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40
2월18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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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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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wnjDoXn0Ow (심상엽 요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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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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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국 죽는 사람은 미지근한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베드로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죽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생존’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죽으려 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 사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말은 이웃의 생존을 위해 내 생존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은 삽니다. 록펠러는 인생의 절반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돈으로 이름 모를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대줌으로써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몸도 건강해져서 90세 넘게 살았습니다. 죽으려 한다는 말은 나의 생존을 위해 모으는 것을 다른 이의 생존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록펠러에게 수술비를 지원받은 여자아이가 쓴 장문의 감사 편지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되찾아준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으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1987년 ‘로버트 네렘’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표준 토끼 모델’이라는 간단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환경에서 토끼들에게 고지방 식단의 사료를 먹이고 마지막 단계에서 토끼들의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박동수, 혈압 등을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콜레스테롤 수치는 모두 같이 높았습니다.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일으킬 확률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별 기대 없이 토끼들의 미세혈관을 관찰하였습니다. 네렘 박사는 토끼들의 동맥 안쪽에 비슷한 지방 성분이 쌓여있으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토끼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 무리의 토끼들은 다른 토끼들보다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60%나 적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라며 원인을 찾았지만 이 결과를 설명할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네렘 박사와 팀원들은 단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방이 덜 쌓인 토끼들은 최근 그의 연구에 합류한 ‘무리나 레베스끄’가 돌본 토끼들임이 밝혀졌습니다. 레베스끄가 토끼들에게 사료를 줄 때 다른 연구원들이 주는 것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토끼들에게 사료를 주며 말도 걸었고 종종 껴안고 쓰다듬었으며 토끼들을 귀여워해 줬습니다. 사랑을 준 것입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애정이 어떻게 물질적인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것은 과학자로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실험 조건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레베스끄가 돌보는 토끼들과 그냥 사료만 준 토끼들의 동맥을 다시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렘 박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 결과를 세계적 권위의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등재하였습니다.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 토끼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안아주고 애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식단에 따른 많은 부작용이 사라졌습니다. 사람과 토끼가 맺은 관계가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물질은 물질이고 애정은 애정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의사와 과학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은 분명 있고 이것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하는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줄 때 받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레베스끄라고 하더라도 징그러운 파충류를 두고 실험했다면 그만한 사랑을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인데 내가 먼저 사랑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웃을 모기처럼 빨아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죽어가고 죽어서는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는 법을 배워 영원히 사는 천국으로 향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이 죽어 사랑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으로 죽기를 거부할까요? 왜 스스로 죄 많은 사람이 되어 죽는 길로 가는 것일까요? 왜 남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주면 바보 소리 듣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사랑으로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고 전해야 합니다. 두 방향밖에 없습니다. 살려고 하든, 죽으려고 하든. 이 단순한 진리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살려고 하면 결국 죽는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보통 그런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방향을 잡으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만있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 위에 가만히 있으면 바다로 흘러가 영원한 미아가 됩니다.
현재 유튜브판 ‘골목 식당’을 운영하는 ‘장사의 신’이란 채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주인공은 은현창 대표입니다. 그는 가난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언제 물이 집으로 흘러들어올지 몰라 항상 망을 보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항상 돈이 없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자장면 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는 곱창집을 하였습니다. 당시 곱창을 배달하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곱창을 배달하겠다는 아이디어로 대박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한 가게에서 버는 돈은 한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프랜차이즈를 하자니 곱창을 표준화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랜차이즈가 쉬운 치킨집에 도전합니다. 처음엔 손님이 너무 없었습니다. 혼자 튀기고 전화 받고 배달하며 단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입소문이 나고 많은 수의 프랜차이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게도 망하지 않고 다 잘 팔리는 치킨 프랜차이즈를 만든 것입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병이었습니다. 비만 오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온종일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때 프랜차이즈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팔 생각이 없었지만, 몸이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팔았습니다. 그의 통장에 찍힌 액수는 ‘200억’이었습니다. 이 숫자를 보는 순간 그가 기뻤을까요?
“이게 다야?”
대부분 성공만 바라며 뛰어온 사람들이 느끼는 허탈감입니다. 모래성을 공들여 평생 쌓은 것입니다. 그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백종원’ 씨가 하던 골목식당과 같은 프로를 자신의 장사 경험으로 무료로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자신에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장사가 안되는 집들의 코치도 해 주고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가게에서는 수백만 원어치를 팔아줍니다. 그는 웃으며 말합니다.
“유튜브 수입, 내가 이래서 맨날 적자야!”
