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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계열전을 올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를 사기 열전에 올리는 태사공의 기가 막힌 역사관이다. 아무리 우습고 인생 삶에 있어 열외라고 우리가 즉 딴따라라고 부르는 이들들 열전의 항열에 올렸다는 인식에서 그 위대함을 느낀다. 하긴 공자를 세가로 편성했으며 반란의 주역인 진섭 또한 세가에 올리는 공의 Sense? 이것이 진정한 역사관의 보편타당성이라 생각하면서 이 글들을 읽고 부담 없이 즐기는 뜻이 있다. 천이 세상에 태어나서 국형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Nonsense가 있다. 피
순우곤[淳于髡]: (풍자와 유머의 대명사 순우곤)
淳於髡者, 斉之贅婿也. 長不満七尺, 滑稽多辯, 數使諸侯, 未嘗屈辱. 斉威王之時喜隠, 好為淫樂長夜之飲, 沈湎不治, 委政卿大夫. 百官荒亂, 諸侯並侵, 國且危亡, 在於旦暮, 左右莫敢諫.
순우곤자 제지췌서야 장불만칠척 활계다변 수사제후 미상굴욕 제위왕지시희은호위음악장야지음 침면불치 위정경대부 백관황란 제후병침 국차위만 재어단모 좌우막감간
순우곤(淳于髡)은 제(齊)의 데릴사위였다. 키는 7척이 되지 못했으나, 익살스럽고 변설에 능해 여러 번 제후에게 사신으로 나갔으나 굽히거나 욕되게 행동하지 않았다. 제 위왕(威王) 때 왕은 수수께끼를 좋아했으며, 음탕하게 놀면서 밤새워 술 마시기를 즐겼다. 술에 빠져서 정사를 경대부에게 맡겼다. 백관들이 문란해서 질서가 없어지고, 제후들이 잇따라 침입하여 나라의 위기와 멸망이 아침 저녁에 달려 있었으나 측근들은 감히 직간하지 못했다.
淳於髡説之以隠曰:「國中有大鳥, 止王之庭, 三年不蜚又不鳴, 不知此鳥何也?」王曰:「此鳥不飛則已, 一飛沖天;不鳴則已, 一鳴驚人.」於是乃朝諸県令長七十二人, 賞一人, 誅一人, 奮兵而出. 諸侯振驚, 皆還斉侵地. 威行三十六年. 語在田完世家中.
순우곤설지이은왈: 국중유대조 지왕지성 삼년불비우불명 부지차조하야? 왕왈: 차조불비즉이 이비충천 불명즉이 일명경인 어시 내조제현령장칠십이인 상일인 주일일 분병이출 제후진경 개환제침지 위행삼십육년 어재전완세가중
순우곤이 수수께끼를 빗대어 “나라 안에 큰 새가 있어 왕의 뜰에 머무르고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가 어떤 새인지 모르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이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르며, 울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현의 우두머리 72명을 조정으로 불러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한 사람은 죽인 다음 분연히 출병하니 제후들이 놀라서 침략한 제의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그 위세가 36년 동안 떨쳤는데, 이 일은「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威王八年, 楚大発兵加斉. 斉王使淳於髡之趙請救兵, 齎金百斤, 車馬十駟. 淳於髡仰天大笑, 冠纓索絶. 王曰:「先生少之乎?」髡曰:「何敢!」王曰:「笑豈有説乎?」髡曰:
위왕팔년 초대발병가제 제왕사순우곤지조청구병 재금백근 거마십사 운어곤앙천대소 관영색절 왕왈: 선생소지호? 곤왈: 하감! 왕왈: 소기유세호? 곤왈:
위왕 8년, 초(楚)가 크게 군대를 동원해 제를 침입했다. 위왕이 순우곤에게 조(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했는데, 황금 1백 근과 마차 10대를 예물로 가지고 가게 했다.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르며 크게 웃자 관의 끈이 모두 떨어졌다. 왕이 “선생은 이것을 적다고 생각하오”라고 하자 곤은 “어찌 감이요!”라고 했다. 왕이 “웃은 데는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라고 하자 곤이 이렇게 말했다.
「今者臣従東方來, 見道傍有禳田者, 操一豚蹄, 酒一盂, 祝曰:『甌窶満篝, 汚邪満車, 五穀蕃熟, 穣穣満家.』臣見其所持者狹而所欲者奢, 故笑之.」於是斉威王乃益齎黃金千溢, 白璧十雙, 車馬百駟. 髡辭而行, 至趙. 趙王與之精兵十萬, 革車千乗. 楚聞之, 夜引兵而去.
금자신종동방래 견도방유양전자 조일돈제 주일우 축왈 구루만구 오야만거 오곡번숙 양양만가 신견기소지자협이소욕자사 고소지 시어제왕내익재황금천일 백벽십쌍 거마백사 곤사이행 지조 조왕여지정병십만 혁거천승 초문지 야인병이거
“어제 신이 동쪽에서 오다가 길가에서 풍작을 비는 자를 보았습니다.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을 손에 잡고 빌기를 ‘높은 밭에서는 그릇에 가득,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오곡이여 풍성하게 우리 집에 넘쳐라’라고 하더군요. 손에 쥔 것은 그렇게 보잘 것 없으면서 원하는 바는 그렇게 사치스러워 신이 웃은 것입니다.” 이에 제 위왕은 황금 천 일(千溢), 백벽(白璧) 열 쌍, 거마(車馬) 1백대로 예물을 늘려주었다. 곤이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 조에 이르렀다. 조왕이 정예 병사 10만 명과 혁거(革車) 천 승(千乘)을 주었다. 초가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威王大説, 置酒後宮, 召髡賜之酒. 問曰:「先生能飲幾何而酔?」対曰:「臣飲一鬥亦酔, 一石亦酔.」威王曰:「先生飲一鬥而酔, 悪能飲一石哉! 其説可得聞乎?」髡曰:
위왕대열 치주후궁 소곤사지주 문왈: 선앵능음기하이취? 대왈: 신음이투역취 일석역취 위왕왈: 선생음일투이취 오능음이석채 기열가득문호? 곤왈:
위왕이 크게 기뻐 후궁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곤을 불러서 술을 내리면서 “선생은 얼마나 마셔야 취하오”라고 물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위왕이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오?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곤은 이렇게 말했다.
