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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의 기학
장 진 호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실학자이다. 그런데 최한기라는 이름조차도 모르는 이가 많을 정도로, 그는 지금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이라 하면 으레 원효를 꼽는다. 그는 100여 부의 책을 저술하였다. 실로 대단한 저술이다. 그런데 최한기는 이보다 훨씬 많은 1000 권의 책을 지었다. 그 가운데서도 최한기는 ‘기학(氣學)’이라는 학문 체계를 통해서 동서양의 학적 만남을 꾀했고, 이를 통해 조선이 처해 있는 난국을 헤쳐 나갈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했다.
최한기는 1803년 최치현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삭령이다.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등을 사용했다.
최한기 집안은 조선 전기 대학자인 최항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혈손은 아니다. 직계로 보면, 8대조인 최의정이 음직으로 감찰직을 지냈다고는 하나, 증조부 최지숭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문무과는 물론이고 생원진사시에도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다.
최한기 집안이 상층 양반이 된 것은 아들 대에 와서였다. 최한기는 1825년에 생원에 급제하였지만, 벼슬길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의 아들 최병대가 186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시종신이 되었다.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입양되어 있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養家)는 무과 집안으로 부유하였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 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 김천복, 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이 필수다. 벼슬 생활을 하지 않은 최한기가 먹고사는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온갖 책을 사보며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양자로 간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학문을 대표하는 『기학(氣學)』과 『인정(人政)』이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시기에 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책을 사고 학문에만 열정을 쏟다 보니, 끝내는 경제적으로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1860년 이후 최한기 집안은 경제적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1870년 중반에 와서는 귀중한 책과 물건을 전당 잡힐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19세기 조선 사회의 선각자들이었다.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 앞날을 전망한 새로운 지식인들이었으나, 당대에는 그들을 받아들일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최한기는 조선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기학이라는 학문을 제창했다.
최한기의 학문 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맹자가 인간의 본유적(本有的)인 것이라고 규정한 인의예지조차 경험으로 얻게 되는 습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앎이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 경험을 통하여 배워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대표적 저서인 『기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기학은 말 그대로 기에 대한 학문이다. 그런데 이 ‘기(氣)’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기(理氣)를 가리킬 때 쓰는 그런 ‘기’에서 따 왔으나, 기존의 성리학에서 말하는 ‘기’의 개념과는 다르다. ‘기’는 만물을 이루는 기본체로서 언제나 운동하면서 변화하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하였고, 이런 ‘기’에 기반을 둔 것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하였다. 만물을 이루고 항상 운행하고 변화하는 ‘기’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경험하고 관찰한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그러므로 ‘기’의 운행 변화의 원리를 알고, 그에 맞추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기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항상 변하고 있다.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늙어서 죽고, 또 새로 생겨나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또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역시 마찬가지다. 따뜻하다가 추워지기도 하고, 건조하다가 습해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의 문물과 형세도 늘 변한다. 더 나아가 우주의 ‘기’도 항상 변화한다. 인간의 삶은 이와 같은 주위 변화에 맞게 변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도 지키고 주위의 변화에 적응하여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이처럼 최한기는 일찍이 변화에 눈을 돌리고 그것을 강조한 사람이다.
이것은 마치 토인비가 그의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말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그는 도전 받고 거기에 응전한 문명은 살아남고, 도전받지 않고 따뜻한 봄날만 지속된 문명은 다 사라졌다고 하였다. 범람하는 강 유역의 문명은 문명의 꽃을 피웠고, 전혀 범람하지 않고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가졌던 곳의 문명은 쇄락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하여 이우영 한국폴리텍대 이사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변화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가. 고민 끝에 역사에서 두 열쇠를 찾았다. ‘지식’과 ‘통섭(統攝·consilience)’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의미로,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함을 뜻한다.”
고 하였다.
요약컨대, 이들이 말한 핵심은 ‘변화’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혜강 최한기 역시 그 변화란 대전제 위에서 기학의 입론을 구한다.
