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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눈벌레
눈벌레가 날아다닐 계절이 되었다.
게이조가 하코다테에서 돌아온 지도 5일이 지났다.
북극에서는 눈이 내리기 전이면 으레 조그마한 젖빛 벌레가 날아다닌다. 날아다닌다기보다 차라리 떠다닌다고 표현할 수 있는 덧없는 광경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추위를 맞기 전에 잔뜩 웅크렸던 마음이 사라지는 듯한 부드러운 느낌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게이조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젠 조금도 따뜻하지 않은 늦가을의 석양 속을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 도오루가 한 말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도오루는,
“아빠, 병원의 무라이라는 선생님 아주 멋진 분이던데요.”
하고 말했다.
무라이와 사무장이 태풍이 몰아쳤던 그 날 밤에 방송으로 게이조의 조난을 알고 급히 달려왔었다는 말은 게이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는 도오루가 무라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라.”
게이조는 이렇게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도오루는 순진하게 말했다.
“아, 맞다, 엄마, 그 선생님이었군요? 태풍이 몰아쳤던 날, 무슨 의논할 게 있다고 엄마와 약속해 놓고 오지 않았던 선생님이…..”
얼른 답변을 못하는 나쓰에를 보자, 게이조는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나쓰에는 또다시 무라이와 만날 약속을 했었나?’
나쓰에가 갑자기 여행을 취소했던 이유가 무라이 때문이라는 것을 게이조는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늘 아침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벌레가 바짝 빨려들 듯이 게이조의 외투에 달라붙었다. 얇고 연한 날개가 투명하여 외투 위에서 갈색으로 비쳐 보였다. 게이조는 눈벌레를 살짝 집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없이 그냥 죽어 버렸다. 마치 한 송이 눈이 손가락에 닿아 녹아 버리는 것 같이 허망했다.
‘행복이나 평화라는 것도 이 눈벌레와 같은 것이구나.’
게이조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를 이번 조난 사고로 알게 되었다. 그 처참한 희생 가운데 살아났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고 정말 진실하게 살려고 아사히가와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체험은 게이조 혼자의 것이었다. 나쓰에도 도오루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저 광란하는 파도 사이를 빠져 나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같이 천진스럽고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한 게이조의 마음은 다시 때묻은 손에 의해 본래의 생활로 왈칵 끌려들어간 느낌이었다. 게이조가 아무리 잊어버리자, 용서하자, 하고 다짐을 해도 나쓰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혼자만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게이조는 문득 금년 봄에 죽은 마에가와 다다시(前川正, 저자의 애인. 저자는 여기서 실제 인물의 이름과 그의 노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생각이 났다.
‘망망한 하늘과 땅 사이에 떠도는 실존으로 자신을 생각하노라, 수술 받은 밤에……’
폐결핵으로 늑골을 절제했을 때 마에가와가 지은 노래다. 그는 게이조의 3년 후배였다. 같은 테니스부의 머리가 좋은 의학도였다. 그가 이 노래를 지었을 때 느꼈을 고독을 지금 게이조는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저 어두운 파도 사이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할 것 같았다.
‘그 고독을 통해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났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그 거센 파도와 싸우는 것과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게이조는 밝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데, 파도는 야속하게 또다시 밀려왔다.
‘나쓰에! 제발 날 좀 조용히 살게 해줘!’
게이조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눈벌레가 떠도는 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어느새 게이조는 후키도(富貴堂) 서점 앞에 와 있었다.
저녁 한때 서점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붐볐다. 토요일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을 헤치고 서점 안쪽까지 들어가기가 귀찮아 게이조는 바로 눈앞에 있는 서가를 쳐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성경을!’
아직 10월 중순인데 크리스마스가 눈앞에 다가온 듯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게이조는 성경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꽤 육중한 중량감을 느끼게 하는 성경을 대하자 그는 문득 학창 시절을 상기했다. 한때 게이조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선교사를 만나면서 성경을 읽고 교회에도 드나든 적이 있었다. 이렇다 할 아무 고민도 문제도 없이 듣는 설교는 별로 가슴을 울려 주지 못했다. 그래도 신의 존재나 영원에 대해 교회의 청년들과 토론을 나누었던 추억은 남아 있었다.