「賜酒大王之前, 執法在傍, 禦史在後, 髡恐懼俯伏而飲, 不過一鬥徑酔矣. 若親有厳客, 髡帣韝鞠■, 待酒於前, 時賜餘瀝, 奉觴上壽, 數起, 飲不過二鬥徑酔矣.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리시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곁에 있고 어사(御史)가 뒤에 있어서 곤이 두려워 엎드려서 마시게 되니 한 말을 넘지 않아 곧 취합니다.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계셔 곤이 옷깃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서 앞에다 모시고 술을 대접하면서 때로는 나머지 술을 받고 술잔을 받들어 손님의 장수를 비느라 자주 몸을 일으키게 되면 두 말을 못 마시고 취합니다.
若朋友交遊, 久不相見, 卒然相睹, 歓然道故, 私情相語, 飲可五六鬥徑酔矣. 若乃州閭之會, 男女雑坐, 行酒稽留, 六博投壷, 相引為曹, 握手無罰, 目眙不禁, 前有墮珥, 後有遺簪, 髡竊樂此, 飲可八鬥而酔二參.
사귀던 벗과 오래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만나게 되면 즐거워서 지난날의 일들을 말하고 감회를 토로하니 대여섯 말은 마십니다. 마을의 모임으로 남녀가 섞여 앉아 서로 술을 돌리고, 장기와 투호를 벌여서 상대를 구하고, 남녀가 손을 잡아도 벌이 없고,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금하지 않고, 앞에서는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서는 비녀가 어지러이 흩어지는 경우라면, 곤이 이런 것을 좋아하니 여덟 말을 마셔도 2-3할 밖에 취기가 돌지 않습니다.
日暮酒闌, 合尊促坐, 男女同席, 履舃交錯, 杯盤狼藉, 堂上燭滅, 主人留髡而送客, 羅襦襟解, 微聞薌沢, 當此之時, 髡心最歓, 能飲一石.
또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파하게 되어 술통을 모으고 자리를 좁혀서 남녀가 동석하고, 신발이 서로 뒤섞이며,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이윽고 주인이 곤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배웅합니다. 그리고 엷은 비단 속 옷의 옷깃이 열리면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이런 경우라면 곤의 마음은 한없이 좋아져서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故曰酒極則亂, 樂極則悲;萬事盡然, 言不可極, 極之而衰.」以諷諫焉. 斉王曰:「善.」乃罷長夜之飲, 以髡為諸侯主客. 宗室置酒, 髡嘗在側.
그래서 ‘술이 극에 이르면 난리가 나고, 쾌락에 극에 이르면 슬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사가 다 그러하니 극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 극에 이르면 쇠해집니다.” (순오곤이) 이런 말로 풍자로 간했다. 제왕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곤을 제후의 주객(主客)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곤이 언제나 왕을 곁에서 모셨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우곤 [淳于髡] (사기 : 열전)
우맹[優孟]
其後百餘年, 楚有優孟.
기후백여년 초유우맹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초(楚)에 우맹(優孟)이 있었다.
優孟者, 故楚之樂人也. 長八尺, 多辯, 常以談笑諷諫. 楚荘王之時, 有所愛馬, 衣以文繍, 置之華屋之下, 席以露床, 啗以棗脯. 馬病肥死, 使群臣喪之, 欲以棺槨大夫禮葬之. 左右爭之, 以為不可. 王下令曰:「有敢以馬諫者, 罪至死.」
우맹자 고초지악인야 장팔척 다변 상이담소풍간 초장왕지시 유소애마 의이문수 치지화옥지하 석이로상 담이조포 마병비사 사군신상지 욕이관곽대부예장지 좌우쟁지 이위불가 왕하영왈: 유감이마간자 죄지사
우맹은 본래 초의 악인(樂人)이었다. 키가 8척에 변설에 능해 언제나 웃긴 이야기로 풍자했다. 초 장왕(莊王) 때 왕이 말을 좋아하여 말에게 무늬 있는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혀 화려한 집에 두고는 장막이 없는 침대 위에서 자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말이 살찌는 병에 걸려서 죽자 신하들에게 장례를 지내게 했는데, 관과 곽을 갖추어 대부(大夫)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라 했다. 좌우 신하들이 이를 다투어 옳지 않다고 했다.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감히 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자는 죽을 죄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優孟聞之, 入殿門. 仰天大哭. 王驚而問其故. 優孟曰:「馬者王之所愛也, 以楚國堂堂之大, 何求不得, 而以大夫禮葬之, 薄! 請以人君禮葬之.」
우맹문지 입전문 앙천대곡 왕경이문기고 우맹왈: 마자왕지소애야 이초국당당지대 하구부득 이이대부예장지 박! 청이인군예장지
우맹이 이 말을 듣고 대궐문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했다. 왕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우맹은 이렇게 말했다. “말은 왕께서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강하고 당당한 초나라가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박합니다. 왕의 예로 장례를 지내길 청합니다.”
王曰:「何如?」対曰:「臣請以彫玉為棺, 文梓為槨, 楩楓予章為題湊, 発甲卒為穿壙, 老弱負土, 斉趙陪位於前, 韓魏翼衛其後, 廟食太牢, 奉以萬戸之邑. 諸侯聞之, 皆知大王賎人而貴馬也.」
왕왈: 하여? 대왈: 신청이조옥위관 문재위곽 편풍여장위제주 발갑졸위천광 노약부토 제조배위어전 한위익위기후 묘식태뢰 봉이만호지읍 제후문지 개지대왕천인이귀마야
왕이 “어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고 우맹은 이렇게 답했다. “신이 청하옵건대 옥을 다듬어 관을 만들고, 무늬 있는 가래나무로 곽을 만들고,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 등으로 횡대를 만드십시오. 군사를 동원해 무덤을 파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져날라 무덤을 쌓고, 제와 조의 대표를 앞에 모시게 하고 한과 위의 대표는 뒤에서 호위하게 하십시오.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로 제사 지내고, 만 호(萬戶)의 읍으로써 받들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제후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대왕이 사람은 천하게 여기고 말은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王曰:「寡人之過一至此乎! 為之柰何?」優孟曰:「請為大王六畜葬之. 以壟灶為槨, 銅歴為棺, 齎以薑棗, 薦以木蘭, 祭以糧稲, 衣以火光, 葬之於人腹腸.」於是王乃使以馬屬太官, 無令天下久聞也.