혜강이 『기학』을 쓰기 시작한 1857년 전후의 시대는 조선 사회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던 때다. 누적된 구질서의 모순과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때맞춰 서구열강들은 기술문명의 이기를 앞세워,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열기를 한창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서학의 유입은 물론, 서구의 자연과학 지식과 기술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각종 발명품들을, 이른바 오랑캐의 산물이라 하여 그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혜강은 일찍부터 청나라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와서 한역한 자연과학 관련 서적들을 접하고, 커다란 충격과 감탄의 염을 품게 되었다. 한말로 말하여, 혜강은 변하지 않는 조선 사회를 크게 걱정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의 자연과학 서적을 접하기 이전에 유교 경전에 대한 깊은 소양을 쌓고 있어서, 일단 그 유교 정신에 바탕하여 이들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고 싶었다. 여기서 구상하고 생각을 담아 정리한 것이 『기학』이다.
그러면 이제 『기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氣)는 만물을 이루고 있는 요소로서 언제나 운행하면서 변화하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기’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험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결국 기의 운행 변화의 원리를 알고 그에 맞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기학이다. 이를테면, 건강을 지키려면 내 몸과 환경의 변화를 잘 관찰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신과 같은 것 즉 경험할 수 없는 학문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학문을 일러 그는 중고지학(中古之學)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기’의 변화에 바탕을 둔 기학이야말로 인간에게 전정 유익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 같은 공리공론의 학이 중고지학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중고지학을 췌마학(揣摩學)과 낭유학(稂莠學)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췌마란 사물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상상하여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세상이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져 있는바, ‘기’는 앞서 말했듯이 만물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이’는 어떤 사물이 사물이도록 하는 원리다. 그런데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갖고 있다는 것으로 불변적인 선(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이’는 경험할 수도 없고 또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최한기는 성리학을 췌마학 곧 거짓된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강은 성리학을, 현실의 변화와 발전을 막는 쓸모없는 학문으로 본 것이다.
그는 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학문으로 낭유학이란 걸 내세웠는데, 낭유란 강아지풀 즉 곡식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되는 잡초란 뜻이다. 이는 인간의 재앙이나 복, 혹은 상서(祥瑞)로움 등을 말하여 참된 삶에 보탬이 되지 않는 학문을 가리킨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을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생명 활동을 하게 해 주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종교 행위는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신을 믿음으로써 자신이 지은 죄에서 벗어나거나, 지옥을 피해 천당에 오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이것 역시 그가 주장한 사물에 대한 경험에 바탕하지 않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즉 기학은 형체가 있는 것에서 출발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같이 경험 속에서 통일된 원리를 찾고, 우리 인간은 경험을 더욱 넓혀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을 가리켜 추측(推測)이라 이름하였다. 어떤 사물에 대한 경험을 쌓아 그 사물의 원리를 미루어서 우주 만물의 원리를 헤아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로 이루어진 사물에 대한 경험과 추측에 의해서 이루어진 학문이 참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론의 선구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한 귀납법과도 유사하다.
‘기’는 우리 몸과 만물을 이루는 재료다. 허공에도 공기가 있는 것처럼 온 세상은 ‘기’로 되어 있다. 우주를 채우고 있는 ‘기’가 뭉쳐져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만물을 만든 것이다. 인간도 이 세상에 없다가 ‘기’가 뭉쳐져서 생겨났고, 마침내는 ‘기’가 흩어져서 없어지는 것이다. 이 ‘기’는 항상 운동하며 변화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우주를 이루는 근원은 하나의 ‘기’뿐이다. 성리학에서는 ‘기’의 운동은 ‘이’가 시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는데, 혜강은 ‘이’라는 것은 ‘기’가 움직이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혜강은 기일원론(氣一元論)자다.
이 ‘기’에 대해서 그는 형질의 기와 운화의 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형질은 형태와 물질이다. 그러므로 형질의 기는 사물을 이루는 물질과 형태로서의 ‘기’다. 이 ‘기’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함에 의해서 구체적 현실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를 그는 운화(運化)라 불렀다.
운화는 활동운화(活動運化)를 줄인 말인데, 생생한 기운이 항상 움직이고 두루 운행하여 크게 변화한다는 뜻이다. 생생한 기운이란 ‘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움직인다’는 것은 앞의 생생한 기운과 연결되어, 생명체가 항상 운동하고 있는 것처럼 ‘기’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차츰 변화한다. 즉 성장하고 늙어 가다가 죽어서 다시 우주의 ‘기’로 돌아간다. 운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러한 운동과 변화를 가리킨다. ‘기’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형질의 기가 형성되고 나면 운화의 기도 그 형질의 기에 따라 변화한다. 사자와 소는 ‘기’의 운화에 의하여 생성되었다. 그러나 그 운화는 형질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었다. 소는 풀을 뜯고 사자는 고기를 먹는다. 이 세상 만물은 ‘기’의 운동 변화로 인해서 각각의 모양과 몸뚱이를 갖는다.
