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58 (10권 4. 김홍신. 펌글)
* 법과 양심 *
박교수의 연구실을 나온 나는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정으로 나갔다.
답답해서 애들에게 미리 학교에 와서 기다리라고 일러 두었었다.
잔디밭에 모여앉아 있던 애들의 표정이 긴장되어 있었다.
웬만해서는 내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불러모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십여 명인데다가 모인 녀석들이 생각해도 십여 명의 인원이,
모두 한다 하는 걸물들이었으니 일이 터져도 보통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더구나 내 긴장된 표정에 모두 조심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있으니 안심해요.
우린 형이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는 애들이란 걸 알잖아요. 신경쓸 일이면 우리가 도맡죠."
내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혜민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넌 이 세상 일에서 진실이나 진리가 이긴다고 생각하냐?"
내 엉뚱한 물음에 혜민이는 잠시 멈칫거렸다.
아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내 속마음을 짚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사필귀정이 아닐까요."
"사필귀정이라.... 좋은 말이지. 그런데 세상은 진실이나 진리보다,
가짜와 음모와 술책이 먼저 통하는 것 같다. 넌 법을 어떻게 생각하냐?"
"법이야 내가 뭘 아나요. 형이 법대 출신이니까 형이 더 잘 알겠죠."
"내가 아는 건 인간의 문제를 법으로 결정하는 것 자체가 조물주에게 떳떳한 짓은 아니라는 것과,
법은 진리나 진실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일정한 약속이란 것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이 회복되지 않는 한 법의 양심도 회복되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장난질이 통용되는 모순을 법은 안고 있는 것이지. 넌 법이 진리고 양심이라고 생각되냐?"
"아뇨."
"나 편하게 하려고 말하지 말고 네 생각대로 말해라."
"내가 한두 번 겪었나요. 어쩌면 이렇게 복잡해 가는 세상에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가 법일 텐데....
사람들은 그 법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하지요. 일전에 누구에게 들으니까,
외국 법조인들이 우리 나라의 재판을 신빙하지 않으니 그게 큰일이란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우리 나라 재판을 못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치욕적인 망신 아니냐.
다른 건 다 믿지 못해도 법의 양심만은 믿어 줘야 우리 나라가 똑바로 설 수 있는 일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법정에 서면 양심과 진실보다는 증거나 증인에 의해 판단이 난다는 걸 나도 금방 배워가지고 나왔다.
그 증거나 증인이 조작되었을 때, 그때는 판사도 별 수 없이 사악한 무리의 편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난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형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내 문제가 아니고.... 그러나 이건 내 문제와 똑같다. 내 은사이신 박교수의 문제니까."
"미나 아버지요?"
"그래."
"무슨 일인데요."
"한참 설명해야 한다."
"일단 조용한 데로 가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럼 어디가 좋겠냐?"
"종구네 사무실이 좋겠네요. 널찍하고 조용하니까요."
"그럼 모두 그쪽에 가서 기다리라고 해라."
"형은요?"
"잠깐 들렀다 갈 데가 있다."
"내가 모시고 가면 안 돼요?"
"그래라."
혜민이가 애들을 모두 종구네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라 이르고 돌아섰다.
"어디죠?"
"미나네 집에 잠깐 들러보자."
자동차는 쏜살같이 달렸다.
침착하고 사리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혜민이도 마음이 급하니까 난폭하리만큼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고나겠다."
"나도 마음이 급해지네요."
혜민이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자동차의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미나네 집은 학교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이었다.
수십 년을 봉직해 온 학교여서 아무래도 학교와 교통이 편한 곳에서 살기 마련이었다.
미나네 집 근처의 찻집에서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듣는 미나의 목소리였다.
은주 누나와는 자주 통화도 하고 오가는 모양인데 나하고는 오랜만의 통화였다.
"근처에 왔다가 차 한잔 얻어마시려고 전화했다."
"별일이네. 오래 살고 봐야 돼. 집으로 오겠어?"
"여기가 좋겠어."
"금방 나갈게."
"여자들의 금방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화장 않는다는 걸 알면서 그래."
"나, 급해. 빨랑 나와."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혜민이가 읽고 있던 법정서류를 얼른 치웠다.
나는 녀석에서 씩 웃어 주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기 전에 미나가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짧은 치마와 티셔츠가 마치 운동장에서 금방 달려온 여자 같았다.
박교수의 초췌한 모습과는 딴판으로 건강하고 발랄한 표정이어서 어쩐지 조화롭지 않아 보였다.
혜민이와 같이 앉아 있는 걸 알고 머쓱해 했다.
"괜찮아, 내 동생이니까."
"지난번에 만났잖아."
"그렇구나."
은주 누나네 가게에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초면은 아닌 사이였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일상적인 얘기를 시작했지만 마음이 급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표정과 네 표정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구나."
"그게 무슨 얘기야?"
"금방 아버지 만나고 왔다. 요새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형편없이 마르셨더구나. 네 얼굴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어?"
"시치미 떼는 거냐? 아니면 그 잘난 자존심 때문이냐?"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재판건 있잖아."
"재판이라니?"
"집 살 때 문제가 있어서 요즘 난리 치르는 거 말이다."
"우리 집?"
"그래."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집에 무슨 일이 있다니.... 금시초문야."
