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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27년~1928년 사이에 중국의 은값은 폭락하며 떨어지고 중국 내에서 동란이 일어나니 중국인 도래가 크게 늘어났다. 1927년 2월 25일에는 중국인 800명이 들어오더니 그뒤 더욱 증가했다. 3월까지 들어온 수는 14,000여명에 이렀고 4월 한 달 동안에는 5,000명이 들어왔따. 7월중 신의주를 거쳐 들어온 화교의 수는 2,605명에 이뤘고 해가 바뀐 1928년 3월 그믐까지 700명이 들어와 평양부근 노동계를 위협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0)
1928년 '평안수리조합'에서는 '한국노동자는 게으르고 결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쫒아내고 대신 화교노동자를 고용했다. 1929년 평안북도에서는 화교노동자만 고용하는 사례들이 여러차례 거듭됐다. 平北水組工事와 多獅島築港工事에서는 화교노동자만 사용하자 한국노동자들이 총독부와 도당국(道當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도당국 각 공사장에 시정할 것을 명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6)
1931년 화교배척폭동직전 평안남도 지역에선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이 증가하고 있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2)
국제조사에 따르면 1925년과 1930년, 5년 사이 평양의 화교인구증가율은 심했다. 조선인 증가율은 66.8%, 일본 증가율은 14.5%인데 화교인구 증가율은 무려 111.8%로 조선인과 일본인 증가율을 압도했다. 1930년에 평양 부내 1천 명중 25명은 화교일정도였고, 그만큼 조선인과 화교의 접촉은 많아졌다. 1928년 6월 평남 평원군(平原郡) 동두면(東頭面)의 평안수리조합(平安水利組合)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간 충돌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도 평안남도에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115)
그런 상황에서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났다.
6-2
평양 4일 오후 6시엔 이문리 길가에서 조선 3명이 지내가던 중국인 2명을 구타했다. 경찰은 이것을 제지했고 이 때만 해도 큰일은 없었다. 밤 평양 중국인 요리집 동승루에서는 조선인 20여명이 달려가서 "굳게 다다걸은문을 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1931.07.06)
7월 4일 저녁 진남포(鎭南浦) 영사 서수(徐隨)는 경성과 인천에 배화폭동이 일어난 걸 알고 5일 새벽 평안남도와 황해도, 두 도청의 경찰부장, 평양경찰서장에게 전문을 보내고 진남포 경찰서장과 면담하여 화교와 지역 상회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5일 오전 11시 평양서 경찰서장 안도(安藤) 고등계주임은 평양상회 상무위원 장경현(張景賢)에게 이렇게 말했다.
『폭동이 발생하면 본서가 반드시 확실하게 보호할 것인데, 만일 조선인들이 도발할 경우 양보하기 바라며 일찍 문을 걸어 잠그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6)
평양에서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던 7월 5일밤 치안 책임자들은 연회에 출석했다 그 때문에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1; 윤해동, “만보산 사건”과 동아시아 “기억의 터” -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SAI Vol.14, 2013, 505)
그리고 안도 주임의 말과는 다르게 밤 11시에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은 손전등을 들고 곤봉, 칼, 도끼, 돌 따위 흉기를 들고는 조를 나눠 화교를 살상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 주일공사가 보기에 군중은 조직이 잘 갖춰진 집단처럼 보였다. 이 군중들의 폭동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 7월 8일 기준으로 사망자 109명, 부상 163명, 생사불명자 63명이었다.(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6쪽)
5일 오후 8시경부터 평양부 신창리에 있는 중국요리점 동승루 앞에 조선사람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그 곳을 습격하였다. 군중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합세하여 종로통으로 진행하며 가로에 있는 큰 중국인 상점들을 차례차례 습격하고 골목에 있 는 중국인 가옥까지 습격하였다. 피습된 상점은 상품이던 가구던 남아있는 것도 없었고 완전히 파괴를 당했고 남아있던 중국인도 피해를 입었고 이런 일은 6일 오전 3시까지 이어졌다. 이런 사태로 전차는 오전 6시가 되서야 겨우 개통됐다. 평양 안에서 중국인집을 거의 습격당했고 보통강변에서 농사하는 중국인 가옥도 태워졌다. (동아일보 1931. 07. 07)
평양경찰서 근무자들이 총출동했고 헌병과 보조헌병 70여명과 소방대원 약 200명이 출동해서 경계하였다. 평양근교에서 피난해 들어온 사람까지 포함해 중국인피난자 3100명은 평양경찰서 광장에 수용하고 400여명은 대동경찰에서 수용했다. 평양경찰서는 이번 테러사건 주모자로 인정된 조선인 57명을 검속했다. 이 폭동에서 경계하던 경관 2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동아일보 1931.7.7) 군중들은 6일 오전에도 도시거리를 돌아다녔다. 오후 7시쯤에 약 5천여명이 그부근 중국인 가옥을 다시 습격했다. 이 때 전차같은 일반교통이 두절된 상태였다. 경관들은 공포탄을 쏘며 제지시도를 하였다. 경찰서에 수용한 피난민 4천여명은 군대와 경관의 호의를 받으며 남전에 있는 의전강습소로 이송됐다.(동아일보 1931. 7. 7)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은 수요일이엇다. 밤 아홉시쯤...
수요예배에 교회당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며 누워서 책을 읽고 잇노라는데 저편 행길에서 「와!」 「와!」하는 수백명 군중의 포함성이 들렷다. 처음에는 무심히 들엇다. 첫녀름 초저녁에는, 흔히 사람들이 모혀서 좋다고 떠드는 일이 잇스므로 그 일종이거니 하고 무심히 여겨 들엇다.
그러나 그 포함성이 줄지를 안코 차차 더 커갈 때에 문득 생각난 것은 아까 낮에 어떤 형사에게서 혹은 오늘쯤 중국인습격이 잇슬지로 모르겟다는 걱정을 들은 일이엇다. 만약 지금의 이 포함성이 중인의 집을 습격하는 소리라면 예배당에서 돌아올 아이들의 길이 근심스러웟다. 그래서 푸댄님에 속옷바람으로 포함성의 진상을 알아보려 행길로 나섯다.
과연 중국인 습격이엇다. 우리 집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안흔 곳에 잇든 중국인 리발소앞에 백여명의 군중의 물결이 흐느적거리는 것이엇다. 나는 그리로 달려가보앗다.