졸업한 후에는 성경이 책꽂이의 어디쯤에 꽂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다시 성경을 집어 드니 역시 그 시절이 그리웠다.
‘음,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이로군.’
게이조는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라고 기억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성경 구절이,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고 왠지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다.
읽는 동안 게이조의 시선은 <마태복음> 제1장에 쏠리기 시작했다. 한 번 읽고 나서 게이조는 숨을 죽였다. 그는 다시 읽었다.
처녀 마리아가 임신한 이야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경위는 이러하다.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했으나 아직 같이 살기 전에 성령에 의해 잉태했다.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그녀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몰래 파혼하려고 결심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걱정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태네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해낼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한 것을 그대로 이루기 위함이다.”……요셉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하나님의 사자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게이조에게는 이처럼 중요한 말은 성경의 어디에도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학생이었던 게이조가 이 대목을 읽헜을 때의 문제는 ‘처녀의 임신이 가능한가?’라는 의학적, 과학적인 의문이었다.
인간의 경우 정자 없이 난자가 스스로 분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난자를 바늘로 몇만 번이나 건드려 처녀 임신의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한 어떤 학자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처음부터 성령에 의한 임신을 들고 나오다니 역시 성경은 의심스러워.”
“처녀 잉태가 거짓말이라면 일부러 이처럼 의심을 살 만한 이야기를 제1장에서부터 쓸 리가 없어. 이건 어쨌든 사실이었기 때문이야. 게다가 2천년 동안 삭제되거나 수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 아니고 뭐겠어. 기적은 있을 수 있어.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해. 우리들 과학하는 사람의 대상은 불가사의한 것이지 기적은 아니야.”
하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그 무렵의 게이조에게는 처녀의 임신처럼 어리석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게이조의 가슴을 쳤다. 나쓰에의 배신에 시달려온 게이조로서는 그냥 읽고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이조는 결혼하지 않은 약혼녀의 임신이 남의 눈에 띄게 되었을 때의 요셉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몰래 파혼하려고 결심했다’라는 짤막한 구절에 그런 그의 고민이 충분히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그 임신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게이조는 파혼하려고까지 생각했던 요셉이 천사의 명령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 크게 감탄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조는 2천 년 동안에 이 세상에는 몇십 억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을 테지만, 처녀의 몸이었던 마리아의 잉태를 요셉만큼 믿기 어려운 입장에 놓였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믿기 어려운 입장에서 천사의 말을 순순히 따른 요셉에게 게이조는 감탄했다.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마리아를 믿은 것처럼 게이조도 나쓰에의 인격을 믿고 싶었다.
게이조는 성경을 손에 든 채 가끔 그의 몸에 부딪치면서 드나드는 손님들 속에 섞여 흐르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쓰에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보랏빛 키스 자국이 8년이 지난 지금도 게이조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임신을 믿은 것에 게이조도 마리아의 평소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흔히 볼 수 있는 청순하고 정직한 정도의 여성이 아니었다. 숭고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녀에겐 있었다.’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나쓰에와 무라이가 어느 정도로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것은 게이조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라이에게 마음이 끌렸다는 그 사실조차 참기 어려웠다.
‘나쓰에는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여행을 취소하면서까지 무라이를 만나고 싶었을까? 무라이가 나쓰에에게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는 도오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어쨌든 둘이 만날 약속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이조는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한 권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요셉이 마리아를 믿은 정도만큼 굳은 신뢰로 맺어진 인간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게이조는 쓸쓸했다. 거센 파도 속에서 악전 고투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새로운 목숨을 얻었는데, 결국 시시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자신이 쓸쓸했다.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어리석게 일생을 마쳐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때 바다에 빠져 죽었어도 그다지 아까울 목숨도 아닌 것 같았다.
위경련을 일으켰던 여자에게 구명대를 벗어 준 선교사는 죽었다고 들었다.
