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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들(눅12:35-40)-2021.12.19
지금은 대림절기간입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통상적으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다리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초림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볼 때 믿는 자들에게 매 주일은 대림절인 셈입니다. 아직 초림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초림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성경은 기다리는 책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책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책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다림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초림 예수를 기다림이요, 초림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림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다만 세상에는 초림하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있고, 아직도 초림하신 예수를 영접치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기다림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대략 200회 정도로 추산할 수 있는데 기다림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기다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기다림,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기다림,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기다림,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는 자의 기다림, 자기 몸의 구속을 기다림(롬8:23),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림(눅2:25),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림(딛2:13), 주의 재림을 기다림(벧전1:13)등 수많은 기다림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다림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귀결이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종류의 기다림의 의미가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기다림을 통해 성공한 사람도 많고, 실패한 사람도 많습니다. 기다림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홍수를 기다리던 노아일 것입니다. 그는 무려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도 있고, 몇 날 혹은 몇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결정적으로 기다림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언약의 후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지쳤습니다.
그래서 10년을 기다리던 아브라함의 부부는 조급했습니다. 드디어 인간적인 꼼수를 계획합니다. 결국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생산하지요. 이는 아브라함의 가문과 그의 일생에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불씨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고통은 후손들이 대물림을 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기다림에 실패한 사람을 한 사람 더 들자면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상13장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된 지 2년차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아직도 사울의 군대는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고로 두려워서 흩어집니다. 아직 싸울만한 군사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은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전략이나 전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인 거예요. 싸움에 앞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통해 전쟁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으니 사울왕의 마음이 복잡했던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블레셋 군대는 진을 치고 쳐들어올 태세인데 백성들은 흩어지고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엘이 정한 기간이 되어도 길갈로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미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에서 자기를 칠일 동안 기다리라고 명령을 했거든요(삼상10:8).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이레를 기다려도 안 오는 것입니다. 마음은 조급하고 기다리던 사무엘은 오지 않고 사울 왕이 조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고를 칩니다. 사울이 직접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삼상13:9). 제사장이 있는 데 왕이 제사를 집도한 것은 월권입니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책망이 선포됩니다. 한마디로 사울이 망령된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여 백성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최후통첩입니다.
사울은 불과 몇 시간을 참지 못한 거예요. 물론 그도 할 이야기는 있었지요. 부득불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기다림에 실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나 버림을 받습니다. 그만큼 기다림이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믿는 자들이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잊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요즘 같은 초고속화 시대에 기다림은 미련하게 보이고 바보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겠습니까?
특별히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는 조급함을 부추기는 일등공신입니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문제는 믿는 자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기도응답을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혹은 조금만 기다렸으면 분명히 이길 수 있었을 텐데, 혹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은 일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저 아쉬움만 더할 뿐이지요. 신앙은 기다림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 믿음을 성숙하게 만들고 믿음을 복되게 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축복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자는 꿈이 없는 자요, 내일이 없는 자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이지요.
믿는 자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36절은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은 믿는 자들에게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성경의 마지막 문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 이 문장을 향해 달려온 책일는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다시 오실 예수를 향해 달려온 책이요, 믿는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깨어 있는 종의 비유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골자는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자기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기 집주인이 혼인잔치의 초대를 받아 어디론가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자기 주인이 언제 올지를 전혀 모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스케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집에 있는 종은 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자지 말고 깨어서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인이 올 때 문을 열어주어야 하거든요.
사람이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같이 시간과 정보가 정확한 시대에도 기다림은 피곤하게 하는데, 하물며 당시의 기다림은 피곤함을 넘어 지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어지간한 인내심이나 충성심이 없으면 불가능하겠지요. 주인이 언제 올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거든요. 본문은 자기 주인이 이경(밤10-2시 사이)에 올 지, 삼경(새벽2-6시 사이)에 올지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아니면 오다가 무슨 일이 생겨 그 밤에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날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종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편하게 누워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35절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라고 주문하십니다. 정말 피곤한 일이지요. 사람의 피를 말리게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경제성이 전혀 없는 무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영악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서 보면 정말 미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언제 올지 모르지만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문을 열어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1) 주인은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당연한 교훈은 주인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유사한 비유가 있지요. 마태복음25장의 천국의 비유입니다. 이른바 열 처녀의 비유지요.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같습니다. 열 명의 처녀들이 자기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올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반드시 신랑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열 명의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들이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로 말입니다. 처녀들은 모두 다 등을 가지고 기름도 가졌습니다. 물론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비상용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미련한 다섯 처녀들도 처음에는 등불을 밝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모두 다 졸고 잠을 잔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의 등불을 켠 채로 졸고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들 긴장감을 가진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 오자 처녀들의 등불이 약해지고 깜박거립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지요. 그런데 그때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다 잠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등잔불이 깜빡깜빡 꺼져갑니다. 그때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비한 기름을 등잔에 부어 등불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게는 준비한 기름이 없었습니다. 