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인터넷 대란 ‘웜바이러스’ 침투
2003년 1월 25일 오후 2시10분쯤 서울 가락동 정보보호진흥원에는 긴박한 전화벨이 잇따라 울려댔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드림라인으로부터 “정상적인 네트워크 소통에 엄청난 지장을 주는 이상 데이터가 폭주하고 있다.”는 일보가 날아든 것이다. 정보통신부와 정보보호진흥원은 서둘러 긴급 대응팀을 가동, 현황 파악과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30분쯤 지나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유·무선 인터넷 접속이 완전히 불통됐다. 사상 초유의 ‘인터넷 대란’이 발생한 것이다.
사태는 11시간여 만에 가까스로 수습됐다. 이번 사고로 국내 주요 유·무선 인터넷이 모두 다운된 것은 국내·외 인터넷 데이터 흐름을 연결하는 KT 혜화지사의 DNS(도메인 네임 시스템) 서버가 다운됐기 때문이었다. DNS란 인터넷 주소를 숫자로 바꿔주는 번역기로 인터넷 네트워크의 중추신경 기능을 한다.
이날 사태의 주범은 MS사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인 SQL의 허점을 이용한 웜바이러스였다. 하지만 이는 미국·대만·일본 등지에서도 발생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유무선 인터넷 시스템을 다운시키는 대형사고로 발전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사전에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또 KT·하나로통신·데이콤 등 주요 인터넷 업체들이 위험분산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선
[1990년] 미국의 영화배우 에바 가드너(Gardner, Ava) 사망
가드너[Gardner, Ava (Lavinia), 1922.12.24~1990.1.25]
19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스미스필드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때 뉴욕으로 가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특출한 미모 덕분에 MGM(Metro-Goldwyn-Mayer Inc: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사)과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주로 단역을 맡다가 《살인자들 The Killers》(1946)에서 버트 랭커스터(Burt Lancaster)의 상대역을 맡아 단숨에 스타덤에 뛰어올랐다.
이어 《헉스터 The Hucksters》(1947), 《원 터치 오브 비너스 One Touch of Venus》(1948), 뮤지컬영화 《쇼보트 Show Boat》(1951),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1952), 《맨발의 백작부인 The Barefoot Contessa》(1954) 등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허스키한 목소리와 매혹적인 자태로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섹스 심벌'로 꼽혔다.
이후 《모감보 Mogambo》(1953), 《보와니 정션 Bhowani Junction》(1956), 《온 더 비치 On the Beach》(1959), 《이과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1964) 등에서는 성격배우로 열연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모감보》에서는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의 상대역을 맡아 1953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1958년 MGM을 떠나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배우 미키 루니(Mickey Rooney), 밴드 리더 아티 쇼(Artie Shaw),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세 번 결혼했으며, 《애바, 나의 이야기 Ava, My Story》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naver
[1981년] 중국 급진 문혁파 '4인방'에 사형 판결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시위 모습
1981년 1월 25일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의 미망인 장칭[江靑]이 반혁명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마오쩌둥의 3번째 부인으로 마오쩌둥이 죽기 전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부르주아 중국문학에 대한 신랄한 공격과 탄압으로 문화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유력한 세력으로 떠오르자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공개재판을 받았다. 장칭과 장춘차오[張春橋]는 교수형, 왕훙원[王洪文]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징역 20년을 언도받았다. 장칭은 사형 판결을 받은 지 2년 뒤인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1991년 5월 14일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던 중 자살했다./브리태니커
[1980년] 이란 첫 대통령선거, 초대 대통령에 바니 사드르 당선 ← 바니 사드르
이란 외무장관 바니 사드르가 1980년 1월 28일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현실정치 감각이 뛰어난 온건한 경제전문가로 알려졌으며 파리 망명시 프랑스내 반팔레비세력과 합류, 이란인권위원회 창설을 도왔다.
