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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지훈 문학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曉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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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상단체의 조직과 대중운동 1. 북성회 재일본한인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 註15)는 흑도회가 1922년 11월 아나키스트와 볼세비키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조직되었다. 주요 인물은 박열·김중한·이윤희흑우회, 김약수·김종범·송봉우·변희용·김장현·이여성·안광천·이헌 등 60여 명이었다. 북성회의 선전 강령은, 첫째, 조선 인민이 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계급임을 명확히 한다. 둘째, 조선프롤레타리아와 일본프롤레타리아 상호간의 연대사상과 결합의 강화를 지향한다. 셋째, 일본에 있어 전조선인 노동자의 단일한 대조합의 창설 註16) 등이었다. 북성회는 일본지역 내 재일본한인운동세력을 장악하고 동경은 물론 대판·신호·경도·북해도北海道 등지에서 노동단체를 조직했다. 또한 일본사회주의 단체인 ‘무산자동맹회’에 참가하는 등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 단체는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본조선노동자조사회·동경조선노동동맹회·일본노동총동맹의 원조로 이재동포의 조사·위문을 실시했다. 1923년 11월말 동경조선노동동맹회·대판조선노동동맹회·신호조선노동동맹회 등과 함께 한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의하였다. 첫째로 진재 당시의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해 일본정부에게 그 진상의 발표를 요구할 것, 둘째로 학살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고 피해자 유족의 생활권 보장을 요구할 것, 셋째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격문을 반포할 것, 넷째로 관동대지진 당시 구호서龜戶署에서 살해당한 일본의 동지 9명의 유족을 위해 조위금을 모집할 것, 다섯째로 기관지 『척후대斥候隊』를 금년 내에 속간할 것 등이었다. 이는 재일본한인에게 단결을 도모하는 ‘기제’로서 작용하였다. 북성회의 활동은 국내와 일본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국내에서는 순회강연회·토요회·건설사·북풍회 등의 조직·활동을 주도하였다. 조직원들은 정치적 활동무대를 찾아 국내로 돌아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사상연구회에 가담했다. 대부분은 과거의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다가 1924년 11월 25일 13인의 핵심적 활동가를 중심으로 북풍회를 경성부 제동 84번지에서 조직하였다. 북풍회라는 명칭은 “북풍이 한 번 불게 되면 빈대와 모든 기생충이 날아가 버린다” 註17)는 속언에서 유래되었다. 조선공산당 2차당 시기 조선공산당 보고서에 의하면, 북풍회의 회원 40명 중 공산당원은 5명이었다. 창립 당시의 회원 ‘13인’은 김약수·김종범·마명·정운해·남정철·서정희·박창한·박세희·신철·송봉우· 이호 등이었다. 註18) 북풍회는 창립과 동시에 코민테른의 블라디보스토크 오르그뷰로 책임자 안데르슨에게 한국의 유일한 사회주의자 통일전선임을 보고하였으나 승인을 얻지 못했다. 북풍회 결성은 북성회의 주력을 동경에서 국내로 옮겨 놓은 바나 다름없었다. 국내 다른 사상단체와 달리 일본무산정당과 제휴 강조는 주목할 부분이다. 북풍회는 “한국 혁명은 일본인 주의자와 밀접한 제휴를 하지 않고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924년 12월 16일 집행위원 서정희·정운해·배덕수·남정철·김약수·김종범·송봉우·박세희·김장현·신철·이이규·마명 등 12명은 연서로 일본과 한국 무산계급의 유기적인 연락·제휴를 모색하였다. 동시에 일본 무산계급의 원조·지도를 바란다는 문건도 작성하여 동경·대판지역 일본인주의자 앞으로 발송했다. 註19) 1924년 12월 13일자 북풍회 집행위원 이름의 팜플렛에서도 무산계급의 공동이익을 위해 만국노동자의 단결과 일본노동자와 연대·제휴를 강조하였다. 1924년에는 한국인 도일자가 급증하고 다수의 한인단체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자주적인 노동운동과 공제운동을 점차 활성화시키는 기폭제였다. 