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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인류
코로나 팬데믹이 지구촌을 강타한 초기, 모든 만남과 교육이 ‘줌’(Zoom)으로 이루어지는 게 그리 낯설 수 없었다. 디지털 공간에 둥둥 떠있는 얼굴들, 와이파이가 터지는 카페에서 수업을 듣느라 마스크로 중무장한 모습들, 남에게 보여줄 상태가 아니라며 카메라를 꺼놓는 바람에 새까만 공백으로 남은 화면에서 사람의 향기를 맡기란 어려웠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아니 걸렸더라도 용케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나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지며리 3년을 버텼다. 성적순으로 야박하게 자르지 않고(상대평가) 넉넉하게 학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게(절대평가) ‘코로나 대학생’들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지난 봄 학기에 다시 캠퍼스를 밟았다. 꼬박 3년 만에 강의실에서 대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마스크 벗고 웃으며 만나자고 눈물겹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한데 ‘대면 수업’으로 다시 만난 대학생들 얼굴이 이상했다. 디지털화된 얼굴이 아닌데도, 피와 살이 도는 진짜 사람의 얼굴인데도 어딘가 어색했다. 젊기는 하지만 생기가 없고, 예의는 차리지만 감정이 소거된 이 얼굴의 정체는 무엇인가?
강의실을 빼곡 채운 대학생들 앞에서 오십 중반의 선생이 혼자 개그 콘서트를 하는데도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두 시간 혹은 세 시간을 한자리에 앉혀두기가 고역이었다. 또래끼리는 잘 통하지 않을까? 별로였다. 모둠을 짜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 과제를 수행해보라고 격려해도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난생처음 선생질에 한계를 느꼈다. 변종 인류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하는 사이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복학생 중 하나가 ‘너무 애쓰지 말라’고 응원하는 말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해외 토픽에서 중국의 청년 실업률이 코로나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높아졌다는 뉴스를 보았다. 학점이 전부 A인데 뭐가 문제인가? 기술적 역량 면에서 어느 세대보다 탁월한 스펙을 갖춘 청년들이 왜 일자리가 없는가?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기업 쪽에서 ‘코로나 학번들’을 외면한다는 진단이 인상적이었다. 학점과 스펙만 좋으면 무슨 소용인가? 조직 생활의 기본인 소통과 협력이 젬병인데!
코로나 펜데믹이 엔데믹이 되었다. 인류는 변종 바이러스를 ‘완전 정복’하지 못했다. 코로나는 풍토병으로 굳어져 한동안 우리 곁에 맴돌 예정이다. 전염병과 문명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쓴 시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페스트가 중세와 근대를 갈랐다. 지금은 ‘위드 코로나’(with‐Corona) 시대다. 지구 문명을 ‘일시 정지’시킨 코로나를 기점으로 새로운 문명이 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인류가 길을 잃었다. 과거에는 지능이 높으면 똑똑한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통해 배움을 얻으려고 줄을 섰다. 기술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견고하던 세상이 붕괴했다. 인간지능(HI)이 인공지능(AI)에 턱없이 못 미친다. 지식은 스마트폰 검색으로 충분하고, 기술은 로봇공학으로 대체되었다. 디지털 세상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사이, 실제 세상은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개인의 자유가 증폭된 듯 보여도, 실상은 모두 알고리즘의 노예로 전락했다.
개인의 탄생
인간 존재의 위축! 이 증후가 언제 나타났더라? 다시 근대로 눈길을 돌린다. 전염병과 르네상스, 그리고 종교개혁과 자본주의가 발흥한 시기다. 르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건 그의 유명한 ‘코기토’ 명제 때문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나’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등장이 새 시대를 낳았다. 중세 때는 생각의 주체가 ‘나’일 수 없었다. ‘나’들은 그저 교황의 ‘무오’한(오류가 없는) 생각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감히 스스로 생각해서 교권에 반기를 들면 죽음이었다. 그런 시대에 종언을 고한 게 ‘코기토’다. 근대의 시작은 ‘개인’의 발견과 짝을 이룬다.