순사 두명이 그 리발소를 등지고, 군중과 마주 서잇다. 백여명 군중은 리발소를 향하여 연방 고함들만 지르고 잇다. 리발소 안에는 전등은 밝아잇스나 주인이며 리발사들은 업고 커다란 체경이 하나는 돌에 마저서 홍채 모양으로 깨여젓다.
그러나 그 뿐이엇다. 와- 와- 고함들만 지즈지 다른 변괴는 생길 듯 싶지 안헛다. 더구나 경관이 벌서 보호하는 이상에야...
거기서 문득 호기심을 이르켜 가지고, 중국거상들의 집합지인 법수머리로 슬금슬금 나려가 보앗다. 밤의 거리. 뒤에서 여전히 나는 포함성밖에는, 평온한 도회의 밤의 거리엇다. 가는 길에도, 과자장사라 식료품점이라 중국인의 상점이 두세개 잇는데 모도 덧문까지 굳게 닷고 박게는 2, 3명씩의 순사가 경게하고 잇섯다.
법수머리까지 갓다. 거기는 아직것 오든 곳과 달라서 흥분된 듯한 군중들이 여기저기 뭉켜서서 공기가 좀 험악해 보이나, 역시 그 틈틈마다 순사들이 지켜서, 무슨 일이 더는 버러 질듯하지 안헛다.
거기서 좀 살펴보다가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왓다. 시간은 열시가 지낫다. 그런데 예배당에 갓든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안엇다. 웬일인가.
이것을 또 나가보아야 하나. 집에서 기다려야 하나, 망서리는 동안 열시 반도 지낫다. 저편 행길에서는 또 아까보다 더 큰 포함성이 연하여 들린다.
아이들에게 대한 걱정이 차차 더하여진 나는 이번은 옷을 모도 주서입고 아이들을 차질겸 또 길로 니갓다. 행길에 나서면서 첫 번으로 눈에 띠인 것은, 아까 본 리발소앞에 잇는 군중들의 동요엇다. 아까는 둘러서서 고함만 지르는 군중이건만, 이번은 왓다갓다 무슨 어즈러운 행동이 시작되엇다.
속력을 다하여 거기까지 달려가 보니, 지키고 잇든 순사들도 할 수가 업는지 뒤로 물러서고, 군중들은 돌과 몽치로서 리발소를 파괴하는 중이엇다.
나는 그것을 구경할 마음의 여유를 일헛다. 예배당에서 아직 안돌아오는 아이들의 안부 때문에 가슴이 서늘케된 나는, 거기서 좌왕우왕 아이들이 이 틈에 잇지 안흔가 하고 차저본 뒤에, 예배당에서 집에까지의 통로로 좌우편의 구경꾼들 틈을 주이해 살피면서 달려갓다.
예배당까지 가서 벌서 컹컴하게 불끈 집을 보고, 도로 집으로 도라와 보매 아이들은 아직도 안돌아왓다. 여기서, 집안에서는 통떨처나서 아이들을 차즈려고 집을 떠낫다.
때는 바야흐로 열한시가 좀 지난 때, 평양 시내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본격적으로 벌려 진 때엿다.
남문통 일대의 그 밤의 광경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이즐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엇다. 법치지에서 생긴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업는 기괴한 광경이엇다.
중국인거상들이 집합지인 남대문 일대는, 사람으로 꼭 메워젓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오리가리 찢어진 비단이며 포목필들이 수 없시 날아다닌다. 중국상관마다 다락에도 흥분된 군중들이 가득이 올라가 잇으며 거기서는 아래(사람으로 메워진) 행길을 향하여 비단이며 포목필을 나려던진다. 여러 필이 공중을 날아 다니는 포목필들, 그 아래서 흐느적어리며 야단들 하는 흥분된 군중.
내가 그곳으로 달려간 때는, 겨우 그 찢어진 비단이며 포목들이 길바닥을 엷게 깔은 때엇다. 그 길바닥의 포목들은 각각으로 두꺼워 갓다. 30분 뒤에는 그것이 벌서 발목을 감초리만치 두꺼워젓다. 한시간쯤 뒤에는 무릅을 넉넉히 감촌만치 놓아젓다.
포목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 군중들의 아우성ㅅ소리 그것은 놀라운 수라장이엇다. 관앞에서법수머리까지의 짧지 안흔 거리는 찢기운 비단과 포목으로 두껍게 깔려서, 거름을 자유로히 옴길 수가 없도록 되엿다.
나는 사람들에게 밀리우고 또 밀리워서 어느덧 이 수라장의 복판 가운데 들어와서 잇게가 되엿다. 전후좌우에는 흥분된 군중들이 「만보산」 「되놈」ㅅ소리를 연하여 부르찢으며, 상관2층에서 날아오는 비단 포목들을 받어서 찢기에 분주하엿다.
재고품이 얼마나 잇는지, 그냥 끈임 업시 나려오는 포목을 보면서, 나는 망연히 서 잇섯다.
「늬 치판아」
「네미X비」
어제까지도-아니 아까 낮까지라도 이 중국인들에게 향하여 서로 농담을 주고 바덧을 아모 악의도 업는 군중들이 몃 사람의 선동자의 선동에 흥분이 되여, 예기안하엿든 이러한 난포한 일을 하는 「군중심리」의 놀라운 힘에 나는 새삼스러히 몸서리를 첫다.
그새 수 십년간을 각고하여 겨우 이만한 뿌리를 싸하 놓앗든 이 상관의 주인되는 중국인들의 생명은? 미리 몸은 피하여 생명의 위해는 받지 안헛나? 혹은 이 상관 안에서 흥분된 군중에게 불행이라도 보앗다.
「여보!」
누가 내 억개를 힘 잇게 치는 바람에 깜적 놀라여 돌아보매 머리는 찢은 비단으로 질큰 동인 사람 하나이 힐난하는 눈으로 나를 본다.
「노형은 왜 찢지안쿠 보구만 잇소?」
나더려도 비단을 짖으랴는 명령이엇다.
나는 대답 업시 그에게 복종하엿다. 내 발 아레서 찌저진 세루의 한끝을 집어 당겨서, 그것을 또 다시 찢는 숭내를 내지 알흘 수가 업섯다.
…
「김선생!」
보매 어떤 지우엇다.
「웨 이리 흥분돼 그러시오?」
그는 내가 세루 찢는 숭내를 내고 잇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엇다.
나는 고소하엿다. 그러고 한편 끝을 들고 잇든 세루를 내여 던젓다.
거기서 발을 떼어서, 군중들의 틈을 빠저서 나가려든 나는 몃 거름 못가서, 진긔한 한 개의 비희극을 보앗다.