혜강은 이와 같은 ‘기’의 운화를 기준으로 하여 먼저 우주와 인간을 나누었다. 즉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와 인간을 이루고 있는 ‘기’로 나눈 것이다. 우주를 이루는 ‘기’의 운화를 대기운하(大氣運化)라 하고, 사람을 이루는 ‘기’의 운화를 인기운화(人氣運化)라 하였다. 인간을 이루는 ‘기’와 그 외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둘을 대등하게 나눈 것이다.
이 둘을 나눈 기준은 의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곧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고, 기타 만물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도 먹고 싶어 하고 동물도 먹고 싶어 한다는 점은 같은데, 어찌하여 의지를 기준으로 하여 구분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인간은 입으로는 먹고 싶으나 의지로 먹지 않고 억제할 수가 있는데, 동물은 단순히 본능에 의해서만 먹으므로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한기는 인기운화를 통민운화(通民運化)와 일신운화(一身運化)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통민운화는 인간 사회의 운동과 변화를 말하고, 일신운화는 안 개개인의 운동과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운화를 기호로 나타내면 대기운화> 통민운화> 일신운화가 된다.
여기서 혜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작은 것은 큰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개인이 사회의 일원이라면 그 사회의 법도를 따라야 하고, 한 사회가 전체 우주의 일원이라면 그 우주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사회가 우주의 운동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고, 개인 역시 인간 사회와 우주의 운동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은 소가 고기를 먹으려 하고 사자가 풀을 뜯으려 하는 것처럼, 법칙에 어긋나 종국에는 죽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고 사회 속의 개인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혜강의 생각은, 동양과 다르게 발전해 온 서양의 과학적 성과물에서 자극을 받아서 생긴 것이며, 변화를 거부하는 당시의 조선 사회를 걱정하는 비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기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통민운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기’의 운동변화를 설명하는 말이 운화이고, 그 운화에는 대기운화, 인기운화, 통민운화, 일신운화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신운화는 통민운화를 본받으며, 통민운화는 대기운화를 본받는다고 했다. 대기운화는 우주 즉 천지 만물을 가리킨다. 대기운화는 우리 인간이 우주를 관찰하여 얻는 지식의 변화로 시작된다. 우주에 대한 지식의 변화는 우주 만물에 대한 인간이 갖는 지식의 변화다.
우리의 전통적 우주관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었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중국이 있고 그 외 나라는 변방에 위치한다는 사상이다. 중국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변방의 나라인 조선은 중국을 따르고 그 문화를 본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를 통하여 지구는 그렇게 네모진 것이 아니고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구론의 변화에 따라 중국이 중심이라는 사상은 무너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공처럼 둥근 물체에는 어느 한 곳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지구론을 수용한 홍대용 등 실학자들은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대기운화에 대한 지식의 변함에 따라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도 변화된 것이다. 통민운화란 이처럼 우주의 변화에 발맞춰서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 사회의 운영 원리는 우주의 변화에 발맞추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반영된다. 이처럼 우주의 변화에 맞추어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최한기는 변통(變通)이라고 불렀다. 변통이라는 말은 주역에서 따온 말인데, 변화와 소통을 합쳐서 말한 것이다.
혜강은 통민운화에서 인간의 의도적인 변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 변통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알맞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조선 사회를 이끄는 지배층은 이러한 변화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혜강은 통민운화, 변통 등을 내세워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우리 사회를 운영하자고 한 것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성리학 풍토는 성리학의 본령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주희는 원래 사물을 탐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하였다. 격물치지란 구체적 사물에 나아가서 그것을 잘 탐구하여 올바른 지식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사물을 탐구하는 자세는 사라지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원리만 지킬 뿐이었다. 즉 그가 주장하는 바의, 사물이 운동 변화하는 이치를 깨달아 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학』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중의 하나를 실용실사(實用實事)의 추구와 민생의 안정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기반이 되는 운화(運化)의 규명이 일차적인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학에는 정학(政學)과 경학(經學), 역수학(曆數學)과 기계학(器械學), 기예공장(技藝工匠)의 학, 격물학, 전례학(典禮學)과 형률학(刑律學), 역수(曆數) 물류(物類) 기용학(器用學) 등이 포함된다.
