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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0. 양자역학과 칸트철학(1930~1932)
- 이 시기에 양자역학의 발전에 참여, 응용하는 데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라이프치로 왔고, 토론은 더욱 풍성해졌다.
- 파이얼스, 란다우, 프리드리히 훈트, 에드워드 텔러, 펠릭스 블로흐(스위스의 물리학자, 금속의 전기적 성질을 규명, 노벨 물리학상),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2차 대전 발발 후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핵기술을 연구하는 우라늄 클럽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했다. 1957년 과학자의 핵무기 개발을 비롯하여 어떤 핵 연구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괴팅겐 18인에 참여했고, 물리학도이면서 철학적, 인식론적 문제들에 높은 관심과 적극적 토론 참여)
- 그레테 헤르만 : 젊은 여성 철학자, 칸트철학에 정통. 원자물리학자들과 함께 철학적 토론을 하기 위해 라이프치히에 왔다. 그녀는 칸트의 인과율이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새로운 양자역학은 이런 인과율을 의문시했다
<토론 참석자 : 그레테 헤르만,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나>
(그레테 헤르만) 칸트철학에서 인과율은 모든 경험의 전제다. 따라서 지각을 객관화시키고자 한다면, 사물이나 현상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려면, 인과율을 전제로 해야 한다.
자연과학은 객관적인 경험을 다루므로, 모든 자연과학은 인과율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양자역학은 이런 인과율을 느슨하게 하면서 양자역학이 자연과학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나) 우리가 라듐 B 원자 한 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길든 짧든 라듐 B 원자가 그 어떤 방향으로 전자를 방출하고 라듐 C 원자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각각의 라듐 B 원자가 언제 붕괴할지 원인을 말할 수 없고, 라듐 B 원자가 어느 방향으로 전자를 방출하는 원인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런 원인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다.
(그레텔 헤르만) 이 부분에서 오류가 있는 것 같다. 특정 사건에서 원인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곧 원인 없다는 추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원인을 발견할 때까지 원자물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연구를 해야한다.
(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완전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전자가 어떤 방향으로 방출될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신은 그런 방향을 알 수 있도록 ‘결정 요소’를 계속 찾으라고 말했지만, 전자가 처음에 원자핵으로부터 특정 방향으로 방사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간섭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간섭을 통한 소멸도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전에 내렸던, 간섭현상을 일으킨다는 결론 역시 유지될 수 없다. 우리는 실험에서 계속해서 소멸 현상을 관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은 새로운 결정 요소는 없으며 우리의 지식은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레테 헤르만) 이상하다. 한편으로 당신은 라듐 B 원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다고 한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전자가 방출될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 지식이 완전하다고 말한다. 다른 결정 요소가 있다면 확실한 다른 실험들과 모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지식은 완전한 동시에 불완전할 수는 없다. 말이 안된다.
(카를 프리드리히)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마치 라듐 B 원자 ‘자체’에 대해 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인데, 원래는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지각의 객체만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칸트는 이런 지각의 객체를 소위 ‘물자체’라는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칸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며 정확한 형식으로 고전물리학의 토대를 이루는 경험 구조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세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는 공간 속의 사물들로, 그리고 규칙에 따라 서로 잇따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원자물리학에서 우리는 지각을 더 이상 ‘물자체’의 모델에 따라 연결시키거나 정돈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라듐 B 원자 ‘자체’ 같은 것도 없다.
(그레테 헤르만) 당신은 ‘물자체’와 물리학적 대상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현상에서 도저히 드러나지 않는다. ‘물자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과 전체 인식론적 철학에서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기능을 할 뿐이다. 우리의 전 지식은 경험에 의존해 있다. 사물을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아는 것이 곧 경험이다. 당신이 고전물리학의 의미에서 라듐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객체 또는 대상이라고 칭했던 것을 말한다. 객체는 의자, 테이블, 별, 원자 등 현상 세계의 일부다.