이때부터 재일본한인의 민족운동은 대중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일본지역 재일본한인의 사상단체가 조직되어 재일본한인 민족운동을 주도해 갈 당시 국내에서는 각종 대중단체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적인 조직을 지향한 주요 단체는 조선노농총동맹·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연맹회·서울청년회·무산자청년회·신흥청년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이었다. 2. 일월회 일월회는 1925년 1월 3일 결성되었다. 註20) 일월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대중 본위의 신사회의 실현을 도모한다. ② 모든 억압과 착취에 대해 계급적·성적·민족적인 것을 불문하고 조직적으로 투쟁한다. ③ 엄정한 이론을 천명하여 민중운동에 이바지한다. 註21) 행동강령은 ① 국내 사회운동의 분립에 대해 절대 중립을 고수하고 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전선의 통일을 촉진한다. ② 재일본한인의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지도·원조한다. ③ 국제운동으로 동양 무산계급의 단결을 도모한다. ④ 무산자 교육을 위해 지방 유세와 조합 순회 강연 등과 아울러 리프렛·팜플렛과 기관지를 발행한다는 등이었다. 사무소는 동경부하東京府下 호총정戶塚町 원병위源兵衛 132번지에 두었다. 1925년 10월 25일 임시총회는 종래의 편집과 서무의 부서에 선전부·조사부를 추가하여 4부로 조직하였다. 또한 상무위원 안광천·이여성과 집행위원 약간 명도 선출했다. 재일본한인 운동을 내용적으로 지도하던 일월회 내에는 혁명사의 구성원이 들어가 있었다. 註22) 혁명사는 북경에 본부가 있고 모스크바·서울·동경에 한 명씩 각각 연락책임자를 두었다. 동경 책임자는 허장환이었다. 허장환은 1925년 12월경 안광천·남대관과 접촉하여 한국의 혁명운동 세력을 통일시키는 방안으로 동지 교환과 함께 기관지 『혁명革命』의 인쇄용 한국어 활자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안광천과 남대관 은 박락종·김정규·하필원·한림 등과 허장환을 책임으로 하는 혁명사 동경지부를 조직하였다. 혁명사 동경지부는 책임자 허장환, 구성원 안광천·남대관·하필원·박락종·한림·김정규 등이었다. 이후 1926년 7월경 허장환이 귀국하자 안광천은 동경 책임자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혁명사는 북경에서 「무산 혁명 달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노농계급에 기초한 계급혁명을 명확히 천명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혁명운동에서 나타난 카우츠키적 흐름을 조선혁명운동에서 타격해 낼 것을 주장했다. 註23) 사상단체인 일월회의 활동은 선전·선동과 대중단체에 대한 지도를 위주로 전개하였다. 선전과 선동은 기관지·팜플렛·리플렛을 통해 주로 수행했다. 먼저 출판·인쇄를 통한 활동은 1924년 10월 설립된 한글 인쇄소 동성사를 이듬해인 1925년에 운영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註24) 일월회는 기관지 『사상운동』과 대중용 권독사 팜플렛을 발행하였다. 『사상운동』은 1926년 4월까지 총 7집이 발간되었다. 또한 1926년 6월 5일 『대중신문』 창간호 1,000부를 발행했다. 1925년 6월 5일 창간한 『대중신문』에서는 2대 운동을 목표로 내걸었다. “무산계급과 준무산계급의 구체적 대중운동의 전개, 무산계급의 민족주의적 투쟁 요소와 공동전선의 신설” 등은 그것이었다. 일월회는 당시 국내에 속학적 마르크스주의가 횡행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요구된다면서 이론투쟁을 임무로 정했다. 註25) 『대중신문』 3호 사설에서는 단일 합법적 전위당의 결성을 강조하였다. ![]() 일본에서 활동한 사상단체 일월회 해체 기념사진 전계급적 운동, 사회주의적 투쟁은 어떻게 전취할 수 있는가. 우리는 대담하게 답하는데 그것은 오직 단일 표면적 전위의 결성에 있다는 것이다. 각 부문의 조직, 무조직 대중의 정예를 포괄하는 단일 전위를 편성하는 이외에, 대중을 전계급적으로 결성하고 동시에 대중을 지도하여 투쟁을 집중시키는 이외에 하등의 방법이 없다. 『대중신문』의 초기 집필진에는 화요계·서울계의 100여 명을 망라하여 일정하게 통일적인 집필진을 확보했다. 『사상운동』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론·유물사관·정치경제학·제국주의론·사회사·경제사와 정당·조합의 역할에 관한 내용을 학습용 커리큘럼으로 제출하는 등 사회주의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특히 실천을 위한 학습의 대상으로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들 글과 이론도 소개되었다. 