왕왈: 과인지과일지차호! 위지나하? 우맹왈: 청위대왕육축장지 이농조위곽 동력위관 재이갱조 천이목란 제이양도 의이화광 장지어인복장 어시왕내사이마속태관 무령천하구문야
왕이 “과인의 잘못이 그 정도란 말인가? 이를 어쩌면 되겠는가”라고 하자 우맹이 “청하옵건대 대왕을 위하여 가축의 장례로 치르십시오. 부뚜막으로 곽을 삼고 구리로 만든 가마솥을 관으로 삼으십시오. 생강과 대추를 섞은 뒤 향료를 넣어 쌀로 제사를 지내고, 화광(火光)으로 옷을 입혀서 이를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 지내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왕은 곧 말을 태관(太官)에 넘겨주고 천하 사람이 알지 못하게 했다.
楚相孫叔敖知其賢人也, 善待之. 病且死, 屬其子曰:「我死, 汝必貧困. 若往見優孟, 言我孫叔敖之子也.」居數年, 其子窮困負薪, 逢優孟, 與言曰:「我, 孫叔敖子也. 父且死時, 屬我貧困往見優孟.」
초상손숙오지기현인야 선대지 병차사 속기자왈: 아사 여필빈곤 약왕견우맹 언아손숙오지자야 거수년 기자궁곤부신 봉우맹 여언왈: 아 손숙오자야 부차사시 속아빈곤왕견우맹
초의 재상 손숙오는 우맹이 현인임을 알고는 그를 잘 대해주었다. (손숙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그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너는 틀림없이 빈곤해질 것이다. 우맹에게 가서 만나서는 내가 손숙오의 아들이라고 말해라”고 당부했다. 몇 년 뒤 그 아들은 곤궁해져 장작을 지어 나르다 우맹을 만나 “제가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제가 곤궁해지면 우맹을 찾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優孟曰:「若無遠有所之.」 即為孫叔敖衣冠, 抵掌談語. 歳餘, 像孫叔敖, 楚王及左右不能別也. 荘王置酒, 優孟前為壽. 荘王大驚, 以為孫叔敖複生也, 欲以為相. 優孟曰:「請帰與婦計之, 三日而為相.」
우맹왈: 약우뭔유소지 즉위손숙오의관 지장담어 세여 상손숙오 초왕급좌우 불능별야 장왕치주 우맹전위수 장왕대경 이위손숙오부생야 욕이위상 우맹왈: 청귀여부계지 삼일이위상
우맹은 “너는 멀리 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손숙오의 옷을 입고 관을 쓴 다음 언행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1년 남짓 지나자 손숙오를 닮아가 초왕과 그 좌우들도 가릴 수 없었다. 장왕이 술자리를 마련하자 우맹이 나아가 축수를 올렸다. 장왕은 크게 놀라며 손숙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여겨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우맹은 “돌아가 아내와 상의하고 사흘 뒤 재상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荘王許之. 三日後, 優孟複來. 王曰:「婦言謂何?」孟曰:「婦言慎無為, 楚相不足為也. 如孫叔敖之為楚相, 盡忠為廉以治楚, 楚王得以霸. 今死, 其子無立錐之地, 貧困負薪以自飲食. 必如孫叔敖, 不如自殺.」 因歌曰:
장왕허지 삼일후 우맹부래 왕왈: 부언위하? 맹왈: 부언신무위 초상부족위야 연손숙오지위초상 진충위렴이치초 초왕득이패 금사 기자무립추지지 빈곤부신이자음식 필여손숙오 불여자살 인가왈:
장왕이 허락하자 사흘 뒤 우맹이 다시 왔다. 왕이 “아내가 뭐라고 하던가”라고 하자 우맹은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서 초의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손숙오가 초의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며 청렴하게 초를 다스려 초왕을 패주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손숙오가 죽자 그 아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이 가난하게 장작을 지어 나르며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삽니다. 손숙오처럼 되느니 자살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山居耕田苦 難鎰食, 起而為吏 身貪鄙者餘財, 不顧恥辱 身死家室富.
산거경전고 난이득식 기이위리 신탐비자여재 불고치욕 신사가실부
“산속에 살면서 밭 갈고 고생해도 먹을 것을 얻기 어렵네. 몸을 일으켜서 벼슬아치가 되면
탐욕하고 비루한 자는 재물을 남기고, 치욕을 돌보지 않아 몸이 죽은 뒤에 집이 부유해지네.
又恐受賕枉法 為姦觸大罪, 身死而家滅. 貪吏安可為也!
우공수구왕법 위간촉대죄 신사이가멸 탐리안가위야!
그러나 뇌물을 받고 국법을 어겨 부정을 일삼다 대죄에 저촉되면,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할까 두려워 탐욕스러운 벼슬아치 노릇을 어찌 할 수 있으리!
念為廉吏 奉法守職, 竟死不敢為非 廉吏安可為也!
념위렴리 봉법수직 경사불감위비 염리안가위야!
청렴한 벼슬아치 되어 법을 받들고 직책을 지켜, 죽어도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생각하나 청렴한 벼슬아치인들 어찌할 수 있으리.
楚相孫叔敖持廉至死, 方今妻子窮困負薪而食, 不足為也!」
초상손숙오지렴지사 방금처자궁곤부신이식 부족위야
초 재상 손숙오는 죽을 때까지 청렴을 지켰건만, 지금 처자가 궁해 땔나무를 져서 먹고 사니, 청렴한 벼슬아치도 할 것이 못 되네!”
於是荘王謝優孟, 乃召孫叔敖子, 封之寢丘四百戸, 以奉其祀. 後十世不絶. 此知可以言時矣.
어시장왕사우맹 내소손숙오자 봉지침구사백호 이봉기사 후십세부절 차지가이언시의
이에 장왕은 우맹에게 사과하고,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침구(寢丘)의 땅 400호를 봉해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10세 손이 지나도록 이것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 이는 말할 수 있는 시기를 알았다고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맹 [優孟] (사기 : 열전)
우전[優旃]
其後二百餘年, 秦有優旃.
