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는 죽음을 앞둔 시인이 시어를 찾아 나서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면서, 그의 아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하루와 알바니아 난민 소년의 하루를 하나로 엮어 보여줍니다. 모기영(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필자들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영화제를 처음 시작했던 마음을 돌아보며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선택했어요. 제1회 모기영은 시간을 다룬 영화들, 특히 ‘하루’에 주목했는데요. 〈영원과 하루〉는 그중 ‘모기영 포럼’에서 다루었던 작품입니다. 3년 전 모기영의 설레던 하루와 오늘 복상 독자님의 하루가 만나고, 우리를 설명할 가장 적합한 ‘낱말’을 찾아 긴 여정을 시작했던 순간들이 오늘도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침묵과 방랑 사이를 오가는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소중한 지면을 엽니다. 시간이 직선으로 질주하는 기차 같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군요.
이하 사진: 〈영원과 하루〉 스틸컷
시어를 찾아다니는 알렉산더의 하루
안개 낀 도시 테살로니키의 바닷가 한 집에서 존경받는 시인 알렉산더(브루노 간츠)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병원에 입원해서 생의 마지막을 기다려야 할 텐데요. 알렉산더는 자신이 키우던 개를 맡기려고 딸 카트리나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개를 싫어하는 사위로부터 그가 들은 말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보다 충격입니다. 오랜 추억이 있는 바닷가 집을 처분하기로 했고 곧 철거반이 들이닥칠 거라는 소식이었어요. 상심한 알렉산더는 딸의 집을 나와 거닐던 중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와 마주칩니다. 솔로모스 연구는 아내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가 돌연 중단했던 미완의 프로젝트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일을 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기로 합니다.
알렉산더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19세기 시인 솔로모스가 자신의 시를 완성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습니다. “낱말들을 다 모으지 못해서”입니다. 솔로모스는 이탈리아에서 자란 그리스 시인이었어요. 터키인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우고 잃어버린 어머니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죠. 매일 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꿈을 꾸곤 했답니다. 사실 이것은 알렉산더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더는 시어를 찾아 나서는 이 짧은 여행 중에 요양원에 들러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렇게 솔로모스의 시간(과거)과 알렉산더의 시간(현재)이 만나게 됩니다.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그리스어로 혁명과 자유를 노래하고 싶은데 적절한 낱말을 알지 못했던 솔로모스는 그리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단어를 ‘사기’ 시작했다고 해요. 부랑자와 병든 사람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이 시인에게 단어를 팔기 위해 모여듭니다. 어쩌면 ‘시’가 조국의 약자들을 ‘살린’ 것이기도 하겠죠. (아,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시를 위한 단어를 모두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모스가 미완으로 남긴 시의 제목은 “봉쇄된 자유”입니다.
19세기 시인이 완성하지 못한 시를, 20세기의 알렉산더는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그는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죽음의 병동으로 들어가기 전 알렉산더의 하루는 이 시어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 됩니다.
아내의 하루: 과거 어느 날과의 조우
두 번째로 알렉산더의 하루와 함께 등장하는 시간은 1966년 9월 20일, 가족과 친지들이 갓 탄생한 딸 카트리나를 보러 온 잔칫날입니다. 아내 안나는 그날을 봉인되지 않은 편지로 남겼어요. 알렉산더는 늙은 시인의 모습 그대로인데요. 안나는 그날 입었던 옷과 함께 젊은 모습 그대로 나타납니다. 안나는 “날아오르다 고정된 나비처럼” 그 순간을 핀으로 고정해 기억하고 싶었다고 말해요. 그리고 눈물을 보입니다.
시를 찾아 헤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은둔자였던 알렉산더는 그 하루와의 만남으로 자신이 안나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안나는 알렉산더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했지만, 그보다 자신이 시인의 침묵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시인의 침묵 또는 방랑. 알렉산더의 사랑을 갈망하던 안나에게는 둘 모두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겠죠. 안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책과 다른 것 사이에서 당신을 납치하려고 했어요. 당신의 딸과 나, 우리는 당신의 삶에 가깝게 살았지만 함께는 아니었어요. 난 당신이 어느 날 떠날 거라는 걸 알아요. 바람이 당신의 눈을 멀리 밀어버릴 거예요. 하지만 오늘 나에게 준 이 하루.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내게 준 이 하루!”
