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 1여단, 한강을 건너다!
공수1여단이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들어갈 때 유일하게 저항한 것은 국방부 옥상에 있던 발칸포대였다.
그날 보안사에서 가장 바빴던 이는 鄭棹永 보안처장과 許和平 비서실장이었다. 柳學聖, 全斗煥장군이 대통령과 군수뇌부를 설득하고 있는 사이에 鄭, 許 두 사람은 실병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보안처장은 군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책임자로서 보안사에서는 사령관 다음으로 권한이 강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보안처는 군부 감시 및 통제의 수단으로서 全軍의 통신망을 통제·감청하고 각 지구 보안부대를 지휘한다. 鄭처장과 許실장은 이 날 밤 이 두 가지 수단으로써 지휘부가 흔들리는 육군본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보안처는 우선 육군본부 및 수경사와 통하는 예하 부대의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다가 출동준비명령이 내려가면 그 군부대 내의 보안부대를 통해서 출동명령의 실천을 막았던 것이다. 3군 산하 5군단 소속인 수도기계화사단에 육본으로부터 출동준비명령이 내려가자 참모장은 출동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런 명령이 내려갔다는 것을 알아챈 이 사단의 보안부대장은 참모장과 함께 손길남(孫吉男) 사단장을 찾아가 『절대로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孫사단장도 상급부대로부터 출동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자정이 지나서는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혼란기에는 정확한 정보판단이 되어야 행동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있다. 육군본부는 예하 부대와의 통신망이 노출되고 정보망(보안부대)이 잘린 상태에서 합수본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모른 채 까막눈으로 싸우고 있었다. 합수본부 측은 육본 측의 행동을 손바닥 들여 보듯 하면서 천리안을 갖고 대처했다. 육군본부는 四肢(사지)가 다 잘리고 눈마저 뽑혀나간 채 버둥대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12·12는 대령들의 밤
許和平 비서실장은 그 날 밤을 전화기를 부여잡고 지샜다. 합수본부장과 경복궁 30 단장실 및 주요부대장을 이어주는 연락책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주요부대의 육사 동기생이나 선후배 장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합수본부측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바빴다.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출동준비 태세에 들어간 부대의 연대장이나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 그게 아니야!』라면서 설득하면 부대가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수도권의 연대장, 사단 참모장과 참모, 대대장 등 실병 지휘관들은 거의 가 許대령의 정규육사 동기생이거나 후배들이었다. 한 미8군 정보통은 『그날은 대령들의 밤이었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 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고 했다.
육본은 초장에 출동준비명령을 내려두었던 수도기계화 사단과 26사단에 대해서 그 날 밤 끝내 이동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기자가 배정도(裵貞道)씨(경기도 이천에서 과수원 경영)에게 『출동명령이 내렸다면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정규육사 출신 연대장들이 반발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세 연대장 중 두 사람이 정규육사 출신이었습니다. 반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10·26사건 때 정 총장의 역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2일 밤에 정 총장이 연행 됐다기에, 퍼뜩 과연 혐의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합수본부 측을 진압하려고 출동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육본 측이 출동명령을 포기한 것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단결과 鄭총장에 대한 군내의 의구심이 육군본부로 하여금 과감한 진압작전을 펴지 못하게 한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全斗煥 측에서는 육본 측이 먼저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자위수단으로써 대응병력을 동원했다는 논리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육본 측이 초장에 9여단에 출동준비 명령을 내린 것이, 이 명령을 감청한 全斗煥군을 자극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全장군은 밤 10시30분쯤, 기동성이 좋은 9여단이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공수1여단을 먼저 불러들여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경복궁30단에 와 있던 朴熙道준장을 본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崔世昌 3여단장에게는 특전사의 지휘부를 제압하라는 임무를 주어 3여단으로 복귀시켰다.
수경사에서는 북악산에 배치된 33 경비단의 일부 병력에 대해 철수하여 본부로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이 이동명령을 감청한 합수본부 측에서는 수경사가 자신들을 포위, 진압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고 판단하여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한 것 같다고 金基宅참모장은 말했다. 張사령관은 33경비단 병력을 수경사 본부 방어 목적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尹興祺 9여단장은 3군 지원사령부에 요청한 수송차량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자 할 수 없이 본부차량으로 1개 대대만 직접 인솔하여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尹여단장은 鄭柄宙 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때 특전사령관실은 3여단의 특공조로 부터 기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자정 무렵이었다. 경인고속도로를 향해 나가던 9여단은 남부순환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굴다리에 당도하였다. 머리 위에 난 남부순환도로를 거쳐 행주대교 쪽으로 가고 있는 박희도(朴熙道) 준장의 공수1여단의 차량대열 불빛이 보였다. 이때 본부에 남겨 둔 참모장 신수호 대령으로부터 무선 연락이 왔다. 『보안사령관의 특별지시이니 돌아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尹준장은 병력을 돌렸다. 신수호 참모장에게 병력을 돌리도록 청탁한 사람은 보안사의 오일랑( 吳一郞) 중령이었다. 두 사람은 갑종간부후보 동기였다.
