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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순' 신화의 마지막 現役… 우선희 핸드볼 국가대표]"아기도 갖고 싶었지만… 감독님이 '팀이 어렵다' 하면 뿌리치질 못해"
"런던올림픽(2012년)에서 메달을 못 딴 뒤 '이제는 아니다. 대표팀에 안 남겠다'고 밝혔어요. 일 년을 떠나 있었지요. 작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있기 전 감독님이 '팀이 어려우니 복귀해달라'고 했어요. … 불러주면 사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서른여섯 살은 인생이 한창 꽃필 때로 여겼는데, 운동선수에게는 안 그런 모양이다. 우선희 선수는 현재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최고참이다. 소위 '우생순' 선수 세대로, 국가대표 경력만 14년 차다. ―서른여섯 살의 운동선수 체력은? "감독님은 제게 마흔 살까지 뛸 수 있다고 해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은데요. "못 뛸 건 없어요.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2001년 제가 대표팀에 들어왔을 때 같이 뛰던 선수들은 다 떠났어요. 혼자가 됐어요. 저도 힘들 때가 있지만, 의지가 되는 동료가 없어요. 후배들에게 기댈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가족 앞에서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이 끝이라고 선언했어요." ―우 선수는 큰 대회가 끝날 때마다 '가정생활을 위해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왔지요. "감독님이 저를 필요로 해 전화를 걸어오면 뿌리치기가 어려웠어요. 저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고. '이번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뛰곤 했어요. 하지만 인천 아시안게임은 정말 끝이에요.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제가 결혼 10년 차에요. 합숙과 시합으로 남편과는 1년도 함께 못 산 것 같아요."
"(웃음) 솔직히 마음은 집이 편하고, 몸은 여기가 편해요. 집에 가면 밀린 빨래와 청소, 남편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남편은 이런 상황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남편은 직업군인이었는데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어요. 혼자 생활하면 불편하지요. 하지만 남편은 '나중에 당신에게 원망을 들을까 봐 내가 먼저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해요. 말이라도 고맙지요." 태릉선수촌에서 만나러 갈 때만 해도, 점프해서 골문을 향해 볼을 내리꽂는 득점력의 여왕(女王)은 쫙 벌어진 체격에 손도 솥뚜껑만 할 줄 알았다. 내 선입견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녀는 나타났다. ―손이 안 크군요. "핸드볼 선수로서 작은 편이죠. 그래서 볼을 꽉 못 쥐고 손바닥에 얹어서 슛을 날려요." ―공이 안 미끄러집니까? "신발 옆면에 왁스를 테이프로 붙여놓아요. 틈날 때마다 볼이 안 미끄러지게 손가락에 왁스를 묻히죠. 시합하고 난 공을 보면 왁스가 묻어 시커멓지요." ―항상 '우생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죠.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덴마크와 벌인 결승전은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명승부였지요. 시합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나요? "별로 안 남아 있어요. 시합마다 제정신으로 뛴 적이 없어요. '승부던지기' 명단에 저는 안 들어갔어요. 메달을 꼭 따야겠다는 마음보다, 그냥 졌다는 것에 아쉬움이 컸어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년)을 본 소감은 어땠나요?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저는 루마니아 프로리그에 있어요. 귀국한 뒤 단체 관람 기회가 있었는데 동료들이 '너는 분명히 울 거야'고 했을 때 '난 안 울어'라고 했어요. 영화는 사실과 픽션이 섞여 있었어요. 하지만 보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라 울컥했어요. 결승전을 마친 감독님이 코트에서 인터뷰하는 모습과 함께 선수들 개개인 사진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냥 펑펑 울었어요."
