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의 다리를 건너는 봄에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르다
김승희
검은 바다에 표류하는 하얀 베개들,
세상이 온통 거대한 병동이니까요
하얀 방역복을 입은 의사들,
마스크와 마스크로 대화하는 마스크,
묵시록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다리 앞에 줄 서 있고
도시 곳곳엔 해파리를 닮은 괴물이 일렁거리며 나타난다
폐가 금세 하얗게 불타버렸어요, 재가 되었어요
이탈리아의 성모마리아상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도
소녀상도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어요
세계는 다 함께 비참과 진혼의 다리를 건너간다
관 뚜껑으로 뗏목을 타고 간다
필사적으로 찢어지는 세계를 막아서며
들들들 들들들 이를 갈듯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
천사들이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술을 뿌려라 꽃도 뿌려라
중력에 휘어잡혀 끌려가는 무겁고 캄캄한 몸
인류의 어느 사과밭에선 지금도 맹렬하게 사과가 자라고 있으리라
홍로, 홍옥, 국광, 후지(부사), 아오리, 미야비, 감홍, 추광, 홍월, 슈펴홍로, 홍로와 추홍의 교배로 만든 선홍, 후지와 쓰가루를 교배한 시나노스위트, 방울사과 메이플, 스칼렛서프라이즈, 파이어크래커, 골드러시, 알프스오토메, 아칸서스블랙, 섬머킹, 백설공주 독사과, 꽃사과 제네바, 스칼렛센티널, 미얀마 후지, 로열부사, 후지와 세계일을 교배하여 화홍, 자홍, 후부락스, 갈라, 레드딜리셔스, 프르미에루주, 멜로즈, 핑크레이디, 로열갈라, 조나레드······ 그리고 아직도 꿈속에서 만나는 이름 모르는 사과들
지금은 봄의 초순, 사과는 이제 시작이다, 진혼의 다리를 건너가는 봄에 나는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른다, 어느 산비탈 아래 이름 모르는 밭에서 아직도 맹렬하게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르는 빨간 사과에 이름 모르는 사랑을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