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 올마이티]는 [브루스 올마이티]의 속편이다. 브루스 대신 에반이 나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똑같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브루스 올마이티]처럼 신의 역할은 흑인 모건 프리먼이 맡았다. 왜 신은 꼭 백인이어야 하는가? 기독교의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중에서 이반에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의 확인이요 믿음의 증거물이 되겠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재미를 주었던 [브루스 올마이티]와는 다르게 새로운 상상력 없이 똑같은 스토리 구조가 반복되는 [에반 올마이티]의 영화적 완성도는 낙제점이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성경 전체를 가지고 수백편의 영화도 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경의 단순 복제식 영화화가 아니라, 이 시대 대중들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어떤 가치의 발견이다.
잘 나가는 하원의원 에반(스티브 카렐 분)에게 찾아온 신. 그의 주문은 느닷없이 방주를 만들라는 것이다. 정석대로 에반은 이 요구를 거부한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수염은 자라나고 머리카락은 덥수룩해지며 고대 선지자들이 입었던 옷만 입을 수 있게 된다. 사정을 모르던 가족도, 동료 의원들도, 언론도 에반을 미치광이 취급한다.
결말은 상식대로 진행된다. 에반의 예언대로 둑이 터지고 홍수가 일어난다. 방주에 산 사람들만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온갖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에 오르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던 국회의원 실력자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이게 전부다.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상식선에서 밋밋하게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런 서사구조가 새로운 재미를 줄 수가 없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짐 캐리 대신 신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역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의 스티브 카렐이 등장하지만 당연히 연기력은 뒤떨어진다. 그저 놀라는 표정과 상심한 모습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끌고 나갈 수는 없다. 물론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짐 캐리의 브루스 놀란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지전능한 능력을 마구 사용하며 신나게 살다가 신의 존재를 깨닫는 겸허한 인간이 된다. 그러나 [브루스 올마이티]의 조연으로 등장했던 에반 백스터가 주연으로 나와서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에반 올마이티]의 에반은 처음부터 지지리 고생만 한다. 그러나 이런 사소함은 근본 컨셉의 변주라기보다는 단순 반복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에반의 방주를 찾아온 수많은 동물들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되었고,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상상력의 새로움은 없고 원전의 지루한 반복만 있는 영화, 그것이 톰 세디악 감독의 [에반 올마이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