‘차라리 그 선교사에게 내 목숨을 주어 버릴걸.’
게이조는 이렇게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거리는 어두워져 있었다. 추위가 발끝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대문 외등 아래 요코가 서 있었다. 요코는 게이조를 보자 급히 뛰어와,
“아빠! 토요일인데도 늦으시길래 걱정했어요.”
하고 게이조의 팔에 매달렸다.
“응………”
게이조는 거리를 돌아다녀 피곤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요코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그의 손이 요코의 얼굴을 쳤다. 요코가 깜짝 놀라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어, 미안. 아프지? 아빠가 피곤해서 그만…….”
게이조는 자신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던 요코의 뺨을 실수이기는 했으나 때리고 말았다. 그의 머리는 지겹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이조는 거리를 돌아다닌 피로가 겹쳐 이튿날 정오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요일이었다. 오후에 나쓰에는 게이조를 문병하러와주었던 사람들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 시립 도서관에 가는 도오루와 함께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쓰기코가 집안 일을 거들어 주러 와서는 부엌에서 겨울 동안 먹을 무를 절이고 있었다. 게이조는 책을 읽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무를 절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집 앞에 나가 빈둥거렸다.
숲 쪽에서 요코를 선두로 여자아이들 네댓 명이 줄넘기를 하면서 뛰놀고 있었다. 요코는 게이조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다가 그만 발이 줄에 걸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요코를 게이조가 붙들었다. 요코는 놀이에 열중하여 빨개진 뺨을 게이조에게로 돌렸다.
“위험해.”
요코가 방긋 웃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거 아빠한테 잠깐 빌려 줘 보렴.”
“아니, 아빠도 줄넘기 할 거예요?”
요코가 신이 난 표정으로 줄을 게이조에게 넘겨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신기한 듯이 게이조를 빙 둘러쌌다. 게이조는 일본 옷에 게다 차림으로 줄을 빙글빙글 돌렸으나 너무 짧았다.
“아쉽게도 너무 짧구나.”
게이조는 이렇게 말하고 줄을 요코에게 돌려주었다. 요코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이젠 안 놀 거예요?”
아이들이 다시 숲 쪽으로 뛰어갔다. 게이조는 어젯밤에 실수로 요코의 뺨을 때린 보상을 한 듯싶어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요코, 아빠하고 놀지 않을래?”
요코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정말요? 뭐하면서 놀 건데요?”
이렇게 묻자 게이조는 답변이 궁했다. 게이조는 어린 여자 아이와 놀아본 경험이 없었다.
“밖은 추워.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자.”
게이조는 요코의 손을 잡았다. 요코는 기쁜 듯이 깡충깡충 뛰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요코라면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서 좀더 즐겁게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코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게이조도 흡족했다. 어제 실수해서 뺨을 때는 보상으로 요코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그는 요코가 누구의 자식인지 잊고 있었다.
“종이 접기를 할까?”
게이조가 말하자 요코는 복도를 쿵쾅거리며 달려가더니 곧 커다란 상자를 갖고 왔다.
“뭘 접을 거예요, 아빠?”
“요코는 뭘 접을래?”
“학이랑 치마랑 배랑…….”
“여러 가지를 접을 줄 아는구나. 배는 어떻게 접더라?”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 밖으로 새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사랑하려고만 하면 나도 요코를 사랑할 수 있다.’
게이조는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요코는 입을 꼭 다물고 야무지게 색종이를 접고 있었다. 색종이의 귀퉁이와 귀퉁이를 겹쳐서 접을 때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접는 것을 보고 게이조는 놀랐다. 색종이를 다 접은 요코는 방긋 웃고 나서 말했다.
“아빠, 이 배의 끝을 잡고 계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있어야 해요.”
‘이렇게 귀여운 아이였던가?’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요코의 웃는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았다.
“아이, 눈을 감으라니까요.”
요코가 우스운 듯이 말했다. 요코의 웃는 얼굴이 환히 빛나 그 머리카락까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요코.”
“네.”