어듸서 뛰처나왓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중국인이 수만명의 흥분된 군중 가운데 뛰처 들엇다. 그가 뛰처들은 겻헤는 마츰 다행히 순사가 한명 잇섯다. 왁하니 중국인에게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는 순사가 그 중국인을 보호하려 할 때에, 중국인은 어듸서 주섯는지 (그 근처 일대는 무릅에 닷토록 비단 포목 등으로 두껍게 더 폇는데) 돌맹이 한 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게냥을 하는 것이엇다.
미상불, 그는 너무 큰 공포 때문에 리성을 일헛든 것이다. 단 한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수 만명의 군중을 대항하려는 이 중국인의 행동은 성한 사람의 일로는 볼 수가 업다.
「되놈잇다」
「죽여라」
몰려 들으려는 군중 틈으로, 몃 명의 순사가 달려왓다. 그러고 어리둥절하여 돌맹이를 들고 망설이는 중국인에게서 돌을 빼서서 던지고, 보호하여 가지고 갓다.
두껍게 싸힌 포목들아대서 중국인의 시체(뒤에 소생하엿다 한다) 하나가 발견되여, 구루마에 실리워 경찰서로 갓다.
이 관앞 상관가를 떠나서 나는 중국인 료리점가를 가보려 대동문 거리로 빼처서 나왓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사건 전야에 부내에서는 만보산 사건을 빙자하여 중국인을 힐난, 협박, 구타 등 경미한 충돌이 6건이나 발생하엿섯다. 그러나 이것이 익야 중국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혈사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 하는 장본일 줄이야 누가 알앗으랴. 중국인은 새려 폭동군중 조차도 몰랏으리라.
5일 밤의 폭동은 오후 8시 10분경, 평양부 신창리 중국인 료정 동승루에 어린애 10여명이 투석을 시작한 것에서부터다. 이것이 1만여 군중을 미련하고 비열한 폭동에의 동원령이 되엇다기에는 일백번을 고처 생각해도 내 리지가 부인한다.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쨋든 일은 여기서부터 확대되엇다. 어린애들 10여 명의 투석이 60여 명 장정들의 투석으로 변하고 동승루의 정문과 유리창이 부서지면서 큰 돌을 안고 옥내에 침입하는 자가 생기엇다. 어느듯 군중은 수천 명을 헤이게 되고, 고함은 점점 부근 사람을 모아 놓앗다.
『이 집의 소유주는 조선인이다. 집은 부시지 말자』는 함성이 구석구석에서 터저 나왓다. 가구 집기를 모조리 부신(전화 한 개가 남앗다-<10>2층 한 구석에 붙엇기 때문에) 군중은 그 다음 집으로 옴기어 군중은 각각으로 집중되면서 순차로 대동강안의 중국인 료정을 전부 파괴하고 대동문통 대로로 몰려 나왓다.
대동문통에서 남으로 서문통-여기가 중국인의 포목, 잡화의 무역상들이 집중된 상가다.
군중은 2, 3백명씩 떼를 지어 중국인의 굳게 닫은 상점을 향하야 투석하기를 시작하엿다. 심한 데는 어데선가 굵은 재목을 멫 명이 둘러 메고 와서 「엉치기」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닫은 문을 부시는 데까지 잇섯다고 한다.
기관총의 난사와 같은 투석은 삽시간에 굳은 문을 깨치엇다. 점내로 침입한 십 수의 장정들은 마치 화재 장소에서 물건을 집어 내듯 손에 닥치는대로 상품, 집기 등을 길 밖으로 내 던진다-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내던지는 상품을 밟고 찢고 뜯고...어느듯 남문정에서부터 종로통까지에 노도와 같이 움즈기는 군중은 1만여 명을 돌파하고 노상에는 주단 포목, 화양 잡화 등등...찢고 깨튼 상품류가 산적하엿다. 전차 자동차 등의 교통두절은 무를 것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군중의 물결에 싸히지 않고는 마음대로의 통행도 할 수 없엇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오기영은 배재고보를 마치고 1928년에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뒤 1929년에 평양에서 수양동우회에 입단했다.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1937년의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1938년 초 도산 안창호의 임종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7))
「저녁 무렵 밥을 먹고 있는데 기마 순사가 말발굽 소리를 높이 울리면서 달려왔다.
얼마 있다가 큰 길에서 “와”하는 함성이 울렸다.‘드디어 왔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옛날부터 평양 사람은 날쌘 동작과 거친 성격으로 이름이 나 있다.안중근을 비롯하여 많은 자객이 이 지방에 서 나왔다.경성,인천의 소요에 자극 받은 다혈질의 평양사람은 하룻밤에 100리를 뛰어 다니며 이 거리에서 중국인을 증오(이 잘못된 증오!)하는 소리를 높였다.
나는 한길로 나갔다.군중으로 꽉 찼다.동경의 메이데이 시위처럼,아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굉장하게 살기를 품은 대중이 무리를 지어 성안의 구 시가지 쪽으로 몰려갔다.
토,톡,토,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계속해서 유리가 깨져 내리는 소리.툭 하고 흙먼지가 일어난다.환성을 뚫고 비명 소리가 들린다.옷이 찢어진 채로 군중의 옷자락 밑으로 빠져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길모퉁이 어두운 곳에서 이 무의미한,정말로 잘못된 양 민족의 투쟁을 바라보았다.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불행한 양 민족이다.
다음날은 병사가 무장하고 말을 탄 그림을 그린 포스터가 동네 곳곳에 붙었다.그 병사가 오늘부터 출동하여 경계한다고 쓰여 있었다.빨간 모자를쓴 옛날 근위사단 병사 같은 순사가 총을 차고 트럭에 타고 돌아다녔다.병 사가 길목에 보초를 섰다.총독부에서 유고(諭告)가 나왔다.
파출소에는 포박된 조선인이 무장순사 앞에 웅크리고 있다.그의 양손에 걸려 있는 굵은 포승과 순사의 빨간 모자가 소요가 끝난 거리의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시의 공직자가 파괴된 집의 뒤처리에 경찰관,청년단,재향군인단원 등과 협력하고 있다.
