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법왕의 아들인데 위품이 뛰어나고 기상이 호걸다웠다. 그는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돌아가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서기 600년의 일이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어머니는 홀어머니로 왕도 남쪽의 못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못의 용한테 서기를 받고 무왕은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무왕은 어린시절을 어렵게 살면서 마를 캐어 살림을 꾸려갔기에 서동이라고 불렸고 익산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이 모든 이야기에 시원한 대답을 주지는 않는다. 42년 동안 백제를 다스린 그의 업적을 자세히 전해주기는커녕 아주 간략하다. 아마도 참고할 문헌이 전무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와 교전한 대목이 아홉 번,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게 세 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게 열 번 있었다는 짤막한 내용이다. 나머지는 가뭄이야기가 두 번 그리고는 궁납지를 팠고. 기암절벽이 있는 죽포 나루에서 노닐고 큰못에 배를 띄어 즐긴 글이 있고 왕흥사 절에 자주 들린 설이며, 웅진으로 행차한 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이룩한 고고학성과와 일본서기의 백제관련내용을 살피면 조금 더 알찬 당시 역사를 알 수 있다.
미륵사 창건
동양 최대라는 미륵사는 639년에 창건됐다. 그 서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금제사리단지와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그 창건연대와 발원자, 시주자가 밝혀진 것이다. 이 봉안기에는 백제 왕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짓고, 왕실의 안녕을 비는 내용을 적고 있다, 이 봉안기는 그 크기가 1.5 X 8.5 cm되는 금제 판에 북조체로 새겨져 있다. 이 봉안기에 발원자인 왕비는 좌평사택 출신이었다.
삼국유사 기이전을 보면 무왕은 그의 어머니가 홀로 서울 남쪽 못가에서 살면서 못 속의 용에서 서기를 받아 장(무왕의 이름)을 낳는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라 했다. 재주와 도량이 컸다. 마를 캐서 팔아 살았으므로 서동이라고 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라 서울로 가서 동요를 퍼트린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지어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 소문에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 유배될 때 몰래 따라 나선 서동과 정을 통하게 되고 백제로 와서 살게 됐는데 금이 많은 용화산에 와서 사자사 스님의 신통력으로 금을 나라에게 보내면서 인심을 얻게 되고 임금이 됐다는 것이다. 어느 날 무왕이 왕비와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니 미륵 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세우고, 경배를 하니 왕비는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고 싶습니다” 고 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지명 법사에게 못을 어떻게 메우면 좋겠냐고 묻자 스님이 신통력으로 하룻밤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를 이뤘다. 미륵 부처 세 개와 금당,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공신들을 보내서 도왔다.
이 절터는 발굴결과 세 절을 가지런히 지은 크나큰 가람이며 동탑, 서탑은 돌로 가운데 탑은 나무로 지었으며, 동서 직선상에 세워 졌음이 밝혀졌다. 금당도 세군데 있고 탑 높이는 14m가 넘는 육층 탑이었다. 미륵사의 미륵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미륵신앙은 당시 백제 뿐 아니라 신라, 왜에서도 유행하던 믿음이었다. 그 옛날 전륜(轉輪)성왕이 그랬듯이 무왕도 부처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온 힘을 다한 것이다. 최근에 미륵사지 서쪽 연못에서 나온 8세기 목간은 실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곧 백제시대에 쓰였을 수사가 하나에서 여덟까지 즉 하덥, 이더릅, 사답, 도삽, 닐곱, 여드름 등이 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 목간에 쓰인 구결 글자는 일본 가나의 원류가 구결 이였음을 밝혀 줬다.
왕흥사 창건
이 절은 서기 577년에 위덕왕 때 짓기 시작해 무왕 35년인 서기 634년에 이룩됐다. 특히 이 절은 물가에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으며, 왕은 늘 배를 타고 절로 들어가 향을 피웠다고 한다.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직선상에 놓인 가람으로 사리함이 발견된 목탑은 기단의 유구로 미뤄 오층탑으로 추측된다. 목탑터 심초석에 있는 사리 구멍에서 나온 사리함 겉에는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정유년(577년) 백제 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 고 적고 있다. 이로서 이 절의 창건 연대가 577년으로 확인된 것이다. 왕흥사는 57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장엄한 절이었다.