기후이백여년 진유우전
그 뒤 200여 년, 진(秦)에 우전(優旃)이 있었다.
優旃者, 秦倡侏儒也. 善為笑言, 然合於大道, 秦始皇時, 置酒而天雨, 陛楯者皆沾寒. 優旃見而哀之, 謂之曰:「汝欲休乎?」陛楯者皆曰:「幸甚.」優旃曰:「我即呼汝, 汝疾應曰: 諾.」居有頃, 殿上上壽呼萬歳. 優旃臨檻大呼曰:「陛楯郎!」郎曰:「諾.」優旃曰:「汝雖長, 何益, 幸雨立. 我雖短也, 幸休居.」於是始皇使陛楯者得半相代.
우전자 진창주유야. 선위소언 연합어대도 진시황시 치주이천우 폐순자개점한 우전견이애지 위지왈: 여욕휴호? 폐순자개왈: 행심 우전왈: 아즉호여 여질응왈: 약. 거유경 전상상수호만세 우전임감대호왈: 폐순랑! 낭왈: 약 우전왈: 여수장 하익 행우립 아수단야 행휴거 어시 시황사폐순자득반산대
우전은 진의 난쟁이 연예인이었다. 우스개 소리를 잘했으나, 큰 도리에 맞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주연을 베풀었는데 비가 왔다. 창을 잡고 섬돌 가에 늘어서 있는 군사가 모두 비에 젖어 추워하고 있었다. 우전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너희들이 쉬고 싶지”라고 물었다. 경호 군사들이 모두 “그럴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우전은 “내가 너희들을 부르면 바로 ‘예’라고 대답하도록 해라”라고 했다. 얼마 뒤 어전 위에서 황제의 장수를 비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우전이 난간에 기대 큰소리로 “경호원들아”라고 불렀고, 병사들은 “예”라고 대답했다. 우전이 “너희들이 큰 키에 비를 맞고 있으니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내가 키는 작지만 다행히 편히 쉬고 있다”라고 하자 진시황은 경호하는 군사를 반반씩 교대하며 쉬게 했다.
始皇嘗議欲大苑囿, 東至函谷関, 西至雍、陳倉. 優旃曰:「善. 多縦禽獣於其中, 冦従東方來, 令麋鹿觸之足矣.」始皇以故輟止.
시황상의욕대원유 동지함곡관 서지 옹 진창 우전왈: 선 다종금수어기중 구종동방래 영미록촉지복의 시황이고철지
진시황이 일찍이 원유(苑囿)를 동쪽 함곡관(函谷關)에서 서쪽 옹(雍)과 진창(陳倉)에 이르도록 크게 넓히려 했다. 우전은 “좋습니다. 금수를 그 안에 많이 놓아서 도적이 동쪽에서 오면 고라니와 사슴에게 뿔로 막게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시황은 이 말에 (이 일을) 중시시켰다.
二世立, 又欲漆其城 優旃曰:「善. 主上雖無言, 臣固將請之. 漆城雖於百姓愁費, 然佳哉! 漆城蕩蕩, 冦來不能上. 即欲就之, 易為漆耳, 顧難為蔭室.」於是二世笑之, 以其故止. 居無何, 二世殺死, 優旃帰漢, 數年而卒.
이세립 우욕칠기성 우전왈: 선 주상수무언 신고장청지 칠성수어백성수비 연가재! 칠성탕탕 구래불능상 즉욕취지 이위칠이 고난위음실 어시 이세지 이기고지 거무하 이세살사 우전귀한 수년이졸
이세 황제가 즉위하여 성벽에 옻칠을 하려고 했다. 우전이 “잘 하셨습니다. 주상께서 말씀을 안 하셨어도 신이 정말 청하려 했습니다. 성벽에 옻칠을 하면 백성들이 비용을 근심하게 되겠지만 좋은 일입니다. 옻칠한 성벽이 웅장하게 서 있으면 도적이 와도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한다면 칠을 하기는 쉬우나 음실(陰室)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2세 황제가 웃었고 그 까닭으로 일은 중지되었다. 얼마 안 되어 2세는 살해당했고, 우전은 한(漢)에 귀순했다가 몇 해 뒤에 죽었다.
<사마천의 논평>
太史公曰:淳於髡仰天大笑, 斉威王橫行. 優孟揺頭而歌, 負薪者以封. 優旃臨檻疾呼, 陛楯得以半更. 豈不亦偉哉!
태사공왈: 운우곤앙천대소 제위왕횡행 우맹요두이가 부신자이봉 우전임함질호 폐순득이반경 기불역위재!
태사공 왈: “순우곤(淳于髡)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자 제 위왕이 뜻을 얻게 되었고, 우맹(優孟)이 머리를 흔들며 노래하자 땔나무를 지던 자가 땅을 얻었고, 우전(優旃)이 난간에서 빠르게 부르자 경호하는 군사들이 반반씩 교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저소손의 후대 보충>
褚先生曰:臣幸得以経術為郎, 而好読外家傳語. 竊不遜譲, 複作故事滑稽之語六章, 編之於左. 可以覧観揚意, 以示後世好事者読之, 以遊心駭耳, 以附益上方太史公之三章.
저선생왈: 신행득이경술위랑 이호독외가전어 절불손양 복작고사골계지어육장 편지어좌 가이람관양의 이시후세호사자족지 이유심해이 이부익상방태사공지삼장
저선생(褚先生) 왈: “신은 다행히 경술(經術)로 낭(郎)이 되었으나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즐겨 읽었습니다. 이에 가만히 사양하지 않고 다시 골계(滑稽)에 관한 고사 6장을 지어 아래에 붙입니다. 두루 견문을 넓히고 뜻을 펼쳐 후세 호사가들이 읽게 함으로써 마음과 귀를 편하고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태사공의 3장 뒤에 덧붙입니다.
郭舎人<곽사인>
武帝時有所幸倡郭舎人者, 発言陳辭雖不合大道, 然令人主和説. 武帝少時, 東武侯母常養帝, 帝壯時, 號之曰「大乳母」. 率一月再朝. 朝奏入, 有詔使幸臣馬遊卿以帛五十匹賜乳母, 又奉飲糒飧養乳母.