“아빠가 안아 줄까?”
2학년이 된 지금까지 요코는 게이조에게 안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코는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순순히 게이조의 무릎에 안겼다.
“요코 꽤 무겁구나.”
의외로 살집이 좋은 요코를 무릎에 안고 게이조는 처음으로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는 자신의 냉정한 태도를 뉘우치게 되었다.
“저 벌써 2학년인 걸요.”
“반에서도 큰 편이지?”
“네, 두 번째로 커요.”
“그래? 대단하구나.”
게이조는 환자의 몸을 만지듯이 가만히 요코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얌전히 있었다. 그런 다음 게이조는 손으로 가볍게 요코의 양팔을 만졌다. 팔도 생각했던 것보다 토실토실햇다.
게이조는 등을 돌리고 안겨 있는 요코의 등에 뺨을 밀어붙이듯이 하며 손을 요코의 다리로 가져갔다. 반들거리는 동그란 무릎이 귀여웠다.
“뭐야, 스타킹을 신지 않았잖아?”
“양말을 신고 있어요.”
“이렇게 무릎이 나오면 춥잖아?”
“네, 하지만 오늘은 따뜻한 걸요.”
게이조는 비단결 같은 요코의 무릎 근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문득 어린 소녀가 치한에게 당한 이야기를 상기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자신의 소년 시절의 과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린 소녀에게 다 큰 사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나 하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요코를 무릎 위에 안아 보니 어린 소녀에 대한 그 치한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숙한 여성과 같이 있을 때와는 다른, 더욱 은밀하고 요망스런 심정일 것 같았다.
성숙한 여성은 섹스에 대한 지식도 감정도 풍부하여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소녀는 그런 지식도 감각도 없다. 어린 소녀를 껴안는 것은 밀실에서의 자위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어린 소녀는 순진하게 안겨 있을 뿐 아무 반응도 없지만, 성숙한 여성의 유혹과는 달리 야릇하게 매혹적인 데가 있을 것이다.
게이조는 그런 생각 끝에 문득 당황하여 요코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꽤나 무겁구나, 요코.”
요코는 몸을 약간 움츠리고 있었다.
‘설사 저 작은 입술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해도 요코는 그것을 아빠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그런 상상을 한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요코가 친자식이라면 절대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이조는 자신이 추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요코를 사랑할 수 있다.’
하고 자부한 조금 전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다. 결국 나는 감각적으로밖에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가?’
요코는 이런 게이조의 생각을 알 턱이 없었다. 아빠에게 안긴 것이 마냥 좋아서 종이로 열심히 학을 접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게이조는 종이를 접고 있는 요코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귀여워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과도 다르다.’
“아빠, 다음엔 뭘 접을까요?”
“………..”
“응?”
게이조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다음엔 뭘 접어요?”
“응, 비행기가 좋겠다.”
“비행기?”
게이조는 소년 시절에 광고 전단으로 비행기를 접으면서 놀았었다. 지금 그는 그때 일을 불쑥 입밖에 낸 것이다.
‘사랑한다는 건……’
문득 도야마루에서 만났던 선교사가 생각났다.
‘그거야, 그거! 자기 목숨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하지만…….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오랫동안 나는 한번도 요코를 무릎 위에 안아줄 수 없었다. 그리고 겨우 안아줄 마음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때, 이번에는 속물을 드러내고 감각적이 될 뻔했다. 그런 내가 선교사의 흉내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나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선교사는 좀더 중요한 무엇을 알고 있었다. 말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말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게이조는 알고 싶었다.
“아빠, 자, 비행기.”
요코는 저은 비행기를 게이조 쪽으로 던졌다. 비행기는 선명히 선을 그리면서 게이조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그때였다.
“오, 살아 있군, 살아 있어!”
다카기가 미닫이를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게이조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악운에 강한 놈이군. 그게 아니면, 쓰지구치는 도통했나? 하긴 악인은 아니었으니까.”
다카기는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앉아 게이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게이조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행이야. 아무튼 살고 봐야지. 인간은 죽어서는 안 돼. 그렇지, 요코?”
