양성했고,
수 많은 2, 3세 이후 제자들이 한국의 교.강단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어 식민사관 이념의 뿌리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우리 세대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