(카를 프리드리히)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레테 헤르만) 그럴 때도. 우리는 현상으로부터 그것을 유추하니까. 일상적인 지각에서조차, 직접적으로 보는 것과 유추만 하는 것을 서로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자의 앞면과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뒷면을 가정한다. 즉 자연과학이 객관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각에 대해서가 아니라 객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이다.
(카를 프리드리히) 하지만 원자는 앞면도 뒷면도 볼 수 없다. 왜 그것이 의자나 탁자와 똑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레테 헤르만) 그것도 객체니까. 객체가 없이는 객관적 지식도 없다. 그리고 객체는 물질, 인과성 같은 범주로 결정된다. 이런 범주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경험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카를 프리드리히) 양자론은 지각을 객관화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칸트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이다. 양자론에서 모든 지각은 관찰 상황과 관련된다. 지각으로부터 경험도 따라와야 하는 경우에는 그 관찰 상황을 명시해야 한다. 지각의 결과는 더 이상 고전물리학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객관화될 수 없다. 어떤 실험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라듐 B 원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때, 하나의 관찰 상황에 대해 완전한 지식은 동시에 다른 관찰 상황과 관련해서는 불완전한 지식이 된다.
(그레테 헤르만) 그럼 칸트가 틀린 것인가?
(카를 프리드리히) 칸트는 경험이 정말로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정확히 관찰했다. 하지만 칸트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과 인과성을 ‘아프리오리’인 것으로 일컫는다면, 그는 그것들에 절대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어느 물리학적 이론에서든 내용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칸트는 어떤 면에서는 완전 옳다. 즉 물리학자가 다루는 실험은 우선은 늘 고전물리학 용어로 진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의 개념들 즉 시간, 공간, 인과성이라는 개념은 실험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고, 실제로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대해 ‘아프리오리’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런 새로운 이론들에서 내용적으로 수정된다.
(그레테 헤르만) 내가 원래 알고 싶었던 것은 어째서 전자를 방출하는 등의 사건을 예측하는 데 충분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계속해서 그 원인을 찾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신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찾아 봤자 소용없다고 말을 한다. 다른 결정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수학적으로 명확히 정리된 불확정성 원리가 특정한 예측을 위해서는 실험 조건을 달리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또한 실험들을 통해 확인된다. 그렇게 말하면 불확정성 원리가 물리학적 현실인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불확정이라는 말은 그냥 모른다는 말로 해석되고,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주관적인 것인데 말이다.
(나) 당신은 오늘날 양자론의 특징적인 면모를 정확히 말씀하고 계신다. 원자적 현상으로부터 법칙을 추론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의 객관적인 현상을 법칙적으로 연관시킬 수 없고, 관찰 상황들에 대해서만 경험적인 법칙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관찰 상황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수학적 기호들은 사실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개연성에 관한 것이다. 칸트는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경험영역에서는 더 이상 물자체 혹은 당신이 사용한 말을 빌리자면 ‘대상’이라는 모델에 의거하여 지각된 것을 정리할 수 없음을 예견할 수 없었다. 즉 원자는 더 이상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레테 헤르만) 그렇다면 원자들은 무엇인가?
(나) 말론 표현하기 힘들다. 우리의 언어는 일상적 경험에서 형성되었고 원자는 일상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니까. 하지만 둘러서 말한다면, 원자는 관찰 상황의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다. 현상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높은 가치를 지니는 구성 요소다.
(카를 프리드리히) 현대 물리학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우리가 경험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제한적인 적용 영역만을 가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모든 경험의 전제가 아닌 건 아니지만, 전제는 비판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며, 그것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레테 헤르만) 칸트의 ‘아프리오리’ 내지 언어를 그렇게 상대화시키는 것은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인식의 확고한 기반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인가?