몇 차례나 다그쳐 물어도 생판 모른다는 것이었다.
표정이나 말하는 투가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답답해서 간략하게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몰랐어. 그런 일이 있다니.... 정말야?"
미나는 되레 나한테 물었다.
내가 미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박교수가 차마 나한테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는가의 여부와
박주석이란 사내의 가족이나 주변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미나는 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박교수가 얼마나 자기 고통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처절했으면 딸인 미나까지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눈치 챈 것도 없냐?"
"어머니가 전에 없이 집을 자주 비우고 이상한 전화가 온다는건 알았어. 전화가 오면 나더러 나가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머."
"아버지가 자식한테 아픈 걸 보이지 않으려고 한 거다. 이젠 너도 알았으니, 표나지 않게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다른 일은 우리 애들이 다하겠지만 동네의 소문이나 그 사람의 사생활과 동네 인심 같은 건 우리가 알아내기 어렵다.
자칫하면 큰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그러니 그런 일은 네가 알아서 움직여라."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
나는 전후 사정을 아는 대로 죄 얘기해 주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마음으로 매듭을 풀어나갈지를 말해 주었다.
미나는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컸다는 걸 그제서야 아는 듯 싶었다.
자식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깊이 아픔을 묻어두는 부성에 미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울었다.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해 낸다. 우리 서로를 믿자."
"정말 고마워."
아직도 눈물이 글썽글썽한 미나가 내 손을 힘 주어 잡았다.
"아버지가 눈치 채지 않게 조심해야 돼."
"알아."
"그럼 됐다. 서둘러야 돼."
"수시로 연락할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찻집을 나서는 미나가 겨우 웃음을 보였다.
착한 이들이 비열한 술책 앞에 굴하지 않는 세상은 언제나 오려나.
사무실 분위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모처럼 애들을 모이게 한 내 표정이 무거웠기 때문이리라.
나는 좀체 애들을 이런 식으로 모이게 하진 않는 성미였고,
일이 있으면 조용하게 불러모았지 이번처럼 급하게 서둘지는 않았었다.
혜민이가 박교수와 내가 얼마나 인연이 깊은지를 설명했고,
나는 대충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박주석이라는 사내가 역으로 증언을 선 경위까지를 말해 주었다.
"그자식, 뿌리를 캐버리죠."
성질 급한 녀석이 이렇게 말을 받았다.
"내 성질대로 하자면 벌써 잡아다 물고를 냈을 일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명백한 증거를 잡아서 순리로 뒤집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인간성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물론이지."
"그렇다면 우격다짐으로라도 캐내야죠."
"이럴 땐 차라리 거꾸로 치고 나가는 것도 상책일 수 있다. 한쪽은 지능적인 사기꾼이고 또 다른 쪽은 비겁한 인간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교묘하게 사람을 벗겨먹는 그런 부류들일수록 겉으로는 선량하고 깨끗한 체하는 것이다.
우린 증거가 필요하다. 저쪽 애들은 늘 시시껄렁한 녀석들을 데리고 다니며,
이 장난 저 장난을 하는 무리니까 우리들의 움직임이 쉽게 노출될 수가 있다."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될지 막막한데요?"
"나도 그렇다. 그래서 너희들을 오라고 한 게 아니냐. 이렇게 여럿이 모이면 꾀가 나겠지."
사실 내 마음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우격다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되레 박교수 입장을 더 난처하게 만들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뒷조사부터 해 봐야겠네요. 그녀석들이 어떤 부류며 어떤 허점이 있는지부터 알아야죠.
다른 편으로는 증인 섰던 박주석의 뒤를 캐야 할 거구요. 돈을 받아먹고 엉터리 증언을 했다면 달리 구린 데가 있겠죠."
"우선은 그 방법밖에 없다."
"우리들이 알아서 일을 분담하죠. 형님은 가만 계세요. 우리가 얼마나 잽싼지 아시잖아요."
"아무도 눈치 채면 안 된다. 그 친구들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기술자들이니까."
"우리도 전문가들이 만만찮습니다. 동원하자고 들면 말입니다. 형님 신경이 너무 예민해져서 그래요.
편히 계시면 우리가 알아서 전문가도 대고, 기술자도 끌어오고 저쪽이 어떤 장난질을 하는지도 훤히 짚어낼 테니까요."
"좋다. 내가 구체적인 선을 제시하겠다. 절대 눈치 채게 해선 안 된다. 그리고 결코 상대에게 속을 보이거나 함부로 대하지 마라.
결정적인 단서가 아니면 아는 체도 말아라. 시간은 촉박하다. 다음 공판날까지는 뒤집어서 보여 줘야 한다."
"이번에 안 되면 상급심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어차피 우린 해 냅니다.
없는 일을 꾸미는 것도 아니고 양심과 진실이 잘못 전달되고 그 진심에 증거가 약할 뿐이잖아요."
"길게 갈 수가 없다. 물론 나중에는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우선은 박교수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걸 막아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압니다. 우린 해 냅니다. 우릴 형님은 믿잖아요."
"믿는다."
"그럼 시작할게요. 형님은 빠져 주세요. 아주 속시원하게 해결할테니까요."
나는 법정 자료를 모두 혜민이에게 넘겨 주고 오늘 밤 안으로 대충이라도 결과를 추스릴 수 있는 묘안을 짜보라고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