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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도모하는 안산 시화 시민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송하늘
(펌)
촛불이 켜지고 지금까지 유지되면서 촛불의 정신 이라고 불리울만한 것이 존재했을까요??
100만 이상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100만개의 생각들이 거리를 가득 매웠었지요..
그 거리에는 다양함이 공존했습니다..그만큼 분쟁도 잦았지요...
하지만 그 의견들의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있었다 해도 생각의 공통분모를 잘못짚어서 폐기되는 계획들도 많았지요..
그 과정 속에서 저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정부 비판에 열을 올리면서도 우리의 내면을 깊게 살피고 다지지는 못할까?
우리가 왜 촛불을 들었는지 그 근원적인 고민은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에 대해 자신만의 대답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것이 바로 촛불이 사그라든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현정부를 비롯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마음속에 촛불을 꺼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후 어느시점에 촛불이 다시 활활 타오른다면...
꼭 손에 든 촛불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의 빛이 다시 켜지게 하려면...
우리는 촛불의 정신을 미리 마련해 놓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단지 한두달 후를 기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수년 후라고 해도 우리의 미래를 위한 행위는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촛불은 이미 역사의 한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 역사 속에서 촛불을 배울 우리의 후세들이 촛불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살릴 수 있으려면..
우리가 진정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눈앞의 이익이 아닌 우리가 꿈꾸던 세상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촛불의 정신을 마련해 놓아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선대들로써 후세들에 대한 의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주제넘게 촛불의 정신이라 불리울 자격이 있는 것들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에대해 이견이 있으시거나 더 나은 대안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만들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구체적 논의를 벌이기 전에 한가지 전제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한 여자아이가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옆의 독수리는 그 아이가 죽으면 먹잇감으로 삼기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넓은 대지 위의 한켠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는 환경문제와 거대한 석유문명이 가져온 아프리카의 사막화 현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 종교를 중심으로 한 수십년간의 내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보았을때의 당신의 느낌...그것이 바로 촛불의 정신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촛불은 저 죽음 직전의 어린아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야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지가 바로 촛불에게 던져진 화두일 것입니다...
이 사진을 먼저 내세운 것은...현재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의 해결을 논하기 전에...
촛불은 우린 안의 욕망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는 것을 전제하고자 함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봅시다...
첫째..촛불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물질문명의 총체적 욕망구조에 대한 저항이어야 합니다..
촛불의 시작점에는 소고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GMO작물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 지금 우리나라에는 멜라민에 대한 공포로 가십거리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인간은 더 나은 육질과 사료공급의 효율성과 원가절감을 위해 소에게 소를 갈아먹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작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담대함을 보였죠..
수 많은 부작용을 지닌 가공식품도 연역적 추리로...마구잡이로 개발해 왔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간에 대한 화살로 되돌아 왔습니다..
촛불 기간동안 문제 되었던 것들에 국한 시킨다 하더라도...
광우병에 걸려 멍하니 뒈져나간다거나...
GMO를 섭취하고 자신도 모르는 불임증상의 원인이 된다거나..
매일 가공식품을 섭취하여 암의 발생 원인을 만들거나 아토피로 몸을 벅벅 긁게 되거나...등등..
인간의 무한한 경제적 효율성 추구는 다시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행복이 아닌 두려움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 현실이 된거죠...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산성과 효율성에한 집착입니다.....
그것의 이면에는 바로 모든 것이 산업화된 지금의 세상...
그 속에서의 물질적 이익..최대이익에 대한 추구가 숨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건 다하겠다는 심산이죠...
우리가 느꼈던 먹거리에 대한 공포..
현정권의 굴욕적인 외교가 결정타를 날리긴 했습니다..그래서 촛불이 생겨났죠...
하지만 현 정권이 아닌 다른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먹거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더 근원적인 원인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문명의 총체적, 구조적 문제라는 것...맞죠??
경제적 효율성의 극단적인 추구....그 원인에 대한...
현재까지 가장 흔해빠진 논의는 좌우 대결이란 이름으로 행해져 왔습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분들... 많으시겠죠..
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자본주의보다 훨신 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맑스 부터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맑스 자본론의 근간은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변증법까지야 그렇다고치고...문제가 되는 것은 유물론의 부분입니다..
유물론과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는 명제는 같은 맥락에 서있습니다...
유물론은 모든 관념이나 의식 보다 물질을 우선시 여겨버리죠....
그것은 맑스가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경제적인 부분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제가 느낀 맑스의 아이러니는...
자본주의의 물질의 착취구조를 설명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물질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해버린게 되는거죠...
맑스가 원하는 세상은...
그가 세상을 계급투쟁으로 바라보았던 역사의 본질은...자본의 이동 일 뿐이였습니다...
