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에 불을 때고 남은 불씨를 담아두었던 화로는 없어서는 안 될 살림살이였다. 우선 화로는 가옥의 특성상 겨울철 외풍 센 우리네 방에 온기를 채워주던 요긴한 난방 용기였다. 옛날 시골집의 온돌방은 아궁이에 지핀 솔가지 불기운으로 바닥은 따뜻했지만 한 겹 창호지를 바른 쌍여닫이 출입문만으로 겨울 한기를 막아낼 수 없었다. 진득하지 못한 아이들이 밖을 들락거리며 묻어 온 찬바람을 녹여주던 것도 화로였고, 마른기침을 하는 늙은 할아버지가 품에 안고 추위를 이기던 물건도 화로였다.
그리고 화로는 성냥이 귀한 시절 불씨를 담아두는 그릇이었다. 집안에 불씨를 지키는 일은 부녀자들의 몫이었는데, 어쩌다 불씨를 꺼뜨리는 날이면 며느리들이 경을 쳤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불씨를 소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불씨를 담아 둔 그릇인 화로는 귀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로에 둘러앉아 형의 토끼잡이 무용담 실감 나게 들었다
|
▲ 삼발이 화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로 중의 하나. 테두리에 복을 기원하는 문자가 있응 것으로보아 선물용이었던 듯 싶다. |
ⓒ 홍광석 |
| |
또한 겨울철 화로는 여인들의 한숨과 눈물을 받아주었던 여인들의 벗이기도 했다. 가족의 저고리에 동정을 붙이고 주름을 펴기 위해서는 불에 적당히 달군 인두를 사용했는데, 화로는 그 인두를 묻어두는 그릇이었다.
그냥 보면 재 밖에 안 보이는데 재를 헤치면 밤하늘의 별처럼 살아나던 불씨에 인두를 달구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발라 인두 온도를 측정하던 여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화로는 가족 사이에 소통의 매개였다. 각자의 방이 있을 턱이 없었던 시절, 많으면 너 덧 명의 형제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둥근 화롯가에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포개고 앉아 손을 잡을 듯 내밀고 얼굴을 마주하며 한낮의 일을 이야기했다. 연싸움, 자치기, 토끼 몰이, 칡 캐러 간 이야기 등등. 형은 막내동생 친구들의 세세한 움직임을 그림처럼 볼 수 있었고, 아우는 토끼를 놓친 형의 무용담을 실감 나게 들을 수 있었다. 형제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말하는 법을 익혔고, 따로 우애를 강조하지 않아도 형제의 소중함을 몸으로 깨우쳤던 것이다. 더러 사소한 말다툼도 있었겠고, 보이지 않는 경쟁도 있었지만, 나중에 오는 형제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배려를 배웠던 곳도 화롯가였다.
|
▲ 곱돌화로 서민들의 가정에서 볼 수 있었던 10각 곱돌화로. |
ⓒ 홍광석 |
| |
또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화롯가에 앉으면 시들한 표정은 물론 얼굴에 남은 작은 상처도 가족들에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부모 형제는 어디가 아픈 지, 무엇 때문에 다친 것인지 꼬치꼬치 물으면서 걱정하고 그러는 가운데 따뜻한 화로만큼 은근한 가족애를 키워주기도 했다.
화로 소재와 종류만 봐도 그 집 형편을 알 수 있다
|
▲ 가마 화로 옛날 가마를 타고 가는 여인들을 위한 화로라고 한다. |
ⓒ 홍광석 |
| |
화로는 몸을 덥혀준다는 사실적인 기능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 물건이었다.
화로는 마음을 담은 길한 선물이기도 했다. 아직 난방 기구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그리고 평균수명이 낮아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했던 시절. 바깥 면에 소나무, 학, 연꽃, 매화, 국화 등을 새겨 그려 넣고 '만수무강(萬壽無疆)'과 '수복(壽福)' 등 기원을 담은 글자를 새긴 화로는 귀한 선물이 되기도 했다. 아마 연탄아궁이가 일반화되기 이전까지 그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고 기억한다.
화로 종류는 다양하다. 소재로 보면 옹기로 빚은 화로가 있고, 돌을 깎아 만든 화로가 있으며, 무쇠나 청동·백동으로 만든 화로도 있다. 더러 도자기 화로가 있으나 그 수량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화로의 모양은 드물게 4각 화로도 보이지만 원형이 일반적이다. 더러 8각, 10각, 12각 모양의 화로도 있지만 밋밋한 원형에 멋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화로 역시 생활필수품이면서 일종의 과시 용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장식이 없는 옹기나 토기로 만든 화로를 주로 사용했고, 조금 잘 사는 집에서는 투박한 삼발이 유기 화로, 곱돌 화로 등을 더 잘 사는 집에서는 표면에 각종 문양과 글씨가 새겨진 유기 혹은 백동을 소재로 한 화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도에 따라서는 가족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로가 많지만, 간혹 가마를 타는 여인네들을 위한 가마 화로, 노인을 위한 작은 화로 등이 눈에 띈다.
소통의 매개였던 화로, 요즘은 무엇으로 대체할까?
|
▲ 무쇠화로 뒤집으면 모자처럼 생겼다고 모자 화로라고도 한다. |
ⓒ 홍광석 |
| |
요즘처럼 난방 시설과 단열이 잘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화로를 골동품으로 취급한다.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켜지는 세상에 불씨를 담아두는 화로는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다. 먼 여행길에 품고 다니던 화로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집에서 가족의 옷을 만드는 여인들은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겨울밤 화로를 벗 삼아 바느질하는 여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거실에 모인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앉아 각자의 생각을 한다.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말을 붙이기 어렵다. 그런 생활에서 가족 공동체의 소중함이며 형제의 우애를 강조한 들 먹혀들 것인가. 그런 가족들에게 둥그렇게 모여앉아 무릎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 보며 떠들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화로가 소통의 매개가 되었음을 알려준들 화로의 존재를 알기나 할 것인가.
눈빛만 보고도 형제의 마음을 읽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던 그 시절은 전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통의 매개였던 화로, 요즘은 화로를 대신할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가족은 있되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도 된다. 화로가 그리운 계절이다. 아니다. 마주 앉을 공간이 그리운 것이다. 집이 아무리 크고 화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찾을 수 없다면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내 고통을 들어 줄 가족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
▲ 10각 유기 화로 크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겉면의 글씨와 10장생이 새겨진 장식이 화려하다. 손잡이의 복을 의
미하는 박쥐 장식도 다른 화로에서는 보기 어렵다. |
ⓒ 홍광석 |
| |
꼭 화로가 아니라도 좋다. 집마다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고,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덥혀줄 상징적 의미가 있는 '화로'를 만들었으면 싶다. 화로를 가운데 두고 가족이 둥글게 모여앉아 표정을 가까이 살피면서 함께 웃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가족의 정은 커질 것이다. 양보와 배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눔의 소중함을 익힌다면 왕따, 자살 등 사회적인 문제도 줄어들 것이다.
비어있는 화로를 다시 본다. 불씨와 함께 잃어버린 화롯가의 사연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