사드르는 1979년 2월 이란회교혁명이 성공해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개선할 때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할 정도로 호메이니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그는 1933년 이란에서 태어나 1950년대초 과격민족주의자 모하메드 모사데그가 집권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모사데그가 미국 CIA가 배후조종한 정변으로 실각하자 지하로 잠입해 1963년 파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1980년 2월4일 취임한 사드르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강경파인 회교혁명평의회와의 권력충돌에서 패해 호메이니에 의해 6월 해임됐다. 결국 1981년 7월29일 이란을 탈출,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조선
[1971년] 우간다 군부쿠데타 발생, 아민 집권 ← 아민
1971년 1월 25일 아프리카 우간다 공화국의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의 성공으로 군사권을 장악해 대통령이 되었으며, 1976년에는 종신 대통령이 되어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아시아인과 다른 종족을 박해하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 폭정으로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78년말 탄자니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1년 뒤 탄자니아 군대와 우간다 민족해방전선(UNLF)이 우간다를 침공해 수도 캄팔라를 장악했다. 아민은 리비아로 피신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랑고족 지도자 밀턴 오보테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민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웨리 무세베니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1986년 여러 차례의 권력 충돌 끝에 무세베니가 우간다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브리태니커
[1933년] 아키노((Maria) Corazon Aquino) 출생 ← 아키노
"화해는 정의로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과 정의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 코라손 아키노
아키노는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대통령으로서 필리핀을 이끈 정치가이다. 마르코스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미망인으로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그녀는 남편이 암살당한 뒤 야당을 이끌었으며, 1986년 2월 연합야당의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아키노 정권은 새 헌법에 의한 국민투표에서 압승하며 토지개혁안 입법, 공산세력 유화책 실시 등의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막대한 외채, 경기 침체, 정치 내분, 자연재해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0년대초 들어 지지도가 크게 약화되었다. 1992년 아키노의 뒤를 이어 피델 라모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브리태니커
[1930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
결성 이후 한국독립당은 재건(1935. 9)·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그 조직이 변화했다. 1920년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임시정부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민족진영의 단합과 쇄신을 도모하고 종래의 파벌적 감정을 청산하여 해외독립운동전선을 통일하기 위해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 이사에는 김구(金九)·조완구(趙琬九)·김철(金澈)·안창호(安昌浩)·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 선임되었다. 이동녕·안창호·이유필·조완구·김두봉·안공근(安恭根) 등이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① 국내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② 엄밀한 조직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③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력을 도모한다는 당책과 당강을 작성했으며, 강력한 항일투쟁을 표방했다. 또한 기관지 〈상해신문 上海新聞〉을 발간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상황 등 독립운동에 관한 것을 선전했다. 그리고 의열투쟁으로 1932년 3월 이덕주(李德注)·유진만(兪鎭萬)의 한국 잠입 및 조선총독 처단계획과 같은 해 4월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의 일본관동군사령관 폭살계획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한편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중국본토 침입이 본격화되자, 1932년 11월 10일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혁명당·광복동지회 등과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했다./브리태니커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샤모니)
근대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 경기가 열린지 28년 만인 1924년 1월 25일 프랑스에서 첫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2월 5일까지 11일간 개최된 이 최초의 동계 올림픽 대회는 16개국에서 25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1921년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결정되어 성사된 동계올림픽은 꾸준한 준비 끝에 남프랑스에 있는 해발고도 1,000 m의 소도시인 샤모니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당시 독자적인 동계대회를 개최하던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국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험대회성격으로 치러진 1회 대회는 ‘국제동계올림픽주간(The International Winter Sports Week)’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작되었다. 첫 종합우승은 금메달 4개를 획득한 노르웨이가 차지하였으며 개인성적으로는 노르웨이의 하우그 선수가 3관왕의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1917년] 벨기에의 화학자 프리고진(Ilya Prigogine) 출생
모스크바 태생, 벨기에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프리고진(1917.1.25~2003.5.28)은 브뤼셀대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1년부터 모교 교수를 역임하며, 물리학·화학 연구소장(1959∼) 및 텍사스대학 통계열역학센터 소장(1967∼)을 겸임했다. 비가역과정(非可逆過程)의 열역학을 체계화하고, 산일구조(散逸構造)의 개념을 제출하여 거기서부터의 요동(搖動)을 통한 질서형성을 연구하는 등, 비평형개방계(非平衡開放系)의 물리학·화학을 일관적으로 추구하였다.