즉 부르조아의 이익을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전환한다하여 우리를 위협하는 석유문명...
그리고 물질문명 전제가 되어온 욕망의 구조를 근원적 해결할 만한 대안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맑스 또한 서양 근대 사상체계 안에서 놀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틀안에서 논의가 벌어졌기 때문에 근대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는 없는것이죠...
맑스를 따라가다 보니 우선 서양 근대 사상까지 와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두번째...
둘째 촛불은 서양 근대가 만들어 놓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석유를 기반으로한 물질문명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서양근대의 절대자아 개념 과 유물론적 인식론 과 이성중심주의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흔히 서양의 특성은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정의 내립니다..
걔네들 돈계산도 철저하고 사고구조가 우리보다 훨 합리적이자나요..
하지만 서양이라고해서 역사적으로 항상 개인주의적 성향만이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세시대에는 극단적으로 공동체적인 장원경제가 존재했고..
또 종교가 개인의 모든 자유를 지배하려드는 모습도 있었죠..
흔히들 암흑시대라고도 하잖아요..
그들은 너무나 심각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한했기에..
그로부터 벗어나기위한 몸부림으로 철저히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습니다...
그에는 당연히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겠죠??
그 시작이 바로 데카르트적 절대자아 개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 유명하잖아요?
나의 존재기반은 바로 나의 생각이다..나의 이성이다...
신 따위가 부여한 신의 은총이 아닌 나 스스로 내 존립기반을 만들어낸다..
근대적 자아관의 시초는 개인 그자체로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그만큼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는 확실히 확보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욕망의 자유도 인정 되는 것이지요...
또 절대자아는 인간의 본질적 사회적 특성을 소흘히 함으로서
인간 사이의 유대관계를 약화 시키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축이 되었던 것은 유물론적 시각 입니다...
서양근대의 유물론적 인식론은 관념이나 형이상학적 논의에 앞서 물질을 우선시켜 버립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은..
그것은 마음이라는 물질에 또 다른 물질을 새겨넣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몸조차 물질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절대자아 개념과 유물론적 시각이 이성중심주의와 짬뽕되어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깁니다 ..
이것은 다시 물질문명의 극단적 발달의 계기가 된것이죠..
하지만 여러분들이 느끼시는 발전은... 과학의 극단적 발달은....
인간에게 오히려 과학의 한계를 느끼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놈프로젝트를 생각해보세요...
이제 겨우 인간의 유전자 배열 상태를 밝히느냐 마느냐 하고있습니다...
그거 밝혀서 또 이거저거 지랄하고 실험하겠지만..
생물의 그 오묘하고 복잡다단한 시스템을 절대 인간의 지적능력으로 완전히 밝혀내지 못한다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스티븐호킹의 머리속으로는 이미 은하계 뛰어넘어 빅뱅에 블랙홀까지 증명해 낸다해도...
인간이 밝혀낸 우주의넓이 만큼..인간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것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되는거죠..
근대적 환상이 가져다 준 오류들은 우리가 근대적 환상에 많이 익숙해서 그렇지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것들이 많습니다..
개인주의와 경제발전을 향한 극단적 사고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 해 버렸습니다..
우리 현대사에도 대표적인 사례가 있죠...
일본의 근대화를 그대로 베끼고 싶었던 박정희는 일본 보다 더 철저하게 새마을 운동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름을 걸고 우리나라의 모든 전통적 가치들을 갈아 엎어 버립니다..
그 이후에도 개발주의의 망령들은 전 국토를 사정없이 파헤쳐 놓으면서 우리에게 가치라는 것을 생각할 시간을 뺏어가 버리죠..
또 유교적 가치도 아닌것이...자본주의적 가치도 아닌것이...
이상한 변종적 형태의 가족관계 또한 우리 주위에서 항상 목격해왔던 해체된 공동체의 실상입니다...
이성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근대의 환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오류와 부작용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모든걸 포기하고 신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모든 근대적 가치들이나 과학의 결과물들을 완전히 부정하려는게 아닙니다...
단지 심각한 모순과 문제점들을 불러일으킨다면...그것에 대한 브레이크가 존재해야 한다는거죠...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으로 과학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던져 준 작품이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인데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바로 불입니다..
불은 인간의 과학문명의 상징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 불씨는 너무나도 귀엽고 앙증맞은 우리의 친구죠~
하지만 잘못다루면 인간에게 큰 위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양면성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하야오의 그 은유가 바로 우리가 과학을 대하는 방식이여야 할것입니다..
이제 친구가 되어버린 과학이라는 힘을 우리는 잘 다뤄야 할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커지거나 아예 꺼져버리면 인간이 젖되는건 마찬가지 이니까요...