박희모(朴熹模), 1여단의 서울진입 방치
1989년 3월 변사한 鄭柄宙 장군은 생전에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었다.
『자정쯤 문홍구 합참본부장이 국방부에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전화를 노국방에게 바꾸어줍디다(기자 주:그때 노재현 장관은 연합사 벙커에서 막 국방부로 돌아와 있었다). 노장관은 「정장군, 박희도가 공수여단을 이끌고 국방부와 육본을 치러 온다고 하는데 당신이 막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퉁명스럽게 「아니, 장관님 예하의 수사기관(기자 주:합수본부를 의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시켜서 잡아넣으시지요」라고 했어요. 鄭사령관은 이 전화 직후에 9여단장에게 출동을 독촉했으며, 몇분 지나지 않아 피습되었다고 한다.
즉, 9여단을 출동시킨 것은 朴熙道 준장의 1여단에 대한 방어목적이었다는 얘기였다. 張수경사령관은 朴熙道 준장이 지휘하는 공수1여단이 행주대교로 접근중이라는 경찰보고를 받자 朴熹模 30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개 연대를 배치하여 서울진입을 막아달라』고 했다. 얼마 뒤 張사령관이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朴사단장은 『병력이 야외훈련을 나가서 배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1여단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행주대교 남단의 개화초소는 수도군단 관할인데, 朴熙道 여단장은 이 초소를 간단히 점령하고 통과했다. 행주대교 북단의 검문소는 30사단 관할인데 朴熹模 사단장은 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수색의 수경사 헌병단 검문소였다.
張사령관은 『헌병단은 지금 부단장이 지휘하고 있으니 조홍 단장의 명령을 듣지 말라. 병력이 접근하면 발포하라』고 지시했었다. 趙洪 단장은 보안사에 위치하여 검문소에 전화를 걸어 『발포하지 말라』는 정반대의 지령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문의가 부하들로부터 김기택(金基宅)참모장에게 쏟아졌다 金참모장은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수색검문소 헌병들은 1여단이 접근하자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공수1여단 병력은 텅빈 검문소를 때려부수었다. 수색검문소에서 서울시내까지는 거칠 데가 없었다. 1여단은 육본과 국방부를 향해 질주하였다. 아무리 소규모의 병력이라도 군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면 정권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5·16때 불과 수천 명의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한강을 건넘으로써 제2공화국이 무너졌다. 12·12사태 때 제1공수여단의 서울진입도 비슷한 결과를 빚었다. 육본 측 9여 여단은 돌아가고 全斗煥 측의 1여단은 서울진입에 성공했다는 것이 12·12사태의 승부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다.
盧泰愚 소장이 불러들인 9사단의 1개 연대, 이상규(李相珪) 제2기갑여단장의 1개 전차대대, 장기오(張基梧) 준장의 공수 제5여단, 30사단 宋응섭 대령(육사 16기·합참본부장 역임)의 1개 연대는 이미 승부가 끝난 뒤 13일 새벽 3시를 전후하며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들 부대는 9여단이 이동을 개시한 직후 全장군 측에서 서울로 부른 것이었다. 서울진입을 저지할 책임을 지고 있었던 朴熹模 사단장(갑종9기 출신)은 육본 측을 위해서는 병력을 내지 않는 대신에 宋대령의 연대가 全斗煥 측의 청탁에 의해 서울로 출동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朴사단장은 그 뒤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전역한 뒤에도 산업기지개발공사 이사장을 거쳐 수자원개발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기자의 거듭된 전화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공수1여단이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들어갈 때 유일하게 저항한 것은 국방부 옥상에 있던 발칸포대였다. 수경사 방포단 소속인 이 방공포대는 張사령관으로부터 사격명령을 받아두었었다. 全斗煥측에서는 국방부와 육본의 다른 부대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않도록 손을 써 두었으나 이 방공포대를 잊어먹었던 것이다. 국방부로 공수단 병력이 들어오자 발칸포가 불을 뿜어 수명의 死傷者가 발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