"없었어요. 영화는 결혼한 언니들 위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팀에서 본인의 존재감이 없었나요? "선수로서 최고 전성기였지요. '세계 베스트 7 선수'에 뽑혔으니까요." ―그때 '아줌마 선수들'의 실제 활약은? "선배 언니들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었고, 같이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대단한 힘이 됐지요." ―영화에서 나오는 이 선배 언니들보다 실제 시합에서는 우 선수가 더 잘 뛰었나요? "영화에는 그랬지만, 솔직히 말하면 언니들은 당시 시합을 많이 안 뛰었어요(웃음). 저는 예선부터 모든 시합에 풀로 뛰었어요. 마지막 골 찬스는 대부분 제게 올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팀 전체 득점의 70%를 했다고 해요." ―핸드볼 선수를 하게 된 계기는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 왔는데 핸드볼 선수를 뽑는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어요. 뛰고 노는 걸 좋아해 지원했지, 핸드볼이 뭔지도 몰랐어요. 체구도 조그마했어요. 선생님이 '너는 키가 작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해 핸드볼 팀이 있는 중·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체력이 너무 안 따라줘 힘들었어요. 저는 '상비군'이니 '주니어 대표'를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웬만한 선수들은 중·고교 때 뽑혀 대표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고 큰 대회에도 참가하거든요. 저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끈기와 성실성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나요? "어쨌든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했으니 다른 길이 없었어요. 대학에 진학하느냐 실업팀에 가느냐였어요." ―한국체육대학에 진학했지요? "거기 교수님으로부터 '너를 1학년 때부터 쭉 지켜봐 왔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죠. 고교 팀은 한체대에 자주 시합하러 갔는데 교수님이 그 많은 선수 중에서 저를 알아봤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덩쿵덩 뛰었어요. 희망이 생긴 거죠. 그때부터 '한체대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진학하면 될 일이지, 고집을 부릴 것까지야. "대학이나 실업팀이 특정 선수를 점찍으면 다른 선수들을 끼워 보냈어요. 한체대에서는 저 혼자만 받아주겠다고 하니, 감독님이 화가 나 '거기에 가지 마라'고 했어요." ―한체대에서 드디어 기량을 발휘했나요? "1학년 때 '핸드볼 겨울 큰 잔치'에 나갔는데 체력이 달려 8게임에서 두 골밖에 못 넣었어요. 교수님들 사이에서 '쟤를 잘못 뽑은 것 같다'는 말이 나왔어요." ―대체 집에서 얼마나 못 먹었기에. "운동을 하고 나면 얼굴과 온몸이 부었어요. 신발이 안 들어갔으니까요. 병원에 가보니 빈혈이었어요. 산소를 운반하는 혈액이 모자라니 조금만 뛰어도 호흡이 가빴던 거죠. 치료하고 나서 돌아와 보니 주전 자리는 선배 언니에게 넘어갔어요. 별로 빛을 못 보고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런데 2001년 대표팀에 발탁됐더군요. "졸업 후 광주시청에 입단했을 때였어요. 그해 첫 '큰 잔치'에 나갔는데 제게 슛할 기회가 많았어요. 뒤에서 언니들이 잘 패스해준 덕분이었지요. 대회가 끝나니 대표팀 명단에 제가 들어가 있었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제 방 침대에서 방방 뛰었다니까요." ―대표팀에 안 뽑혔으면 어떻게 풀렸을까요? "대학 4학년 때 선수로서 한계를 느껴 체육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어요. 쉬는 날인 토요일에는 밥도 못 먹고 밤 11시까지 노량진 학원에 가 앉아 있었어요. 운동을 병행하니 공부도 안 되고, 결국 포기하고 실업팀에 들어갔다가 국가대표가 된 거죠. 처음부터 '스타성' 있는 선수와 꾸준히 해서 늦게 피는 선수가 있는 것 같아요." ―은메달을 땄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나고 이듬해 결혼했지요? "대학 4년 때 남편을 사귀었어요. 올림픽을 치르면 선수로서 모든 걸 이룬 거죠. 스물일곱 살 때였어요. 아기도 낳고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인생이 계획대로 착착 되는 게 없었어요." "생활 때문이었지요. 신혼살림 기반이 없었어요. 마침 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이적 문제가 안 풀려 시간을 끌다가 루마니아로 갔어요. 루마니아 리그에서 뛰면서 대표팀에 불려오곤 했지요. 그러다 보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목표를 세웠지요." 베이징올림픽을 석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는 루마니아 프로팀 소속으로 시합에 나가 슛을 하다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출전이 확정된 뒤 후배들에게 '이렇게 힘들게 땄으니 올림픽을 앞두고는 부상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게 저였어요. 그런 제가 부상을 입었으니까요. 코트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올림픽'이 떠올랐어요.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무릎 수술과 재활을 하면서 일 년간 코트에 서지 못했지요? "재활을 한 뒤 루마니아 팀으로 돌아가 보니 코칭스태프가 다 바뀌었고,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경제가 무너져 월급도 안 나왔어요. 모든 게 무너졌죠. 하지만 운동을 그런 식으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대표팀으로 복귀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간 거죠." ―그때 동메달을 땄지요. 그전까지 여자 핸드볼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6연패였다고 하더군요. "(힘없는 소리로) 여자 핸드볼은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하면 금메달을 따온다고 했지요. 선배 언니들이 정말 잘했죠. 동메달을 따고는 우리끼리 '귀국하면 인천공항에 총 들고 서 있지 않을까. 다 죽을 준비하자'고 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요. 공항에서 헤어질 때 동료들을 안아주는데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뒤로 '우생순' 세대가 대부분 교체됐는데, 본인은 남았지요. "대표팀을 새로 맡게 된 감독님이 '지금 팀이 어렵다. 성적을 내려면 너는 남아줘야 한다'고 했어요.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본인도 미련이 남았겠지요? "베이징올림픽에 못 나갔으니, 아마 그 미련으로 런던올림픽에 나갔어요." ―하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4위로 메달을 따지 못했고…. "그때 사진을 보면 저는 완전히 해골이었어요. 6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했어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메달은 못 따고. 너무 지쳐 있었어요. 혼자 어디론가 떠나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앞서 말한 대로 '이제 더 이상 아니다'고 했어요. 그런데 다시 여기에 와 있어요."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 18일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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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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