낭패였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갈 수 있는 등불이 꺼진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허둥지둥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도 자기들이 쓸 만큼의 기름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름을 나누어주고 나면 자기들 쓰기에도 부족한 것을 알았습니다. 거절당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파는 자들을 찾아가서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중에 어디로 가서 기름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결국 그녀들은 신랑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등불을 켜서 신랑을 맞이한 후에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하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이 닫히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 신랑 예수는 다시 오십니다. 다만 우리 생각에 신랑이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후서3장9절은 말씀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른바 주님의 재림이 우리 생각처럼 더딘 것은 아니지만, 더딘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릅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3:8). 우리의 관점으로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생각처럼 더딘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닙니다. 가장 적당한 타이밍에 오실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다시 오실 타이밍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땅에 주님의 신부가 채워질 때까지 말입니다. 지구촌에 그리스도의 신부가 다 채워지면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금은 지구촌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주님이 당신의 신부를 기다리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채워지면 신랑은 지체 없이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은 당신의 신부된 자를 찾고 계십니다.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랑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주님은 본문의 주인처럼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2) 종은 반드시 주인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인이 오실 것을 믿습니다. 이른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반드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언제 어느 시에 오실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집은 주인의 집이기 때문에 분명히 오십니다. 그리고 주인도 분명히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도 수없이 많은 곳에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반드시 다시 강림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림 예수를 기다림도 믿음이요, 재림 예수를 기다림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 예수를 믿는 자가 복된 것은 초림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옷을 입고 아기 예수의 신분으로 초림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절기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나는 중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막연히 아직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저 어리석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아직도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메시아를 지금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이방인들이야 하나님을 몰라서 그럴지라도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알되 자기들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초림하신 예수를 영접치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민족이요, 무지한 백성들입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남다르게 받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큰 소리를 칠지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치 못한 자는 성탄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 초림하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지요.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초림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시간표로 설명해보면 초림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재림 예수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영적 순서가 초림 예수를 만난 사람이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물론 초림 예수를 만남이나 재림 예수를 기다림이 시간적으로 큰 간극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시간차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적순서가 초림과 재림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영접했다함은 초림 예수를 만났다 함이요, 초림 예수를 만났다함은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른바 재림신앙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재림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처음부터 주님이 내안에 계시는지 여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는지의 여부를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수없이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장식합니다. 아람어로 마라나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이지요.
예수 믿는 자들의 소망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요즘 믿는 자들의 인사는 대부분 할렐루야, 혹은 샬롬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주로 마라나타였습니다. 그만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했던 것이지요. 초림하신 예수를 만났다면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직도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초림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주인은 반드시 행한대로 복을 주십니다
주인은 반드시 오십니다. 이른바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주인은 오셔서 행한대로 복을 주십니다. 본문 37절을 보십시다. 주인이 돌아올 때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주인이 돌아 올 때 깨어 있는 종들을 보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올 때까지 깨어서 자기를 기다리는 종들을 보신 주인이 얼마나 감동하시겠습니까? 주인은 종들에게 행한 대로 복을 주십니다. 주인이 주시는 복은 어떤 복일까요? 주인이 친히 허리에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감히 종들이 상상할 수 없는 복입니다.
종들이 주인으로부터 섬김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주인이 직접 종들을 섬겨주시는 것이지요. 그것도 마치 종처럼 허리에 띠를 띠시고 종들을 자리에 앉히신 후에 수종을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황공하지만 주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겨주셨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유월절을 앞두고 주님이 십자가에 잡히시기 전 세족식을 행하시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저녁을 잡수시던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인 체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이는 세상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섬김이 아닙니까? 항송하지만 최고의 복을 받은 것이지요.
그 복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복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 23편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말입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지요. 왕의 식탁에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것들이 즐비한 식탁입니다. 그것도 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직 나를 향한 잔치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을 예표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집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를 축복이지요. 이는 주인으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성도된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인이 오실 때까지 깨어 있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복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이 주인으로부터 그런 복을 받는 것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장차 우리 주님으로부터 이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다만 잘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잘 기다릴 줄 아는 성도라면 반드시 지금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지의 여부를 수시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3장5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십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내안에 계시는 주님을 믿을 때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예수를 기다리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아직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영접치 못하고 기다리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내 안에 오신 예수, 내안에 나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의 성전이 되어 살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최고로 복 받은 성도입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 기다리다가 낙심치 말고, 기다리다가 포기하지 말고, 성경의 약속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안하지만 초림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도 소중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의 대림절이 훨씬 더 복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떤 예수를 기다리십니까? 바라옵기는 모두 다 초림하신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에서 최고로 복된 사람입니다. 날마다 기다리십시오.
마치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다가 아기 예수를 영접한 시므온처럼 말입니다. 또한 과부된 지 팔십사 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아기 예수를 기다리던 선지자 안나 할머니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 기다림에 성공한 자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의 성도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대림절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복된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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