자..정리하자면 가장 근원적 원인은 우리안의 고삐풀린 욕망의 자유...
그것이 가능하게된 것은 근대적 인간관 인식론 이성주의에 있다는 거죠...
원인을 밝혀서 없애려면 그곳을 채울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대를 지양하고 나서 지향할 곳은 어디여야 할까요??
여기서 셋째...
셋째 촛불은 자신의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촛불시위마다 울려퍼지던...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 일까요??
386세대 선배님들께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는 바로 민주주의 였습니다..
하지만 그 민주라는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민주주의의 정의를 가장 깊게 논의하는 헌법책이나 논문에서 조차 민주주의는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모습도 다양하구요...
직접민주 간접민주 자유민주 사회민주 동일성민주 상대적민주.....
그 개념의 다양성 만큼...
우리가 손쉽게 부르는 민주주의는 실상 다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안에 논의 되는 모든 민주의 개념이 근대적 사고의틀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논의되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왜 근대적 사고 틀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
그것은 민주주의로서 더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곳이 어디이냐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결국 이루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개개인의 기본권 확보 입니다..
단지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기위한 수단으로서 여러가지 형태의 민주주의 형태가 제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 열심히 해봤자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이 짓밟힌다면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 없는것이죠..
북한의 국명은 분명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입니다..
그들 역시 민주주의를 거창하게 내걸고 있지만 그들의 실상이 전혀 민주적이지 못해보이는것..
그건 바로 그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이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기 떄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들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대자본과 거대권력의 기득권의 지배 내에서의 자유만 보장되고 있지요..
자..그러면 우리 선배님들과 현재 우리가 목놓아 부르짓는 민주주의라는게..
결국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보장이라는 궁극적 목표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겠죠??
민주주의와 기본권 보장은 헌법적 가치 라는 이름하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헌번적 가치는 민주주의 이념과 기본권 보장 개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하에서는 그래서 민주주의든 기본권 보장이든 헌법적 가치라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우리의 헌법적 가치는 분명 우리가 지켜나가야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또 우리의 가시적인 목표이기도하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여서는 안됩니다.
그 헌법적 가치가 우리에게 직면한 수많은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죠..
욕망의 구조를 해결하기위해 따라왔지만...헌법적 가치들 만으로 그것을 해결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는거죠...
그런의미에서 네번째..
넷째 촛불은 기존의 헌법적 가치의 범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헌법적 가치들 또한 근대적 사고의 틀안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짚고넘어갈 것이..
근대적 헌법 자체가 근대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천부인권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부르조아 계급의 재산권 확보와 귀족과 왕권으로부터의 해방의 수단이였죠.
근대 초기의 여러가지 모순을 보인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겉이 뻔지르르한 영국의 권리장전을 생각해보세요..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층의 유아 사망률이 90%까지 다다른 경우도 있어으니 권리장전이 누구를 위한 권리장전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1928년이 되서야 영국 여성의 투표권 제한이 철폐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근대적 헌법이 우리 생각처럼 진정 천부인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던거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해서 헌법적 가치가 국민 개개인을 위한 사회적 기본권과 생존권적 측면이 전혀 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거쳐 수정 자본주의 영향하에 헌법적 가치 또한 실질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죠..
비록 실패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대적 복지국가 헌법의 실험도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각 국 헌법에영향을 주기도 하였구요...
하지만 우리 헌법적 가치의 주 대상은 아직 근대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자유권적 기본권 은 사회적 기본권(인간다운 생활할 권리)에 비해 항상 우위에 있죠..
왜냐하면 그 태생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틀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자체로 구체적 기본권을 도출해주지 않죠
또...환경권 조항 하나로 우리 헌법은 구체적 기본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국회가 인정해서 법을 만들어야만이 기본권으로 행사할 수 있는..뒷전으로 밀린 기본권이라는거죠...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법적인 분쟁들이 점점 이익분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도
근대적 헌법의 가치가 우리안의 욕망구조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근거가 될것입니다...
모든 자유권적 기본권은 타인의 기본권과 상충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죠..
서로 내 조때로 하는 행동이...내가 주장하는 권리가... 누군가에겐 권리침해가 될 수 밖에 없는 거...
이렇듯 헌법적 가치의 핵심은 자유 입니다...
하지만 절대개인의 자유는 서로 상충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욕망을 제어하는 기능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근대적 자유가 아닌 ....자율 의 개념으로 우리 사고의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자율은 자유의 개념에 이미 어느정도의 제약과 도덕성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또 인류가 쌓아왔던 모든 사상체계도 막되먹은 자유보다는 자율을 중시하고 있죠...