다카기는 이렇게 말하고 옆에 앉은 요코를 가볍게 안아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아빠가 살아 돌아와서 좋겠구나.”
“네 좋아요.”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울었을 거예요.”
“울어? 얼마만큼 울었을까?”
“몰라요, 엄마는 기절했었어요.”
“기절?”
“병원 선생님들이 주사를 놓아 주셨어요. 오빠도 울었어요, 아빠가 죽었다면서.”
“허, 대단했구나. 요코도 울었니? 엉엉하고 말이야.”
“전 울지 않았어요.”
“왜? 슬프지 않던?”
“오빠는 아빠가 죽었다고 했지만, 전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틀림없이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게이조는 다카기가 요코를 안고 있을 것을 보면서 조금 전의 자신의 추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코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다.
“지금 갈께. 기다려.”
요코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색종이 상자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
“………..”
다카기와 게이조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혼났겠군.”
“응.”
“생각하기도 싫겠군.”
“응.”
“사람들은 자넬 볼 때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물을 테지. 나는 묻지 않겠네. 그들은 단지 흥미로워서 묻는 거야.”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
“아니야, 인간이란 남이 목숨을 걸고 치른 고역에 대해서조차 사정없이 물어대지.”
“………..”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살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게.”
“………..”
“어차피 인간이란 몇 번 다시 죽었다 깨어나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뭐 자신은 별로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돼. 편하게 살아가게.”
게이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다카기의 말에서 뭔가 빠져 있는 것을 느꼈다.
“조금 있으면 무라이도 올 거야.”
“무라이가? 뭐 볼일이라도 있나?”
“아니, 별로.”
게이조는 2,3일 전부터 병원에 출근했다. 그래서 무라이하고는 여러 차례 얼굴을 마주쳤다.
“나쓰에 씨는?”
쓰기코가 위스키를 갖다 놓고 나가자 다카기가 물었다.
“답례하러 갔네.”
“답례? 무슨 답례?”
“이번 일에 위문해 준 데 대한 답례지.”
“사실 일생일대의 곤욕을 치르지 않았나. 위문은 그냥 받아두기만 해도 돼.”
다카기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숲 쪽에서요코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주 활기에 넘치는 아이로군.”
“아, 요코 말인가?”
게이조는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아무튼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야.”
하고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그거 다행이네.”
“……….”
게이조는 다카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요코가…….정말 범인의 자식인가?”
게이조는 다카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약속을 잊었군 그래.”
다카기도 응수하듯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허를 찔려서 당황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약속은 잊지 않고 있어. 하지만…….”
“그 애는 자네 부부의 자식일 텐데 범인의 자식이라니 난 모르는 소리야.”
다카기는 이렇게 말하더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요코는 머리가 좋아. 학교 성적도 2등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네.”
“흠.”
“게다가 아주 명랑하고 싹싹한 아이야.”
“그래서?”
“저렇게 얼굴도 예쁘다네. 살인범의 자식으로 저런 애가 태어날 수 있나?”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살인범의 자식은 으레 머리가 나쁘고 얼굴 생김새도 추하고 성격도 비뚤어진 줄로 알고 있나?”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사이신가 하는 자는 광부로도 일한 적이 있고…….”
“쓰지구치, 자네가 살아돌아온 기념으로 마시는 축하주를 놓고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네. 내가 늘상 유아원 아이들을 보러 오는 자들에게 화가 치미는 건 바로 그런 점일세. 그들은 뭔가 한 단계 낮은 족속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로 아이들을 보지. 설사 부모가 문어(광부)든 오징어든 우리네 자식과 뭐가 얼마나 다르다는 건가? 요코가 의사의 자식이 될 수 있다면 두말 할 것 없잖아. 광부의 자식이라고 자네도 꺼림칙하게 생각하나?”
다카기는 게이조를 노려보았다.
“그런지도 몰라.”
