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의 야욕은 실로 엄청나다.
근래에 들어 오면서 많은 비밀들이 공개 또는 여론에 의하여 어떤 부분들은 본색을 들러 내는 일이 많이 있다.
물론 그 정체성을 숨기면서 공개하지만 말이다.
어떤 이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무섭고 두렵고 그들의 권세와 야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정도로 어마마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비밀을 지킬수가 있었어며 폭로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세상의 정치,군사,법률,기업가,지식인들,등등 모든 종류의 모든 직업과 모든 곳에 그들이 들어 가지 못할 곳이 없이 각 분야,각 계층에 들어가서 그들이 충성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다고 하지만 진작 그들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오직 높은 단계에 있는 이들만이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충성을 하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 오면서 역대 교황들이 말하였던 이야기들과 현재 교황이 말하고 있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이야기들이다.
교황권은 중세시대 천년동안 전무후무한 세력을 펼치면서 온 세계를 다스렸다.
현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사실은 교황권의 입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들의 권력 계보는 수많은 하부 조직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닌 비밀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하부 조직들에 소속이 되어 있는 자들은 아주 높은 지도층이 아니면 그 단체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진정한 목적을 알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아주 많은 부분에서 사회에 수많은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을 일들을 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것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것인데 왜 그리 유독 교황권에 대하여 말을 하는가 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종종 교황권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의 어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 시스템에서 계획하고 이루어 갈려는 것은 반 성경적이며 반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할 수 밖에 없도록
많은 일들을 꾸미고 추진하고 있는 중에 있다.
그러한 것의 일 부분이 일요일에 휴식를 하게하는 법령들을 만들고 추진중에 있어며,진실한 그리스도 인들이 성경으로 돌아 가야한다는 근본주의 사상을 아주 과격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동일시 하도록 만들기도 하며,오직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라고 천명한 성경 말씀을 아주 사람들의 입맞에 맟추어서 그리스도가 없어도 구원이 있다라고 하며,교황은 천사까지도 파문 할수 있다라고 하며 모든종교는 하나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에 많이 하였기에 오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또한 교황권은 중세 시대에 하던 방식으로 각 나라들을 교황권 지배하에 넣기 위하여 예수회를 앞장 세워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왔다.
그 중에 하나가 조선의 임진왜란이다.
먼저 일본 기독교 전래부터 알아본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 - 일본 동경대학 출판회에서 발간한 ‘일본사 가운데의 불교와 경교’에서는 9세기 이미 경교가 일본에 전파되어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일본 역사에서 일반적인 기독교 전래를 살펴보면 16세기 가톨릭 소속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씨가 뿌려졌다.
첫선교사는 프란체스코 사이베르 선교사로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뿌린 씨앗은 16세기 일본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 오다 노부나가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정책 때문에 1582년 교회가 200여개에 신도가 15만 명, 1590년에는 30만 명, 1600년에는 50-75만 명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총인구가 약 2천5백만이었던 것을 비교할 때 대단한 성과이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일본이 당시 포루투갈과 상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 문물(文物)교류가활발했고, 임진왜란 때 사용된 서구 총도 이때 함께 들어왔다.
일본의 역사에서 16-17세기(1549-1683년)의 기독교를 가리켜 기리시단’(吉利支丹;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이에 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의 포교를 공인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기독교 포교 공인은 그의 배불정책에 기인한 불교사원의 견제가 그 첫째요, 포르투칼과의 무역을 통한 대포와 화약구입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서현섭《지금도 일본은 있다》)
그러나 1587년 7월까지 기리시단이나 포루투갈인들에게 관대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신부들의 추방령과 기리시단의 금지를 선포했다.(사와 마사히코《일본 기독교사》P48~49 )
조일전쟁이 일어나기 6년전인 1586년 히데요시는 예수회 일본 대교구 부사(副師) 코엘류와 가스빠르의 면담에서“제국의 전역을 정복한 후엔 중국을 꼭 정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했으며, 대만에도 복속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어 이미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방송 캡쳐)
고니시를 비롯한 수많은 기리시단이 조일전쟁에 출동하였고, 신부들을 종군사제로 조선에 보냈으며, 조일전쟁에 출전했던 기리시단은 전체 일본군의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이 수치는 당시 많은 다이묘들이 기독교신자였다는 말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추방령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히데요시가 예수회 신부들을 조선으로 출병시켜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일본내에서의 포교를 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임진왜란과 기독교인 부대 -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20-25만 명으로 이중에는 기독교인이 상당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조선 정복의 선두로 나선 일본의 제 1군단장 고니찌 유찌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가 이끄는 선봉부대는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고니찌 또한 ‘어거스틴’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 영주였다. 이 부대는 개전 20일 만에 평양성에서 진격했지만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퇴각하여 경남 웅천에 성을 쌓고 진을 쳤다.
이때 고니찌는 일본 예수회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요청함에 따라 그레고리 세스페데스가 파송되었고, 경남 웅천에 1년간 머무르면서 일본군 진중에서 군인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일본 교인들은 도요도미 사후 박해가 끝난 것으로 보았지만, 도꾸가와의 에도 막부에서는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박해와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방송캡쳐)
기리시단의 십자가 깃발아래 귀베기, 코베기 등의 온갖 살상을 저질렀다.
임진 왜란 배후에는 예수회가 전적으로 후원하였다는 많은 증거들을 오늘 다시금 알아 보았다.
이처럼 예수회는 교황권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많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교황의 말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단체이다.
오늘날도 이들처럼 교황의 눈과 귀가 되어 충실한 애견노릇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혹시 알지 못하여 그들에게 종노릇 하는 이들이 있다면 빨리 알아 차리고 나오세요.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써 함께 성장하시기 바람니다.
첫댓글 카톨릭의 실체를 알려야하는군요~우리가 몰랐거나,,잊고 살았던 것을
깨우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