무제시유소행창곽사인자 발언진사수불합대도 연영인주화열 무제소시 동부후모상양제 제장시 호지왈 대모유 솔일월재호 소주입 유조사행신마유경이백오십필사유모 우봉음비손양유모
무제(武帝) 때 총애를 받은 창(倡, 연예인)으로 곽사인(郭舍人)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는 않았으나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무제가 어렸을 적에 동무후(東武侯)의 어미가 무제를 길렀다. 황제가 장년이 되자 ‘대유모(大乳母)’라 불렀다. 유모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입조했는데, 황제는 조서를 내려 총애하는 신하 마유경(馬游卿)에게 비단 50필을 유모에게 내리고 음식도 준비하여 유모를 보살피게 했다.
乳母上書曰:「某所有公田, 願得仮倩之.」帝曰:「乳母欲得之乎?」以賜乳母. 乳母所言, 未嘗不聴. 有詔得令乳母乗車行馳道中. 當此之時, 公卿大臣皆敬重乳母. 乳母家子孫奴従者橫暴長安中, 當道掣頓人車馬, 奪人衣服.
유모상서왈: 모소유공전 원득가청지 제왈: 유모욕가득지호? 이사유모 유모소언 미상불청 유조득령유모승거치도중 당차지시 공경대신개경중유모 유모가자손노종자횡포장안중 당도제돈인거마 탈인의복
유모가 글을 올려 “어느 곳에 공전(公田)이 있는데 이를 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황제는 “유모가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가”라 하고는 그것을 유모에게 주었다. 황제는 유모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유모가 황제가 다니는 길을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무렵 공경대신들은 모두 유모를 공경하고 존중했다. 유모의 집 자손과 종들은 장안의 거리에서 횡포를 부렸는데, 길에서 다른 사람의 마차를 세우고 옷가지 등을 빼앗았다.
聞於中, 不忍致之法. 有司請徙乳母家室, 処之於邊. 奏可. 乳母當入至前, 面見辭. 乳母先見郭舎人, 為下泣. 舎人曰:「即入見辭去, 疾歩數還顧.」乳母如其言, 謝去, 疾歩數還顧. 郭舎人疾言罵之曰:「咄! 老女子! 何不疾行! 陛下已壯矣, 寧尚須汝乳而活邪? 尚何還顧!」於是人主憐焉悲之, 乃下詔止無徙乳母, 罰謫譖之者
문어중 불인치지법 유사청사유모가실 처지어변 주가 유모당입실전 면견사 유모선견곽사인 위하읍 사인왈: 즉입견사거 질보수환고 유모여기언 사거 질보수환고 곽사인질언매지왈: 돌! 노여자! 하부질행! 폐하이장의 녕상수여유이활야? 상하환고! 어시인주연언비지 내하조지무사유모 벌적참지자
이런 이야기가 궁중에까지 들렸으나 차마 법으로 다스리지 못했다. 관리가 유모의 집을 변방으로 옮기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유모가 궁중으로 들어가 황제와 작별하기 앞서 먼저 곽사인을 만나서는 눈물을 흘렸다. 곽사인은 “들어가 뵙고 작별하고 나오실 때에 빠른 걸음으로 걷되 자주 뒤를 돌아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유모가 그 말대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가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곽사인이 급한 말투로 “쯧쯧, 이 늙은이가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하는가? 폐하께서는 이미 장년이신데, 아직도 당신 젖을 먹고 사실 줄 아는가? 뭘 또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는가”라고 했다. 이에 황제는 불쌍하고 슬픈 마음이 들어 바로 조서를 내려 이 일을 중지시키고 유모를 옮기지 않게 했다. 이를 건의한 자는 벌을 주어 귀양 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전 [優旃] (사기 : 열전)
동방삭[ 東方朔 ]
武帝時, 斉人有東方生名朔, 以好古傳書, 愛経術, 多所博観外家之語. 朔初入長安, 至公車上書, 凡用三千奏牘. 公車令両人共持挙其書, 僅然能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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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때 제(齊) 사람으로 동방생(東方生)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삭(朔)이라 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서적과 경술을 좋아했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두루 많이 보았다. 동방삭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서는 3천 편의 목간을 수레에 실어 올렸다. 이 수레에 실린 목간은 두 사람이 함께 들어야 겨우 옮길 수 있었다.
人主従上方読之, 止, 輒乙其処, 読之二月乃盡. 詔拝以為郎, 常在側侍中. 數召至前談語, 人主未嘗不説也. 時詔賜之食於前. 飯已, 盡懐其餘肉持去, 衣盡汚. 數賜縑帛, 簷掲而去. 徒用所賜銭帛, 取少婦於長安中好女. 率取婦一歳所者即棄去, 更取婦. 所賜銭財盡索之於女子. 人主左右諸郎半呼之「狂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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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상방(上方)에서 이를 읽었는데 사이 사이 붓으로 표시를 해가면서 두 달 만에 겨우 다 읽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낭(郎)으로 삼았다. 동방삭은 황제 곁에 있으면서 자주 불려가 어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황제가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때로는 어전에서 먹을 것을 내렸는데, 먹고 나면 남은 고기를 모두 품속에 넣어 가지고 나가는 통에 옷이 모두 더러워졌다. 비단도 자주 내렸는데 어깨에 둘러메고 나갔다. 하사받은 돈과 비단을 아낌없이 써버렸고, 장안의 젊은 미녀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1년 정도가 지나면 그 여자를 내보내고 다시 맞이했다. 황제가 내린 돈과 재물을 이렇게 모두 여자에게 써버렸다. 황제 좌우의 낭관들 대부분은 그를 미치광이로 불렀다.
人主聞之, 曰:「令朔在事無為是行者, 若等安能及之哉!」 朔任其子為郎, 又為侍謁者, 常持節出使. 朔行殿中, 郎謂之曰:「人皆以先生為狂.」 朔曰:「如朔等, 所謂避世於朝廷閒者也. 古之人, 乃避世於深山中.」時坐席中, 酒酣, 拠地歌曰:「陸沈於俗, 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 何必深山之中, 蒿廬之下.」金馬門者, 宦[者]署門也, 門傍有銅馬, 故謂之曰「金馬門」.