진왕국과 백제 불교 수용
서기 531년에 있었던 이와이 난리의 주모자 이와이 정권은 북규슈 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이며, 히고나라에 있던 백제 다무로가 세력을 키워 자란 왕권이며, 후쿠오카와 후젠 일대가 다 이 세력하에 있었다. 또한 니찌라를 낳은 히고 고을은 백제 영향 아래 6세기 말까지 호족이 존속하고 있었다. 니찌라는 백제관직 나솔까지 가진 백제관리이며, 그 고향 히고나라는 히쥬라고도 불렸던 백제 다무로가 있던 곳이었다. 이와이 난리 뒤에 떨어져 나간 세력이 후쿠오카 일대와 후젠 일대에서 힘을 키워 생긴 나라가 바로 진秦)왕국이다.
왜나라에는 왜노국을 비롯한 숱한 작은 나라가 일본 각처에 생겼다가 없어지곤 했으며, 이 현상이 7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진(秦)을 일본에서는 하다로 읽는다. 그런데 이 하다씨는 여러모로 유능한 씨족으로서 도요구니 뿐 아니라 긴끼로 퍼져 나가면서 왜나라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 했다. 백제 왕실의 가와찌 왕권을 하다씨가 5세기 6세기에 걸쳐 섬겼으며, 그 일족이 이루고 있던 북 규슈의 도요구니는 이와이 난리뒤에 따로 진왕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무왕과 왜와의 관계
무왕시대에도 사신과 불승이 백제와 왜나라 사이에 자주 오감을 일본서기는 전해준다. 601년에 사까모도 아라데와 오도모 구이가 백제에 사신으로 왔다가 왜로 돌아갔고 602년에는 백제 중 관륵이 백제에서 달력, 천문지리서, 점 책을 가져왔고 서생 3,4인을 골라서 간로꾸 밑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603년에는 불상을 하다 고을지기 가와가스에게 주어 고류지 절을 세웠다. 639년 가을에는 백제 대궁과 백제 신사를 짓고 12월에 구다라가와 물가에 구중 탑을 쌓았다. 그러나 641년 왜나라 당 유학생 겐리가 백제 아닌 신라를 거쳐 귀국하는 대목은 왜나라 외교정책에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는 징후였던 것이다.
백제의 문자문화와 유교
이나리야마 쇠칼에 새긴 개로왕의 이름 가운데 ‘로’자와 에다후나야다 쇠칼에 새긴 개로왕의 이름 가운데 ‘로’자와 6세기 초의 백제 목간에 쓰인 이름 스가로에서 ‘로’자의 서체가 빼닮았다. 이 다른 세 지역에서 글자꼴이 똑같은 까닭은 어떤 한 곳에서 필체가 쓰이기 시작했음을 뜻하며, 그 공통분모가 되는 곳은 백제 서울 가나구루이다. 그 동안에 밝혀진 금석문이나 목간 등에 남은 백제 문자는 그 연대가 4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인천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해서로 쓴 붓글씨로 논어 학습용으로 밝혀졌다. 논어를 400년대부터 백제사람들이 열심히 배웠다는 것이 증면되었다.
무령왕 시대 곧 6세기 초에는 오경박사를 왜나라로 보내 유학 전수에도 힘썼으며,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성왕과 위덕왕대에 불교를 왜나라에 전수했고 이 전통은 무왕대에도 이어졌음을 일본서기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유교에 관한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령대왕 이래로 대왜로 보낸 오경박사 파견기사를 통해 그 실태를 짐작할 수가 있다. 오경이란 주자학이전에 유교 고전인 다섯 책, 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를 가리키는바 특히 강남 양나라에는 오경원을 만들고 오경박사라는 제도를 차렸는데, 백제도 이 본을 따랐다. 곧 백제는 중국남조에서 꽃피운 남조 경학을 본 땄으며 낙양,장안에서 발달한 북조 경학과는 그 학풍이 달랐던 것이다. 백제는 이때 강남풍 한자 발음을 배웠고, 그대로 왜나라에 전수한 것이 그 이후에 일본은 백제 멸망 뒤 당나라에서 한문을 배우게 되어 일본에서 한자발음은 이 두가지 발음이 섞여 있다.
