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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증거
마가복음 16:1~13
오늘은 교회 절기상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 아침 일찍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소생하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되 다시는 죽을 수 없는 불멸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곧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불멸의 몸으로 일어나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영광의 몸으로 사신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소상하고 진실하게 기록한 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교회들에게 쓴 서신들에도 일관되게 증언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5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내용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제자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1~8)
여기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자들이 숫자로 보면 수백 명에 이르고 부활 후에 만나신 횟수가 여러 차례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주후 57년 경이니 예수님 부활 후에 약 2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도들과 한꺼번에 5백명씩이나 예수님을 한 자리에 보았던 사람들도 여전히 살아 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 사도 바울의 증언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생략된 부활의 증인들이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여인들도 있습니다. 또한 엠마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부활하신 당일 오후에 몇 시간이나 동행하며 성경을 가르쳐주고 함께 식사까지 했던 글로바와 그 아내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승천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당부하는 내용도 나오고 감람산에서 120문도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한꺼번에 함께 계신 장면도 나옵니다. 또한 다메섹으로 가던 핍박자 사울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와주신 것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밧모 섬에 귀양살이하던 사도 요한에게 부활의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를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뵈었던 사람들이 실로 매우 많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스승을 잃어버린 제자들의 망상이나 환상이 아니고 심리적인 혼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지속적이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과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직접 뵈었던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 시골로 내려가던 두 사람 곧 글로바와 그 아내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들과 다른 갈릴리 여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 부활을 전해주었을 때 그들이 곧장 믿었습니까?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이르기를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직접 보거나 전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갈릴리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곤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참혹하게 완전히 십자가 위에서 피를 다 쏟고 죽으셨으며 차가운 무덤에 묻히는 것을 직접 가까이에서 접해서 알고 있었던 그들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 부활의 주님의 소식을 천사에게서, 혹은 직접 본 동료 자매와 형제에게서 전혀 듣고도 믿을 수 없고, 또 친히 주님이 부활하신 당일 밤 그 제자들이 모인 방에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자기 손과 발과 옆구리의 구멍들을 보여주시고 자기 몸을 만지도록 해주어도 역시 두려워하며 여전히 의심하였습니다.
그렇게 의심이 많고 믿을 수 없었던 제자들과 갈릴리 사람들이 나중에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들은 다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생애 전체를 드렸고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대부분이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들 도망쳤던 비겁한 행동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에 소수의 갈릴리 여인들과 제자 요한 외에는 다들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 잡혀갈 때 정신없이 내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계집종의 추궁을 듣고 자기도 잡힐까봐 예수님과 불과 20~30미터 정도 떨어진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번 뵙는 중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니까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제자들은 거의가 순교하였으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다가 칼에 맞아 죽거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거나 불에 태워 죽거나 기름 가마에 던져지기도 하고 화살에 맞아 죽거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이처럼 다 용감한 증언자들로 변신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다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을 직접 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기에, 주님이 명하신 복음의 진실한 증인으로 산 자에게 영원한 영광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용감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겁쟁이 제자들이 용감한 증언자들로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놀라운 변신이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나라의 매장 형태와 다릅니다. 그들은 암벽이 있는 곳을 파서 돌로 된 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무덤 입구를 둥근 큰 돌을 굴려서 막아놓습니다. 그리하여 그 동굴 안에 그들의 조상들의 뼈를 안쪽에 넣어두고 새로 그 후손이 죽으면 그 후손을 동굴 무덤 앞에 놓아 그 살이 다 썩으면 그 뼈만 조상들의 뼈가 있는 안쪽에 함께 넣어 보관합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아리마대 요셉의 동굴 묘소도 마찬가지 형태였을 것입니다. 그 무덤은 요셉이 자기와 자기 후손을 위하여 만들어 판 새 무덤이었는데,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골고다에 잡혀 죽으시자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묘소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그 무덤에서 살아나셨기에, 그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무덤이 비었으니 더 이상 주님이 묻히신 빈 무덤은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나신 자를 찾기 위하여 비어 있는 무덤을 찾아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후 세월이 이천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님이 묻히셨다고 추정되는 그 무덤의 위치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의 무덤을 생각해보십시오. 인도의 불교 창시자 석가모니는 그가 죽은 뒤에 화장하고 나온 뼈들과 재와 그의 몸을 담았던 항아리를 가지고 열 곳에 나눠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열 곳에 만들어놓은 석가모니의 무덤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숭배하곤 합니다. 저 유교의 최고 스승이라 일컫는 중국의 스승 공자 역시 죽은 뒤에 산동성 곡부라는 곳에 그의 무덤을 성대하게 만들어 놓아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참배하곤 합니다. 저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의 무덤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는 매년 이슬람 교도 수백만 명이 성지순례차 와서 경배하고 돌아가곤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종교 창시자의 무덤들을 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신성시하며 찾아와 경배하곤 하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어 있는 무덤이니 그 무덤이 어디 있는지 이천년 간 학자들과 신도들이 열심히 찾아도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은 자가 아니요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덤과 사망을 영원히 폐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을 찾아 기념하고 경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물고기를 나무 위에서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빈 무덤은 곧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미 자연 세계 속에서 죽은 자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를 심어놓으셨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5:35 이하에 이러한 말씀을 사도 바울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는가 하고 의심하고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자연 세계를 보면 부활의 예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벼나 밀이나 보리나 채소의 씨앗이 땅에 심어져서 흙에서 썩어 죽지 아니하면 그것들에서 싹이 나지 않습니다.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천년이 지나도 그것은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흙에 들어가 며칠 동안 캄캄한 땅 속에서 죽어 있을 때 비로소 거기서 싹이 올라오고 줄기가 올라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죽고 나서 무덤에서 부활할 때에 어떻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곧 다시 죽을 수 없는 불멸의 영원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었는가가 의심스러울 수 있으나, 자연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흔합니다. 우리가 알지만 저 잠자리 애벌레는 저 지저분한 물속에서 몇 년 살다가 나중에 성충이 되면 하늘을 나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잠자리가 됩니다. 작은 새 알을 보면 그 새 알에서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큰 날개로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습니까? 작은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 뿌리가 생기면 그것이 자라나 20미터, 30미터의 크나큰 상수리 나무가 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연 속에서도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고 영광스러운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뒤에 다시 불멸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얼마든지 자연의 예표들처럼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그러한 것처럼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죽은 뒤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화된 모습처럼 부활의 영광을 입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영광스럽게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으로 자연 세계에서도 우리 구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예표적 증거들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기적들과 그 이름의 간구의 응답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죽고 난 후에도 그 이름이 나름대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합니다. 누구의 손자, 누구의 자손이라고 하면 그 훌륭한 조상의 업적이나 선행 때문에 후손들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 사람의 이름에는 죽은 뒤에도 영향력이 있습니다.