(카를 프리드리히) 칸트가 ‘아프리오리’로 당시의 자연과학적 인식 상황을 올바르게 분석했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원자물리학에서 새로운 인식 상황에 서있다. 이 말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법칙이 옛날의 기술에 중요한 실용적인 규칙을 올바로 정리했지만, 이런 법칙은 전자 기술과 같은 오늘날의 기술에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인식론적 분석이 불확실한 생각이 아니라, 참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분석은 사고 능력이 있는 생명체가 주변과 관계를 맺는 곳에서는 늘 옳은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경험’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칸트의 ‘아프리오리’ 역시 나중에 중심적인 위치에서 밀려나서, 인식 과정에 대한 더 포괄적인 분석의 일부가 될 것이다. 역사적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 구조도 변한다는 사실은 직시해야 한다.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사실을 알고 이해해 나가는 것뿐 아니라 ,’이해’라는 말의 의미를 늘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11. 언어에 대한 대화(1933)
1933년 1월의 파국 이후 부활절 휴가 기간에 나는 옛 친구들과 행복한 휴가를 보냈다. 닐스,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펠릭스 블로흐, 카를 프리드리히를 스키 산장인 륀슈타인하우스에 초대했다.
1) 디랙의 안개상자 실험을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이야기하다
닐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안개상자 사진은 ‘반입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https://blog.naver.com/with_msip/222098150963
(나) 우리는 한동안 실험에 오류가 있지는 않았을까를 논했고 이야기 끝에 나는 닐스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런 토론에서 양자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전하를 띤 입자가 마치 전하를 띤 기름방울이나 검전기에 쓰는 작은 구슬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리학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아직 고전물리학의 개념의 한계에 대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러다 보면 실수가 빚어지지 않을까?
(닐스) 전혀 그렇지 않다. 관찰 내용을 고전물리학적 개념으로 진술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원자 현상을 이론적으로 진술하려면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고전물리학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결과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없으니까.
(펠릭스) 우리가 양자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고전적 개념들을 포기하고 새로 얻은 언어로 원자 현상을 더 수월하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닐스)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에서는 현상을 관찰하고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늘 규칙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관찰하고 전달하는 전 과정이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수단으로 한다. 안개상자는 측정 도구다. 측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일상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기본 전제다. 우리는 이제 이런 언어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도구는 과학의 전제인 것이다.
2) 포커 게임
우리들의 포커놀이 방식 A) 떠들썩하게 자신의 카드패를 선전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그런 카드패를 가졌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닐스는 다시 언어의 의미를 사색했다.
(닐스) 포커를 칠 때는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실재를 어떻게 위장할 수 있을까? 언어는 듣는 사람에게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인상들은 차분하게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추측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해서 쉽사리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이런 강한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그 뒤 게임에서 예기치 않게 입증되었다. 닐스는 확신에 차서 자신이 손에 든 다섯 장의 카드가 모두 같은 무늬라고 주장했다. 판돈을 아주 많이 걸었으므로, 닐스가 카드 네 장을 냈을 때 상대편은 결국 포기했고 닐스는 판돈을 많이 땄다. 그런데 게임이 끝난 뒤 닐스가 자랑삼아 같은 무늬 다섯 번째 카드를 내밀었을 때, 닐스는 그제야 자신이 사실은 같은 무늬 카드를 다섯 장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님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트 10과 다이아몬드 10을 혼동했던 것이다. 따라서 확신에 찬 그의 말은 사실은 ‘허풍’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상들의 힘이 과연 수백 년간 인간들의 사고를 규정해왔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포커놀이 방식 B) 닐스는 이번에는 카드 없이 말로만 포커를 쳐보자고 제안했고,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
(닐스) 말로만 포커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언어에 대한 과대평가였다. 언어는 늘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말이다. 진짜 포커에서는 어쨌든 카드 몇 장이 테이블에 놓여 있다. 하지만 기본이 되는 현실이 부재하는 경우는 더 이상 신빙성 있게 허풍을 치는 건 불가능하다.