온 시내에는 유언비어의 재즈가 울려 퍼지고 있다. 7월6일이었다.」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1931.8,「満州に漂泊う朝鮮人」 改造,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5쪽에서 재인용
평양에서 탈출한 한 화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번 한인의 화교 참살은 사전에 일본인이 5일을 기한으로 하고 마음대로 살육하라고 한 것으로 조선인은 도끼를 휘두르고 무리를 지어호각을 불고 북을 치면서 나왔는데, 길이 1장 남짓의 죽창을 날카롭게 창처럼 깎은 것을 가진 자도 있었고, 손에 곤봉을 쥔 자도 있었으며, 돌을 집은 자도 있었다. 또 큰 차를 뒤에 따라오게 하여 많은 돌맹이를 싣고 다니며 무기로 쓴 자도 있었다....일본인은 사태가 시작된 후에도 비록 우리 동포를 보호한다고 말은 했지만 암중으로는 여전히 조선인을 도왔으며, 교포들은 일본인이 보호한다고 하여 의외의 사태가 없을 줄 알고 안심하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일본인의 귀신과 같은 계략에 걸려들었다....일본인은 교활한 술수를 부려스스로 화교의 건물을 훼손하고도 화교들에게는 韓人의 폭동이며 실로 일본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難僑二批抵靑」 「難僑經煙抵濟」 1931년 7월 20일 7면 申報 521쪽,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5에서 재인용)
중국 상해 시사신보(上海 時事新報)는 이렇게 보도했다.
「평양의 大屠殺(로이터 6일 東京電). 조선 서북 평양지방에서 야간에 폭동이 발생하여 華人 29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중상을 당하고 일본경찰 3명도 중상을 당했다. 폭동은 밤 9시에 발생하여 6일 새벽 4시에 그쳤다. 한인은 화인의 가옥 100여 곳을 훼손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華人을 도로 한 가운데로 끌고 나와 30여명을 도살하였고 13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폭 당시 경찰서로 피한 자들은 부상을 면했다. 폭동이 일어난 후 경찰과소방대는 즉시 출동하여 질서 회복에 노력하고 조선인 100여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5천여명의 조선인은 계속 화인을 구타하였고 다음날 7시에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군사당국은 폭동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군대에게 필요시 경찰을 원조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로이터 6일 東京電,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7쪽에서 재인용
시사신보(時事新報)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중에서 동삼성 민보(東三省民報), 성시보(醒時報)와 함께 반일 색채가 제일 강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8) 그런데도 일본경찰이 부상당한 것을 보도했다. 그만큼 폭동이 격렬했던 걸 알 수 있다.
당시 군중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유언비어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적극참여했다.
『오후 11시, 이 때는 벌서 평양은 북에서부터 남으로 중국인의 상점과 가옥은 한 개를 남기지 않고 전부 부서진 때엇섯다. 누구의 입에선가 무서운 유언이 퍼젓다.
「영후탕(중국인 목욕장)에서 목욕하든 조선인 4명이 자살되엇다」
「대치령리(부외)에서 조선인 30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되엇다」
「서성리에서 중국인이 작당하야 무기를 가지고 조선인을 살해하며 성 안(부내)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장춘에서는 동포 60명이 학살되엇단다」
비상시기의 군중을 선동하는 류언과 비어는 실로 위대한 힘을 가젓다. 냉정에 도라가면 상식으로써 판단될 허무맹랑한 소리가 마츰내 전율할 살인극을 연출하고야 마랏다.
집을 부스고 물건을 찢고 깨트린 것으로써 고만인 줄 알고 일시 피햇다가 제각기 잔해만 남은 가구등을 수습하랴든 중국인은 이 때부터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야 다리가 뛰는 대로 다라날 수 밖에 없엇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전주ㅅ골 중국인 목깐탕에는 때마츰 조선 사람 욕객이 7, 8인 잇섯는데, 이 소동이 시작되자 목깐탕 주인 중국인은 칼을 들고 탕으로 뛰여들어가서 벍어버슨 욕객들을 모도 죽엿다...
-료정동화원에는 유흥객이 몃 사람 잇섯는데 소동이 시작되자 중국인들이 칼을 들고 객실에 뛰어 들어가서, 손님이며 기생을 모도 죽엿다...
-모상관에는 조선인 고인이 몇이 잇섯는데, 모도 참살을 당하엿다...
일견 그럴듯한 이런 소리들을 서로 주고 바드며 흥분된 군중들은 포목찢기에 분주하엿다.
…
몰려오는 군중들에게는 또 한가지의 새로운 풍설이 떠돌앗다. 지금 어둑신한 골목에는, 중국인들이 칼을 품고 숨어 잇서서, 통행인들을 함부로 살육을 한다 하는 것이엇다.
아직것 너무도 긔괴한 관경들 때문에 꿈과 가튼 마음으로 구경을 다니든 나도 이 풍설을 귀로 하고는 가슴이 선뜩하엿다. 례배당에 갓든 아이들이 인제는 집에 돌아왓다. 나는 즉시 파출소로 뛰처 들어가서, 집에 소란 통에 조선인의-그 가운데로 아이들의 사생자나 업섯나. 중국인에게 참변을 안보앗다 할지라도, 소란통에 밟혀서 상한 사람이라도 업는가고 물어 보앗다. 아직것 알을 한안에서는 조선ㅅ사람은 경상자 하나도 나지 안헛스며, 목깐탕의 참변 요릿집의 참변 운운도 모도 모도 풍설에 지나지 안는다 하는 것이엇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결국 오기영이 말한대로 "전율할 살인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7월3일 이후 평양)
「'''유방이 양쪽으로 잘려나가고, 임산부도 참혹하게 살육당했으며 심지어 땅바닥에 엎어져 우는 화교 또한 밟혀 피 떡이 되었다'''」
「朝鮮避難華僑之一封血淚書」(1931. 7), 萬寶山事件及朝鮮排華慘案, 中國國民黨中央宣傳執行委員會, 南京, 1931, 56쪽,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4쪽에서 재인용
저 신문에 따르면 "참혹하게 살육"당했다고 한다. 그럼 그 "참혹하게 살육"했다는 건 어느정도일까?
「[世界文化社 平壤訊]평양 법원 8월 19일 화교 慘殺大暴動 사건에 대한 심리가 있었다.
