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그 향연의 시작
설악이 서서히 물들고 있다. 설악 폭포를 가리고 있는 단풍나무가 분홍빛을 띄우고 물방울들은 떨어진 기온으로 이미 얼어 주위가 하얗다. 아직은 푸른 나무들의 자태가 건너편의 점봉산을 가리고 있지만, 그 색은 점점 퇴색되고 있다. 뿌리와 줄기를 타고 올라온 자양분은 찬바람 때문에 월동 준비를 하고 있다. 자꾸 떨어지는 기온 따라 그 물줄기는 작아지고 나무 끝에 달린 잎부터 영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오색 단풍은 지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고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탄과 감성을 한껏 올려준다. 지난여름의 많은 비와 태풍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기고 있지만 금방 흘러가는 시간 따라 그 고통의 흔적들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다.
“힘을 내라. 가을이다. 사랑한다.” 얼마 전에 94세로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영면한 한원주 씨의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헌신한 요양병원의 내과 의사였다. 그녀도 마지막 가을을 보지 못함을 남은 사람들에게 넘기며 떠나갔다. 그 가을은 이렇듯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색을 오르는 발걸음에 힘을 얻는다. 늙어가면서 따라오는 병을 기다리기보다는 그 시간을 마중하러 설악을 오른다. 해가 갈수록 자꾸 힘에 부치지만, 이곳에 온 것만으로 가슴은 고동친다. 능선은 아직 멀리 있으나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서 생기가 돌았다. 칠십 중반을 넘긴 나훈아 씨의 힘찬 팔다리 근육 영상이 꿈틀거리며 주마등 같이 떠올랐다. 기다리지 말고 도전하는 거다.
대청봉 정상 석에는 산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자주 올라온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 평생에 한 번 올라온 사람도 있겠다. 그들 모두는 동해 앞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운무와 옅은 비 그리고 찬바람으로 둘러싸인 봉우리에서 한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추위에 떨고 있다. 내 차례가 오려면 30분은 족히 걸리겠다.
드디어 사달이 났다. 몇 년 전에 사서 고이 묻혀두었던 저렴한 등산화가 문제를 일으켰다. 밑창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중청으로 내려가는 돌길에 발바닥으로 차가움과 거친 통증이 솟아올랐다. 이런 낭패가 있나. 앞으로 하산길 생각에 차가운 바람에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쭈뼛거리며 감히 등산화를 살 수 있냐고 산장 직원에게 물었으니. 답은 바로 노다. 아이코, 어쩌겠는가. 정년을 맞이한 김 소장을 찾고 퇴직한 직장을 들먹거렸다. 그런데 2년째라는 젊은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제발. 그는 잠시 후 누군가 신었을 등산화 한 켤레를 틈으로 내밀었다. 이런 횡재라니. 얼른 받아 신었다. 270이라고 하였는데 헐렁거리는 발가락을 끈으로 조이고 맞는다고 우겼다. 다시 안도감으로 얼굴이 펴졌다. 물론 계속 머리를 조아리고 설악동에서 반납하겠다고 굽실거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래서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가 보다. 사람과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니 이 어찌 독야청청할까나. 더구나 나 같은 나약한 보통사람은 사람 곁에서 부대끼며 숨을 쉴 수밖에.
다시 물드는 설악의 단풍이 눈으로 들어왔다. 젖은 돌바닥도 문제없으며 가랑비 찬바람도 걱정 없다.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천불동은 저 아래에 있고 정면으로 공룡 능선은 운무에 가려있다. 색색으로 차려입고 느리게 오르고 내리는 산객들의 말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고즈넉하게 한 동 누워 있던 희운각 대피소는 사라지고 온통 공사 중이다. 옛 멋은 어디로 갔을까. 눈으로 덮인 대피소에서 몸을 녹이던 옛 기억을 이제는 현대풍으로 바뀌는 건물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지나간 세월은 추억과 사진으로 남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흘러간 물은 다시 오지 않지만 그 기억은 쓰며 달다. 겁 없는 다람쥐만 사람 사이를 오고 가고 있다.
내려가는 천불동에는 물드는 단풍만큼 산객도 많다. 여러 산악회에서 줄을 서서 내려가고 있다. 완성된 단풍은 아니지만, 비취색 옥담과 우렁찬 폭포 그리고 남성미 한껏 암장미에 취해 그들도 나도 눈과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예부터 이곳을 은자의 산이라고 했다. 금강산이 상악(霜嶽)이라면 이 산은 설악(雪嶽)이라고 했다. 금강산에 서리가 내리면 얼마 후에는 설악산에 눈이 내렸다는 사실로 보아 이 산은 눈(雪)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젊은 산악인들이 이 산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며 오세암도 눈 때문에 슬픈 전설을 갖고 있다. 지금은 눈이 아니라 오색으로 물드는 빛깔의 향연을 만들고 있다. 저 아래 沼에 몸을 풍덩 던지고 싶다. 지금 설악은 알록달록 여인네의 색동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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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눈이리도 왔으면 더욱 큰일이었습니다. 산, 신발을 다시한번 준비하려고 합니다.
좋은데 다녀왔군요.
나는 수리산도 포기했어요.
수리산을 못 본지가 6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기온에 옥체를 보전하시길 빕니다. 개동님!
벌써 향연이 시작되었군요.
부럽습니다.
밑창빠진 등산화라도 신고 오르고 싶은데 이젠 관절이 허락을 안해요.
윤슬님의 그 맑고 고운 싯귀가 천불동 옥담 속에서 들리는 듯 하였지요.
등산화 내민 젊은 직원이 참 착하군요..
덕분에 성공적인 산행 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사진 속 꿈틀대는 트인 바다를 보니 속이 후련해 집니다.
내 고향 바다는 잘 있을까?
빌린 등산화가 아니었다면 내려오기 어려웠습니다. 회장님의 고향 바다는 어디일까 궁금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책상에 앉아서 설악의 단풍과 동해의 거센 파도를 오랜만에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늘 운동 많이 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시는 모습 반갑습니다.
매년 한 번은 가지만 그때마다 힘이 부치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갔다오면 또 내년을 기대하지요. 뵐 시간이 없어서 송구합니다.
오색 단풍은 이제 청춘입니다. 산에서 사람을 만났군요. 가을은 가는데 청춘을 다시 불러봅니다. 사진도 잘 감상했습니다.
코로나가 뜸해지면 보령으로 마실가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되는군요. 별 일 없지요? 신작가님.
@미둔 조순섭 네 ㆍ별 일은 없는데 좁은 지역에서 코로나가 안 끝나네요ㆍ
단풍은 위에서 아래로
꽃들은 아래에서 위로
남쪽도 이제 단풍이 물드는 것이
제법 날씨가 차가워 졌습니다.
사랑으로 살찌는 가을입니다.
네. 가을이 사랑을 안은채 다가옵니다. 이응민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