註26) 일월회는 1925년 10월 25일 임시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토의·결의했다. 註27) ① 일본학생과학연합회·정치연구회·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연계하여 일본인을 대상으로하는 소준고상군사교육훈련연습小樽高商軍事敎育訓練練習 규탄연설회 개최의 건, ② 위의 사건에 대하여 재동경조선인 각 단체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인을 대상으로 한 연설회 개최의 건, ③ 형설회관의 화재에 대해 형설회螢雪會 동정 캠페인 결정, ④ 자강회自强會에 대한 조사의 건조사위원 한림, ⑤ 일월회와 동일한 주장을 가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조선무산청년동맹·삼월회 등 각 단체와 공동으로 국내의 운동과 재일운동의 관계에 관한 성명서를 작성·발표하는 건, ⑥ 회의 조직을 갱신하여 종래의 편집과 서무 부서에 선전부·조사부를 추가하여 4부로 하며 상무위원으로 안광천·이여성, 집행위원 약간 명을 선출한다. 특히 1926년 1월 3일 창립1주년 기념식에서는 당면 슬로건을 제출했다. ① 전래의 모든 단체적 감정을 무조건 매장하자, ② 전조선적인 유력한 단일사상전선을 결성하자, ③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대중 가운데로 들어가자 등이었다.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한 일월회는 1925년 11월 17일 재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삼월회·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註28) 여기에서는 재일본조선무산계급운동이 조선무산계급운동의 일부라는 전제 아래 재일운동의 유의미성을 밝혔다. 일월회가 재일본한인 민족운동의 계급적 성격과 임무를 전면적으로 거론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성명서는 국내 파쟁이 일본 내 한인운동으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고, 국제주의적 연대의 실현을 먼저 일본 지역에서 진행시켜 낼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재일본한인 운동세력이 일본지역에서 활동한다는 지역적 유리함에 기초해 학생의 역할과 민중교양의 필요성이 당위적임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한인운동의 통일을 강조했다. 재일본한인 민족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일부임을 강조한 이 성명서는 이후 실제 재일본한인 민족운동의 내용적 지침이 되었다. 이러한 방향에서 재일본한인 민족해방운동은 전개되어 나갔다. 물론 재일본한인 민족해방운동은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연결선 상에서 그리고 일본무산계급과 연대 속에서 진정으로 가능했다. 1926년 11월 12일 일월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동경조선청년동맹·삼월회 등의 간부들과 함께 정우회·전진회와 항쟁에 대한 박멸과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선언에서는 파벌주의의 박멸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와 함께 일월회는 「파벌주의에 대한 철의 전강」을 선포했다. 註29) 이후 일월회는 11월 28일 스스로 해체를 성명하고 해산했다. 일월회와 관련 있는 단체는 신흥과학연구회·관동조선무산계급단체협의회·극동사회문제연구회·조선내지운동특별연구위원회·재일조선무산계급단체협의회 등이었다. 이러한 단체는 구성원이 이중·삼중으로 중첩되어 있었다. 3. 삼월회 일월회의 자매 여성단체인 삼월회는 1925년 3월 이현경·황산덕 등을 중심으로 조선무산계급과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한국 여성은 계급적·봉건적·인습적 및 민족적 압박 아래 있다”면서 “무산계급 남성과 제휴하여 인류의 압력을 근본적으로 일소하고 대중 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선언했다. 註30) 삼월회는 1925년 12월 총회에서 선언·강령·규약을 새로이 정했다. 강령은 ① 대중 본위의 신사회건설을 도모한다. ② 무산계급과 여성의 억압과 착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쟁을 도모한다. ③ 목표와 방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과학적 이론의 보유를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삼월회는 사무소를 동경부하東京府下 고진정高田町 구원龜原10번지 범생사에 두었다. 註31) 4. 