3) 데모크리토스의 표상
원자핵에 전자나 양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옛 데모크리토스의 표상을 믿고 있었다. 한마디로 ‘맨 처음에 입자가 있었다’라는 표상이었다. 물질은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고, 물질을 계속 쪼개어 가다 보면 마지막에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라 불렀던 최소 단위에 이른다고 믿었다. 그것을 이제는 ‘양성자’ 또는 ‘전자’ 등의 ‘소립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상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물질을 계속 쪼개어가다 보면 맨 나중에 더 이상 부분이 남지 않고 물질 속의 에너지가 변환될 것이며, 부분은 쪼개지기 전보다 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맨 처음에는 무엇이었을까? ‘맨 처음에 대칭이 있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철학과 맞아떨어진다.
안개상자 사진 속의 입자가 정말로 디랙이 예측한 양전자라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신대륙의 문이 열린 셈이었다.
4) 후광(feat 실증주의자)
(나) 나는 실증주의자와 서신교환에서 실증주의자들이 모든 단어에 정해진 의미가 있고, 그 단어를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양 행동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떤 존경받는 사람이 방에 들어왔을 때 방이 환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럴 때 광도계로 밝기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적어 보냈다. 나는 ‘환하다’라는 단어의 물리학적 의미가 원래의 의미고, 다른 뜻은 전이된 의미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후광이라는 말 역시 누군가 들어왔을 때 방이 환해지는 듯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닐스) 나도 그 설명이 옳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의미는 딱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단어의 의미는 문장 속 단어들의 연관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인 언어에서도 그러니, 시적 언어에서는 더 그렇다. 자연과학 언어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우리는 원자물리학에서 이전에 매우 정확하고 문제가 없어 보였던 개념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자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위치’와 ‘속도’ 같은 개념만 해도 그렇다.
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정확한 언어의 가치를 강조하고, 언어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언어가 내용을 상실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과학에서 우리가 이런 이상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도달할 수는 없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실험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언어만 해도 그 적용 영역을 명시할 수 없는 개념들이 들어있다. 물론 이론물리학자들이 자연을 묘사할 때 활용하는 수학적 도식은 비교적 논리적으로 엄격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자연에 대해 진술하려면 어딘가에서는 수학적 언어에서 일반적인 언어로 옮겨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의 과제다.
(나) 실증주의자들은 무엇보다 스콜라철학을 비판한다. 종교적 질문과 관련된 형이상학이 주된 비판 대상이다.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에서는 가상의 문제들에 대해, 즉 언어적으로 정확히 분석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한다. 이런 비판이 정당하다고 보는가?
(닐스) 그런 비판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내가 실증주의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과학도 기본적으로는 형이상학보다는 나을 것이 없다는 우려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단어들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애초에 포기하지만 자연과학에서는 언젠가 훗날 그 단어들에 명백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 희망 내지 환상을 품는다.
5) 설거지
(닐스) 설거지는 언어와 똑같다. 물도 더럽고 행주도 더럽지만 결국 이걸로 접시와 컵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개념이 불명확하고 논리가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만 제한된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자연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6) 본능과 지능(언어)
(카를 프리드리히) 산양들이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도망칠지 숙고를 하거나 말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동물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특정 신체 능력을 거의 완벽하게 발달시켰다. 인간들만이 특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은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을 가능케 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고, 그럼으로써 시간적, 공간적으로 동물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로써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적응능력이 뛰어나게 된다. 인간은 많은 면에서 동물보다 신체 능력이 뒤떨어져 있지만, 공간적 시간적으로 더 커다란 영역을 장악함으로써 이런 결점들을 상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언어의 발달은 아주 중요했다. 언어, 그리고 그와 연결된 사고 능력은 다른 신체적 능력과 달리, 개인 안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발달하는 능력이다. 언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밖에 없다.