게이조는 다카기의 말에 옹졸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말이야, 쓰지구치, 유아원 애들을 보면 대체 나와 그 애들의 어디가 다를까 하는 걸 생각하곤 하네. 그 애들을 보러 오는 자들이 자기들은 그 애들보다 위에 있는 인간이라는 얼굴로 볼 적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
“자네 가문엔 둔갑술 쓸 때나 볼 수 있는, 두루마리 비슷한 길다란 계보 같은 게 있었지? 유서가 깊다고 해봐야 모두 살인범과 다를 게 없네. 첩을 거느렸던 자도 있을 거고 전쟁이 날 적마다 사람 잡기를 예사로 했던 자들도 수두룩할 걸세. 그런 자가 한 명도 끼지 않은 가계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하긴 그래. 하지만 그건 범죄자와는 다르네.”
“그래. 나도 뱃속의 아이를 몇십 명, 아니 몇백 명이나 죽였다네.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하는 태아를 말일세. 그만큼 죽였으면 귀신이라도 되어 나타날 것 같은데, 가엾게도 그러지도 못하더군.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서 경찰에서도 잡아가지 않네.”
다카기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야 범죄가 아니니까.”
“쳇,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하든 관계없다 이건가? 전쟁 중에 그런 짓을 했더라면 모두 감옥에 갔을 걸세. 의사도 모두 말이지. 그 시대라면 난 전과 몇백 범이야.”
“……….”
“그렇다면 나도 이 짓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유아원의 아이들을 귀여워한답시고 은근슬쩍 얼버무리는 치사한 놈이라네.”
게이조는 다카기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잖나? 후쿠자와 유기치(근대 일본의 선구자)는 역시 훌륭한 사람이야.”
“후쿠자와 유기치한테 애인이 있었던 거 알고 있나?”
“몰랐는데.”
“아사히가와에 그 애인의 아들과 손자가 살고 있네.”
“그게 정말인가?”
“응, 정말이야. 아들이라지만 벌써 70고개를 넘긴 분이라네. 훌륭한 분이지. 손자도 게이오 출신의 뛰어난 사람이야.”
“흠, 금시초문인걸.”
“아무튼 그 애인은 후쿠자와의 친척이었다네. 후쿠자와는 청혼을 했으나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자의 부모에게 거절당했었다네.”
“옳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할 만도 하군.”
“뭐, 후쿠자와의 사상과 관련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그 애인의 손자는 오래 전부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후쿠자와의 핏줄이라는 말은 한 번도 비치지 않더군.”
“아니, 그건 또 왜?”
“겸손한 거지. 후쿠자와가 훌륭하다고 해서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거야. ‘자네 할머니가 후쿠자와의 애인이었다며?’ 하고 물었더니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며 깜짝 놀라지 않겠나. 그런데 무라이가 꽤 늦는군.”
게이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라이가 들어왔다.
“어부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천천히 마셔 볼까. 자네도 이제 문제없겠나?”
“괜찮네.”
게이조는 무라이를 보기만 해도 마음속에서 거센 파도가 일었다.
“병원엔 벌써 나간다지?”
다카기는 쓰기코가 가지고온 치즈를 서너 쪽 집어들더니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병원에 나가는 게 편해.”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아름다운 마누라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무라이는 멍하니 위스키 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왜 그러나, 무라이?”
“왜라니요?”
“기운이 없어 보여서.”
“그래요?”
무라이가 히죽 웃었다.
“그런데 자네 결혼할 생각 없나?”
“결혼요?”
“몸에 무린가?”
다카기는 마치 게이조에게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도 이제 안정이 되고 했으니 이제 슬슬 결혼해도 되잖소?”
게이조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마치 무라이가 결혼하기라도 바라는 듯한 마음을 내비친 것을 후회했다.
“결혼이라고요…….?”
이렇게 말하고 무라이는 싱글싱글 웃었다.
“능글맞게 웃지 말게. 결혼 같은 건 해봐야 어차피 후회하게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아예 결혼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건 아냐.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 후회하거나 투덜거리게 마련이니까.”
다카기의 말에 무라이는 또 싱글벙글 웃었다.
“다카기 씨는 원장님과 동갑이시죠?”