집단이 개인을 압도했던 중세 사회와 달리 근대사회는 개인이 집단의 요구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바를 자기 삶에 구현해나가는 ‘주체’로 우뚝 서게 되었다. 사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개인이다. 유전자가 거의 같은 일란성쌍둥이끼리도 고유한 개성을 뽐내는 게 인간이다. 창조성이 왕성할수록 개성화도 뚜렷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움을 향한 예술가의 집념을 떠올려보라. 예술이 활짝 꽃피려면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는 개인이 자기의 고유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최근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변화로 지목되는 개인주의는 부정적인 측면만 내포하지 않는다. 굴곡 많은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근대스러운 개인이 탄생한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이 땅의 근대는 일본 제국주의 물결에 떠밀려 시작되었다. 제국주의는 전체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마련이므로, 그 안에서 개인이 자기 삶의 고유한 무늬와 결을 주장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의 소환에 불응하는 개인이란 있을 수조차 없었다.
해방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전체주의가 청산된 건 아니었다. 독재 정권은 국가 건설이라는 깃발 아래 아무 때고 개인을 징발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눈을 부라리며 끊임없이 개인을 약탈했다.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한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머릿속에 똑같은 욕망을 욱여넣도록 강제했다. 그런 집단주의 폭력이 형식적으로나마 제어된 건 ‘87년 체제’ 이후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 토양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민주주의는 쉽게 말해 인민이 주인이라는 의식이다. 이 의식이 생겨나려면 ‘국가’(國家)에서 ‘가’(家)를 떼어내야 한다. ‘가’가 붙어있는 한, 다시 말해 나라님이 아버지로 군림하는 한, 자녀인 백성이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 잘못을 야단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는 호주제 폐지와 함께 시나브로 시작되었다는 게 나의 개인적 관찰이다.
한데 일상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가’의 권력은 여전히 철옹성이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영화 대사가 아직도 오르내리는 게 그 방증이다.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의 흥행 뒤에는 사회의 모든 단위마다 안개처럼 스며있는 가족주의, 그것도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가족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을 펼치면 ‘82년생 김지영’의 분열적 자아가 아프게 출몰한다. 페미니즘의 수혜를 입고 차별 없이 교육받아 취업에 ‘성공’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고스란히 포획된 주인공이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어느 추석,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집에서 집안일을 하던 그녀는 갑자기 친정어머니로 빙의되어 시부모에게 항의한다.
사돈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저희 집 삼 남매도 명절 아니면 다 같이 얼굴 볼 시간 없어요. 요즘 젊은 애들 사는 게 다 그렇죠.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야죠. (18쪽)
이 소설 출간이 우리 사회에 대두한 비혼주의자의 증가와 때를 같이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즈음,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1인 가구가 2인 이상 가구를 추월한 사실은 짚어봐야 할 기현상이다.1) 개발독재 시대에 산업화·도시화에 발맞춰 확대가족이 줄고 핵가족이 늘어났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저출생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자녀 없이 부부끼리만 사는 경우도 흔히 보았다. 그러나 ‘나 홀로’ 사는 사람들이 모둠살이를 하는 사람들보다 두드러지게 많아진 현상은 최근에야 생겨난 이례적인 풍경이다.
초개인의 등장
혼밥족, 혼술족 유행에 힘입어 〈혼술남녀〉(tvN)라는 드라마가 나온 게 2016년의 일이다. 2013년에 나온 〈나 혼자 산다〉(MBC)는 해마다 방송연예대상을 휩쓸면서 지금까지 장수 예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민주화 이후 세대, 특히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세대에게 개인주의는 대체 불가 유일무이한 선택지로 보인다. 그럼에도 마냥 긍정의 눈으로만 바라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근대스러운 개인이 아무리 ‘우리’가 아닌 ‘나’의 정체성을 지상 과제로 삼는 자율 주체라고 해도, 그 바탕에는 어디까지나 타자와 연대할 필요가 깔려있었다. 이는 근대사회의 토대를 이룬 자본주의 이론의 대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 《도덕감정론》(1759)에 기초해있다는 사실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연관성을 통렬히 관찰한 토대 위에서, ‘나의 이기스러운 마음’을 충족하려면 ‘남의 이기스러운 마음’도 고려해야 한다는 호혜성과 정의의 감각을 시장의 원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오늘의 자본주의는 기어이 선을 넘고야 말았다. 이 고삐 풀린 괴물을 제어할 기구나 도구가 지구 위에는 없다. 지구 전체를 무한 경쟁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개인을 ‘자기 경영’ 주체가 되도록 압박하여 끊임없이 착취하게끔 채찍질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는 후기 근대의 특징으로서, 개인을 지탱하던 견고한 토대들을 녹여버리는 ‘액체성’을 본질로 한다.
