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한 대에 얽힌 악의 유산을 추적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년의 주인공 아드리아 아르데볼은 기억이 사라지기 전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본다.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차가운 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 유년 시절, 아버지가 금고에 넣고 절대 연주해 보지 않는 바이올린 ‘비알’에 대해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진다. 아버지의 의문스러운 죽음 후 아드리아는 열세 개 언어를 배우며 고문서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평생의 연인인 사라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던 와중, 아버지 서재의 고문서와 편지들을 통해 유일한 애장품이자 아버지의 유산인 바이올린 ‘비알’의 비밀을 차츰 알게 된다. 아드리아는 반복되어 온 악의 역사가 가문의 유산이 되어 삶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악이 실행된 역사적 장면과 가해자, 피해자들을 되짚어 가며 악의 연대기를 추적하고 기억의 조각들을 짜 맞추기 시작한다.
악은 결코 거대하지 않다
개인의 행위 속에서 자라나 역사를 만드는 악의 씨앗
『나는 고백한다』의 첫 장면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비를 맞으며 걷는 아드리아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아드리아는 처음에는 자신의 삶 전체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착취한 아버지의 유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외면하려 했고, 그 후에는 부정하려 했음을 가감 없이 밝힌다. 연인 사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버지의 골동품 컬렉션과 고문서들을 추적하며 수많은 악의 연결고리를 직시한 아드리아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참회하는 마음으로 수없이 “나는 고백한다.”라고 되뇔 뿐이다.
자우메 카브레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악이란 거대한 사건이나 악명 높은 이름 하나만으로 명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악은 언제나 특정한 시기에서 많은 인물의 구체적 행위로 인해 발생하며, 우리 중 그 누구도 악의 연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드리아의 개인사를 통해 추적해 나간다. 아드리아는 인간의 실질적인 행위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가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전 생애에 걸친 추적으로 깨닫게 된다.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해도, 신에게 죄를 고백해도 평범한 일상 속의 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힌다.
최초의 모래 알갱이는 눈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손의 가시가 되더니 뱃속에서 불덩이로 변하고, 호주머니에서 걸리적거리기까지 하다가 좀 더 나쁜 운과 만나 양심의 가책에 무게를 더한다. 모든 것, 그러니까 모든 삶과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라, 이처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해한 모래 알갱이로부터 시작되는 거였어. (2권, 123쪽)
이처럼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 관념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는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사상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철저한 경험에서 출발해야 함을 작품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작품 해설」중에서)
당사자의 목소리 속에서 재현되는 악의 체험
구원이 아닌 공감으로 악을 직시하는 예술 작품의 역할
자우메 카브레는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결코 명쾌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예술을 통한 공감임을 보여 준다. 골동품상인 아버지와 음악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드리아는 열세 개 언어를 익히고 수준급의 바이올린 실력을 갖춘다. 그의 예술적 감수성은 고문서를 추적해 나가며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과 홀로코스트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주변 인물들까지 마치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서술해 내는 ‘예술적 상상력’은 아드리아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악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핵심이 된다. 유일한 친구인 베르나트와 수많은 시간을 음악과 글쓰기, 고전 작품에 관해 토론하며 소통하기도 한다. 그의 연인 사라는 한마디 말보다는 그림을 통해서 아드리아에게 직접적으로 건네기 힘든 피해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우메 카브레는 카탈루냐 민족이 독재 정권하에서 박해받은 역사를 『나는 고백한다』속 수많은 악행의 묘사 속에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카탈루냐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가 카탈루냐어로 직접 쓴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술과 문화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 준다. 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는 악의 경험이 생생히 전해지고 있는 예술 작품을 존중하고 향유하며 과거의 사실들을 잊지 않는 것임을 역설한다. 자우메 카브레는 『나는 고백한다』속 수많은 시, 고전 소설, 그림, 음악들을 통해 과거의 악행을 전달하는 동시에 개인의 세계관을 바꾸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예술의 힘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대학살 이후…… 잔인함은 수 세기 동안 도처에 존재해 왔고, 그걸 생각해 본다면 인류 역사는 ‘무엇무엇 이후 시의 불가능’에 대한 역사가 될 거야. 그렇지만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겠어?”
“그것을 겪은 사람들.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 학자들.”
“맞아. 그 모든 것들이 역사를 말해 주겠지. 그 기억들을 위해 박물관도 세워졌고.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 살아있는 경험의 진실 말이야. 이것은 학술적인 연구로 전해지지 않아. 예술만이 그것을 전할 수 있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말이야, 생체험에 가장 가까운 장르라고나 할까.” (2권, 343쪽)
시공간과 인물을 넘나드는 독창적 서술 방식
개인의 삶과 역사적 사실을 관통하는 악의 연결 고리라는 거대한 주제가 가지는 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독창적인 서사 기법이다. 자우메 카브레는 『나는 고백한다』를 여러 시점의 목소리를 한 문단 안에, 때로는 한 문장 안에 섞는 방법으로 서술한다. 아드리아는 외로운 유년 시절을 이겨 내기 위해 카슨 보안관과 검은 독수리라는 인형을 바라보며 ‘상상 속 친구’와 소통한다. 상상을 통한 소통과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아드리아는 알츠하이머의 영향까지 받아 시공간뿐 아니라 작품 속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의 시점을 빠르게 넘나들며 독창적인 고백을 지속해 나간다.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좇아 고문서를 바라보며 바로 삼인칭으로 그 당시 인물의 상황을 서술하다가 갑자기 사라가 앞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독백과 대화가 교차하고 여러 시점을 급작스레 옮겨 다니는 서술 방식은 읽는 사람에게 마치 교차 편집된 영상을 보는 듯한 생생함과 속도감을 준다. 오랫동안 영상 매체와 오페라의 대본 작가로 활약한 자우메 카브레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서사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들려주는 듯한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자우메 카브레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차츰 바이올린에 얽힌 어두운 개인사들이 드러나는 긴장감과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를 통해 독서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서사 기법은 책의 주제와 결합하여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