(닐스) 종족과 생물이 다양한 것처럼, 다양한 형식의 언어와 사고가 있다. 그러나 생물 모두가 같은 자연법칙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의 같은 화학적 화합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논리에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형식들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인간과 무관하게 현실에 속하는 형식들 말이다. 이런 형식들은 언어 발달의 선택 과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선택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카를 프리드리히) 앞에서 보어 선생님은 지능과 본능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의견을 표명하신 것 같은데, 선택 과정을 통해 지능 혹은 본능이 높은 정도로 발달되지만, 두 능력이 동시에 발달하는 건 기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상보적 관계로 한 가지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닐스) 난 다만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두 종류의 능력이 매우 다르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 행동 중 많은 부분은 아직 본능이 좌우한다. 어떤 사람의 겉모습이나 얼굴 생김새로 그가 지적인지 자신과 잘 통하는 사람인지 판단하고자 할 때 경험뿐 아니라 본능도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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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BERNAR WERBER
제9장 개미혁명(308~344번)
308 지각의 차이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지각한다. 고양이 실험
309 역설수면
우리는 밤마다 잠을 자는 동안 역설수면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15분에서 20분 정도 지속되며, 중단되었다가 한 시간 반쯤 지나서 더 길게 다시 찾아온다. 급속한 안구 운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렘 수면이라고도 한다. 아기들의 수면은 역설수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늘 흥분상태에서 밤을 보낸다. 그런 흥분 상태에 있을 때, 아기들은 흔히 어른들처럼 이상한 표정을 짓곤 한다. 아이들은 노여움, 가끔 슬픔, 두려움, 놀라움 등 갖가지 표정들을 잇달아 흉내 낸다.
314 아기의 애도
아기는 생후 8개월이 되면 특유의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소아과 의사들은 그것을 ‘아기의 애도’라고 부른다. 어머니가 자기 곁은 떠날 때마다 아이는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심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돌아와도 아기는 어머니가 또 떠날 것을 걱정하며 다시 불안감에 빠진다. ‘아기의 애도’는 자기가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15 본원적인 의사소통
13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인간이 타고 나는 자연 그대로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가지 실험을 했다. 아기 여섯 명을 영아실에 넣어 놓고, 유모들에게 아기들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되 절대로 아기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모두 쇄약해져 죽고 말았다. 아기들이 생존하는 데는 젖과 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케뮤니케이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316 동화(同化)의 방법
상대방이 말을 하면서 턱을 문지르면 당신도 턱을 문지르고,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면 당신도 그렇게 하고, 그가 냅킨으로 입을 자주 닦거든 당신이 똑같이 해보라. 상대의 버릇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무식의식적인 메시지를 자동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나는 당신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똑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으니 아마 교육받은 것도 생각하는 것도 같을 것입니다.”
317 황금비
1+52
=1.6180339……
선분을 가장 아름답게 나누는 비. 물체에 신비한 힘을 부여함으로써 훌륭한 건축과 회화와 조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비율. 쿠푸 왕의 피라미드, 솔로몬 신전, 파르테논 신전, 대부분의 로마네스크식 성당, 르네상스의 많은 그림들에 적용됨
자연에도 황금비는 발견된다. 나뭇잎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지 않도록 떨어져 있는 거리와 나뭇잎의 길이, 사람의 몸에 있는 배꼽 위치
318 알
새의 알은 자연의 걸작 중 하나다.
알 껍질은 삼각형의 금속염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정들의 뽀족한 끝은 알의 중심을 겨누고 있다. 그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으면 알 껍질의 저항력이 한결 커진다. 반대로 압력이 내부로부터 올 때는 삼각형 결정들이 서로 떨어지면서 얼개 전체가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알을 품는 어미의 무게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새끼가 쉽게 깨고 나올 수 있을 만큼 약하다.
319 미래에 대한 의식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미래에 대한 의식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
321 문자와 기호의 힘
화룡점정의 예
323 잉카의 사회 변동
잉카 부족들은 결정론을 믿었고, 세습적인 계급제도를 받아들였다. 왕자는 네모꼴의 틀, 무사의 자식은 세모꼴의 틀, 농부의 자식은 뾰족한 틀에 머리 모양을 맞췄다.