다섯째 촛불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되는 철학적 기반을 대안으로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근대적 가치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관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극복해야할 모순들이 비단 근대 사상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서양철학의 이성주의와 이분법적 사고의 근간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었죠..
플라톤의 이데아는 흡사 기독교의 하늘나라와도 닯아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상태를 상정해 버림으로서 너무도 단순하게 세상을 선과 악으로 양분해 버립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 내지 대체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걸 누가하지?? 현대철학이 해줄까???
현대철학이 완전한 우리의 대안적 체계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측면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하버마스의 진리합일설은 이상적 대화 상황에서의 합의를 정의로 해석해버립니다..
또 존 롤스의 정의론은 기본적 권리의무의 할당에 있어서의 평등을 요구하며..
불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상태를 정의라고 해석합니다..
데리다의 헤체이론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등의 현대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문제점과 그에 따른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멋져 보이고 세련되 보이는 모든 포스트 모던의 사조는...
모더니즘을 산산히 부셔버리는 업적을 남긴거죠...
하지만...그 부셔버린 이후를 말하지는 않죠...
해체하고 부정하고 비판하면...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좀 무책임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뫼르쏘처럼 우리의 실존을 찾아 눈부신 햇살 속에서 아랍인 하나를 쏴죽이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서양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어디로 가야할 까요??
그것을 빼놓고 무엇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할까요??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류가..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고전적 가치 들로 그 자리를 채워넣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로써 이루어 나아가야할 모습은 자율을 바탕으로한 인본주의적 공동체 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적 가치에 있어 고전이란 무엇입니까??
고전은 인류가 수천년 동안 쌓아왔던 지혜의 보고입니다...
우리가 읽어왔던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시리즈나 음악들을 쭉~~한 번 훑어 보세요..
쳐다보고 있자니 나부터 좀 무안해지는 책들이분명히 있죠??
분명 가요톱텐 5주 1등을 한 노래들 중에 몰래 엠피쑤리에 담아 듣기에 쑥쓰러워지는 노래가 있죠??
반면 수십년이 지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책들과 음악이 있습니다..
고흐처럼 동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고전이 되버리는 예술작품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작품들이죠...
그런데...그런데...우리 손에 쥐어진 수천년의 가치를 지닌 고전들은...
과연 얼마나 그 가치가 월등하길래 그 시간을 버티고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일까요??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얼마나 인간의 본질적 부분을 건들고 있길래 그 생명력을 유지 하는 것일까요??
그런 과정을 거친 고전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할 소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섣불리 정의 내릴 수 없지만 고전들을 통해 귀납적인 추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전들에서 인간의 본질을 추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그림을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할 것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도 인간을 위한 인본주의적 공동체로 향한 효과적 발걸음을 옮겨나갈 수 있겠죠...
우리가 존내 구리다고 생각하고 버려왔던 우리의 고전적 사고구조와 모습들...
그것들 속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인류가 직면한 식량문제나 환경과 에너지 문제까지 포괄할 수 있는 거대한 대안적 세계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점칠때나 쓰는 줄 알았던 음양론을 생각해봅시다...
동양적 사고에서 음과 양은 항상 나누어져 있죠...이거 똑같은 이분법아니냐??
근데 우리 태극기에 있는 태극문양을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나누어져는 있지만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애매하게 침범하며 순환적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죠??
또 고봉 기대승과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살펴봅시다...
주기론이던 주리론이던 이리와 기기는 완전히 고립된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 서로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서양적인 이분법은 동양적 세계관에서 통용되지 못했다는거죠...
하늘천 따지...우리가 흔히 듯던 천자문에도 그 사유가 숨어져 있습니다..
하늘은 양이죠..땅은 음이고...
하늘과 땅이 떡쳐서 나온 새끼들이 지금 우리 지구상의 모든 만물이란거죠...
존레논 이매진의 한 가사를 생각해봐요...
No need for greed or hunger, 탐욕과 궁핍도 없고
A brotherhood of man, 인류애만 넘치는
물론 기독교적 세계관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꼭 반대편에 사탄이 존재하잖아요...
기독교 애들은 항상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강조하잖아요..
그것과 동양의 음양의 천지 코스몰로지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 있다는 점이 다른거죠..
그렇다면 니가 말하고 하려는 구체적인 대안적 시각이 무엇이냐???
지금 이 글에서 그것들은 다 쓸 수는 없겠죠...그거 쓰려면 책을 내야되잖아요..
전 고전적 가치들에서 우리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일례로 이전에 연세대학교 정외과 함재봉 교수님이 쓴 글에서 유교적 인식론과 사상체계를 대안으로 제시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人 이라는 글자 자체가 두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성형문자라는 점...