안나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해변에서의 그날 하루는 전체적으로 우중충하고 회갈색 톤이 나는 영화의 색감 가운데 가장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장면들로 표현되었습니다.
알바니아 소년과 보낸 하루
아내의 하루(과거)와 시어를 찾아다니는 알렉산더의 하루(현재)에 끼어드는 마지막 하루는 아직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알바니아 소년의 하루입니다. 이 소년에게 ‘하루’는 이민국 경찰들에게 쫓기는 하루이고 국경 너머로 추방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하루이며, 목숨 걸고 국경을 함께 넘어온 친구를 잃은 하루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앞둔 시인에게 시어를 파는 하루이기도 했지요. 이날 알렉산더는 죽기 전 마지막 선행인 듯, 소년을 국경지대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한 위험과 고통의 장소인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시인도 우리도 곧 알게 되죠. 시인이 늘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영혼의 방랑자였듯이, 알바니아 소년은 실제로 갈 곳이 없는 방랑자이며 현실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세기 시인과 20세기의 알렉산더와 21세기를 바라보는 소년이 방랑자 이미지로 우리에게 연결됩니다. 우리가 솔로모스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알렉산더가 소년에게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인데요. 시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둘은 19세기 복장을 한 솔로모스를 지나쳐 걷습니다. 셋이 한 화면에 담겨 있지만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행인으로 그들을 만났죠. 결국 알렉산더는 소년이 부르는 노래들에서 빛나는 단어들을 낚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단어들입니다. 나의 작은 꽃, 이방인, 내게, 몹시 늦었어….
알렉산더가 값을 지불하고 소년으로부터 얻은 단어 중 가장 인상적인 낱말은 ‘몹시 늦었다’입니다. “아르가디니”라고 소년이 가르쳐 주었어요. 단 하루 동안의 일인데요. 처음에는 알렉산더가 소년을 돕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언제부턴가 소년이 죽어가는 알렉산더와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마침내 새로운 곳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는 소년에게 “(떠날) 시간이 됐니?”라고 알렉산더가 묻자, 소년은 이렇게 답했어요. “아르가디니.” 이 마지막 말이 시간과 관계되어있고, 둘의 유대감이 ‘이방인’이라는 말에 담겨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어딘가로부터 떠나온, 이방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향해 열린 하루
그리하여 소년과 알렉산더의 길이 달라진 후에도 알렉산더는 결국 자신의 ‘하루’를 끝맺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만난 알렉산더와 안나의 대화입니다.
“내일… 내일이 뭐지, 안나? 언젠가 당신에게 물었지. 내일은 얼마나 걸리지? 그리고 당신은 내게 대답했지.”
“영원과 하루.”
‘영원 하고도 하루’는 어쩌면 오지 않을 날일 것 같죠. 이렇게 해서 병원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기로 했던, 알렉산더의 ‘하루 이후’는 영원히 지연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영역으로 멀리 밀려난 죽음의 시간 덕에 알렉산더는 이제 하루를 영원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거였어요.
‘내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시간-이미지를 가졌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미지의 세계로 또다시 망명을 떠나는 알바니아 소년의 내일과 죽음을 앞둔 알렉산더의 내일이 같은 의미는 아니겠지요. 알렉산더는 절망의 내일에 대해, 그 내일이 (영원 하고도 하루나 더 있어야 하므로 결국은) ‘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살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희망찬 내일이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절망의 내일이 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를 시작하는 대목에서 어린 알렉산더에게 할아버지는 시간이란, 해변에서 어린아이가 주사위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어떤 패가 나올지 몰라 두근두근하는 게임 같지만, 설령 패가 잘못 나오더라도 파도에 휩쓸려간 뒤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 같은 건지 모르겠다고 나름의 해석을 더해봅니다. 시간이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지만,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 같은 여유 또는 꼭 그만큼의 규칙과 진지함이 우리에게 있다면 극복하지 못할 두려움도 아니지 않을까 하고요. 영원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이라는 하루와 현실의 공동체가 품은 고통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