장사꾼이 적자를 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 끝까지 가보았기 때문에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돈을 벌었다가, ‘아, 이건 아니지!’라고 하며 다시 남을 위해 살려고 했다가, ‘아, 이러면 우리가 굶어 죽겠다!’라고 하며 왔다 갔다 한다면 나만을 위한 삶이 나를 죽인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던지 죽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벌든지 이웃을 위해 살든지 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려고 했다가 평생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방향을 확실히 정합시다.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죽도록 일하던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살던지. 결국, 죽는 사람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이 아니라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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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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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34-9,1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태도가 바뀔 것이다. 베드로 사도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나도 그러한 현세적인 것을 바라며 그분을 따른다면, 어느 사인가 그분과는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자연적으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에 힘들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사랑이 그것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끊고 죽이라는 것이다.
이 악한 자신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우리가 그분께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을 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갈라 5,24 참조).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당신을 닮게 해 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육정을 마음으로부터 끊어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된다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상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이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이라는 두 다리로 첫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따르는 고통,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피하려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분 앞에 부끄러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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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ㄴ-38)
이 말씀을 단순하게 “살겠느냐? 죽겠느냐? 하나를 선택하여라.”, 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여라.”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둘 중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하여라.”가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마태 18,12-14)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에 관한 ‘단순한 지침’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에 관한 가르침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비장한 각오’를 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이 말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은 “나의 제자가 되려면”인데, 뜻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뜻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리다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혼나는 이야기가 있는데(마르 8,33), 우리는 편안하고 쉬운 길만 찾으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는 ‘다른 법’을(로마 7,23)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로마 7,25) 즉,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마음 수행’만으로는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고통들과 어려움들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 항상 십자가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쁨, 행복’과 ‘십자가’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편하고 쉬울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중단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 십자가를 피해서 갈 수도 없습니다. 힘든 일이 닥치면 정면 돌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 것은 허무한 일이 될 뿐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제 목숨을 잃으면’이라는 표현 때문에, ‘온 세상도 얻고, 제 목숨을 잃지도 않는 경우도 있나 보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 세상’과 ‘제 목숨’은 대립 관계입니다. 세상 것을 욕심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마태 6,24)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목숨(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한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말고 ‘허무’를 버리고 ‘영원’을 선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면”이고,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이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말과 재림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죽기 전에 그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씀 때문에, 종말과 재림의 날에 관한 말씀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천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제 이루어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은총입니다. 물론 평소에 회개하면서,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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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카이스트(KAIST)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원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입니다.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있고,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대학입니다.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대학입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도 어찌된 일인지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뉴스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의 학생처장은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하는데 원인을 모르니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카이스트에 들어오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열심히 공부해서 막상 들어오니 새로운 목표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처장은 신입생들에게 입학하기 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그것은 ‘꽃동네’ 체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꽃동네에서도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카이스트에서 공부해야 하는 목적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야한다는 목표였습니다. 카이스트에서 공부해야 하는 목표가 생겼기에 학생들은 더 이상 자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 2가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의 상징인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구원의 방주가 된다고 하십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수 있듯이,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삶의 목표이며,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 십자가는 가난한 이웃들이었습니다. 이태석 요한 신부님에게 십자가는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이었습니다. 오웅진 요한 신부님에게 십자가는 얻어먹을 힘만 있었던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이었습니다. 제게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빨간불이 들어오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빨간불이 있기에 더욱 조심하게 되고,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일과 함께 병행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일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문홍보를 가게 되면 부득이 성당 미사를 다른 신부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시간이 허락되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려고 합니다.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 두 번째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십자가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이 있는 십자가는 희망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등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인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맺어지는 인연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지고 가려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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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에서 ‘야고보 서간’을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은 무엇보다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데, 행동과 실천이 붙따라야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주제의 핵심 단락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오늘 말씀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지금껏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에 관한 수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참으로 실천하며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경우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초주검이 된 사람을 온 정성으로 돌본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29-37 참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나’와, 정작 길에서 비슷한 처지의 궁핍한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쳐 버리는 ‘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당신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결국 말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삶, 곧 행동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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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기현 시몬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모범을 따라 충실히 살고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들은 어떠한 자세로써 살아가야 할 지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일입니다. 독일군 한 부대가 폴란드의 작은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들에게 군인들이 먹을 음식과 전쟁에 필요한 철 그리고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만일 다음 날 정오까지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주민들 중 10명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든 식량을 꺼내고, 가정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가져왔습니다. 식량과 철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지만 마을에 있는 모든 돈을 모아도 그들이 요구한 돈에 반밖에 차질 않았습니다.