신흥과학연구회 일월회의 이종횡·유영준 등은 조선무산청년동맹회의 박천·정희영·김삼봉 등과 1926년 11월 1일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신흥과학연구회를 결성했다. 1926년 10월 이래 활발히 전개된 회원모집에 기초하여 11월 1일 이들은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현금 도처에서 각종 운동이 활발해도 비과학적인 것이 많고 우리들은 과학적으로 현대사회를 연구하여 국내 민족의 세계적 신발전의 항로를 개척하고 장래 영원히 인류 평등과 평화 및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본회를 창립한 것이다’고 선언했다. 註32) 이 자리에는 53명이 출석하여 창립 의의를 낭독하고 우의 단체 대표자 축하연설이 있었다. 아울러 선언·강령은 위원에게 부탁하고 회칙을 축조 심의하여 원안을 가결시켰다. 이들은 잡지 『신흥과학』을 발행했다. 5. 흑도회와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계열의 활동도 일본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조직은 1921년 결성된 흑도회이다. 註33) 흑도회는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의 도움으로 결성되었다. 주요 회원은 김판권·권희국·원종린·김약수·박열·임택용·장귀수·김사국·정태성·조봉암 등이었다. 기관지는 『흑도』였다. 이 조직은 1922년 11월 아나키스트계열과 볼세비키계열로 양분되었다. 박열 등의 아나키스트들은 풍뢰회를 조직한 후 1923년 2월 흑우회로 개칭하였다. 기관지인 『불령선인』은 이후 『太い鮮人』·『현사회』로 이름을 바꿔 발간했다. 박열은 1922년 5월경에 일본인 사회주의자인 김자문자金子文子와 동지적 관계로 발전했다. 그는 이때부터 아나키즘의 실현을 위한 투쟁방법을 차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1923년 10월 예정되었던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요인 암살이었다. 이 계획은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당시 체포당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재일본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운동은 잠시 침체기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무산학우회·동흥노동동맹회·관동동흥노동동맹·흑우사·흑색전선 등을 통해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 내의 아나키즘운동은 1927년 이후 공산주의세력과 이론투쟁 과정에서 힘을 잃게 되었다. 6. 재일본한인 민족운동단체 1) 불교청년단체 (1)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3·1운동 이후 불교계의 일본 유학생이 증대되는 가운데 이를 배경으로 1920년 4월 11일 결성되었다. 발기인은 정광진·엄용식·김상철·성기현·김경주·박경순·강성인·박종수·이도현·신태호·신현철 등 11명이었다. 이들은 취지서에서 당시 사회를 개조의 시대라고 인식하고 한국 불교의 미래를 위해 잠시도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해외에 있는 불교청년 유학생들이 일치단결하여 한국 불교의 구태를 개조하는 동시에 사회의 정신을 지도하기 위해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를 창립했다. 註34) 실무조직은 이사·회계·서기 등이었다. 그런데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에는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유학생들의 친목도모는 주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0년 6월 20일 개최된 총회는 이회광李晦光의 매종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였다. 학우회의 주요 결의 사항은, ① 경도 임제종 종립학교에 재학하는 한국 불교 유학생의 입각지를 명백하도록 권고할 것, ② 이회광에게 회개의 권고문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20년 7월 18일 임시총회에서는 ① 보현사와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와 분리할 것, ② 이회광 파직, ③ 동경유학생 전학, ④ 관장제와 의원제도를 실행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는 이전의 결의에서 일보 전진한 것으로 일본 임제종과 관계가 있던 보현사 문제를 처리하고, 이회광에 대해 경고에서 멈추지 않고 파직을 결의했다. 