범인은 모두 230명이고 주범은 金連植, 鄭良善, 高元圭 등 3인이었다. 검사는 3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하지만 3인은 모두 항변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문서의 내용과 3인의 공술에 근거하면, 3인은 7월 7일 저녁 8시 평양 교외 江東郡 大成里에서 화교 縢欽和(37세)의 집을 습격하여 등씨를 구타하고 날카로운 톱으로 그의 다리 한쪽을 자르고 곤봉으로 내려쳐 죽였다. 범행 동기는 피고의 공술에 따르면 이러했다. 7월 1일 평양시내의 각 신문에 만주지방의 韓僑 200명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게재되었음을 봤을 때 피고의 사촌형 및 친척 모두 3년 전에 만주로 이주하였고 그 주거지가 長春에서 멀지않았기 때문에 필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으로 판단해 크게 흥분하였다. 대성리로 돌아와 바로 경찰서에 관련사실의 확인을 문의한 결과 鮮僑의 피살소식이 확실하다는 것을알고서 범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자 3인은 크게 억울함을 호 소하였다. 나머지 227명의 범인은 살인ㆍ방화의 죄로 기소되어 再審을 기약해야 했다.범인 모두는 현재 자신들이 이용당한 후 일본인에 의해 심판받는 데에 대해 극히 불만을 느끼고 감옥 내에서 여러 차례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平壤暴動首犯之供詞」, 中央日報, 1931. 8. 28,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2쪽에서 재인용
이런 살육이 일어난 곳은 한, 두곳이 아니다. 평양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죽은 어린애를 죽은 줄도 모르고 힘껏 붓안은 채 경찰서로 도망해 와서 비로소 내자의 시체되엇슴을 발견하는 모성...젖 빠는 어린애를 껴안은 채 부축되어 서로 와서 땅 바닥에 뉘이자 숨이 넘는 모성. 시내는 완전히 XXX상태다.
곳곳에서 살인은 공공연히 XX의 XXX에(!) 감행되엇다.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통쾌에 취해버렷다. 3, 4명 내지 6, 7명식 피흐르는 곤봉을 든 장정을 앞세우고 2, 3백명식 무리를 지어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마자 죽을 사람을 찾아서 헤맨다.
「여기 잇다!」한 마듸의 웨침이 떠러지면 발견된 중국인은 10분이 못 지나서 살려달라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시체가 되어버린다.
-늙은이의 시체의 안면에 구더버린 공포의 빛! 고사리같은 두 주먹을 엡브장스럽게 쥐인채 두 눈을 말둥말뭉 뜨고 땅바닥에 엎어저 잇든 영아의 시체!
날이 밝앗다. 간밤의 무참은 숨김 없이 드러낫다. 길 우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하야 보행좇아 곤란하고 전선에는 찌저진 포목류가 걸려서 새벽 바람에 건들거리고 잇다. 폐허다! 문허진 로마성인들 여기서 더하엿으랴. 곳곳에서 중국인 시체는 발견되엇다. 서성리 조성암(중국인)의 집에서는 일시에 10개의 시체를 발견하엿다. 피살된 자, 적어도 백을 넘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드러맞고야 말앗다.
아침부터 경관은 무장을 하엿다. 중대가 출동하고 인근에서 응원경관대가 오고-그런 중에서도 백주에 다시 재습 삼습-XX의 XX로 피난 장소에 가든 중국인이 중도에서도 타살되고 목숨이 귀하야 8, 9명이 한 곳에 숨엇다가 몰사를 하는 등. 재습, 삼습에서 공책 한 권이라도 그대로 내버려진 놈이 잇으면 마자 찢어버렷다. 잉크병 한 개라도 거저 내버리기 아까웟는지 쓰레기통에다 맛장구를 처서 죄 없는 쓰레기통이 붉고, 푸른 땀을 흘리고 섯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두껍게 싸힌 포목들아대서 중국인의 시체(뒤에 소생하엿다 한다) 하나가 발견되여, 구루마에 실리워 경찰서로 갓다.
이 관앞 상관가를 떠나서 나는 중국인 료리점가를 가보려 대동문 거리로 빼처서 나왓다.
대동문 아페서 강안통으로 우 춘관아페까지 가보매, 우 춘관도 모도 문이 부서저 나가고, 텅 뷔인 집에는 전등만 밝아잇지 인귀척은 업스며 그 조금 아페는 중국노동자의 시체(인력거꾼인듯)하나이 지키는 사람도 업시 구경꾼도 업시 행길에 누워잇섯서, 나를 소스러치게 하엿다.
몃 집 더 올라가서, 장춘관 건너편에 구경꾼 4, 5인이 들러서 잇기에 갓가히 가보며 중국인 시체둘이 덧두기어 잇섯다. 홍승루도 모도 문이 부서지고 그 집 아페도 시체가 잇섯다(고 귀억된다)
대동자동차부 앞에는 허리가 기억자로 뒤로 부러진 중국인이 아직 채 죽지는 안코 단말마의 신음을 발하고 잇고, 그 겻헤 다른 중국인 시체가 하나 잇고, 순사가 이 시체를 차고로 끌어 드리라는등 실타는등 다투고 잇섯다. 그러나 여기는 폭행군이 벌서 다녀간 뒤라, 비교적 조용하엿다.
료정가를 다 보고, 다시 아까의 관앞으로 돌아가 보려고 신창리 네거리까지 가매, 저편 보이는 관아페서는, 산악이 무너지는듯한 수만명의 함성이 울리기 시작하엿다. 그래서 그리로 띄여 갈 때에, 관앞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물껼이 이리로 밀려오기 시작하엿다. 그와 동시에, 기마순사의 모양이 비로소 여기저기서 번드기엇다. 군중은 긔마경관에게 몰리워서, 이리로 밀려 오는 것이엇다.
오늘밤의 돌발사건에 대하여, 인제야 경찰당국의 방침이 작정되여, 무장경관으로 하여금 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이엇다.
…
금만 흥분된 일이 잇서도 잠을 못이루는 나는, 이날 밤 가족들은 모도 피곤하여 잘 때도, 잠을 들지를 못하엿다가 새벽 다섯시쯤 후보가 궁금하여 다시 집을 빠저 나왓다.
백일하에 폭로된 참경!
범수머리에서부터 관앞까지 경관과 소방대로 철통같이 에워싸고, 통행을 금지한 이 평양의 간선도로는 무릅까지 빠질만치 각색의 비단포목으로 무치엇고, 전차 전등, 전화, 전동력의 각 전선에 역시 각색의 비단이 느리워 잇서서, 그것은 마치 때아닌 만함식이엇다. 거기를 여기저기 무장한 경관이 지키고 잇고, 소방수들은 도로에 덥힌 필육을 것노라고 야단들 하엿다. 구경꾼들이 벌서 경관망의 박게는 백 둘러서 잇다. 잠시간 이것을 구경꾼들 뒤에서 보다가, 나는 구경꾼들 틈을 헤치고, 그 아페 잇는 경관망까지 헤치고, 폭풍우 지난 현장에 발을 드려놓앗다. 경관은 나를 신문기자나 검사국원으로라도 보앗는지 아모말 업시 통과시켜 주엇다.
