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고등동성당 (1) 교구 첫 주교좌성당이 있던 자리
- 고등동성당 입구.
새해부터 ‘길에서 쓰는 교구사’ 기획을 시작합니다. 이번 기획은 교구가 설정되면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가 담긴 현장을 방문해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가는 시리즈입니다.
장소에는 역사가 숨쉬고 있다. 그 장소와 장소를 연결한 길은 옛 어른들이 걸었고, 지금 우리가 걸으며, 미래의 자손들이 걸어가게 된다.
교구의 역사를 찾아갈 첫 목적지는 어디가 좋을까. 우리 교구의 중심이었던 주교좌성당이 아닐까.
‘천주교 수원교구 초대주교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고화로 22. 입구에 들어서자 팻말이 보였다. 우리 교구에는 현재 주교좌성당이 두 곳이나 있지만, 사실 그 두 곳은 교구 설정 당시에는 아직 세워지지 않은 곳이었다. 수원대리구 고등동성당. 이곳이 바로 교구의 첫 주교좌가 있던 자리다.
고등동성당은 처음부터 주교좌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9년 이종철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됐고, 1960년에 400㎡ 규모의 성당을 건립했다. 수원시에 두 번째로 세운 성당이었다. 이어 1963년 교구가 설정되자 당시 수원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라는 이유로 고등동성당이 주교좌로 선정됐다.
- 바오로 6세 교황의 '수원교구 설정 칙서'가 붙어있는 고등동성당 머릿돌.
교구의 첫 주교좌라는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현재 첫 주교좌성당이었던 당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1977년 주교좌를 조원동주교좌성당으로 옮기고 1992년 새 성당을 지으면서 옛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오히려 교구가 그만큼 변화하는 역사 속에 살아왔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성당 입구 왼편에 세워진 머릿돌에서 이 성당이 첫 주교좌성당이었음을 알려주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머릿돌에는 바오로 6세 교황의 칙서 원문과 번역문이 붙어있다.
1963년 10월 7일 당시 바오로 6세 교황은 ‘수원교구 설정 칙서’를 통해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내에 있는 수원시와 부천군, 시흥군, 화성군, 평택군, 광주군, 용인군, 안성군, 이천군, 양평군, 여주군을 포함한 지역을 분리해 한 교구로 설정한다”고 밝혔다.
또 “이 교구의 주교는 자기 주교좌를 수원시에 두고, 또 그 주교좌를 같은 곳에 있는 성 요셉 성당에 두기를 나는 원하며, 따라서 이 성당을 합당한 모든 권리와 특전을 가진 주교좌성당으로 승격시킨다”고 전했다. 고등동성당의 주보성인이 ‘노동자의 모범이신 성 요셉’이기에 칙서는 성당을 ‘성 요셉 성당’이라 불렀다.
이 칙서를 받은 윤공희 신부는 곧바로 로마를 방문, 주교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1일 오후 2시 초대 수원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됐다. 이 성당에서 열린 첫 교구 행사였다.
본당 24개, 공소 200여 개, 교구 사제 28명, 신자 수 4만2648명의 작은 교구. 관할구역 대부분이 농촌지역인 교구가 이 자리에서 첫 발을 내디뎠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8년 1월 1일, 이승훈 기자]
[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고등동성당 (2) 14년간 주교좌였던 건물은 역사 속으로
- 신축 이전 옛 고등동성당.
고등동성당이 첫 주교좌성당이었던 만큼, 교구청 조직도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이뤄졌다. 교구는 성당 옆에 수녀원으로 사용하던 일본식 가옥을 주교관 겸 임시 교구청으로 사용했다.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1963년 12월 27일 교구 사무를 총괄하는 부감목(현 총대리)에 장금구 신부를, 요즘 교구 사무처장과 주교 비서 업무를 하는 상서국장에 손태섭 신부를 임명했다. 주교를 포함한 단 3명이 교구청 조직의 전부인 작은 교구청이었다.
이후 교구의 구체적인 특수사목을 담당할 위원을 임명하고, 교구 행정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규모 있는 교구청사가 필요해졌다. 1967년 10월 20일 화서동에 새 교구청 축복식이 열리기 전까지 이곳은 교구의 교구청으로 기능했다.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옛 주교좌성당과 교구청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사무실을 찾았다. 아쉽게도 신축 이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는 답변뿐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한편에서 옛 성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옛 성당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 모습이 남아있었다. 간결하고 아담한 외관을 지닌 전형적인 바실리카 건축양식 성당이었다. 1층에는 신자석이 2층에는 성가대석이 있었다고 한다. 1, 2층을 합쳐 400㎡에 불과한 성당이었지만, 14년 동안 주교좌로서 교구의 주요행사를 도맡았다.
바로 이곳에서 초대교구장 윤공희 주교가 착좌한 이래로, 8차례 서품식에 걸쳐 30여 명 부제가 사제로 서품됐다. 1971년 김영근 신부, 1975년 강주희 신부, 1976년 정원진 신부의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집전했다. 그리고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주교서품식과 착좌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 현재의 고등동성당.
바오로 6세 교황은 1973년 1월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한공렬 대주교가 선종하자, 윤공희 주교를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교구장은 공석이 됐고, 정덕진 신부가 교구장 직무대리를 하며 새 교구장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1년 후인 1974년 11월 21일 이곳에서 열린 주교서품식에서 김남수 주교가 서품됐고,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김 주교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풍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등동성당은 아주 작아 한 500명밖에 수용하지 못했다. 그때 온 사람이 사제단 200명에 평신도가 2000명도 넘었으니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입구에 서 있거나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서품을 받는데 분심이 들었다. 성인호칭 기도할 때 엎드려 ‘주교좌성당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 좀 더 큰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으니, 나는 엎드려서 성당 한 채를 다 지었다.”
그때 김 주교가 ‘엎드려서 지은 성당’이 실제로 완공된 것은 1977년이다. 고등동성당은 14년간 주교좌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준주교좌 성당이 됐다. 이후 본당 신자가 4000여 명이 넘어서면서 이용에 불편이 커지자 1988년 지금의 성당을 준공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8년 1월 7일,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