인간人間 이라는 말 자체가 사이간자가 들어감으로서..
인간은 철저하게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만 그 존재가 확인되고 존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또 이익 효용 행복 등의 개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절대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도덕을 요구하는 자율적 자세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근대적 절대자아와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이에대해 진중권 교수는 특유의 처절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벌건 개명천지에 구닥다리 어흠~대감이 군림하려 드느냐고...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전적 철학체계와 가치를 가져온다 하여 그때와 똑같은 사회가 형성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떄문입니다..
단지 교육의 방향과 기본적인 세계관의 대체가 필요할 뿐..
현재까지 이뤄 온 인류의 모든 과학기술이나 인문학적 발견의 성과를 모두 버리자는게 아니니까요..
그 대안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다시 만들어질 세상은 이전의 세상과 똑같은 모습이 아닌 새로운 형태가 되겠죠..
저희같은 경우...고전적 가치를 찾다가 김구 선생 글을 걸었습니다...
가장아름다운나라 카페에 오시면 이전부터 김구 선생의 가장아름다운나라 글귀를 카페에 걸어놓았었죠??
왜 그랬게요??? 자율을 바탕으로한 인본주의적 공동체의 가장 필요한 대안적 시각이 글귀에 쓰여져 있기 때문이죠...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
인의(仁義)가 부족하고,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인류가 60억인데도 불구하고 20억일때도 저 생각을 하셨다는게 정말 위대해 보입니다..
저 한마디의 가치로만 앞으로 우리나라 가장 고액권인 10만원짜리에 들어가셔도 전 불만 없습니다~
근데 인의 자비 사랑의 마음..
이거 되게 복잡한 구조 입니다...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만 따오신거 잖아요...
인仁이라는 글자 하나만 봐도..그 의미는 정말 복잡합니다.
공자가 말한 仁은 본래 등에 짐을 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이란 '남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가까운 혈연에서 비롯하여
멀리 미치게 함으로써 사회적·국가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그것을 본래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남의 불행을 좌시하지 못하는 동정심=측은지심 이라고 합니다.
주자는 인을 현실적인 애정과는 구별하여
인이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理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은 여기에서 이념적인 성격을 강화해서 체계적인 유교 윤리철학의 근본원리가 됩니다....
우리 천원짜리와 오천원짜리에 지폐인물인 이황과 이이 선생의 주리론과 주기론에 등장하는 이理에 해당합니다.
의義는 맹자가 강조한 의미입니다.
의를 실현코자하는 대장부의 기질을 호연지기로 표현하기도 했구요..
호연지기 한 단어만 해도 굉장히 복잡하 해석을 요구합니다...
어쨋든 인의 는 현실적 결과보다 당위 를 추구하던 유교적 사상의 근본인거죠...
역사적으로 지금까지의 우리 민족이 가장 추구했던 가치이기도 하구요..
자비 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붓다에게 자비의 마음을 이끌어 오려면 그 과정 또한 복잡하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벗어나 ...
사물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느 것이 아닌.. 나 자신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버려 무아의 상태에 이르러야만이 나올 수 있는 마음입니다..
존나게 어려운 말이죠...당연히 저두 못하는 거죠...그걸 어떻게해...
하튼 자비 한마디에 불교적 가치를 포괄해 넣을 수 도 있다는 겁니다...
사랑 의 마음 또한 같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게 솔직히 쉬운일 입니까??
이웃이 펀드해서 대박나거나 집값 따불치면 억울한 이때에..이웃 사랑은 참으로 요원해 보입니다...
그거 하나 실천하려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란거 부터 인식해야줘..
그리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셨던... 40일간 사탄에 맞서 싸우셨던 고생과 ...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언덕을 넘어 죽음에 까지 이르렀던 모든 희생의 과정을 깊게 깨달아야만이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전적 종교적 가치들을 쭉~생각해보세요..
어쩌면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시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그 종교적 가치들과 고적적 가치들은 모두 하나의 진리체계 안에 있다는 느낌은 안드시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보아야할 것이 바로 그곳이 아닐지...느낄 수 있지 않나요??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제어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다 는 점이죠...
어디서 의를 논하는데 이를 얘기하구 지랄이야!! 라고 호통치는 맹자의 모습...
왕자의 자리를 내어놓고 탁발 하나들고 수행하는 붓다의 모습...
애초에 마굿간에서 태어나 로마제국과 기득권 랍비들과 타협하지 않았던 예수의 모습...
모두 욕망에 대한 제어는 기본인거죠...
결국 우리가 어떤 곳을 바라보고 가야할지에 대해서는 고전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그걸 다 지금 폴어놓을 수 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공동적으로 바라고 있는 곳의 모습이...
