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기운 받은 산맥… 흥선대원군·고종 배출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1622~1658)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46-1에 있다. 본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는데 숙종 19년(1693)에 이장한 것이다. 인평대군에게는 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네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 복녕군이 32세로 일찍 죽고,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는 숙종 때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른바 ‘삼복의 변’이다. 그러자 후손들은 인평대군의 묘 자리가 나쁜 탓이라며 명당을 찾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그 후 후손 중에 남연군과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고종과 순종이 배출되었다.
이곳은 한북정맥에서 이어진 천보산맥의 정기를 받는다. 소조산은 포천의 진산인 왕방산(736.7m)이다. 산 이름은 왕이 친히 다녀갔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어떤 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도선국사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라 헌강왕이 다녀갔다는 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 있는 보덕사를 방문했다는 설, 광해군이 이 산으로 사냥을 왔다는 설 등이다. 이 때문에 왕방산은 왕기가 서려 있으며, 그 맥을 받는 땅에서 왕을 배출할 것이라는 도참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곳이 곧 인평대군 묘라고 한다.
왕방산에서 출발한 맥은 북쪽으로 행진하여 원수봉을 지나 덕령산(350m)을 만든다. 그리고 다시 청신로 고개를 넘어 동그랗게 생긴 여러 봉우리를 만든다. 마치 숨을 고르듯 산세의 흐름이 완만하다. 묘 바로 뒤의 현무봉은 정상이 둥근 원형으로 생겼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형을 무곡성(武曲星)·금성(金星)·금형(金形) 등으로 부른다. 무곡성에서 맥은 산의 중간이나 하단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산자락 아래에 기운을 모아 혈을 맺는 특징이 있다.
묘역 입구에서 산세를 보면 마치 귀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를 귀인단좌형이라고 한다. 귀인형 산세는 산정상이 둥근데 아래는 삼각형 형태로 우뚝 솟은 탐랑형이 있고, 정상과 아래가 둥글게 생긴 무곡형이 있다. 탐랑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손이 주로 문과 쪽으로 출세하여 부귀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무곡형은 복과 덕이 많은 자손들이 주로 무과나 재물 쪽으로 출세하여 부귀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현무봉에서 묘까지 이어지는 용맥은 상당한 변화를 하고 있다. 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용맥의 끝자락 혈장은 순하면서도 풍만한 모습이다. 혈장이 풍만하다는 것은 기가 그만큼 많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혈장을 보호하기 위해 좌청룡과 우백호가 겹겹으로 감싸고 있다. 특히 내백호가 묘역 앞까지 감싸며 내보국을 형성하였다. 덕령산에서 내려온 산맥이 안산을 이루고 그 너머로 한북정맥의 운악산과 수원산, 여기서 분지한 천주산 연맥이 큰 보국을 이루며 조산 역할을 한다.
물은 용맥 앙변을 따라온 물이 앞에서 합수되고, 좌청룡과 우백호를 따라온 물도 묘역 앞에서 합수한다. 이를 물의 상분하합(上分下合)이라고 한다. 땅의 지기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때문에 상분하합이 몇 중으로 이루어진 곳은 지기가 조금도 새나가지 못하고 한곳에 모인다. 인평대군 묘에 큰 기운이 모였다고 보는 이유다.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묘역 앞의 평탄한 들판으로 모인다. 그리고 포천천으로 흘러가 북으로 흘러 영평천과 합류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한탄강과 합류한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 후인 1640년 두 형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듬해 돌아온 그는 형들이 있는 심양을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다녀왔다. 소현세자는 9년, 봉림대군은 8년 동안 불모로 잡혀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자 봉림대군이 제17대 왕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효종은 유일한 동복동생인 인평대군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인평대군이 사망하자 효종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직접 제문을 짓고 비문을 썼다.
인평대군 묘역 아래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인 치제문비(致祭文碑)가 있다.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첫 번째 것 전면에는 효종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이 적혀있다. 후면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있다. 두 번째 것 상단에는 영조, 중단에는 정조, 하단에는 순조의 어제어필이 있다. 내용은 시·서·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정통했던 그의 생애와 청나라에 끌려가 겪었던 고초, 그 후 청나라에 가서 벌인 외교적 성과들이 적혀있다. 조선시대 다섯 왕들의 글씨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것도 이곳 답사에서 얻는 팁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