또한 백제에는 고이왕 260년에 벼슬제도로 여섯 좌평 곧 내신(총무), 내두(재정), 내법(의식), 위사(근위), 조정(사법), 병관(군사)을 두었으며 근초고왕 때는 고흥박사가 백제 역사책인 서기를 썼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이 책은 잃었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제본기’, ‘백제신찬', '백제기’라는 역사책 등 백제 망명객이 지은 책들이 존재했고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많은 참고가 된다. 이렇듯이 백제에는 개국이래로 이른 시기부터 문자생활을 해왔고 유교와 불교전통이 깊었음이 짐작된다.
바위동산
앞에서 백제는 남조 경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까 무왕시대에 이르러 임금이 동산놀이를 즐긴 기사가 자주 눈에 띈다. 무왕 35년(634)대목에 삼국사기 기사는 다음 글이 있다. 2월에 왕흥사가 이룩되었는데 그 절을 물가에 짓고 아롱진 빛깔로 화려하고 장엄했다. 왕은 늘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에는 궁정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이 십리 밖에서 물을 이끌어 대고 못 둘레 언덕에 배들을 심고,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신선이 노닌다는 방장선산을 꾸몄다.
최근에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익산 왕궁터 뒤편에 있는 후원의 존재는 당시의 바위동산도 기량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무왕 37년 (636)대목의 글을 보면, 3월에 임금은 뭇 신하를 거느리고 사비 가람 북쪽나루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 이 나루 양쪽 언덕에 돋은 바위와 보기 좋은 돌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아름다운 꽃과 드문 풀을 심었는데 마치 그림과 같았다. 임금님은 술을 마시고 흥취가 나서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과 번갈아 춤을 추며 사람들은 이곳을 대왕나루라고 불렀다. 그리고 팔월에는 뭇 신하와 바다를 바라보는 다락집에서 노닐었다.
39년(638) 대목은 봄 3월에 임금님이 왕비와 궁녀들과 배를 타고 큰 못에서 노닐었다. 이런 기사에서 보듯이 무왕은 자연을 사랑했고, 꽃과 바위가 있는 동상을 꾸미기도 했고 아름다운 궁녀와 더불어 노래와 춤을 즐기고 물에서 배타기를 즐겼음을 볼 수 있다. 백제는 이제 그 완숙한 문화를 노래로 춤으로 동산 꾸미기로 꽃피웠던 것이다. 익산에 꾸미다 만 궁터에 멋지게 꾸몄을 바위동산의 모습은 현재 남아있는 바위 수점만으로 그 모습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백제 동산바치 미찌꼬가 꾸몄다는 바위동산과 시울진 다리로 꾸미는 동산 전통은 그대로 일본 전통 정원의 기초를 마련했다. 동산 꾸미기 못지않게 백제 풍악을 왜나라에 전수해 준 부루바치 미마미 이야기도 백제 음악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2년 동안 백제를 다스린 무왕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다. 고구려나 신라와 국경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라 운명이 걸리는 큰 전쟁은 없었다. 그렇기에 왕흥사와 같은 아름답고 자엄한 절을 지을 수 있었고, 동양에서 가장 큰 가람인 미륵사 절을 지을 수 있었다. 그것도 탑과 금당을 갖춘 절을 세 개나 가지런히 지어낸 것이다. 아마도 이 시대에 만들었을 능산리 절터에서 건진 대향로는 공예 예술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공예로 말하면 왕흥사 탑자리에 있던 사리함과 공양품에서 보는 금붙이 몸치레는 그 섬세하고 아름다움이 극치에 이른다. 무왕이 지은 궁납지며 익산 궁터의 바위동산, 사비강가, 바위동산도 이 시대의 문화수준이 동산 꾸미는 데에도 높았음을 보이고 있고, 왜나라에도 백제 동산바치 부루바치가 큰 이바지를 했음을 일본세기는 적고 있다.
문자생활도 이제는 휴대용 벼루를 지니고 다닐 정도였음을 유물로 알 수 있고 중국 북조와 남조의 서체가 고루 쓰였던 것으로 봐서 중국 문화가 널리 받아드려지고 또 이웃나라에도 퍼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미륵사 절을 세우고 풍류를 즐기고 오경 유교로 나라를 다스리던 무왕의 나라 백제에는 유불선을 아우른 화랑도는 생겨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이 백제와 신라의 나라운명을 갈라놓은 실마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