완전한 자유가 아닌 자율을 기반으로한 인본주의적 공동체 사회라는 결과물은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걸 마치기로 하고...
이제 다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과연 어떻게???라는 방법론적 고민이 시작됩니다...
여섯째 촛불은 새로운 철학적 기반으로 기존의 방법론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야 합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의학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중용 의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새로운 철학적 기반이 생겨났다 하면...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론 또한 기존의 것과 달라야합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아야죠...
그것을 위해 기존 방식의 강박관념에서의 탈피가 우선되어야 할것입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관성으로 우리는 싸우는 방식에 있어 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흔하게 쓰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투쟁입니다..
투쟁이란 무엇입니까? 싸울 투에 싸울 쟁 자 입니다..
싸우고 싸우는거죠..
너무나도 무자비하고 명백한 적을 상대하던 습관은 우리를 싸우고 또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일까요??
이전의 군부독재하의 순진한 국민들과 지금 우리 국민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한총련이 96년 연대사태 이후로 슬금슬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과연 상대방의 교묘한 술책에 놀아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세상의 변화에 맞추지 못해 도태되어 나간 것일까요??
전자의 의미가 크기도 하지만 전 본질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미 모든 포스트 모더니틱한 실험으로 가득차 나가고 있는데..
유독 우리의 의식화된 대학생들은 기존의 NL계열 PD계열 IS계열의 협소한 논쟁만을 거듭하며...
기존 투쟁방식만을 유지하면서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은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또한 진보적 사회운동을 펼쳐왔던 다른 단체 또한 그와 비슷한 양상을 띄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존 사고의 틀로 기존의 방식을 취한다면...
기존처럼 동일하게 패배하거나 큰 효과를 거두지못할 것...이라는 얘기가 되는거죠...
이전에 화이트헤드를 인용한 글이 있었습니다..
방법론 역시 보수화되는 순간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고 퇴행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였죠..
그래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기존 사고의 틀과 기존 방식에 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탈피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해 결국 패배하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론에 걸맞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선 한의학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왜 갑자기 한의학적 세계관이냐??
사회현상과 한의학적 세계관이 과연 연관이 있느냐??
의문을 제시하시겠지만...
전 지금 우리 시점에서 너무나도 필요한 또 다른 세계관이라 자부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몸과 우리사회를 비교해 봅시다...
여태까지..우리 몸이 병이들면 어떻게 해왔습니까??
병의 원인인 세균에 감염된 부분을 잘라 없애려고 하지요?? 바로 질병에 대한 투쟁이였죠...
인류역사를 보면 어떻습니까? 똑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류를 잘라 없애버리려고 했죠..
하지만 저런 방식의 치료법은 항상 끊임없는 질병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들어 암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생활습관을 유지한다면..
당연히 암은 발생하게 되는것이고..그 암세포를 드러내게되면...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인류가 겪어왔던 모든 사회적 병폐도 마찬가지 입니다...
병폐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는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병든 사회에서는 병든 사람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것이구요...
이에대해 대안적인 시각을 제시한 것이 체질의학 입니다...
병이 이미 발생한 후에 그것을 치료하려드는 모습이 아닌...
건강한 균형의 상태를 유지 시키려 하는 것이 기존 서양의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부분이죠..
체질의학에 의하면 사람의 모든 장기는 각기 그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기들은 모두 동등한 것이 아니고 강한 장부와 약한 장부로 나뉩니다..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기능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한 장부의 그룹과 약한 장부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강한 장부와 약한 장부가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은 각기 개인적인 체질을 가지게 됩니다..
이 관점을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의사라면...
혁명 과 반전 이 아닌.. 산술적 평등 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조화 와 균형으로서 건강 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정도의 불평등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의사의 역할이 강한 장부와 약한 장부를 똑같은 기능으로 만드려는 것이 아닌..
강한 장부가 너무 강해지려는 성향을 띄거나 약한 장부가 너무 약해지는 것을 막아 본래의 균형상태를 맞추는것이지요..
만약 같은 기능으로 만들거나 같은 능력으로 맞추려 한다면 건강의 상태는 오히려 깨져버리고 마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 봅시다..
역사적으로봐도 나찌나 제국주의 국가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한 장기가 더욱 더 강해졌을 때 나오는 부작용을 말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본래 강한 장부였던 한나라당 세력과 기득권은 점점 더 강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론장악의도.. 비정규직 법규의 악용..언론권력인 조중동의 언론플레이..
모두가 강한 것을 더욱더 강하게 만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행해왔던 행동들은 강한것이 더 강해지려는 것을 막으려한 의사의 행동이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그 강한 세력은 우리가 도려내야할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도려낼 수도 없구요...