325 명상
327 적을 사랑하라
네 적을 사랑하라. 그것이 적의 신경을 거스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328 사람을 다루는 기술
사람은 주로 시각적인 언어, 청각적인 언어, 육감적인 언어를 많이 구사하는 부류로 나뉜다.
331 검열
326 작곡 기법 : 카논 vs 332 푸가 기법
- 카논 : 단일한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 기본 선율, 기본 선율에 반주를 덧붙일 것, 기본 선율과 반주에 또다른 반주를 덧붙일 것…
프랑스 민요 [자크 수사], [아침 바람, 상쾌한 바람], 파헬벨의 [카논]
- 푸가 : 카논에 비해 한층 발전된 기법으로 카논에서는 단 하나의 주제를 놓고, 그것이 스스로와 대면하는 방식이라면, 푸가는 여러 개의 주제가 나타나다.
바흐의 [음악의 헌정]- 다 단조로 시작해서 라 단조로 끝난다.
[푸가의 기법] 가장 빼어난 작품,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이 푸가는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BACH(시플랫,라,도,시)
333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다
335 나비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아이들의 침대에 같은 모티브의 그림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나비였다. “지금 우리는 애벌레지만.. 곧 날아올 것이다”
336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는 영국 외교관이자 대법관으로 1516년 유토피아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1532년 헨리 8세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은 것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서 1535년 참수를 당했다.
337 소년들의 십자군 원정
소년들이 주축이 된 최초의 십자군 원정은 1212년에 있었다. “어른들과 귀족들은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고, 그래서 순수하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빈둥거리는 젊은이들이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겠다고 나섰다. 소년들은 변변한 지도 하나 없이 신성 로마제국을 떠나 성지를 향해 떠났다. 남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 무리는 그 수가 점점 불어났다. 도중에 마을에서 식량을 약탈했다. 그들은 마르세유항에 다다랐다. 그러나 어떻게 건널 것인지 걱정하지 않았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을 항구에서 기다리던 차에 시칠리아 사람 둘이 나타나 예루살렘까지 배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두 시칠리아 사람은 튀니지의 해적단과 짜고 소년들을 튀니스로 데려가서 소년들을 모두 헐값에 노예로 팔았다.
339 아담파
1420년 보헤미아에서 교회의 개혁과 독일 영주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후스파 신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 급진적인 집단이 아담파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에게 다가가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원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똑같은 조건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블타바강 한복판의 섬에 자리 잡고, 나체 공동체를 만들고, 재산을 공유화하고, 모든 사회 제도를 철폐하고,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살았던 지상 낙원의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급진주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후스파 신자들은 블타바강에 있는 섬을 포위하고 그들 모두를 학살했다.
341 생일 케이크
생일 때마다 촛불을 불어 끄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의식 중 하나다. 불을 제어하는 것은 아기가 책임 있는 존재로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 중의 하나다. 반대로 노인이 되어 촛불을 불어 끄기가 어려울 만큼 숨이 달리는 것은 이제 활동하는 인구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될 때가 되었음을 뜻한다.
342 아메리칸 인디언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어느 부족을 막론하고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한 지역의 사냥감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고, 자연을 고갈시키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거나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세습 권력도 항구적인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북미 인디언 사회는 평등한 사회였다. 추장은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야만 추장이 될 수 있었다. 직업적인 군대를 보유한 적이 없으며,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늘 견지했다. 어느 편에서든 피를 흘리는 사람이 생기면 전투는 즉각 중단되었고, 사망자가 생기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북미 인디언들이 남미의 인디오들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백인들의 침략에 저항한 것은 남미 쪽보다 더 분산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결국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의 대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1492년 무렵 1천만이었던 인디언 수는 400년이 지난 1890년 15만으로 줄었다. 190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부는 그들을 몰살하려고 했다.
343 만사에는 때가 있다
344 팔랑스테르
팔랑스테르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만든 말로, 집단 공동체를 뜻하는 ‘팔랑주’와 수도원을 뜻하는 ‘모나스테르’를 따서 만들었다. 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주택 단지에 모여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