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이혜연
거의 온종일을 음악과 함께한다. 정통클래식을 주로 듣지만,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을 찾아 듣기도 한다.
늘그막 혼자 몸이다 보니 음악이 말 상대를 대신한다.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아들 내외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고, 구차해 보이기도 싫어 외롭다는 말 가슴에 꾹꾹 눌러 두고 산다. 어느 정도는 외로움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창 넓은 카페에 앉아 폼 내며 마셔대던 블랙커피처럼, 달콤하게 즐기던 고독이 요즘 들어 쓴맛을 일깨운다. 가슴이, 눌러 둔 말들로 묵직하다. 그래도 우울증이라든가 공황장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음악 덕분이라고, 음악이 그 지경까지 이르는 걸 막아준 것이라 믿었다.
어느 날 코로나19로 가중된 외로움을 지워보려고 보기 시작했던 모 TV 방송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임영웅 이라는 무명의 한 젊은 남자 가수를 만나면서 내 일상은 뒤흔들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울이 내 가슴속에 이미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악기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진정한 위로는 슬픔이나 아픔을 다독여 묻어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헤집고 들어가 씻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많이 울었다. 나이가 들어서 눈물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가 선사한 눈물의 의미는 달랐다. 정화(淨化)의 눈물이라고나 할까. 뒤끝이 가볍고 편안했다.
태풍이 막대한 피해를 주긴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고 한다. 바닷속을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깨끗이 청소해준다는 것이다. 중저음의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풍부한 음색, 말하듯 담담하면서도 절제가 있고 섬세하며 품격이 있는 그의 노래는 노랫말 하나하나, 멜로디 한음 한음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와 응어리져 있던 것들을 흔들어 일으켜 눈물로 씻어주고, 잊고 있던 감성을 일깨워 달큰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우울증 환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한 것도, 삶을 포기하고 있던 대장암 말기 환자가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살고 싶어졌다고 한 것도 슬픔이 씻겨간 자리에 차오르는 행복감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감성 장인 이라 부르고, 어떤 심리 상담가는 음유시인, 상담 치유사라 일컫기도 한다. 심사에 참여한 한 마스터는 “아무 생각 없이 무대에 오르는 가수가 대부분인데,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청중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자기 몸에 세팅을 한 다음 무대에 올라온다.”고 했다. 그래서 듣는 이를 공감시키고 감동과 위로를 주는 것이라고. 그는 감정의 완급 조절에 능란할 뿐만 아니라, 볼륨이 작은 음을 낼 때도 계속 알맞은 힘을 주고 부르기 때문에 소리가 흩어지지 않는데 그런 힘은 탄탄한 가창력에서 온다고 했다. 그의 노래가 편안하게 들리는 것은 그만큼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마치 백조가 수면 위에 그림처럼 떠 있기 위해 물밑에서 수없는 발길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그 마스터는 덧붙이기를 아무나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목소리와 감성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엄마가 재혼할까 불안해하는 어린 아들을 위해 한 부모 가정되기를 결심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생각해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의젓하고 심성 바르게 크려 노력하는 동안 그의 가슴속은 많이도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와 슬픔이 절제를 알게 하고 마음 밭을 깊고 풍부하게 가꾸어주어 공감과 위로의 힘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글 선배 한 분은 그의 노래가 수필을 닮았다고 했다. 목청 높이지 않으며 여백이 있고 품격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글 역시 사람의 목소리다. 그중에도 수필은 체험의 문학으로, 간접 경험도 자신의 것으로 체험화하여 자기만의 목소리로 서술하는 것이다. 트로트 노랫말이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수필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라고 해서 쉽게 쓰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가수의 노래처럼 쉽게 읽히는 글이 결코 쉽게 쓰인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와 마찬가지로 불행과 슬픔은 사유의 폭을 넓혀주어 글을 깊고 풍부하게 해준다. 문학이 결핍의 소산이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거의 매일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 글에 대해 생각해본다. 수없는 연습으로 가창력을 다지고, 멜로디 하나, 노랫말 하나에 내포되어 있는 감성들을 완벽하게 소화해 자기화한 다음 무대에 오르는 그 가수처럼, 나는 한 편의 글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던가? 글에 나를 충분히 이입시켰던가?
아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기교만을 믿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처럼 나는 얄팍한 내면을 부풀려 알량한 테크닉과 문장력으로 눈속임을 했을 뿐이다. 문학이 치유의 힘을 갖는다 말은 하면서도 내 아픔, 슬픔의 카타르시스로 이용하고 공감을 구걸하기에 급급했을 뿐,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다.
늦은 나이에 또 배운다, 서른 살짜리 가수에게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글이 어떤 것이야 하는가를, 글을 쓰는 종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그런데,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던 그 마스터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