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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최후의 유혹(誘惑)
니코스 카찬차키스
내가 읽어본 가장 위대한 작품(김광한)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카잔차키스는 1955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이라는 소설속에서
그리스도교 핵심교리에 공개적이며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과 고민을 담아냈다
30년이 지난후 미국의 영화감도 마틴 스콜세지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영화로 재작한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들때 복음설르 기초로 제작한것시 아니라
인간의 영적 갈등을 다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인간 예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구축한 동떨어진 교리안에서만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였다
너무나도 잘쓴 글이라 소개합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틴스콜세지 감독의 동명 영화의 국내 개봉을 둘러싸고 교계와 영화계 사이의 적잖은 논쟁이 벌어졌었다. 예수님에 관한 한 이미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들이 나와있는 데다, 예수님을 기본으로 한 이른바 '메시아 네러티브'는 '스타워즈'에서 '매트릭스'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중문화의 많은 영역에서 수도 없이 페러디된 새삼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일텐데 왜 그랬을까?
이미 1950년대 출판 당시부터 끊임없는 이단논란에 휩싸여 약 30년 가량이나 많은 법적 규제 속에 갇혀 있다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죽고도 20년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질 수 있었던 이 '문제적 소설'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함에 있어 여타의 다른 문학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서술 시점을 채택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예수님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시작되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대답이다. 적어도 나와 같은 크리스찬에게는 바로 '신(神)'으로 대응되는 '거룩한' 예수님의 삶과 그 내면에 대해, 작가는 그 행적을 더듬고 주변 인물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기존의 예수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간접화법'을 쓰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내면 속을 곧바로 파고 들어가는 '직접화법'을 선택한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 나오는 마리아의 아들을 나는 '예수님' 이 아니라 '예수'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왜냐면 나에게 있어서의 예수님과 작가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다른 존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내가 읽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원래 외삼촌의 책이었다가 어머니의 서재로 흘러 들어와서 이제는 종이가 다 누렇게 색이 바랜 86년판 이다. 번역가로서도 이름높은 안정효님의 작품인데 읽기가 그다지 수월하지는 않았다.^^;;)
2.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인간이 신의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가 판단하려고 하다니!'
당연히 교계에서 '불경스럽다'는 말을 들을 법하다. 그것은 명백한 교단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정말 이단적이냐는 논쟁에 있어서 나의 입장은 교단의 입장이나 작가의 입장과는 또 다르다. 모든 문학 작품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런 논쟁 속에 있는 작품들에 대해서 원작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서, 또한 텍스트의 의미가 내 안에서 또 다른 의미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섣불리 작품에 대한 입장을 정하려고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야기는 여타의 다른 예수 소설들에서 주문처럼 주워섬기는 예언과 탄생에 관한 서술을 뭉텅 잘라 내버리고는 바로 청년 예수의 지긋지긋한 악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청년 예수의 인간적인 욕망과 상충하는 신으로서의 사명에서 오는 갈등, 자신의 사명에 대한 불 확신, 두려움, 혹은 모든 인간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운명에 대한 고뇌였다. '불 확신'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적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가 느끼는 고뇌는 그의 사명에 대한 불 확신에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한 작가는 이러한 예수의 고민을 오직 예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
두 사람의 책을 다 읽었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테지만 실제로 작가는 오랫동안 니체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책을 읽으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은 오직 나뿐이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는 일종의 '초인'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작품 속에서 예수는 너무도 완전한 인간이며 보통의 인간보다 더욱 예민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을 지녔다.
3.