다음날 정오가 되었을 때 독일군들은 주민들 중 닥치는 대로 10명을 뽑아 그들을 밧줄에 묶고, 눈을 가린 채 마을 중앙에 나타났습니다. 독일군 장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민 대표가 나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음식과 철은 준비되었지만 돈은 아무리 구해도 우리에게 가진 것은 당신들이 요구한 금액에 반밖에 모이질 않았소, 이것이라도 제발 가지고 가고,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아 주시오.”라고 애원하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는 독살스런 눈을 부릅뜨고 “복종하지 않으면 어떠한 대가가 치러지는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밧줄에 묶인 채 있는 마을 주민 10명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독일군 장교 앞에 조그마한 한 여인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마을 병원에 근무하던 수녀님이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독일군 장교에게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 연약한 여자를 죽이는 것이 다른 마을에 더 많은 효과적인 본보기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 뒤 천천히 독일군 병사들 사이를 지나 밧줄에 묶여 있는 10명의 마을 사람들을 풀어 주고 가족들에게 보내고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당당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두 숨죽인 듯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독일군 역시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일군 장교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음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으로 주어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우리들은 주님께 충실한 응답의 자세로서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으로 남긴 뜻을 잘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에서부터 이웃 형제들을 위한 삶으로 방향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은 온통 이기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호의호식하며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만 잘 살아 보려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 더 나아가 몇 푼의 돈 때문에 이웃 형제를 죽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앞의 예화에서처럼 비록 연약하고 가진 것 없는 수녀님이지만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순간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목숨까지도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와 맞서서 주님의 사랑을 전한 수녀님의 용감한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그 수녀님의 모습처럼 살아가고자 한다면 아주 조그마한 부분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형제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며,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큰 어려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끊임없는 사랑 안에서 희생하는 삶을 꾸준히 이어 나아갈 때 이런 삶의 모습이 모이고 모여서 종국에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람으로 변모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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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윤태 루카 신부님]
<십자가>
각자의 일터와 생활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아마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희망이라도 없으면 살아가시기가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쁨을 주어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길 바랍니다.
만일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더 우리 자신들과 가족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거나 일시적 행복을 주고 파탄에로 이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취자 여러분! 그런 일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생명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죽음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혹시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그것이 죽음인지 독인지 모르고 눈앞의 일을 위해 걸어가거나 마신다면, 주님께서 생명에로 이끄시는 양식을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편에 생명의 길을 희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위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지기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이기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보다 어려움을 비겨가거나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설령 이웃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에 반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은 좀 여유 있고 성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세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첫 번째 인간 아담 에덴동산의 유혹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성공의 길인지 알려주십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서 소위 돈, 명예, 권력 등으로 포장된 것들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을 들어다 보면, 이런 내용을 금방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럽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면, 이미 당신은 세상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를 요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지 않고 어디로 가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하루만 열심하면 안되고 매일매일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욕심스럽게 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초대에 맞지 않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 “너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잘 보게 해 주겠는데, 너희들이 잘 보인다고 하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주님의 깊은 탄식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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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바벨탑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흩어짐’의 뜻을 지닌 ‘바벨’이란 말 속에는,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써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는 인간의 오만함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시고 그들의 말을 섞어 흩어 버리십니다.
인간이 신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신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4차 산업 혁명’ 또는 ‘제4의 물결’로 불리는 기술 융합과 인공 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이 ‘정신’을 창조하려는 새로운 바벨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습니다.
공정한 분배와 올바른 민주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기술 과학의 혜택 역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내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만 잘살려고 하면 이 세상은 ‘혼란’, 곧 바벨의 역사를 반복하고 맙니다. 내가 죽기로 작정하고,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 곧 십자가를 짊어질 때 이웃을 용서하고, 공감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벨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서로 짊어져 주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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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는지,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워질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비우는 일은 결코 스스로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진 분에 의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곧 받아들여 진 분이 중심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짊어지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지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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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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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음의 지혜를 청해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오늘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어제보다 더 실천하지 못한 나의 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긴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야고2,14-24.26)에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있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7.24-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몸소 짊어지시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완전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당신께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5)
오늘도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의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갑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삶는 이!"(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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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어떤 분으로부터 ‘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워낙 무엇을 키우는데 재주가 없어서 각종 화초를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대로 키워보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책을 사서 난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배운 대로 난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서 매일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습니다.
특히 정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매일 닦아주면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정성을 기울이다 보니, 난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변화도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잎이 자라는 것도 보였고, 잎에 약간의 이상이 보이면 마치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이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난이 제게 무엇을 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도 무엇을 줘야지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성을 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려면 먼저 알기 위해 노력하고 여기에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만 외치는 공허한 사랑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잘 따르려면 어떤 조건을 채워야 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가져야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를 때 세상의 목숨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부와 명예를 좇아서 하느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의 뜻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과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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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해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김보다는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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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래야 존엄한 삶이요 인간다움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끝까지 남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랫동안 인용했던 말마디 둘도 다시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하는 우선 순위요 우선 순위가 바뀌면 삶은 주객전도의 혼란스런 삶이 될 수 있고, 하느님 믿음의 중심이 실종되면 건강과 돈은 절대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혈연도 탐욕 앞에는 무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탐욕도 절제되어 서로간의 형제애나 참된 우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유산문제로 파탄나는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후손에 내려 줄 가장 소중한 자산은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강론 제목은 ‘믿음의 여정-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입니다. 순례 여정 내내 ‘여정’이 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하루의 여정은 주로 성지 순례 여정으로 믿음의 여정과 직결되는 하루였습니다.