정학은 정치학이고 경학은 경전에 대한 학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이다. 역수학은 천문학과 수학이다. 역수학과 기계학은 운화의 기를 인식하고 증험하는 학문인바, 기계가 아니면 이 ‘기’에 착수할 수가 없고 역수가 아니면 이 ‘기’를 나누어 살펴볼 수가 없다고 보았다.
기예공장의 학은 한 가지 일에 나아가 ‘기’의 교묘함을 얻고 능한 바를 익혀서 ‘기’의 정밀함을 터득하는 것이고, 격물학은 온갖 종류의 산물이 왜 제각기 다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응집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의 최종 목표는 운화 유형의 이치에 통달하는 데 있다. 이는 오늘의 응용과학이라 할 수 있다.
전례학과 형률학은 모두 교화로써 만인을 이끌고 거느리는, 인도에 속하는 학문이다. 통민운화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다.
역수학은 천문이나 계절의 변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그것을 통해서 천문과 계절의 운동과 변화를 읽어 내는 것이므로 기학의 본령에 속한다. 물류학은 곡식, 채소, 풀, 나무, 들짐승, 날짐승, 물고기 등을 종류에 따라 분류하는 학문이다. 이 역시 사물에 대한 수많은 경험과 관찰에 의한 일반 원리의 발견을 가능케 하는 학문이므로 기학에 속한다.
기용학은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구들은 모두 ‘기’를 활용하거나 측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용이나 측정은 구체적인 경험이며 관찰이다. 그러므로 기용학은 기학에 속하는 학문이다.
이처럼 기학은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운화 즉 운동과 변화를 읽어 내어 구체적인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는 학문이다. 기학은 그러한 원리를 적용하여 인간이 풍요롭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만물의 변화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통민운화다.
그러한 운화의 원리를 안다면 농부는 농사를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이며, 어부는 고기를 보다 많이 잡는 데 유익할 것이다. 또 정치가는 시대의 조류에 맞고 도덕적인 정치를 할 수 있고, 장군은 더 좋은 전략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또 과학자는 인류에 공헌하는 법칙과 발명을 해내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최한기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워진 기학의 원리를 모든 인류의 삶의 방식으로 확대하고자 희망하였다. 인간은 사는 지역에 따라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같은 기운을 타고 생겨났으므로, 인류 모두에게 공통되는 도덕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기운을 타고났고 공통된 도덕을 가진 인류라면, 서로가 적대시하거나 다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대동(大同) 사상이라 표현했다. 이와 같이 기학은 단순한 ‘기’에 국한되는 학문이 아니다. 국제평화론에까지 닿는 큰 철학이다.
최한기의 『기학』은 서양의 실용 사상을 기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전통적인 ‘기’에 의거하였다. 그만큼 주체적인 입장을 견고히 가지고 있었다. ‘기’의 운동과 변화 즉 운화를 강조한 혜강은,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당시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인류 공동의 철학으로 확대하여 평화적인 세계를 만드는 이념으로 제시한 위대한 선각자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는 세계화, 4차산업혁명, 소통의 가치도, 따지고 보면 160년 전에 혜강 최한기가 외친 통민운화에 닿아 있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의 존재를 접하고, 통상개방론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개화 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소수 문벌 가문이 독점하다시피 한 과거 제도의 폐단 비판을 필두로 현실 문제를 비판하고 과감한 개혁을 부르짖어, 뒤이어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최한기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기존의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과는 달리 이(理)보다 기(氣)가 우월하다는 견해는 기성 학계의 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저술도 1000여 권을 남겼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120여 권에 지나지 않는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과 저술에 바친 최한기라는 선각자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첫댓글 혜강 최한기 선생의 함자를 저는 처음 들어봅니다. 굉장하신 분이셨군요.
그리고 변통이 우리 삶을 점차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 되도록 이끌어간다는 내용이 참 경이롭습니다.
통민운화의 개념도 꼭 머리에 새겨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