비평형 열역학의 기본을 이룬 산일함수를 체계화한 업적으로 197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1915년] 미국, 대륙횡단 전화선 개통
1915년 1월 25일, 미국의 뉴욕-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횡단 전화회선이 개통되었다. 1876년 3월 전선을 통해 음성을 전송하는 장치를 발명한 벨에게 특허를 주면서 시작된 전화의 역사가 거대한 대륙을 하나의 통화권으로 묶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미국의 장거리 통신사업은 1893년 보스턴과 시카고 사이에 연결된 도시간의 장거리 회선을 시작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보완하며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보였다. 장거리통신시 발생하는 신호의 손실을 막기 위한 증폭기(增幅機)가 개발되어 미국 전역의 전화통신망 가설이 가능해지고, 이후 1926년 단파중계에 의한 대양 횡단 통화시설이 도입되었다. 이어 수명이 긴 중계기 개발로 대양 바닥에 케이블을 깔아 통화하는 방법이 가능해짐으로써 1956년 영국에서 미국에 이르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가설되어 전 세계의 단일 통화권 실현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
[1888년] 독립운동가 지청천(池靑天) 장군 출생 ← 지청천
1888. 1. 25 ~ 1957. 1. 15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 충주(忠州). 호 백산(白山). 본명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1888년 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그 간부에 취임하였다.
청산리(靑山里)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병력을 이끌고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하였다.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만주를 벗어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유시(自由市)에 집결하였다. 흑하(黑河)사변으로 러시아혁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양기탁(梁起鐸)·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고, 그해 군민의회(軍民議會)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고, 1932년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 한 ·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무장해제당한 후 그 해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키고 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였다. 1947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882년] 버지니아 울프(Woolf, (Adeline) Virginia) 출생 ← 울프
1882. 1. 25 ~ 1941. 3. 28
영국 소설가 겸 비평가. 영국 런던 출생. 철학자이며 《영국 인명사전》의 편자인 L.스티븐의 딸이다. 빅토리아조 최고의 지성(知性)들이 모인 환경 속에서 주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세인트 에이브스의 별장에서 보낸 어릴 때의 여름철 경험이 그녀와 바다를 밀접하게 만들었다. 부모가 죽은 뒤로는 남동생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 ·문인 ·비평가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 ‘블룸즈버리그룹’이라고 하는 지적(知的) 집단을 만들었으며, 1905년부터는 《타임스》지(紙) 등에 문예비평을 써 왔고, 1912년 정치평론가인 L.S.울프와 결혼하였다.
1915년 처녀작 《출항》을, 1919년에는 《밤과 낮》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 소설형식을 따랐으나 1922년에 나온 《제이콥의 방》에서는 주인공이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과 주위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주는 인상을 대조시켜 그린 새로운 소설형식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수법을 보다 더 완숙시킨 작품이 《댈러웨이 부인》(1925)이었다. 그 사이 평론 《현대소설론》(1919)과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서는 또 새로운 실험적 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논하고,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진실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27년에는 소녀시절의 원체험(原體驗)의 서정적 승화라고도 할 수 있는 《등대로》를 발표,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를 추구하며 시간과 ‘진실’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였다. 친구 S.웨스트의 전기 《올랜도 Orlando》(1928)는 그와 같은 수법의 좋은 예이다. 1931년에 발표한 《물결 The Waves》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까우며 그녀의 사상의 궁극과 한계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발표한 《세월》(1937) 《막간(幕間) Between the Acts》(1941)에서는 또다시 전통적인 수법으로 돌아갔다.
이 밖에 문예평론집에 《일반독자 The Common Reader》(2권, 1925∼1932), 여성론 《나만의 방 A Room of One’s Own》(1929) 등이 있다. 1941년 3월 28일 우즈강(江)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원인은 소녀시절부터의 심한 신경증이 재발한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naver
[1886년] 한성주보 발간 ← 1886년 2월 22일,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이 한성주보에 게재한 근대광고의 효시 ‘덕상 세창양행 고백’.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갑신정변’으로 폐간된지 14개월 만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효시라고 볼 수 있으나 전 지면이 한문으로 인쇄되었고 정부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여 주사 사사 등 중급관리가 기자가 되고 인건비 제작비 등도 국비로 추렴했다는 점에서 ‘관보’의 테두리를 멀리 벗어날 수 없었다.