예수는 열심당원들을 못박아 죽이는 바로 그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로 등장하며, 아이가 태어날 때 경험했던 그 모든 놀라운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지난한 고뇌와 방황에 찌든 청년 예수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비참한 생활의 권태에 찌들어 있는 상태였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자제해야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엄청스레 비참한 분위기에서 시작하며 십자가를 만드는 일을 하며 연명하는 예수를 비난하는 열심당원인 가롯 유다는 기골이 장대한 불타는 열정의 사나이로 등장. 예수가 스스로 고행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수의 머리를 움켜쥐는 거대한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묘사되는 운명에의 부름. 또는 죄의 유혹에 대한 악마의 저주와도 같은 고뇌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던 청년 예수는 치욕과 수난에 찬 나날들을 보내다 어느 날 새벽 사막의 수도원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나사렛을 벗어나 그가 맨 처음 찾아가는 곳은 그가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못하고 창녀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사는 막달라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비판적인 눈으로 읽은 것도 아니었지만 가히 '슬픈 인연' 이랄 수 있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하룻밤은 감수성 넘치는 상황 설정과 묘사로 유독 나를 집중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수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하지만 다가가지 못했던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를 찾은 것이었고 예수에게서 자신의 운명을 느꼈지만 그의 손을 잡지 못해 스스로를 창녀로 내버린 비운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증오도 사랑도 아닌 애틋한 감정으로 예수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손을 잡기는커녕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두 사람의 배경으로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예수는 용서를 구하고 이별을 말한다.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욕을 하지만 예수를 걱정하며 그를 떠나보낸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인간적인 욕망 내지는 인간성을 상징하는 대칭적인 코드로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예수와 바울의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로까지 작용한다.
작품은 열 두 명의 제자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도 생동감 넘치는 성격과 사연을 부여한다. 예수를 비난하고 경멸하던 모든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마음을 먹은 예수는 인간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의 진리들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작품 속의 예수는 다분히 도발적이며 우리가 늘 머리 속으로 그려왔던 높고 푸른 중동의 하늘과 같은 평온한 모습이 아니라 폭풍이 치는 갈릴리 바다와 같은 고뇌와 열정 속에서 자유의 투사가 되어 움직인다. 성경의 뼈대를 크게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인간 예수는 점점 옥죄어 드는 시대의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불경스럽고 세속적인 표현일 수 있겠지만 독자는 이러한 예수의 고뇌와 투쟁을 바라보며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진리에 대한 책임감과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만한 종교성의 그 심연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고민을 시작한다. 바로 이 곳에서 작가의 미덕은 진가를 발휘한다. 적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우리와는 너무도 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고 깊은 뜻을 가늠하기도 힘들어 거룩하기는 하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예수의 생각과 그 감정을 비로소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는 감동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그 감동과 예수님의 사이에는 본질의 예수님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과 예술가로서의 감성이 접목되어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4.
어느덧 이야기는 종반부로 치닫고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 다다른다. 너무도 생동감 넘치는 묘사 덕분에 골고다 언덕은 읽는 이에게까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양손과 발목에 못이 박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예수는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문득 십자가가 아닌 서른 세 마리의 새들이 가지마다 앉아 노래를 부르는 높은 나무가 펼쳐져 있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너무도 거대해서 무의미한 사명을 떨쳐버리고 인간 예수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 뜨겁게 살아 숨쉬는 대지와의 완전한 교합을 통해(원작의 용어를 사용) 또 다른 의미의 구원을 이루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작품의 제목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그 놀라운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수호천사인지 실은 악마인지 모를 한 천사의 안내를 받아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함께 '나사로'라는 이름으로, 십자가가 아닌 침구류 등을 만드는 목수 일을 하며 살기로 한다.