거기 들어선 나는 어마어마한 경관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면서, 어젯밤,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파괴당한 중국인상점들을 집마다 들여다보면서, 세계 개벽이래 인류가 아직 듯도 보도 못한 「비단보도」의 길을 더듬엇다.
삿젼ㅅ골 압흘 지나다가, 나는 삿전ㅅ골 어떤 집 아페 서 잇는 무장경관의 표정이 심상치 안흔 것을 보고, 거리를 버서나서 그 골목으로 들어갓다. 그러고 서슴지 안코 경관이 지키고 잇는 집 대문으로 쑥 들어섯다. 들어서매 나의 지인인 몃 몃 신문긔자도 벌서 그 집에 들어와 잇섯다.
그 집 툇마루에 중국녀인의 시체가 하나 업드려 잇섯다. 광에 중국인들이 업드려 잇섯다. 역시 시체인줄 알고 가까히 가보매, 약간 호흡이 잇는 것이 아직 체 죽지는 안헛스며, (지금까지도 이 점은 알아보지 못하엿지만) 그 체격으로 보아서 17, 8세의 소년인 듯 시펏다. 그러고 그겻헤는-나는 그것이 영아시인지 혹은 셀로이드인형인지를 지금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영아라면 생후 3, 4개월 박게는 안되엿슬 것이다. 그것이 분홍빛이 도는 점으로 보아서는 혹은 인형인 듯 싶기도 하지만, 벍어벗은 그 물체의 국부(그것은 게집에엇다)까지 똑똑이 조각된 점으로 보아서는 인형으로 볼 수가 업섯다. 나는 잠시 허리를 굽으리고 그것을 굽어보앗다. 무엇인지 정체를 밝혀보려는 호기심으로, 손까락으로 만저보고도 시펏지만, 만약 그것이 영아시이면, 이 후에 손가락에 감할 불쾌한 추억 때문에 만저 보지도 못하고 그냥 굽어보고만 잇섯다.
「쉬야. 쉬야」
문득 뒤에서 들리는, 겁먹은 이 소리. 돌아보니 웬 조선노인이- 아니 조선옷을 입은 중국노인이 빈사의 소년들을 부르는 것이엇다. 이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잇서서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커다란 수획이엇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경악도 아니엇다. 비애도 아니엇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엇다. 그것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이엇다. 그의 입이 들먹거리지 않고 그의 입에서 음성만 나오지 안흐면 그것은 명공이 깍가노흔 한 개의 사인상이랄 수박게 업는 무표정한 긔게적 얼굴이엇다. 나는, 잠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노라고 다른 데 주의치 못하다가, 노인의 아페서 무엇이 음적거리는 것이 걸핏 보이므로 그리로 눈을 떠러트럿다.
거기는 너덧살쯤 난 중국 어린애가 하나 잇섯다. 노인의 다리를 두 팔로 잔뜩 부둥켜 안고 잇는 그 어린애의 한편 귀와 그 근처의 가죽은 찢어저 느러지고, 그 편쪽 눈도 업서젓스며 입도 찌저진 정시치 못할 참혹한 형상이엇다. 어린애는 울지도 안코 아버지인지 한아버지 인지의 다리를 부둥켜 안코 몸만 와들와들 떨고잇섯다.
나는 창황히 그 집을 뒤로 하엿다. 더 볼 용긔가 업섯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조선하층민은 주거 시설이 변변치 못 했다. 그렇기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말했듯이 "조선인은 여름에 집 밖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9)
평양은 그런 점이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곳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집 밖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금방 대규모 군중이 되서 모여들었고 집단으로 테러를 벌였다.
평양은 만주와 아주 근접했다. 재만한인과 서로 관련있다는 측면에서는 평양이 인천보다 긴밀했다. 그리고 평양에서는 본인이 본인의 주변사람이 만주를 직접 체험한 사람도 많았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2) 그러나 신의주처럼 아주 가깝지도 않았다. 신의주는 국경도시였다. 국경 경계가 바로 닿는 곳이기에 국경경계를 넘어서 조선인과 중국인끼리 체육경기를 할 수 있을정도였고 실제 직접 교류가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화교와 조선인의 사회적 대립이 심할 때 화교의 사회적 공간이 평양, 인천보단 덜 위축되고 축소됐다.(이은자,오미일, 1920-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의 화공과 사회적 공간, 史叢79(2013.5.31), 349~352,354)
박정현 교수는 "평양에서는 1927년 화교배척사건 때 거의 피해를 보지않았기 때문에 인천이나 경성 등 다른 대도시처럼 중국인들이 미리 대비하거나 대피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2)
주일중국공사는 평양에서 재조화교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로 평양에 중국영사관이 없던 점을 지적하였다.(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2쪽)
한 일본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세 소요 사건(3.1 운동 - 정병욱) 때 일본 민간인으로 살해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해하면 큰일이라는 것을 조선인폭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동(반중국인 폭동 - 인용자) 에서 죽은 자가 많은 것을 보면 약자에게는 멋대로 잔학하게 하면서 강한 자에는 약해진다는 것일까』
(酒井敏雄『日本統治下の朝鮮北鎭の歷史』 草思社, 2003, 158~159쪽,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70쪽에서 재인용)
오기영 선생도 비슷한 의견을 말했다.
『이날 오후에는 천여 명 군중이 기빨을 선두로 「용감한 정예병」(!) 30여 명을 태운 화물 자동차를 앞세우고 기림리로 재습의 장도(!)를 떠낫다. 여기서는 필경 1명의 총살자와 2명의 중상자를 내엇다.
그러나 이것은 경관의 발포에 의함이엇고 중국인은 결코 반항치 않앗다. 군중은 반항 없는 약자에게 용감하엿든 것이다. 이날 밤에는 다시 부외의 중국인 가옥을 닥치는 대로 충화하엿다. 밤새도록 평양성 밖에는 불꼿이 뻐처 잇섯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중국 총영사는 7월 3일날 총독부에게 화교를 무장경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7월 6일이 되서야 이루어졌고, 30여명이 구타를 당하다 살해된 현장에서도 경찰은 현장에 없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60)
한 중국언론은 이런 보도를 했다. 당시 일본경찰이 폭동이 심각해지 전까지 잔압에 소홀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나온다.
