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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초등(구국민)학교
구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혹불은 살아졌다.
옛 복명학교 올라가는 길 오른 편에 남산교회 왼편에 근래 생긴 천주교 기념관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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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복명학교는 대구 동부교육청으로 바뀌고 구건물은 헐으내고 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복명학교 설립자 울산할마씨 생존시 복명학교의 졸업기념사진 뒤에 감울산의 좌상 앞의 가운데 흰옷입은 분이 김울산
아래는 2012년 현재 범물동의 복명학교 교정에 있는 김울산의 흉상 원래 남산동의 복명학교 교정에 있을 때는 분명히 흉상의 대석에는 대리석에 大正 ○○ 년에 조상했다고 기록 되었는데 대석은 학교가 옮길 때 바뀌어졌다. 아래는 옮긴 범물동 복명학교교정
김 울 산(金 蔚 山 1858~1944) 선각자
최 태 호
암울한 일제 강점기 사회가 어려울 때 사회를 위하여 또 아동 교육을 위하여 특히 여아 교육을 위하여 아낌없이 전 재산을 내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게 하였고, 광복이 되자 이런 그의 행적이 건국의 밑그림이 되었으니 그이가 바로 김울산 할마씨이다.
그의 공덕은 제주도의 김만덕을 비교할 수 있으며 그의 뜻은 만고 충신 논개에 비교 할 수 있으니 그는 명문귀족의 귀부인이 아닌 신분이 관기 출신이나 행적은 짐승보다 더 높고 거룩했다.
1858(철종 9)에 울산에서 통정대부인 아버지 哲甫와 어머니 李奉順의 두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나서 기구한 가정 사정으로 어린 시절 감영이 있는 대구에서 관기 수업을 받아 한 많은 기생 “향아“가 되었다.
관기는 신분상 천민이다. 그러나 관기 수업은 고급 교양인을 기르는 교육과정이었다. 시문과 서화, 예절을 가르치고, 춤, 음악, 각종 악기다루기 등 많은 예능을 익히게 하였다. 오늘 날 전문대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학문이 높은 사대부와 시문을 주고받거나 기품 있는 서화를 하는 교양을 갖춘 이도 있었으며, 오늘 날 고급 전통 예술은 모두 그들의 기예를 재현한 것이다. 비록 신분은 낮으나 그들의 처신은 여염집의 부인과 같이 분명하였다. 조선의 관기는 일제 강점기 권번의 기생과는 품위에 있어서나 행신에 있어서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로는 기생의 한과 서러움을 안고 체념으로 살아야 하는 여인의 인생이었다. 이러한 기생수업에서 충분한 교양을 갖출 수 있었으니 그의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은 상당한 미모와 기품이 있는 여인으로 보인다. 그는 정미소와 술집을 경영가기도 하여 운 좋게도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대원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가 살던 20세기 초는 한말의 통신 수단이 좋지 않은 때이지만 이 곳 대구는 영남의 행정 중심지이고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변화하는 국내 사정을 빨리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국권이 일인의 손에 좌우되는 것도 그 원인이 서양의 문명를 수용하지 못한 것에도 있음을 인식하고 국권을 되찾으려면 여러 가지 방범이 있지만 자라는 어린이에게 신지식의 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을 일직이 깨닫고, 많은 뜻있는 이들이 갖가지 사숙을 세워 자라는 아동에게 신지식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명문거족의 참여가 부족하여 모두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
원래 대구에는 거대한 재원을 가진 東齋, 西齋의 두 書堂이 있었는데 신지식의 교육을 위해 과감히 이 두 서당을 폐쇄하고 그 재원으로 전국적으로 자랑할 저유학교인 사립 수창보통학교을 세웠다. 한편 공립으로 대구보통학교도 세워졌다. 그러나 이로서도 부족하였다. 특히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의식이 팽배하여 여자아이를 위한 학교가 절대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재원의 부족은 사숙이 학교로서 성장할 수가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선 서주원이 1908년(융희3년) 순종황제의 대구순시 때 받은 하사금 2백원을 바탕으로 사립 명신학교를 창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부족하므로 자금을 후원하여 1910년 월 26일 개교할 수 있게 하였다. 명신여학교가 운영난에 허덕여 폐교할 지경에 이르자 주변에서 간곡한 권유도 있었고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생각하여 한 여아라도 더 교육을 받게 하고자 이를 쾌히 인수하였다. 1927년 11월 12일에 명신학교를 복명학교라 고치고 아미산(현 보현사와 남산교회가 있는 언덕 일원)에 현재 남아 있는 2층 벽돌 건물을 지어 다시 개교하였다. 이 복명학교는 김울산 여사의 꿈의 실천이며 이상의 실현이었다. 그래서 울산이라는 탄생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던 것을 이름도 복명이라 고쳤다.
학교에 투자한 돈은 총 8만원. 당시 80kg 쌀 한 가마가 20원이었으니 4천석의 값과 같은 엄청난 재원으로 학교 건축비만도 3만 5천원이 들었다. 그는 유아교육의 중요상을 깨닫고 학교에 유치원 2개 반까지 개원하고 민족의 뜻이 깊은 金剛組와 白頭組라 반 이름을 지었다. 20년간 경영한 학교 재산은 대지 1,270원(당시 시가 12만 7천원). 교사(시가 3만 7천 3백원, 연와조2층 건물 2동, 부속건물 목조와즙(木造瓦葺)3동 연건평 420평), 토지(논 97필지 4만 8천 477평)및 밭 1필 70평(시가 3만원)등이었다.