인주문지 왈: 영삭재사무위시행자 약등안능급지재! 삭임기자위랑 우위시알자상지절출사 삭행전중 랑위지왈: 인개이선생위광 삭왈: 여삭등 소위피세어조정한자야 고지인 내피세어심산중 시좌석중 주감 거지가왈: 육침어속 피세금마문 궁전중가이피세전신 하필심산지중 호려지하 금마문자 환(자)서문야 문방유동마 고위지왈 금마문
황제가 이를 듣고는 “삭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행동을 못하게 한다면, 그대들이 어찌 그에게 미칠 수 있겠소?'라 했다. 삭이 그 아들을 천거하여 낭이 되게 한 다음 다시 시알자(侍謁者)가 되게 하니 그는 늘 절(節)을 가지고 사신으로 나갔다. 동방삭이 궁전 안을 걸어가고 있을 때 어떤 낭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라 하자 삭은 “나 같은 사람은 말하자면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일세. 옛 사람들은 깊은 산속에 숨어 세상을 피했지”라고 했다. 때로는 술이 거하게 취하면 두 손을 땅에 짚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속에 젖어, 세상을 금마문(金馬門) 안에서 피한다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을 피해 몸을 온전히 숨길 수 있거늘, 하필 깊은 산 속, 풀잎으로 엮은 집 속이랴!
금마문이란 관정의 문을 말한다. 문 옆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세워져 있으므로 이를 '금마문'이라고 한 것이다.
時會聚宮下博士諸先生與論議, 共難之曰:「蘇秦、張儀一當萬乗之主, 而都卿相之位, 沢及後世. 今子大夫修先王之術, 慕聖人之義, 諷誦詩書百家之言, 不可勝數. 著於竹帛, 自以為海內無雙, 即可謂博聞辯智矣. 然悉力盡忠以事聖帝, 曠日持久, 積數十年, 官不過侍郎, 位不過執戟, 意者尚有遺行邪? 其故何也?」
시회취궁하박사제선생여논의 공난지왈: 소직 장의일당만승지주 이도경상지위 택급후세 금자대부수선왕지술 모성인지의 풍송시서백가지언 불가승수 저어죽면 자이위해내쿠쌍 즉가위박문변지의 연실력진충이사성제 광일지구 적수십년 관불과시랑 위불과집극 의자상유유행야? 기고하야?
언젠가 학궁(學宮)에 모인 박사와 선생들이 서로 토론했는데 모두들 동방삭을 두고 이렇게 비난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만승(萬乘)의 임금을 한번 만나 경상(卿相)의 자리를 얻어 그 은택이 후대에까지 미쳤습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선왕의 도를 닦고 성인의 의리를 사모하여 『시경』, 『서경』 등 백가의 말씀을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외우고 계십니다. 문장은 스스로 세상에 둘도 없다고 자부하고 계십니다. 또 견문이 넓고 사물을 판단하는 데에 밝으며 지혜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성스러운 임금을 섬기면서 수십 년 보냈음에도 벼슬은 시랑(侍郎)에 지나지 않고 지위는 집극(執戟)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컨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東方生曰:「是固非子所能備也. 彼一時也, 此一時也, 豈可同哉! 夫張儀、蘇秦之時, 周室大壊, 諸侯不朝, 力政爭権, 相禽以兵, 並為十二國, 未有雌雄, 得士者彊, 失士者亡, 故説聴行通, 身処尊位, 沢及後世, 子孫長栄.
동방생왈: 시고비자소능비야 피일시야 차일시야 기가동재! 부장의 소진지시 주실대괴 제후부조 역정쟁권 상금이병 병위십이국 비유자웅 득사자강 실사자망 고설청행통 신처존위 택급후세 자손장영.
동방삭 왈: “참으로 그대들이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그 때는 그 때, 지금은 지금이거늘 어찌 같을 수 있겠소! 대저 장의나 소진이 살던 시대는 주(周) 왕실이 크게 무너져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러 오지 않을 때였소. 힘으로 통치하고 권세를 다투면서 군대로 서로를 침탈하여 12개 나라로 합병되었으나 자웅이 정해지지 않았던 때였소. 인재를 얻는 자는 강하졌고, 인재를 잃은 자는 멸망했소. 그래서 그 자들의 말과 계책이 받아들여져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 은택이 후대에 미쳐 자손들이 오래오래 부귀를 누렸던 것이오.
今非然也. 聖帝在上, 徳流天下, 諸侯賓服, 威振四夷, 連四海之外以為席, 安於覆盂, 天下平均, 合為一家, 動発挙事, 猶如運之掌中. 賢與不肖, 何以異哉? 方今以天下之大, 士民之衆, 竭精馳説, 並進輻湊者, 不可勝數. 悉力慕義, 困於衣食, 或失門戸.
금비연야 성제재상 덕류천하 제후빈복 위진사이 연사해지외이위석 안어복우 천하평균 합위일가 발동거사 유여운지장중 현여불초 하이이재? 방금이천하지대 사민지중 갈정치세 병진폭주자 불가승수 실력모의 곤어의식 혹실문호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소. 성스러운 황제께서 위에 계셔 덕이 천하에 흐르고 제후가 복종하며 사방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떨치고 있소. 사해(四海) 밖까지 자리를 틀어 그릇을 엎어놓은 것보다 안정되어 있어 천하가 고루 한집으로 합쳐졌소.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 현명한 것과 못한 것을 무엇으로 구별한단 말인가? 지금 천하는 넓디 넓고 백성들은 많아서 있는 힘을 다해 유세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으려 몰려드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라오. 힘을 다하고 의리를 지켜도 먹고 입는 것에 곤란을 받고 어떤 자는 집까지 잃게 된다오.
使張儀、蘇秦與僕並生於今之世, 曾不能得掌故, 安敢望常侍侍郎乎! 傳曰:『天下無害菑, 雖有聖人, 無所施其才;上下和同, 雖有賢者, 無所立功.』故曰時異則事異. 雖然, 安可以不務修身乎? 詩曰:『鼓鍾於宮, 聲聞於外. 鶴鳴九皐, 聲聞於天.』. 苟能修身, 何患不栄!