한지책자형의 양절(兩折)로 인쇄된 이 신문은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의 주간지였으며, 최초로 1886년 2월 22일자부터 상업광고를 실었다. 독일의 상사인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적된 적자 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박문국의 폐쇄와 함께 폐간됐다./조선
[1874년] 영국 작가 서머셋 모옴(Maugham, William Somerset) 출생 ← 서머셋 모옴
1874. 1. 25 ∼ 1962. 12. 16
198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고문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어머니가 죽고 2년 뒤에 아버지마저 죽자,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숙부 밑에서 자랐다.
한동안 독일에 유학한 뒤 런던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작가가 될 뜻을 세웠다고 한다.
1897년 처녀작인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Liza of Lambeth)>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런던의 빈민굴을 무대로 한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이었다. 97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는 작가생활로 들어가 소설ㆍ희곡 등을 계속 쓰다가 1907-08년 그의 희곡 4편이 런던의 4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됨으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성한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는 15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는 작자가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간에 대한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이며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으로 대표적 걸작이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의관으로 근무하다가 첩보부원이 되었으며, 17년에는 중요 임무를 띠고 혁명하의 러시아에 잠입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의 유미주의적인 태도는 화가 P.고갱의 전기에서 암시를 얻어 쓴 소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는데, 이 작품으로써 그의 작가적 지위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장편으로는 앞에서 든 2편 외에도 <과자와 맥주>(1930) <극장>(1937) <면도날>(1944) 등과 단편집 <나뭇잎의 하늘거림>(1921), 희곡 <순환>(1921초연) <높은 사람들>(1923), 자서전적 회상(回想) <서밍업>(1938) <어느 작가의 노트>(1949)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대중성을 존중하는 그의 소설의 특색은 평명하고 스스럼없는 문체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 나가면서 독자를 매혹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것은 복잡하고 불가해(不可解)한 존재임을 날카롭게 도려내 보이는 점에 있다. 그의 희곡은 17세기 이래의 영국의 독특한 풍속희극(風俗喜劇)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작품의 대다수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애독되고 있다.
[1793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사망
1741(영조 17) 서울~1793(정조 17)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회통〉·〈규장전운 奎章全韻〉·〈기전고 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 檢書廳記〉·〈시관소전 詩觀小傳〉·〈송사전 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 嬰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嬰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嬰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盎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759년] ‘올드랭사인’의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던 로버트 번스 출생
번스 [Burns, Robert, 1759.1.25~1796.7.21
스코틀랜드 에리셔 출생. 각지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는 틈틈이 옛 시와 가요를 익혔으며,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써서 자신의 사랑과 마을의 생활을 솔직하게 노래하였다. 최초의 시집 《주로 스코틀랜드 방언에 의한 시집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1786)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한때는 에든버러에서 문단생활도 하였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면서 옛 민요를 개작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에 공감하여 민족의 자유독립을 노래하여 당국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18세기 잉글랜드의 고전취미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샌터의 탬 Tam o’Shanter》(1791)을 비롯한 이야기시(詩)의 명작과, 《새앙쥐에게 To a Mouse》(1785)와 《두 마리의 개》처럼 동물을 통하여 인도주의적 사상을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역시 그의 진면목은 《둔 강둑 The Banks of Doon》(1791)이나 《빨갛고 빨간 장미 A Red, Red Rose》(1796)와 같이 자연과 여자를 노래한 서정시,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1788) 《호밀밭에서 Comin' through the rye》와 같은 가요에 있다. 지금도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naver
[1627년] 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 출생
보일 [Boyle, Robert, 1627.1.25~1691.12.30
아일랜드의 맨스터주(州) 리즈모어 출생.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 스쿨에 다녔다. 1641년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던 중 G.갈릴레이의 저서를 읽고 근대과학에 눈을 떴다. 1644년 귀국하자 런던에 4개월여 체류하면서 크롬웰 혁명파 인사들, 그리고 근대과학에 뜻을 둔 인사들과 사귀었다. 1646년 런던에 새로 생긴 과학자의 그룹 ‘인비저블 칼리지’에 가담하여 ‘자연과학은 인간생활에 유용하여야만 한다’는 F.베이컨 정신에 영향을 받았다. 이 모임에 가담한 것이 실험과학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647년 자비로 만든 실험실에서 의학과 화학의 실험을 시작하여 갈레노스식(式)의 낡은 의학에 반대하여 연금술이 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료수단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의료화학파의 사고방식에 따라 최초의 화학서적인 《독약을 의약품으로 바꾸는 일에 관해서》(1650)를 썼다.