불멸하지 못한 인간이 영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인간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언젠가 내가 내 시 속에 썼던 것과 비슷한 말이 쓰여져 있었다. 영원한 한 순간.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할 수밖에 없는 한 순간의 가치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것이다. 썩 이치에 맞아 보이는 이 말. 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유일 무이한 자기 합리화의 능력을 가진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지만 정말 예수님도 그런 유혹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인간이었다면 인간답게 살고싶어 하는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다. 그 입장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확신에 찬 예측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아니면 파격적인 내용의 파급 효과가 두려워서였을까? 작가는 후반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대해서 이전까지의 치밀하고 명확한 서술보다는 조금은 시적인 상상력에 많이 의존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곤충들과 같이 황소들과 같이 예수도 마리아와 동침을 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자식을 낳고 살게 된다는 내용만큼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비록 그것이 악마의 순간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이가 들어 백발이 성성한 예수에게 어느 날 그와 똑같이 늙은 제자들이 다시 나타난다. 평온한 삶 속에서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만큼이나 많은 삶의 지혜들을 체득한 예수였지만 그들이 젊은 시절 함께 나누었던 불과 같았던 열정과 꿈에 대해 추궁하는 제자들 앞에서 그는 자꾸만 할 말을 잃는다. '과연 내가 선택한 길은 옳았던 것일까? 그 날 골고다 언덕에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꾸었을 것인가? 비록 하루 하루가 죽음처럼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불과 같은 열정에 휩싸여 있던 나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하나님의 진리는 실제 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의 삶을 택함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과 이제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는 비로소 자신이 악마의 최후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순간 그는 십자가 위에 매달린 채로 눈을 부릅뜬다. 양손과 발목 그리고 옆구리와 이마에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는 분명 인간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안락한 인간의 길과 고통스런 죽음을 관통하는 신의 길 사이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선포한다.
"그렇다. 그는 겁쟁이, 도망자, 배반자가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고 최후까지 명예롭게 그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었으며, 약속을 지켰다. 그의 제자들은 꿋꿋하게 살아서 땅끝까지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졌나니, 하나님께 영광을! 그는 승리감에 차서 소리쳤다- 이루어졌나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 모든 일의 시작이니라."
5.
그러니까 요는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유혹을 극복하고 결국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다분히 불경스러운 접근법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바로 보고 나면 과연 이 작품이 책을 읽어서도 안되고 영화를 보아서도 안될 정도로 이단적인가 하는 지적에는 충분한 회의가 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 성경 말씀의 텍스트로 사용하기에는 물론 무리가 따르겠지만 신으로서 인간의 삶을 살다간 예수님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분명 의미심장하며 문학적으로 무척이나 훌륭하다.
진리를 찾기 위해 니체와 베르그송, 불교와 기독교를 넘나드는 치열한 사상적 여정을 거쳐온 작가의 정신 세계 덕분에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나 그를 단순한 성스러운 인간 중에 하나로 여기는 사람이나 명백하게 긍정할 수 있는 작품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거룩한 예수님에 관한 그저 뻔한 주석 수준의 일반 종교 서적이나 몇 년 전에 불었던 '예수 관련 서적 붐'을 타고 쏟아져 나왔던 '예수는 없다'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트렌드물들과 비교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어떤 작품도 흉내낼 수 없는 진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단 한표 차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던 그는 일반적인 경우가 그러하듯 시대를 앞서나간 천재적 문학가였고,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철학적 사유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은 진지한 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서, 시대를 관통한 '문제적 고전'으로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분명 가치 있는 작품이며 아직까지도 그 생명력과 강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작품이라고 할 만 하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크리스찬이랍시고 무조건 비판적인 입장만을 견지하거나 또 반대로 맹종적인 시각을 취하는 것은 어느 쪽이건 오히려 작품의 독해를 더욱 어렵고 위험한 것으로만 만들뿐이라는 생각을 덧붙이고 싶다. 그보다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보다 균형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는 과연 니코스 카잔차키스 만큼 진지하게 예수님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부끄러움도 들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을 자칭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의 소설 속에서 그린 예수는 분명 성경 속의 본질적인 예수님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 본질의 예수님을 어느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작품 속의 예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니체의 초인론과 베르그송의 생기론 등의 그의 사상적 토양 위에서 그 만의 시각으로 새로이 해석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생각을 그대로 본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각을 단련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의미의 신앙적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 성숙한 크리스찬의 자세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도 잘쓴 글이라 소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