사장의 소진여복병생어금지세 증불능득장고 안감망상시시랑호! 전왈: 천하무해치 수유성인 무소시기재 상하화동 수유현자 무소입공 고왈: 시이즉사이 수연 안가이불부수신호? 시왈: 고종어궁 성문어외 학명구고 성문어천 구능수신 하환불영
장의와 소진이 나(僕)와 지금 시대에 태어난다면 손바닥 만한 땅도 얻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감히 상시(常侍)나 시랑(侍郎)을 바라겠소! 전해 오는 말에 ‘천하에 재해가 없다면 비록 성인이라 해도 그 재주를 펼 곳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면 비록 어진 이라 해도 공을 세울 수가 없다’라고 했소. 따라서 시대가 다르면 일도 달라지는 것이오. 그렇다고 수신에 힘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시경』에 ‘종(鍾)을 궁궐에서 울리니 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고,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리는구나’라고 했소. 진실로 몸을 닦을 수 있다면 어찌 영화롭고 부귀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랴!
太公躬行仁義七十二年, 逢文王, 得行其説, 封於斉, 七百歳而不絶. 此士之所以日夜孜孜, 修學行道, 不敢止也. 今世之処士, 時雖不用, 崛然獨立, 塊然獨処, 上観許由, 下察接輿, 策同範蠡, 忠合子胥, 天下和平, 與義相扶, 寡偶少徒, 固其常也. 子何疑於餘哉!」於是諸先生黙然無以應也.
태공궁행인의칠십이년 봉문왕 득행기설 봉어제 칠백세이부절 차사지소이일야자자 수학행도 불감지야. 금세지처사.. 시수불용 굴연독립 괴연독처 상관허유 하찰접여 책동범려 충합자서 처하돠평 과우소도 고기상야 자하의어여재! 어시제선생묵연무이응야
태공(太公)이 몸소 인의를 행해 72세에 문왕(文王)을 만나 그 포부를 행하니 제나라에 봉해져 7백년이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소. 이것이 바로 선비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으며 도를 행하는 것을 감히 멈추지 못하는 까닭이오. 지금의 처사(處士)는 비록 시대에 쓰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뚝 홀로 서고, 위로는 허유(許由)를 보고 아래로는 접여(接輿)를 살피며, 계책은 범려(范蠡)와 같고 충성은 오자서(伍子胥)와 같으나, 천하가 평화스러우니 정의를 지키며 몸을 닦을 분이니 짝이 없고 무리가 적은 것은 애당초 당연한 것이거늘 그대들은 어찌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이에 여러 선생들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建章宮 後閤重櫟 中有物出焉, 其狀似麋. 以聞, 武帝往臨視之. 問左右群臣習事通経術者, 莫能知. 詔東方朔視之. 朔曰:「臣知之, 願賜美酒粱飯大飧臣, 臣乃言.」詔曰:「可.」已又曰:「某所有公田魚池蒲葦數頃, 陛下以賜臣, 臣朔乃言.」詔曰:「可.」於是朔乃肯言, 曰:「所謂騶牙者也. 遠方當來帰義, 而騶牙先見. 其歯前後若一, 斉等無牙, 故謂之騶牙.」其後一歳所, 匈奴混邪王果將十萬衆來降漢. 乃複賜東方生銭財甚多.
건장궁 후각중력 중유물출언 기상사미 이문 무제왕림시지 문좌우군신습사통경술자 막능지 조동방삭시지 삭왈: 신지지 원사미주양반대손신 신내언 조왈: 가 이우왈: 모소유공전어지포위수경 폐하이사신 신삭내언 조왈: 가 어시삭내긍언 왈: 소위추아자야 원방당래귀의 이추아선견 기치전후약일 제등무아 고위지추아 기후일세소 흉노혼야왕과장십만중래항한 내복사동박생전재심다
건장궁(建章宮) 뒤뜰 전각의 난간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고라니와 비슷했다. 무제가 이를 보고는 경험 많고 경술에 밝은 측근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에 동방삭에게 살피게 하니 동방삭은 “신이 알고 있습니다. 신에게 술과 기름진 쌀밥을 내리시어 실컷 먹게 해주시면 신이 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여 조서를 내려 “좋소”고 했다. 이에 음식을 내려 먹게 하자 또 “어느 곳에 공전(公田)과 고기를 기르는 연못과 갈대밭 몇 이랑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이를 주신다면 신 삭이 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여 조서를 내려 “좋다”고 했다. 이에 동방삭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건 추아(騶牙)라는 짐승입니다. 먼 나라 사람이 귀순하여 의리를 받들 때 추아가 먼저 나타납니다. 그 짐승은 이빨의 앞뒤가 하나 같이 가지런하고 어금니가 없습니다. 그래서 추아라 부릅니다”라고 했다. 그 뒤 과연 1년 만에 흉노의 혼야왕(渾邪王)이 10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한에 항복했다. 이에 다시 동방삭에게 많은 돈과 재물을 내려주었다.
至老, 朔且死時, 諫曰:「詩云『営営青蝿, 止於蕃. 愷悌君子, 無信讒言. 讒言罔極, 交亂四國』. 願陛下遠巧佞, 退讒言.」帝曰:「今顧東方朔多善言?」怪之. 居無幾何, 朔果病死. 傳曰:「鳥之將死, 其鳴也哀;人之將死, 其言也善.」此之謂也.