1654년 인비저블 칼리지 회원들의 이동에 따라 옥스퍼드로 이사한 후 런던에 새로 생긴 또 하나의 신과학자 그룹, 즉 지금의 왕립협회의 전신인 옥스퍼드 그룹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가장 활동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1655년에 쓴 <4원소설 ·3원질설(原質說)을 입증한다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여러 가지 실험에 관한 고찰>에서는, 이미 아리스토렐레스와 파라셀수스의 설에 대한 비판이 엿보이는가 하면, 《서설(序說)》(1661)에서는 스콜라학파(學派)의 자연철학을 비판하여 실험이 지니는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요컨대 이제까지 소홀히 보아 넘겼던 침전물이나 증기(蒸氣) 등도 사실에 입각하여 포착, 그 화학반응을 전면적으로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자면 입자론(粒子論:원자론)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여 《입자철학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화학실험의 예》(1661)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실험주의와 입자철학은 주저 《회의적 화학자》(1661)에 잘 간추려져 있으며, 나아가 《질료(質料)와 형상(形相)에 관한 기원》(1666)에서는 입자철학을 다시 전면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저술을 하는 한편, 조수인 R.훅과 더불어, 공기 펌프를 만들어 대기(大氣) 입자의 존재로 말미암은 공기의 탄력을 설명하고 《공기의 탄력과 무게에 관한 학설의 옹호》(1662)를 저술함으로써 유명한 ‘보일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1661년 자기의 여러 가지 실험적 연구에서 추려 모은 《생리학 에세이》를 발표하여 과학으로서의 화학을 개척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후 주로 불과 공기의 구성요소의 연구를 계속하여, 불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빛에 관한 연구에서 ‘뉴턴의 원무늬’의 현상을 발견하였고 열에 관해서는 온도계의 표준 영점(零點) 규정을 제창하였으며, 또 열이 미립자의 운동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영국 혁명기에 봉착하였던 보일은 낡은 연금술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학을 단지 의학이나 산업에 유용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단계를 넘어서, 화학에 실험적 방법과 입자철학을 도입하여 화학 그 자체를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근대화학의 첫단계를 구축하였다. 왕립협회가 설립되자, 그 평의원(評議員)이 되었으며 1680년에는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naver
[1077년] 카노사의 굴욕 [Humiliation at Canossa]
1076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20 ?~1085)와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충돌, 파문과 폐위선언으로 서로 대립하였으나, 1077년 역대 황제들의 집권정책에 불만을 가진 제후들이 파문이 취소되지 않을 경우 왕을 폐위키로 결의함으로써 하인리히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자신이 폐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인리히는 같은 해 북(北)이탈리아의 카노사성(城)에 체재 중인 교황을 방문, 카노사성 밖의 눈 속에서 3일간 서서 굴욕적으로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교황은 독일 제후(諸侯)와 동맹할 수 있는 호기(好機)를 놓치게 된 반면, 황제는 시간을 벌게 되어, 실리(實利)면에서 황제의 정치적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nave
황제권과 교황권의 갈등
유럽의 문화공동체가 붕괴되게 된 원인중 가장 큰 것은 1077년에 발생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8~741)의 아들인 피핀(Pippin der Jungere, 714~768)은 약해빠진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 대신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왕이 되고는 싶지만 명분이 없어서 쉽사리 반란을 못 일으키고 있었는데 때마침 롬바르디아에서 서로마 제국으로 압박을 해서 교황인 스테파노 2세(Stephanus Ⅱ, ?~757)가 난감해 하고 있었다. 서로의 처지를 잘 알게되자 스테파노 2세가 피핀을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도유식을 통해서 명분과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피핀은 롬바르디아를 정벌하여 롬바르디아땅을 교황에게 선물을 한다. 이때부터 교황령 국가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752-754).