“응, 그래.”
“그럼 저보다 먼저 결혼하셔야죠.”
“아, 그렇게 되나?”
다카기는 목덜미를 긁적이고 나서 말했다.
“세상의 관례대로 말하자면 그래야지. 하지만 말이야, 무라이, 내가 독신으로 있는 것과 자네가 혼자 사는 것 중에서 대체 어느 쪽이 더 눈에 거슬리겠나?”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무라이는,
“듣기 거북한 말씀 마세요. 왠지 제가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고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하고 있을 거야, 아마.”
“이거 곤란한데요.”
“어쨌든 난 혼자 살아도 세상 아가시들을 휘저어놓진 않네. 하지만 자네가 혼자 살면 반드시 시끄러울 거야. 안 그래, 쓰지구치?”
게이조는 마지못해 웃고 나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집사람에게 무슨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더니…., 결혼 얘기였소?”
무라이는 약간 당황하면서,
“아, 별, 별로 의논이랄 것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병원에 누구 점찍어 놓은 아가씨라도 있나?”
다카기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불그레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그가 술에 취했다는 표시였다.
“없어요, 유감스럽게도.”
“쓰지구치 병원의 간호사들은 비교적 반듯한 편이잖아?”
“글쎄요, 뭐 그렇지도 않죠, 원장님?”
무라이의 말에,
“사무원 중엔 누구 없소?”
하고 게이조는 전에 없이 불쑥 말했다.
“없습니다.”
무라이는 좀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마쓰사키 유카코와는 그래도 뜻이 맞지 않나요?”
게이조는 짓궂게 물었다.
“마쓰사키요? 그 여자는 원장님 외에는 세상에 남자가 없다고 하는걸요.”
무라이는 태연하게 말하고 나서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허, 쓰지구치에게도 그런 여자가 있나? 다시 봐야겠는데.”
다카기는 게이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천만에.”
게이조는 손을 내저었다.
“당황해하는 걸 보니 수상하군. 그렇지 무라이?”
“마쓰사키는 원장님께 몸이 달아 있답니다.”
무라이는 이죽거렸다.
“엉큼한 놈이군, 쓰지구치도. 점잖은 체하더니만. 나한테는 한 마디 비치지도 않았잖아.”
다카기는 게이조의 잔에 위스키를 다랐다. 게이조는 무라이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설사 마쓰사키가 나하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라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게. 나쓰에 씨 눈에 눈물이 날 테니까.”
다카기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라이 쪽으로 몸을 쓱 돌렸다.
“무라이, 어쨌든 자넨 결혼해야 해.”
“………..”
“자네 어머니가 신신당부했네. 빨리 색시를 맞아들이도록 설득 좀 해달라고 말이야. 나쁘게 생각 말게.”
“다카기 씨가 하라면 하죠 뭐.”
“그게 정말인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카기는 자신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때, 이 아가씨?”
게이조는 두 사람의 거동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사진 같은 건 볼 필요 없어요. 어차피 여자란 오십보 백보니까요. 다카기 씨가 좋다면 무조건 좋아요.”
무라이는 위스키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림없는 소리 말게. 맞선은 봐야지?”
“맞선 같은 건 귀찮아요.”
무라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무턱대고 사귈 거야?”
“어차피 결혼하게 되면 싫더라도 날마다 볼 게 아닙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해요.”
“흥, 그럼 뭐야? 사진도 안 보겠다, 본인도 안 만나보겠다, 결혼식 때 처음 얼굴을 볼 건가?”
다카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놀랐다.
“다카기 씨가 좋다고 해서 권한다면 그걸로 족하잖아요.”
“하지만 사진 좀 본다고 해서 뭐 큰일나는 것도 아닐 텐데.”
“사진 같은 걸 봐서 여자의 뭘 알 수 있겠어요? 만나봐도 알 수 없어요. 석달이나 반년쯤 사귀어도 서로 속일 수 있거든요. 좋은 점만 보여주려고 할 테니까요.”
“그래서 사귀지도 않겠다는 건가?”