그가 살던 곳은 구 橫町 즉 현 대구 동산 파출소 뒤편 하천부근 이었는데 , 여름 하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큰 재난을 당하자 사제로 둑을 쌓고 이재민을 구제하였으며, 흉년이 든 해에는 쌀 이천석을 내놓아 구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도 한 그의 논토가 있는 침산 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사재로 나룻배를 건조하여 주민들의 통행을 도우기도 하였다.
그 는 소작인에게도 대단히 후하여 달성군 서부의 소작인은 송덕비)昭和 10년 9월 일)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으며, 달성군 수성면의 소작인도 송덕비(1920년 갑술 4년 일)를 세워 후덕함에 고마움을 새겼다. 현재 그의 산소(반티산 아래 소재) 조야동 샘골에 송덕비 두 개가 남아 있다.
한편 그의 일상생활은 너무도 검소했다. 예를 들면 집에 써는 비도 몽당비가 되도록 사용하였고, 문풍지가 찢어지면 모아 둔 헌 종이로 때워 발랐다. 자기를 위한 생활은 지나치게 인색하나 사회를 위해서는 후하기는 한량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자금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희도학교는 해방후 신 교육법에 의해 초등학교 취학은 의무교육으로 되자 공립학교로 되고 현재 종로초등학교로 변하였다. 복명학교도 마찬가지로 학교와 학교의 재원은 아무보상도 없이 국가에 귀속되고 공립학교로 바뀌었으며 학군의 아동 부족으로 학교는 폐교 이전하고 그 자리는 교육청의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그에게는 후손도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복명학교의 교정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석대위에 모셨지만 일제는 전쟁물자로 쓰기위해 공출되어 버렸고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돌로 대신 만든 작은 흉상을 학교 뜰아래 세워 두었는데, 이 석상이 현재 초라하게 남아 그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칭송한 송덕비의 비각은 허물어진 체 손보는 이가 없이 무너져 가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나와 같이 60대가 넘는 순수한 대구 사람만이 간신이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예로부터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은혜를 잊으면 짐승과 같다고 배웠다. 그에게 건국공로표창을 추서하고, 그의 유적을 손질하고, 복명하교를 기념관으로 만들고 또 추모제를 지내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그것은 반드시 그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적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를 가르치며, 오늘날의 육영사업을 하는 이나 교육 사업을 하는 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의 본이 되기 때문에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대구시사,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원간), 여성백년(최미화 200.8.15)
위의 글은 필자가 2000년 11월 발간한 중악지(영남문화회간)에 특집 대구의 인물에 실은 것으로 본문에 나오는 지명과 위치는 현재의 지점과 다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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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구초등학교는 고종퇴위 대한제국의 칙령에 의해 세운 조선시대 설립된 학교로
바람새의 모교로 특이하게 혹부리학교란 애칭이 있었지요.
복명학교는 위에 기록되었듯이
김울산 할머니가 남의 도움없이 순수하게 설립된 숭고한 정신이 깃던 학교이며,
대구 정규 사립여학교로서 처음이라고 하네요.
대구 남산동에 거주한 바람새가 자주들렸더 시누이의 학교라서
행여 깊은 사연이 있는 회원을 위해 옮겨 왔지요.
애석하네요.
저는 복명학교와 이웃인 대구남부(현재는 명덕)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우리 친척과
친구들중 복명학교에 다녔던 사람도 있고 창립하신 김울산할머니 이야기도 어릴때 들
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구초등학교는 교복과 남학생 모자가 귀족학교처럼 느
껴지곤 하던 어린시절 기억이 납니다.
흠^^ 명덕학교에서 교생을 했는뎁쇼.ㅎㅎㅎ
동생들이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대구초등학교를 지나
대구중앙교를 근무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중앙교?
둘째 아들이 중앙초등교를 졸업했고 더시원님이 건대 교수로 재임시 둘째가 건대에 입학했는데.....
인연입니다.ㅎㅎㅎ
대구중앙교는 교생 실습을 나간 학교로 군복무후 1962.8-1964.3 까지 근무해
2학년을 맡았고, 마지막해에 1학년 담임을 하면서 어린이가 한달 한달 변화를 하며
어른스러워 지는 과정을 볼수 있었던 추억이 있답니다.
초임은 1959.3-1961.8 대구대봉교로 자유당/민주당/516혁명 을 경험하면서
4학년 2번 3학년 담임을 했습니다. 대구중앙 건대 졸업한 자제분 만나 보고 싶네요!!
낯 익은 대구초교와 복명초교의 전.근대사를 엮어놓았구려.
특히 복명학교는 내가 교생실습을 했던 추억 어린 곳인데......
아하~~ 그랬었군요. 교생실습장이 없어졌지만 추억은 영원히 남겠습니다.^^*
대구 남산교회에서 대구 복명국교로 올라가는 길 어린시절 남산동 고려다방 뒷동네에 살아서 골목 골목 을 너무나
잘알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 변해진 모습이 너무나 다르군요 복명학교는 친척아지매가 선생님이 어서 자주 놀러갔고
대구 초등은 초임지 옥포국교[1959~1961]에서 3년만에 특혜를 받고 대구시 로 와서 3년동안 근무한곳이 대구국교1962~1964]이다 내 젊은 날의 희비의 쌍곡선이가장 많았던곳 지금도 생생이 기억난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복명교와 대구초등교에 대한 역사와 김울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지만~~
전혀 생소한 곳이어서 할말이 없네요.
그렇지만 함께 참여하고 싶어서리~~.....ㅎㅎㅎ
지기언냐의 글을 재미있게 보고 또 오라버니들과 군자언니의 댓글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