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려는 마음(딤전 5:17(c))
하교시간에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한 무리가 소란을 피우며 우 몰려와 마을버스를 탄다. 버스기사는 출발시간이 지체되자 아이들에게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타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을 한다. 몇몇 여학생이 버스에 올라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버스기사에게 들으라는 듯이 입에 올리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심한 욕지거리를 해댄다.
막말하는 사람들 많아
언뜻 보기에도 버스기사는 여학생들에게 아버지뻘이나 될 것 같은데. 차안에 있는 어른들 가운데 누구도 나서지 않고, 심지어 버스기사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너무나 분이 난다는 표시로 차를 험하게 출발시킨다. 이제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존경상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회적인 큰 문제들 가운데 선두에 속하는 문제이다. 존경이란 꼭 윗사람에게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윗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온 노인들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 된다.
자기의 분야에서, 그것이 특수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최선을 다하여 전문가가 된 사람은 정말로 존경스럽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학문이나 예체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교사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에게라도 그렇게 큰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덧 시간은 흘러 심지어 목사까지 존경하지 않는 때가 되었다. 목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사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 신앙과 인격과 생활에서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느새 신자들마저도 존경을 상실한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자들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상대화의 정신에 오염되었다. 사도 바울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존경을 상실한 시대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로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말속에는 사람들이 장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존경의 조건은 대상에도 관련되지만 주체에도 관련된다.
존경받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존경하려고 해도 그 대상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존경할 수 없듯이, 아무리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도 존경하지 않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그래서 존경의 대상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듯이, 존경의 주체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존경하려는 마음, 존경을 표현하려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오래 전 정암 박윤선 박사는 신학교에서 때때로 새파랗게 젊은 목사들이 설교를 해도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받아 적으면서 아멘을 연발하곤 했다. 목사들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며 정암이 무식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설교하는 목사는 무조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며, 목사의 설교는 무조건 존경받을만한 것이다!
정암이 설교학 시간에 우리의 습작 설교에 보여준 예리한 비판은 아직도 가슴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그렇게 난도질하는 정암의 설교비판 앞에 머리를 숙인 까닭은 그가 설교자에 대하여 평소에 보여준 진심 어린 존경 때문이었다.
존경스런 모습 남긴 ‘정암’
그렇다. 비판은 나중이고 존경이 먼저다. 존경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을 표현할 자격이 없다. 존경이 빠진 비판은 악마적인 것이다. 존경을 상실한 상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씩 수치가 증가하는 매연에 오염되듯이 시대정신에 오염되어 존경하려는 마음을 점점 뒤로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을 앞에 점점 두고 있다.
소의 입(딤전 5:18)
터부(taboo)는 교회에도 있다. 요즘 들어 교회에는 말해서 안 될 금기사항들이 더 많이 늘어나는 듯이 보인다. 어떤 교인에게 그의 자녀들이 학교생활이나 결혼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다. 어떤 여신자에게 그녀의 남편이 사회생활에서 성도로서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더욱 큰 실례이다.
금기사항들 늘어나는 추세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지, 기도생활을 잘하는지, 신자의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삶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자들의 세계에 숨기고 감추는 것이 더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점점 더 부담스럽게 여겨진다.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 가운데 가장 큰 것 하나는 목회자의 생활비에 관한 것이리라. 사실 이것은 터부 중의 터부이다. 목회자의 생활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신자는 흔하지 않다. 게다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신자는 겨우 손꼽을 정도이다. 목회자의 경제생활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때때로 성도들은 목회자가 알아서 잘 살겠거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먹고 마시는 것을 어련히 책임져주시지 않겠냐는 막연한 확신이 신자들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는 애써 이런 문제를 자신의 관심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놀랍게도 신자들 가운데는 목회자의 경제적인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치 무슨 불경죄라도 짓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목회자의 생활비는 반드시 꺼내놔야 할 화제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가 물질에 대한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회자의 생활비에 너무 무심한 것도 문제이지만 목회자가 자신의 생활비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이것이 목회자의 품위를 결정한다. 우리는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적인 분수를 넘어섬으로써 그 동안 쌓아온 인격과 권위와 존경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욕심은 목회자가 일생동안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목회자의 생활비는 누구나 말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가 끄집어내야 할 주제이다. 경제적인 결핍상태 때문에 제대로 목회하기 어려운 목회자로부터 심지어는 삶을 영위하기조차 힘든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담임목회자에서 부교역자로 눈을 돌리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사실 이것은 교회의 규모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데는 목회자의 생활비에 대한 신자들의 무관심이 큰 몫을 차지한다. 게다가 요즘 신자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비희생적이어서 목회자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챙기려고 할 뿐 물질로 참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목회자가 좀 더 적은 생활비로 살면 살수록 더욱 경건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신자들의 신앙성숙도 문제인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쉬쉬하며 감추기보다는 솔직하게 양성화시켰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목회자를 존경한다면 물질로 그 존경심을 표시하라는 것이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안 되듯이,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목회자가 목회하기에 충분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은 물질에 마음을 뺏긴 염치없는 사람이었는가? 그러면 똑같은 말을 하시며(마 10:10), 더 분명하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목회자 생활 지지는 교회의 몫
자기를 위해 물질에 욕심을 내는 목회자도 문제이거니와 목회자에 대하여 물질에 야박한 교회도 문제이다. 목회자만 먹여 살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목회자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는 목회자의 입이 소의 입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