“저는 저 나름대로 갖고 있는 결혼관이 있어요. 결혼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요. 아니, 결혼해서 몇십 년이 지나도 모르지요. 인간이란 그런 면이 있잖아요?”
“어때, 쓰지구치, 무라이의 논리 말이야.”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뜻밖에 무라이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무라이는 언제 어디서 이런 깊은 상처를 입었을까?’
“다카기 씨는 독신이니까 알 턱이 없지요. 하지만 원장님, 결혼이란 도박과도 같은 게 아닐까요? 잘 되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둘 중 하나로 낙착이 되거든요.”
“글쎄요.”
게이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뜨겁게 연애를 했거나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라 결혼했다고 해서 반드시 잘 돼 나간다고 볼 수는 없지요. 어떤 결혼이든 성공할 확률은 오십 퍼센트밖에 안 돼요.”
“보기와는 달리 엉뚱한 생각을 하는 녀석이군.”
다카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판사판이지요. 어차피 도박을 하는 이상 저는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부모도 성격도 그 밖에 어떤 것도 모른 채 하고 싶어요.”
“마작만 하더니 자네 완전히 노름꾼이 다 되었군 그래.”
“그럼요, 노름꾼이고말고요. 도박이라도 할 심산이 아니고서야 어디 결혼할 엄두가 나겠어요?”
취해서 핏기가 가신 무라이의 얼굴을 보면서 게이조는 처음으로 그에게 약간의 온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래서야 어디 여자 쪽에서 응할까요?”
게이조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사람을 깔보는 수작밖에 안 돼. 아주 철딱서니 없는 녀석이라니까. 난 자네 중매는 절대 안 서겠네.”
다카기가 화난 듯이 말했을 때 나쓰에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쓰에는 손님이 다카기뿐인 줄 알았다.
“다카기 씨가 오셨어요.”
쓰기코는 무라이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카기의 이름에 무라이까지 포함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방에 들어저자마자 뜻밖에 무라이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빰을 붉혔다. 이것을 알아차리자 그녀는 더욱 상기되어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게이조와 다카기의 눈이 동시에 날카롭게 빛났다.
“집을 비워서 미안해요.”
인사를 마치자 나쓰에의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나쓰에 씨, 무라이가 결혼하기로 결정했답니다.”
다카기는 나쓰에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게이조는 또 다카기가 농담을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방금 다카기는,
“자네, 중매는 절대 안 서겠네.”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머, 축하합니다.”
나쓰에는 약간 놀라긴 했으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게이조가 죽었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그녀였다. 그 후로 그녀는 무라이에 대해서는 무슨 딱지라도 떨어진 것처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 무라이의 모습을 보고 뺨을 붉힌 것은 단지 놀라서였다. 설사 아주 단순한 놀라움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연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쓰에의 감정에는 어린애다운 면이 있었다 그녀는 게이조의 죽음을 생각만 해도 겁이 났다. 그러나 무라이가 결혼한다고 해서 그녀의 생활에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요코를 키우게 한 게이조가 너무도 밉기는 했지만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다.
“축하합니다.”
라고 말하는 나쓰에의 말을 세 사람은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 게이조는,
‘거짓말 말아요!’
하고 생각했다. 다카기는 다카기대로,
‘얼굴색도 바꾸지 않고 축하하다니 어떻게 된 걸까? 방금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수줍음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무라이는 나쓰에의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이것이 이 여자의 본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카기 씨가 권하는 바람에……”
무라이는 태연했다. 나쓰에의 태도는 ‘치로루’ 다방에서 만났을 때와는 판이했다.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어머, 어떤 분인데요?”
나쓰에는 다카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여자죠.”
다카기는 무라이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나쓰에 앞에 사진을 꺼내 놓았다.
“예쁘군요. 그렇죠, 여보?”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말했다.
“아니, 난 아직 보지 않았소.”
게이조는 무라이도 보지 않은 사진을 들여다보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나쓰에의 태도에 불안을 느꼈다.
‘앙큼을 떠는 것도 분수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