투쟁과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
그 힘이 너무 강하면 그 힘을 약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천천히 시간을 갖고 체질을 변화 시켜야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요즘 문제가 되는 기륭전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입해보면...
비정규직 철폐를 목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아닌...
비정규직 법규의 악용을 막아야 하는 것으로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철폐해버리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클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한 장부를 한순간에 완전히 뒤집을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에 불과하다는 거죠...
예를들어 권문세족이 득세 했던 고려말에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나...
기득권 세력은 한번에 뿌리 뽑지는 못하고 수십년전 공민왕부터 서서히 그 힘을 약화 시키는 과정이 필요했죠...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한방에 한나라당 세력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느정도 시간을 두고 서서히 우리 사회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하는 관점에서 접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논의들은 중용 과 닮아 있습니다..
중용은 우선 개념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중간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중간은 양쪽 끝의 중앙지점...흔히 우리가 말하는 회색의 인간형이죠..
하지만 유교적인 중용의 개념은 중간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중時中이라는거죠...
타이밍이라는게 있다는 얘기 입니다...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는 목적적 형태의 중간지점이 아닌...
그때 그때의 진리체계가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변화하는 진리체계를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개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거죠...
생각해보세요..100년 전 사람들의 추구하던 가치와 지금 우리들의 가치...
그것은 분명히 다릅니다..또 둘 중에 하나가 객관적으로 100% 옳다고 할 수 도 없습니다..
우리는 끊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항상 우리의 기존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에 맞는 진리를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기존 내 생각의 틀에 머물러 있는 이상과 아집 속에 이미 변화한 세상을 맞춰나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거죠..
구체적 상황의 특수성이나 수없이 많은 연관성 속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그 시時에 맞추진 않는다면..
단지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주장을 외롭게 외치게되는 형국이 되버린다는거....
결국에는 지는 싸움을 할수밖에 없다는거죠...
중용에 따르는 방식이란...항상 구체적 상황 이 닥쳤을 때...
그 상황에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목표와 아집에서 벗어나서 말이죠....
중용의 시각에서 주어지는 또다른 장점은...
초월적 가치가 아닌...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의 판단 을 의미한는거죠..
시중의 時는 그 주어진 상황까지도 예정하고 있는거니까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갑자기 북유럽 복지국가 수준으로 복지예산을 늘리면 나라 망하자는 소리라는거...
정리하자면...
인간은 분명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기대는 버려야 합니다..
선천적인..유전적인 영향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제가 갑자기 100미터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기는 힘들죠...
그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똘레랑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인간을 모두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서로에 대한 인정과 관용은 오히려 요원해 진다는거죠...
너랑 나랑 똑같은 조건인데 왜 너는 이 생각을 하지 않느냐...?? 가 아니라...
너와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이 달라서 입장의 차이가 생기는 구나...로 사고해야 한다는겁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샌가 어느 특정 그룹은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운명론으로 까지 흐르면 안되겠지만.....
완전한 힘의 평형상태나 평등에 대한 강박관념은 버려야겠죠...
언제나 평형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도무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 기관은 잘라내버리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이 생길수도 있고...
잘라낸다고 해도 역사는 또 더 강한 기관을 만드는 오류를 범했던 경우도 있었죠...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이 스탈린으로 흐른것....
권문세족에 대항한 조선이 또 다시 양반위주의 신분사회로 흐르고 만것을 보면 역사의 되폴이를 볼수 있습니다..
자..한의학적 세계관과 중용적 세계관을 통합하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릅니다..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 일방적으로 타인을 적대시 하고 계몽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
사회의 각 기관의 특성과 힘의 강약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전체 사회의 건강의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거죠...
강한 기관은 우리에게 확고한 적이 되거나 투쟁의 대상이 되는것이 아닌...
우리와 한 몸안에 있는 기관의 일부이며 그들에 조차 관용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함께하는 우리 서로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거겠죠..
또 우리 밖에 있는 초월적 목표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나아가라는 결론을 도촐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러터진 저항의 방식을 취할 수도 없습니다...
무조건 인정하고 용서하는건 성인들이나 가능한거죠...솔직히 난 못해...
우리는 분명 우리 사회의 건강한 체질 변화를 꿈꿀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걸맞는...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효과적인 구체적 방법론이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서 일곱번째....
일곱번째 촛불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향한... 사람의 변화 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그 세상속의 사람들이 바뀜으로서 가능해 집니다..
사회체제의 변화는 어쩌면 사람의 변화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효과에 불과할 수 도 있습니다...
중용적 세계관에서 우리는 한순간의 혁명보다...극단적 방식 보다....
서서히 시간을 두고 변화해 나아갈 것을 요구 합니다...