일제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막내아들 주광조가 북한 김일성의 치하에서 탈출하여 남한 서울에 내려왔으나 제대로 먹지 못하여 폐결핵에 걸린 상태로 공부도 중단된 채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그 때에 친구 여동생의 친구를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구귀학이라는 자매였습니다. 대구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대학 다니다가 우연히 서울 한국은행에 취업을 하게 되어 올라왔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절망적인 청년 주광조는 구원의 빛을 본 듯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구귀학 자매는 이 청년이 약하고 가난하여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친정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접고 만남 자체를 거부했으나 주광조는 묵묵히 은행 퇴근 시간에 맞춰 나와 몇 분이라도 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구 자매의 친정의 올케 언니가 자기 친정 식구에게 주광조 청년 집안을 물었다가 그 집안의 유수한 장로님이 주광조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줄을 알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이면 선도 안 보고 딸을 줄 것이야”
이 말을 전해 들은 구귀학 자매의 어머니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냐면서 딸과 주광조 청년을 불러 결혼을 서둘러 하도록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급하게 결혼식을 하려고 결혼식 장소를 서울에서 알아보니 마침 찾아간 교회의 목사님이 옛날 주기철 목사님 가정과 친분이 있는 최거덕 목사님이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결혼 예식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결혼식 당일에 면사포를 쓴 구귀학 자매에게 한국은행 동료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며느리가 되다니...이병철 며느리가 부럽지 않구나”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분일지라도 그의 삶이 고귀하고 아름답고 덕을 쌓으면 그가 비록 죽어도 그가 남긴 이름에는 고상하고 복된 힘이 있어 후대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렇듯 비록 죽어 썩어 없어진 사람의 이름에도 선한 영향력이 있을진대, 영원히 죽음을 이기고 영광 중에 부활하여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초대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에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걸인 병자를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사도행전 3:6)
명하자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 곧 걷고 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중풍병자도 일으키고 죽었던 과부 도르가라는 여인까지 살려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의 괴수라고 미워하고 믿지 않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을 믿고 수만, 수십만 명이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을 다니면서 미신과 잡신과 우상 숭배에 깊이 물들었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길로 돌아왔던 이유도 사도 바울이 주의 이름으로 명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수없이 많은 귀신들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분명함을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순교하고 힘없이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자의 이름이라면 어찌 권세가 있고 어찌 능력이 그 이름으로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고 영광스럽게 되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영광의 주님이시기에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이름 까닭에 응답주시기에 이렇게 기도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이 분명함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죽은 자가 아니요 분명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의 구주시요 보호자시요 인도자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를 주님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미국의 고든콘웰신학대학교 세계기독교연구센터(Center for Global Christianity)가 발표한 2022년 세계 기독교 현황에 따르면, 가톨릭을 포함해 전체 기독교 인구는 25억 5900만 명으로 지난 2000년과 비교해 5억 7천 만 명 가량 늘었습니다. 앞으로 2050년이 되면 약 35억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는데, 특히 아프리카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빠르게 많이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세계 인구의 32퍼센트에 달합니다. 열 명 중에 세 사람이 넘게 기독교인들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작은 팔레스타인 땅의 갈릴리 나사렛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온 세상에 퍼진 것은 실로 예수님 말씀 그대로 작은 겨자씨 하나가 심겨져 큰 나무를 이룬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가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살아 계신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주는 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절에 이 복되고 귀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알고 있는 자로서 주님이 피로써 세우신 교회에 와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있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르신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한 사람도 내게 올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자리에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해 오셔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감사하며 예배하게 된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사망에 매여 늘 죽음을 두려워 떨면서 살던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친히 죽음으로써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고 영원한 불멸의 영광의 부활과 영생 천국을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주님의 부활을 영원히 찬양합시다. 큰 기쁨으로 기뻐하면서 이 복된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어서 구원의 복된 영광에 동참합시다. 또한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절대 소망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지라도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영광 중에 부활하시 것을 기억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승리할 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이 부활의 복된 소식, 생명의 소식을 우리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 동료와 온 세상에 담대하게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로 남은 생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