『또 일본이 고용한 순사 보조는 대부분 한국인이라 분명히 폭동을 도운 흔적이 있다』(「韓人暴行列國同心憤激」 1931년 7월 12일, 4면, 申報 302쪽., )
이 폭동에서 조선인의 감정이 관련되어있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5)
평양에선 7월 8일이 되서야 경성의 조선총독부 경관강습소 간부 이후 강습생 150명이 도착해서 사태수습을 했는데 너무 늦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쪽) 평양의 피난화교는 7월 7일에는 5천여명에 달했다. 이처럼 많은 피난민들이 함께 생활하는 피난민수용소에서는 계절적 요인으로 인하여 전염병 환자가 속출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쪽)
이 사건때문에 평양에서 중국인을 구제하기 위해 '평양사회단체 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의 대표인 오윤선 선생과 조만식 선생은 일제의 진압이 너무나 무능력했던 점을 따지기 위해 10일 오후 3시에 도청으로 가서 평남지사를 만났다. 대표들은 '경관이 보고 있는데도 살상이 일어났고 무장경관이 경계를 시작한 2일부터도 중국인 가옥을 향해 습격, 파괴, 방화가 있던 것'을 따지며 '무능했거나 무성의했음'을 따졌고 '중국인을 수용한 곳은 위생이 극히 나쁘니 시급히 개선방침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 1931.07.13)
동북지방정권은 귀국한 화교를 적극 수용했다. 1931년 화교배척 당시 많은 화교들은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귀국하였는데 대부분은 조선과 가장 가까운 요녕성을 골랐다. 조선에 인접한 안둥현(安東縣)에서는 화교배척이 일어난 뒤 7월 7일까지 귀국한 화교가 2000여명에 달했고, 7월 10일까지 3700여명이 도착하였다. 동북지방정부는 이미 귀국한 화교들을 수용했고, 앞으로 귀국할 인원을 대비해 압록강에서 선박으로 화교를 인도하게 하였따. 7월 10일까지 안동현의 각 여관과 가옥에 거주하게 된 화교는 모두 3000여명이였고 7월말까지는 9,000여명에 이렀다. 화교들에게 식료품도 제공하였고 당시는 여름철이라 전염병을 막기위해 의료서비스도 제공하였다. 피난한 화교들중 고향으로 돌아기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는 귀향경비를 지급했다. 조선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화교들이 있으면 동북정부과 직접 일본과 교섭을 맡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특별기부금을 모금해 화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석사학위논문 - 최효명, 만보산사건(1931) 직후 화교배척사건과 배일운동의 성격, 2015, 32)
평양지역 사망자수는 도부청(道府廳)조사결과는 95명인데 중국측 조사를 따르면 109명이다. 평양중화상회의 9월 13일 피해조사 보고서를 따르면 사망자수는 남자 106명, 여자 7명, 어린이 8명 등 총 121명이다. 중화민국외교부 조회에서는 1931 8월 22일까지 파악된 사망자의 총수는 121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국제연합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던 顧維鈞의 보고서를 따르면 평양지역 사망자는 133명이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30~31, 인천학연구 4, 2005.2,
236~237)
평남경찰부장 야스나가 노보루는 이번일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 밑의 평양경찰서장도 사표를 제출했다. (동아일보 1931.07. 07) 야스나가 노보루는 임도사무관이였다가 1931년 1월 12일 발표에 따라 평안남도경찰부장이 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15일)
7
한국에서 이 사건을 직접 다룬 소설은 현재까지는 없다. 다만 중요하게 영향받은 소설은 있다. 그 소설을 쓴 사람은 그 유명한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당시 평양 화교학살 당시 참사를 목격했다. 그 현장에 끌려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1934년 12월 1일에 그것을 수기로 썼다. 그 수기를 보면 군중들의 학살을 잔인했다. 그런데 김동인은 여기에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게 없다. 오히려 흥미거리로 보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보매, 집에는 아이들이며 아이들을 찾즈려 나갓든 사람이 모도 돌아와서, 오늘밤 견문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에 꼿이 한창피엇다. 아이들은 군중의 일지를 따라서 정거장까지 나가서 중국인들이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정거장에 모혀 잇는 것을 본 이야기를 한다. 순사들이 경게하고 잇서서 손을 부치지 못하드란 이야기를 하며, 중국인잡화무역상을 파괴하는데서 주서 왓노라고 「안주のみ취분」 두 통을 자랑하며 겸하여, 어떤 사람들은 큰 보통이로 물건들을 싸가지고 지고 가더라는 이야기를 한다』
『「쉬야. 쉬야」
문득 뒤에서 들리는, 겁먹은 이 소리. 돌아보니 웬 조선노인이- 아니 조선옷을 입은 중국노인이 빈사의 소년들을 부르는 것이엇다. 이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잇서서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커다란 수획이엇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경악도 아니엇다. 비애도 아니엇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엇다. 그것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이엇다. 그의 입이 들먹거리지 않고 그의 입에서 음성만 나오지 안흐면 그것은 명공이 깍가노흔 한 개의 사인상이랄 수박게 업는 무표정한 긔게적 얼굴이엇다. 나는, 잠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노라고 다른 데 주의치 못하다가, 노인의 아페서 무엇이 음적거리는 것이 걸핏 보이므로 그리로 눈을 떠러트럿다.』
당시 현장에서는 화교가 군중에게 저항을 시도한 일도 있다. 김동인은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보기도한다.
『거기서 발을 떼어서, 군중들의 틈을 빠저서 나가려든 나는 몃 거름 못가서, 진긔한 한 개의 비희극을 보앗다.
어듸서 뛰처나왓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중국인이 수만명의 흥분된 군중 가운데 뛰처 들엇다. 그가 뛰처들은 겻헤는 마츰 다행히 순사가 한명 잇섯다. 왁하니 중국인에게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는 순사가 그 중국인을 보호하려 할 때에, 중국인은 어듸서 주섯는지 (그 근처 일대는 무릅에 닷토록 비단 포목 등으로 두껍게 더 폇는데) 돌맹이 한 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게냥을 하는 것이엇다.
미상불, 그는 너무 큰 공포 때문에 리성을 일헛든 것이다. 단 한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수 만명의 군중을 대항하려는 이 중국인의 행동은 성한 사람의 일로는 볼 수가 업다.』
그리고 김동인은 화교학살과 폭동, 테러를 보고 무언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 4월 '삼천리'에서 단편으로 쓴 픽션소설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붉은산이다.