이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강, 2009)의 돌연변이가 개인주의의 ‘인플레이션’ 현상이다. 말하자면 ‘초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가 탄생했다. 자율적 선택을 신봉하면서 간섭은 죽어라 싫어한다. 스스로 책임을 지기도 버겁다. 아날로그식 관계가 불편해 최대한 자급자족을 추구한다. 키오스크, 배달 음식, 온갖 상품의 정기 구독, 각종 홈 뷰티와 홈 트레이닝 상품들은 독립성을 최고로 삼는 초개인주의의 산물이다.
이렇게 발 빠르게 구비된 물적 토대 위에 코로나가 강림했다. ‘각자도생’이 체질화되었다. 각자 집안에 유폐된 채로 모든 연결을 디지털화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될세라 ‘비대면’ 접촉이 활발해지고 ‘문고리’ 거래가 성행했다. 굳이 상대방 얼굴을 보지 않고도 개인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침 튀기는 말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손가락 터치로 모든 걸 해결했다. 감정 소비가 줄었다. 깔끔한 세상이 열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편리한 만큼 삭막해진 느낌이다. 인간 본성에서 뭔가 빠져나간 기분이랄까?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0과 1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언어 이면의 뉘앙스로 행간의 숨은 뜻을 간파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한 가지 사건에 오만 가지 생각을 잇댄다. 이랬다저랬다, 감정이 널을 뛰고, 좋았다 나빴다,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이 모순이 인간의 신비다. 그리고 신비는 신의 언어다.
코로나 이후 등장한 인공지능계의 스타 ‘ChatGPT’는 확실히 신기하다. 하지만 별처럼 신비롭지는 않다. 신의 손으로 빚어진 게 아니라 사람의 코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데도 기술이 주도하는 문명에 몸을 푹 담은 우리는 신기한 것들에만 경탄할 뿐, 신비한 것들에는 오히려 무덤덤하다. 삶에서 신비가 거세된 세상, 세속주의에 잠식된 오늘이다.
그럴수록 종교가 쇠퇴할 거라고 누가 말했나? 아니다. 근대 이후, 그러니까 신을 몰아낸 자리에 이성이 들어앉은 이래, 주춤하던 종교가 다시 돌아왔다. 인간은 어쨌거나 ‘뜻’을 추구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랍비 조너선 색스가 꼬집은 대로, 의미 없이 사는 게 인간에게는 너무 어렵다(《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한국기독교연구소, 2022, 32쪽 참고). 종교가 아니라면 종교 비슷한 거라도 의미를 채워주어야 한다. 민족주의든 인종주의든 뭐든.
다시 돌아온 종교는 … 부드럽고 조용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종교간 일치를 추구하는 종교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종교 형태로서, 주님의 원수들과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타락한 시대를 끝장내고 하나님, 진리, 신의 뜻에 대한 순종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묵시종말 시대를 가져올 준비가 된 종교 형태다. (위의 책, 32쪽)
초개인주의 시대에 ‘급진적이며 정치화된 종교’가 성황을 이룬다는 분석에 소름이 돋는다. 한국 사회, 특히 대학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에 푸르른 지성인들이 휙휙 넘어간다. 액체 근대의 반작용이다. 삶의 모호한 액체성을 견디려면 종교라도 확실한 답을 주어야 한다. 흑 아니면 백, 선 아니면 악, 아군 아니면 적,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말해줘야지 애매하게 얼버무리면 불안만 가중된다. 자기 계발과 자기 경영에 지친 심령들에게 종교까지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된다. 문자주의에 함몰되면 진리에 다가가기 힘들다는 말은 문자로만 소통하는 세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거기에 안주하면 세상이 지옥이 된다는 게 문제다. 힘들더라도 회색 지대의 불안을 견뎌야 한다. 손가락을 몇 번 두드리면 0.5초 이내로 답이 주어지는 걸 알지만, 그 정보가 온전한 지식일 수 없다는 겸손함도 탑재해야 한다. 결국은 태도가 관건이다. 지식과 기술 면에서는 인간이 기계를 따라갈 수 없더라도, 인간이 기계를 대하고 동료 인간을 대하며 자연 만물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겨져있다.