피핀의 아들인 카를대제(샤를마뉴, Charlemagne, 742.4.2~814) 때 이르러 서로마 교황인 레오 3세(Leo III, ?~816)를 도와(800.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서 레오 3세를 다시 교황으로)주어서 더욱더 왕권과 교황권의 관계는 두터워진다.
오토 1세(Otto I, 912~973) 때 이르러 교황인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의 파병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로 출정하고 962년 교황으로 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된다. 그 황제관을 받게 될 때 오토 1세는 요한 12세에게 "①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사람은 교황이 될 수 없다. ②서임권은 황제에게 있다." 라는 2가지 조항을 제시하고 요한 12세는 이 요구를 승인하였다.
이때까지 본 내용만 하더라도 황제와 교황의 관계에서 황제의 우위가 확실하였다. 오토 1세 때 이르러 황제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 졌고, 교황은 황제에게 어떠한 반항,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11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1017~1056)는 로마 교황을 3번이나 바꿨다. 그러나 그는 빨리 죽게되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가 황제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황제대신 어머니인 아그네스(Agnes)가 섭정을 하게된다. 남편과는 달리 아그네스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게 한다. 섭정이 끝나고 하인리히 4세가 통치를 할 때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20 ?~1085)가 1074년, 1075년 사순절 종교회의를 통해서 사제의 결혼금지령과 서임권을 교황에게 돌려라는 조안을 발표한다. 그가 이러한 발표를 하게된 이유는 이렇다.
사제의 결혼금지령을 통해서 사람, 성직자를 구분시켜서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고, 인간ㅡ교황ㅡ신 관계의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황제는 결혼을 하므로 인간에 속하였으며,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가하여 서임권을 교황의 권력에 포함시켜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화가나서 1076년 교황을 폐위한다. 이에 대항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1074년 사순절 종교회의에서 황제를 파문(excommunication)시킨다. 그 이후는 모두가 익히 아는 카노사의 굴욕이다.
가까스로 사면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편을 들었던 주변의 제후들을 1080년 까지 제거하여 결국 카노사의 굴욕 7년(1085)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킨다.
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십자군에 의해서 잠시 소강 상태(솔직히 십자군 전쟁에서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의 명령인 예루살렘의 정복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동부 유럽으로 진출한다거나)를 보이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종교회의(Lateran Council)에서 황제의 의미를 Rex와 Imperator로 둘로 나누었다. 곧 Rex는 불완전한 왕이고 Imperator는 완전한 왕을 말한다. 이러한 Imperator가 되기 위해서는 신의 승인 즉, 교황에 의한 대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은 교황의 승리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 유럽은 교황중심의 세계로 움직이게 되고 신 중심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naver
그밖에
2009년 군포 실종 20대 여성 살해 용의자 검거
2003년 대만, 한국에 대해 입국비자 면제
1999년 콜롬비아 지진
1989년 헌법재판소 첫 위헌 결정
1981년 김철호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정부, 비상계엄 전면 해제
1980년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명동 위장결혼식 불법집회사건의 윤보선에 징역2년, 함석헌에 징역 1년등을 선고
1977년 북한, 한국의 불가침협정제의를 거부하고,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
1973년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한성호 침몰 (사망, 실종 61명)
1970년 신민당, 한국독립당 흡수
1969년 미국-월맹, 파리평화회담 처음 개최
1965년 제2 한강교 개통
1957년 캐시미르 신헌법 발표. 인도에 편입
1957년 일본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사망
1956년 국회 국방부원면사건 조사결과 발표(군월동용FOA 원면 50만불어치 시중유출)
1954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 베를린 회의
1949년 소련과 동구5개국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창설
1947년 전설적 갱스터 알 카포네 사망
1929년 독립운동가 이의준 선생 순국
1925년 총독부, 1면1학교 계획 시달
1907년 러시아, 만주철병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