붉은 산에서 정익호란 캐릭터가 나온다. 그 캐릭터는 평소에는 조선인을 괴롭혔고 사람들은 그자를 '삵'이라 부른다. 그러다 갑자기 조선인 소작농 송첨지가 중국인 지주에게 맞아죽는다. 이 송첨지는 '삵'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삵'은 이 일을 원인으로 지주에게 대들었다 맞아죽는다. 그리고 죽기전에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다. 재만조선인들은 애국가를 부른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개연성이 없다. 이상경 선생이 지적하듯 만주의 중국인과 이주한 조선인 사이에서는 문화 차이에 따라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이런 이야기는 없다. 또한 중국인 지주의 착취 때문에 소작농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도 없다. 수전 개간을 둘러싼 물리충돌이나 이것에 개입하는 일본 세력에 대한 묘사도 없다. 그런데 삵은 갑자기 중국인 지주에게 대든다. 삵은 조선인에게 암같은 존재였는데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점은 이미 옛날부터 지적받은 점인데 김흥규는 1977년에 「황폐한 삶과 영웅주의」(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7.03)에서 이점을 지적한 바 있다.(이상경, 김동인의 「붉은 산」의 동아시아적 수용- 작품 생산과 수용의 맥락.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250-251)
또한 이런 소설은 김동인의 기존 창작 경향과도 전혀 달랐다. 이전 김동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고 작품에서 계몽주의스런 요소를 드러내는 걸 부정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소설을 쑥 내민 것이다. 1931년 평양 화교 배척 폭동과 학살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붉은 산과 평양 화교 학살에 대한 연관성과 이에 대한 전문분석은 이상경 선생이 쓴 다음 논문을 참고하자.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7~110; 김동인의 「붉은 산」의 동아시아적 수용 - 작품 생산과 수용의 맥락,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249~255)
한국에서 대표되던 근대민족문학 중 하나였던 붉은산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것이다.
8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부에선 이것이 일본의 사주라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책임일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가 체험한 것으로 몇 가지 활례를 들어보겠다. 그 하나는 만주의 만보산 사건이며, 그 둘은 동경 대진재 사건인데, 그것은 모두가 터무니없는 일종의 낭설을 전포시킴으로써, 한․중이나 한․일 간에 정략적인 유혈극을 연출케 한 일본군벌의 조작극이었다.』
(사설, 「사상 선전전을 적극 경계하라」, 동아일보, 1954.12.1.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6에서 재인용)
『동포의 수난 원인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친일분자를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 (중략) 망국근성의 소유자인 매족도배가 일정의 앞잡이로 가서 가위 경쟁적으로 중국인의 권익을 침해하였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만주사변의 서곡이었던 만보산 사건의 준비공작이었다.』
김우평, 「만보산 사건 전의 만주출장」, 동아일보, 1955.5.15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6에서 재인용)
이런 경우는 한 두사례가 아니다. (윤해동, “만보산 사건”과 동아시아 “기억의 터” -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SAI Vol.14, 2013. 486~488, 492~497 참고)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있다.
예로 일본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가설에 반박이 있다. 예로 이사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관동군 참모부군에서는 '만몽영유계획' 골격을 이미 1931년 6월에 갖춘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보산 충돌 음모 → 만주사변 이라는 음모가설은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이 부족한 비약이란 지적이다.
(손승회,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 萬寶山事件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02, 2009.6, 401)
그 밖의 사건의 원인을 음모론으로 보는 것에도 비판이나 반대의견들이 있다.
『화교배격사건의 원인을 일단 한국인의 화교배척감정(華僑排斥感情)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민족성 문제는 韓·中間을 이간질 시키려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것이고,이는 과거 개화파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중국인 멸시관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이 민족성 문제가 화교배격사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으나,직접적인 관련은 없기 때문』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3쪽
『이러한 일본의 책동설은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그것이 다 사실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일본의 대륙 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이 각본처럼 연결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책동설의 근거가 부족하고 만보산 사건에서 만주사변 에 이르는 연쇄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0
『일본의 책임은 확인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사주’ 혹은 ‘음모’를 사건의 주된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항일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고 하거나, 오보를 양산하고 식민지조선인을 사주하여 눈엣가시인 화교를 축출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서 배화폭동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더라도 1931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화교학살 폭동에 대해 한국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역사적 책임감과 그에 따른 엄중한 반성의 당위성까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3)
오히려 지구사로 따지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였다. 딱히 '제국의 인위적인 음모'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1927년의 배화폭동을 계기로 인적 교류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특히 중국노동자에 대한 단속문제가 한중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미 일본에서는 조선에 한 발 앞서,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경쟁, 관동대지진 때의 중국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 과정은 넒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학살과 1903년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금지령의 전개와 흡사하다. 즉, 공업화 정도에 따라 해외노동력이 유입될, 그리고 그를 흡수할 수요가 발생하기까지의 시간이 틀리기 때문에, 시차를 두면서 유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가 미국의 경우 19세기 중․후반 이었다면, 일본은 제1차 대전 호황기의 1910년대로 볼 수 있다. 외국노동자가 자국사회에 충격을 줄만한 규모로 유입되면, 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논리와는 별도로 사회갈등 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의 경우 그 시기는 1930년대였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단초가 나타나고 있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2
이런 사건은 이미 관동대지진 때도 일어났고, 그 이전에 미국에서 일어났으며 한국도 유사한 현상이 반복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음모론으로만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김준현은 『‘만보산 사태’를 획책한 배후로 일본을 지목한 상태에서는, 다른 갈등주체들의 능동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성도 내재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7)
학자들은 이점을 지적한다.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는 입을 모아 그 학살의 대 상에 갓난아이도 포함될 정도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배화 사건’은 조선인의 손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이민족에 대한 증오 공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기억은 ‘만보산 사건’의 기억보다 더욱 마음 편히 접근하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배화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억압되어 있었다. ‘배화 사건’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는 한국문학사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찾기 힘들며, 전국적 규모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이만큼 문학적 형상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9)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그러나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현 시점이야말로 ‘배화 사건’을 불러내어 그 의미와 파장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 일 것이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12)
『우리는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잊지 못한다. 당시의 기록과 증언을 찾아내고 그를 들이대면서 반성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참 불균형하다. '노근리'에는 치를 떨면서도 베트남에서 '우리'가 한 짓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반성하는 목소리는 의외로 작다. 꼭 마찬가지로 관동대학살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1931년 여름의 중국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전우용, 한국인의 화교관 -자가당착적인 민족서열의식, 실천문학 , 2001.8,91
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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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보고 난뒤 생각난것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반도에 독립운동아니 광복운동을 하였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