그것은 조금 느려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계몽이 아닌 정보의 제공과 스스로의 빛이 깨어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방식을 취해야 할것입니다...
금강경의 한구절은 우리가 자세를 낮추고 일반 대중에게 다가서기를 요구합니다..
이와같이 헤어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중생들을 내가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어라...
어쩌면 붓다가 허무주의자 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철저한 자기부정을 전제로 해야만..
우리는 사람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거만하게 가르치려 든다거나 맹목적으로 싸우려 든다면 절대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으니까요...
저희는 유화적 방식으로 사람의 변화를 위해 4달에 거쳐 수많은 실험을 해왔습니다..
고아원에 갔던 것도..아동학대 센터에 갔던 것도..노인복지회관에 갔던 것도...
아파트 단지에 갔던 것도...시민공원에 갔던 것도...대학교를 돌아 다닌것도...농활을 다녀온 것도...
모두 사람의 변화를 향한 것이였죠...
아직도 실험의 단계라 그런지 무엇하나 주가 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근데 위에 있느 것들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향한 방식인데...
저희가 못하면 누군가 다시 시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수없이 많은 실험들과...앞으로도 행해질 수많은 실험들이 원하는 것...
물론 2년 후 그리고 4년 후의 선거에 실질적인 승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은...
촛불 스스로 먼저 커다란 그림을 가지고 변화하고...
그 실천의 힘으로 촛불 밖의 사람들도 조금씩 변화하기를 바랬던 거죠...
자..이제 왜 저희가 농활을 갔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었나요??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겪은 세상에 대한 환멸속에서 귀농을 선택한 안동의 꽃님네 부부는...
항상 이익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보여주는 모든 모습의 반대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본 인간의 땀냄새와 자연이 스스로 뿜어내는 향기와 맞닥드렸을 때의 그 느낌은..
우리가 지금까지 버려왔던...무시해왔던...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가치들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 계기가 될 수 있음에...우리는 농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귀농한 그 모습 자체가 대안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도시 인구가 농촌으로 내려가면 더 큰 부작용이 생길거에요...전부 굶어 죽자는 소리죠....
모든 물질적 가치라던가 욕망을 부정하고 수도하는 종교인으로 돌아가자는거???..절대 아닙니다...
저 역시 욕망을 사랑하고 물질을 중요시 하는데 어찌 그 말을 씨부릴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 사회의 쉼표가 필요하고..
우리가 더 근본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재로서는 너무 치우쳐 있기에 그쪽으로 다가가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사람 중에 귀농을 선택한 사람이 한 분 또 있죠??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입니다...
전직 대통령이였던 사람이...매일 오리풀어 유기농 오리농법에 도전하고 계십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이야기 꺼낸다고 또 노빠라고 밀어붙일 분들 계시겠지만....
그건 논외로 하자구요...
그냥 귀농을 선택한 그 행동에만 촛점을 맞춰주시기 바랍니다...
전 그분이 수없이 많은 행위 중에 귀농을 선택하신 이유를...
저 나름대로 알고있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근데 왜 하필 유독 고향마을로의 귀농일까...
지금까지 제가 위에서 떠들었던 모든것들...
그것들을 포괄하는 근본주의를 위해 그분은 귀농을 선택했다고 생각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니~지금 잘못알고 있는 기다~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제 머리속에는 이건 분명 스콧니어링의 벤치마킹이다!!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촛불은 이미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였습니다..
삼양라면 구매 운동에서 보여지듯...
소비자 주권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작게나마 이루어졌구요...
바른언론살리기 운동 역시 포지티브한 형태로 촛불의 대안운동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기존 정치세력이 아닌 순수일반시민으로 구성된 단체나 카페들이 생겨났고...
현재 직접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리고 촛불은 앞으로도 믿을수 있는 농산물직거래 등
이익과 효율성 보다는 가치를 찾아가는 삶의 방식을...
소비대중이 아닌 새로운 시민운동의 주체로 떠오를 가능성도 많습니다...
단지 지금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냐가 문제될 뿐이지요...
그것은 해월선생이 이야기 했던 후천개벽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 형태를 향한 거대한 움직임...
인류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나아가는 중심에 촛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망하는 북유럽 국가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의 대한민국을 향한 한걸음 한걸음을 우리가 해나갈 수 있습니다...
촛불은 이미 한 시즌을 끝내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가장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 역사의 한 순간에 펼쳐진 드넓은 하얀 백지위에..촛불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요?
촛불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후..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촛불은 단지 대정부 투쟁이라던가 민주주의에 국한된 개념을 목적으로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의 자비 사랑의 마음이 가득한..
자율적 인격체가 가득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자...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