태도는 관계적 용어다. 혼자 있을 때야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타자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타자와 만날 때면 어떤 식으로든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쓴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가짐이 태도로 나타난다. 한때 유행했던, 지금도 간혹 언론에 등장하는 ‘갑질 문화’ 역시 태도에 관한 것이다.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기대된다. 설령 그가 누리는 부와 권력이 세습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한 성취라도, 그의 태도에서 검박함이 묻어나오면 칭송받는다. 한데 ‘위’에 있다고 자기보다 조금 아래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 봉건영주처럼 군림하여 ‘갑질’을 한다. 그러면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그에게 가차 없이 ‘비인간’ 꼬리표를 다는 게 우리네 정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는 마르틴 부버의 명제를 되풀이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홀로 자족하는 분이셨다면, 세상을 손수 지으셨을 리 없다. 당신의 작품이 태어날 때마다 “보기 좋다”고 탄성을 지를 리 없다.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가 일곱 차례나 반복된다. 얼마나 만족스러우셨으면! 다만 딱 한 가지 좋지 않은 점이 발견되었다. 바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창세기 2:18)이다. 그래서 함께 삶을 일구어나갈 짝을 지어주셨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관계적인 만큼, 하나님을 닮은 사람 역시 관계적이어야 했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어졌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든 동산에서 여러 동물, 식물을 돌보는 정원사로 살도록 위임받았다.
그러니까 사생활 중심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 초개인주의는 사적 관심이 공적 관심을 다 잡아먹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 곧 자아 중독은 극단의 이기주의를 동반한다. 개인에게서 공공성 혹은 공동선에 관한 관심을 박탈하여 ‘탈시민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내가 하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나만 좋으면 되지 누가 왈가왈부하냐, 그런 마음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방종이다.
이제야 나는 근대의 새벽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어째서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이 죄라고 예언했는지 조금 알겠다. 나아가 “믿음이란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47쪽)라는 문장에 ‘엄지 척’을 표시한다. 타자를 소거하라는, 자기 일신의 안전과 안녕만 챙기라는 시대적 명령에 단호히 ‘아니오’를 선언하는 게 믿음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건 사랑밖에 없다. 사랑은 불안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모험의 다른 이름이다.
이집트 제국의 통치는 말 그대로 ‘갑질’이었다. 히브리인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해 최대한 기력이 방전되도록 쥐어짰다. 보람이라곤 전혀 없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일쑤였다. 온갖 고된 일로 괴롭혀 살맛이 나지 않게 고문했다. 그러면 사랑할 힘이 사라질 줄 알았다. 감정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노동 기계가 될 줄 알았다.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느라 식인종처럼 서로를 잡아먹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제국의 경영자들, 관리자들, 감시자들은 그렇게 짓밟힌 풀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생명의 씨앗을 퍼뜨릴 수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 안에 불멸의 사랑이 새겨있는 걸 보지 못했다.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출애굽기 1:12a).”
사랑할 때 우리는 기꺼이 변화의 길에 들어선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난다. 관계는 정성을 먹고 자란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관계의 밀도가 깊어진다.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분의 마음에 접속해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어진다. 출애굽은 그 사랑 이야기다. 제국의 질서에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르는 게 행복이 아니다. 제국이 주조한 욕망의 덩어리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사랑하는 게 기쁨이다. 우리 신앙도 출애굽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사랑으로 수놓는다. 낯선 타자를 향해 자기 존재를 개방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몸을 던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도전이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
우선은 사랑할 것. 계산은 잠시 미뤄둘 것. 머리보다 가슴에 귀 기울일 것. 가슴이 뛰는 일에 미친 척 달려들 것.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과 미친 척 연애할 것. 사랑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고요히 지켜볼 것. 그렇게 크고 넓고 깊은 바다로 나아갈 것. 급기야 물방울과 바다가 둘이 아님을 깨달을 것.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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