오전 처음에는 세계 7대 경관중의 하나라는 주상절리 중문 전망대를 감상했고 이어 산방산 곁을 지나면서는 산방굴사 절에 대한 초의 선사와 추사 김정희와의 감동적인 우정에 대한 일화도 들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8여년의 제주도 유배중 초의 선사가 방문하여 6개월간 산방굴사 절에 머물면서 추사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는 일화입니다. 아마 전무후무한 두 분간의 우정의 사랑일 것입니다.
이어 도착한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였습니다. 참으로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신앙의 일화 가득한 분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개된 전설적인 분입니다. 정약현의 딸이자 다산 정약용의 조카로 장부는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황사영이었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관비로 생애를 마친 그러나 시종일관 신앙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제주도 유배시 2살짜리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어부에 맡겨졌고 그 후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먹먹하게 합니다. 참으로 현세에서는 어떤 희망도 없이 하느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고 기도와 믿음 만으로 평생 한많은 생을 살았을 정난주 마리아입니다.
오후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에 들렸습니다. 바다를 전경으로 한 참 아담하게 마련된 성당이요 기념관이었습니다. 제주도의 천주교 역사는 물론 26세에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갖춰진 기념관이었습니다.
참으로 정난주 마리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두 분의 믿음이 가슴 깊은 감동으로 와 닿았던 어제의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오늘로서 5박6일의 제주도 순례 여정은 끝납니다. 얼마나 무궁무진의 깊이를 지닌 보물섬 제주도 인지, 아마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은 커녕 평생을 봐도 다 못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 오늘 오전 일정만 마치면 오후에는 수도원에 돌아갑니다. 끝은 시작이듯 믿음의 순례 여정은 다시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의 순례 여정이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기까지 한결같은 믿음의 삶으로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줄기차게 실천과 함께 가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믿음이 답입니다. 늘 실천과 하나된 믿음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어 야고보 사도의 결론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 마음을 두드립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실천적 믿음에 대한 구체적 결정적 답을 주십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새삼 믿음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자 버림과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늘 읽어도 새로운, 믿음을 새롭게 하는 좌우명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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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님!
내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것 모든 것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 목숨을 살리는 방법이 뭔가요?
용하다는 의사도
신기가 있다는 무당과 점쟁이도
특별한 영을 받은 초능력자도
사실 그 목숨을 살리지는 못하는데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아, 주님!
목숨을 구해보겠다고 용을 쓰는 것이
오히려 문제군요.
그렇죠!
내 목숨은 하느님께 달린 것인데
내가 이떻게 해볼 수 있다는 게
참 우습지요.
제 목숨을 참으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처방에 따라 살아가는 것밖에 없지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면서 말이죠.
믿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이라 말하면서
사람에게 내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내 목숨을 구하실 분이라 믿으며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그 길,
예수님을 따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생명으로 가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이겠지요.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오늘도 그 길을 나도 따라 걷게 하소서!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
말없는 어린양처럼 걸어가신길
외로이 걸으신 그 고통의 길
이젠 그길을 내가 걸어가리라
내가 가는 길 십자가의 길
그러나 그 길은 사랑의 길
부르심의 길 그 영광의 길
당신을 따르는 길 생명으로 가는 길
(그 길, 임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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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KDhGp56l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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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 35)
꽃도
꽃망울로
시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피 흘리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십자가의
목숨이다.
참된 사랑에는
십자가의
목숨이 있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
목숨으로
목숨을
구하는
복음이다.
목숨의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복음의 길이다.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를 돌보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사랑에 빚진
우리들
목숨이다.
목숨은
십자가를
만난다.
참된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알게 되는
사랑의
복음이다.
사랑은
꽃길이 아니라
끝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다.
목숨을 내놓는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십자가 없이는
목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서로를 구하는
변화의 시작에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삶이 있었다.
십자가는
삶의 변화이며
목숨은 목숨에
갇혀 있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힘겹게
밀어 올리는
십자가의 삶에서
다시 삶을 만나고
다시 사랑을 찾는
빚진 목숨들의
기도가 있다.
길을 잃은
목숨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은
목숨의
길을 알려준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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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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