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의 세계를 만든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그림
* (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미국의 화가 척 클로스(Chuck Close, 1940~)를 대표하는 그림은 〈자화상〉(Self-portrait, 1997)이다.
그의 〈자화상〉은 얼핏 보면 마치 사진을 보는 듯 매우 정밀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림이라기보다는 사진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클로스의 그림에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때는 사진 같은 그의 그림에 관객이 한 발 다가가면 갈수록 사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매우 엉성한 비정형적인 형체들만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사진과 같은 그의 얼굴 모습은 사라지고 형체가 깨져버리고 만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 저장된 이미지를 크게 확대하면 형태가 깨지고 사각형의 흐릿한 픽셀만 드러나는 것과 비슷하다.
클로스의 역설적이고도 흥미로운 그림은 이른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극사실주의)을 대표한다.
하이퍼리얼리즘이란 1960년대 후반부터 회화를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현실보다도 더 현실과 같은 극도의 정밀함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최근 한 아트페어에서는 실물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사과 그림이 박스에 포장된 채로 벽에 걸려 전시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박스 역시 그림인 걸 알고 많은 관람객들이 놀란 적이 있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하이퍼리얼리즘에 이르러서 극에 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떠올려볼 수 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왜 20세기가 되어서야 생겨난 것일까? 과거의 화가들은 20세기 이후 등장한 하이퍼리얼리즘 화가들만큼 정밀하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혹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기술이 부족하여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하이퍼리얼리즘이 탄생하게 된 비밀을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찰스 벨(Charles Bell, 1935~1995)이 그린 〈구슬〉(Marble) 연작 그림은 얼핏 보면 사진 같지만 매우 정밀하게 그려진 회화 작품이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dongsungbang&logNo=220676974077&proxyReferer=
이 그림을 잘 보면 우리는 하이퍼리얼리즘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벨의 그림은 투명구슬을 그 속에 있는 조형이나 구슬 표면에 반사된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정교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우리가 구슬을 맨눈으로 들여다볼 때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 이미지들은 매우 근접해야만 볼 수 있는데 우리 눈은 초근접 이미지를 볼 수 없다.
대상의 표면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눈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카메라는 접사촬영이 가능하다.
우리가 대상을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정밀하게 보고자 한다면 카메라로 접사촬영을 한 후 그것을 확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벨의 그림은 우리 눈에 드러난 현실이 아닌 카메라의 접사촬영에 의해서 드러난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정밀하게 그리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사진의 이미지인 것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이 사진이 발명되고 그것이 널리 보급된 이후에야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리얼리즘이란 우리 눈에 나타난 세계보다 더 리얼한 세계를 보여준다.
다시 클로스의 작품을 언급하자면 그의 그림은 바로 하이퍼리얼한 이미지가 사진의 픽셀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하이퍼리얼리즘이 단순히 회화의 한 조류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자체가 이미 하이퍼리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이퍼리얼한 사회란 벨이 그린 〈구슬〉의 경우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적 이미지가 현실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