지노 삭차사시 간왈: 시운 영영청승 지어번 개제군자 무신참언 참언강극 교란사국 원폐하원교녕 퇴참언 제왈: 금고동방삭다선언? 괴지 거무기하 삭과병사 전왈: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차지위야
동방삭이 늙어 죽을 무렵 “『시경』에 ‘윙윙 파리가 떼 지어 울타리에 앉네. 화목하고 즐거운 군자여, 참언을 믿지 마소. 참언은 끝이 없어 나라를 어지럽히니’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첨을 멀리하시고, 참소하는 말을 물리치십시오”라고 간했다. 황제는 “동방삭이 요즘 어쩐 일로 착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마 뒤 동방삭이 과연 병으로 죽었다. 옛말에 이르길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라 했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동곽선생<東郭先生>
武帝時, 大將軍衛青者, 衛后娚也, 封為長平侯. 従軍撃匈奴, 至余吾水上而還, 斬首捕虜, 有功來帰, 詔賜金千斤. 將軍出宮門, 斉人東郭先生以方士待詔公車, 當道遮衛將軍車, 拝謁曰:「願白事.」將軍止車前, 東郭先生旁車言曰:「王夫人新得幸於上, 家貧. 今將軍得金千斤, 誠以其半賜王夫人之親, 人主聞之必喜. 此所謂奇策便計也.」
무제시 대장군위청자 위후남야(원문은 위후형야: 衞後兄也) 봉위장평후 종군격흉노 지여오수상이환 참수포로 유공래귀 조사금천근 장군출궁문 제인동곽선생이방사대조공거 당도차위장군거 배알왈: 원백사 장군지거전 동곽선생방거언왈: 왕부인신득행어상 가빈 금장군득금천근 성이기반사왕부인지친 인주문지필희 차소위기책편계야
무제 때 대장군 위청(衛靑)은 위후(衛后)의 오라비(娚)로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그는 군에 나가 흉노를 무찌르고, 여오수(余吾水) 부근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흉노를 베고 포로도 잡는 공을 세웠다. 그가 돌아오니 황제는 조서를 내려 황금 1천 근을 하사했다. 장군이 대궐 문을 나설 때 제나라 사람 동곽(東郭) 선생이 방사(方士)로서 공거(公車)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길 위로 나와 위 장군의 수레를 가로막고는 절하면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장군이 수레를 멈추고 동곽 선생을 앞으로 나오게 했다. 동곽 선생이 수레 곁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왕 부인이 새로이 황제께 총애를 받고 있으나 집이 가난합니다. 지금 장군께서 황금 1천근을 얻으셨으니 그 절반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주시면 황제께서 이를 듣고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발하고 편리한 계책이라는 것입니다.”
衛將軍謝之曰:「先生幸告之以便計, 請奉教.」於是衛將軍乃以五百金為王夫人之親壽. 王夫人以聞武帝. 帝曰:「大將軍不知為此.」問之安所受計策, 対曰:「受之待詔者東郭先生.」詔召東郭先生, 拝以為郡都尉. 東郭先生久待詔公車, 貧困飢寒, 衣敝, 履不完. 行雪中, 履有上無下, 足盡踐地. 道中人笑之, 東郭先生應之曰:「誰能履行雪中, 令人視之, 其上履也, 其履下処乃似人足者乎?」
위장군사지왈: 선생행고지이편계 청봉교 어시위장군내이오백금위왕부인지친수 왕부인이문무제 대자운부지위차 문지안소수계책 대왈 수지대조자동곽선생 조소동곽선생 배이위군도위 동곽선생구지조공거 빈곤기한 의폐 이분완 행설중 리유상무하 족진천지 도중인소지 동곽선생응지왈: 수능이행설중 영인시지 기상이야 기이하처내사인족자호?
위 장군이 사례하며 “선생께서 다행히 편리한 계책을 알려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위 장군은 바로 황금 500근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선물을 했다. 왕부인은 이 일을 무제에게 말했다. 무제는 “대장군은 그렇게 할 줄 모른다”라면서 불러서 누구에게 얻은 계책인지를 물었다. 위청은 “조서를 기다리고 있던 동곽 선생에게서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동곽 선생을 불러 군의 도위(都尉)에 임명했다. 동곽 선생은 오랫동안 공거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빈곤에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으며, 옷은 해지고 신도 온전치 못했다. 눈 속을 가면 신이 위는 있어도 바닥이 없어 발이 땅에 닿았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웃었다. 이에 동곽 선생은 “누가 신을 신고 눈 속을 가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이 위는 신발이고 아래는 사람의 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한단 말인가”
及其拝為二千石, 佩青緺 出宮門, 行謝主人. 故所仁官待詔者, 等比祖道於都門外. 栄幻路, 立名當世. 此所謂衣褐懐寶者也. 當其貧困時, 人莫省視;至其貴也, 乃爭附之. 諺曰:「相馬失之痩, 相士失之貧.」其此之謂邪?
급기배위이천석 패청와 출궁문 행사주인 고소이동관대조자 등비조도어도문외 영화도로 입명당세 차소위의갈회보자야 당기빈곤시 인막성시 지기귀야 내쟁부지 언왈 상마실지수 상사실지빈 기차지위야
그는 2천 석 벼슬에 임명되어 푸른 도장줄을 매고 대궐 문을 나가서 하숙집 주인에게 사례하고 작별을 고했다. 전에 같이 조서를 기다리던 자들이 모여 도성 문 밖에서 조도(祖道)에 제사 지내니, 길 위에 영화로운 이름이 세상에 세워졌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서 보배를 품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빈곤했을 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사람들이 그가 영예와 부귀를 얻자 바로 서로 다투어 달라 붙었다. 속담에 “말[馬]을 감정할 때는 파리함 때문에 실수하고, 선비를 평가할 때는 가난 때문에 실수한다‘고 하더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王夫人病甚, 人主至自往問之曰:「子當為王, 欲安所置之?」対曰:「願居洛陽.」人主曰:「不可. 洛陽有武庫、敖倉, 當関口, 天下咽喉. 自先帝以來, 傳不為置王. 然関東國莫大於斉, 可以為斉王.」王夫人以手撃頭, 呼「幸甚」. 王夫人死, 號曰「斉王太後薨」.
왕부인병심 인주지자왕문지왈: 자당위왕 욕안소치지? 대왈: 원거낙양 인주왈: 불가 낙양유무고 오창 당관구 천하인후 자선제이래 전불위치왕 연관동국막대어제 가이위제왕 왕부인이수격두 호! 행심 왕부인사 호왈 제왕태후훙
왕 부인이 위독했다. 황제가 몸소 가서 문병하며 “그대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다. 어디에 있길 원하는가”라고 하자 “낙양에 있길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그건 안 되오. 낙양에는 무기와 식량 창고가 있고 관문 입구라 천하의 목구멍과 같아 선제 때부터 왕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동 나라들 중 제나라만큼 큰 나라는 없으니 제왕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왕 부인은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 부인이 죽지 “제나라 왕의 태후께서 돌아가셨다”라고 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방삭 [東方朔](사기 : 열전.)
첫댓글 애쓰셨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