이러한 시도 는 국내 불교계의 단호한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1920년 12월 5일 학우회 회관 건립안을 작성하고 그 비용 15,000원을 국내 불교계에 청구하기로 결의했다. 1921년 4월 1일 동양대학에서 열린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명칭을 개정했다. (2)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의 후신으로 1921년 4월 7일 동경 진종 설교소에서 창립되어註35) 1931년 5월까지 존속하였다. 1921년 4월 제1회 정기총회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전의 활동이 협소하였다고 판단하여 그 기능을 확장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창립 목적은 석가모니의 정신을 발양하여 세계의 평화를 기도하며, 민족의 정로를 계도함이었다. 일상적인 활동은 불교의 유신운동이었다. 이회광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불교계의 개혁을 위한 다양한 불교청년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 산물은 1920년 12월 16일에 조직된 유신협의회였다. 이에 발맞추어 일본에 유학한 불교 청년들은 조선불교혁신단을 조직하여 국내 불교청년운동과 연동 속에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조직은 간사제이며, 실무부서는 서무부·이재부·지육부·체육부·편집부 등으로 평의원을 두었다. 가입 회원은 대략 30여 명 내외였다. 주요 활동은 정기총회·임시총회의 개최, 졸업생 축하회·송별회, 신도학생환영회·하기순회강연·기관지 발간 등이었다. 매년 4월의 정기총회에서는 각부 보고, 임원 선출, 제반 사항의 토의 등 순서로 진행되었다. 또한 회원은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면서 불교 강연을 실시하는 동시에 기관지 『금강저』의 발간지원비를 모금하였다. 기관지 『금강저』는 1924년 5월 1일 창간된 잡지로 이영재가 편집을 주간하였다. 국내 불교계의 모순과 반동행위를 비판하는 성격이 강하여 국내 주지를 비롯하여 불교계에서는 『금강저』와 잡지 발간을 추진한 불교 청년들에 대해 비판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추진사업은 먼저 원효대성찬앙회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원효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한민족의 종교적 의식을 환기하여 대성大聖 원효과 같은 인격을 도야하려고 했다. 그리고 불교교리 연구기관으로 삼장학회가 있었다. 최영환과 오관수 등은 이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기관지로 『무아無我』를 격월간으로 간행했다. 주목되는 활동은 1928년 3월의 조선불교학인대회 참가였다.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여기에 참가하여 『금강저』에 기고문·평가·격려의 글 등을 실었다. 또한 1929년 1월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7년 4월 24일 제7차 정기총회에서는 유학생들이 동경과 경도로 이원화되어 있는 조직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도지부의 설립을 결정했다. 일본에서 귀국하는 졸업생 취직문제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에 대한 취첩의 문제, 은인인 주지를 축출하려는 운동, 일반 학문을 수학한 점 등은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었다. 이들은 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회관 설립을 추진했다. 건립비용은 국내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요구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이 단체는 1931년 5월 23일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으로 전환했다. (3)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 1920년대 불교 청년운동의 중심 단체였던 조선불교청년회가 총동맹으로 1931년 3월 전환되자 이에 연동하여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가 1931년 5월 23일 정기총회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발기가입에 준하 여 기존의 회의체를 해체한 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으로 전환하였다. 註36) 매년 2월에는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역원 선거를 하고, 동맹의 제반 활동에 대한 문제점을 토의·결정하였다. 조직 내에는 동맹연구회가 있었다. 동맹연구회는 유학생들이 자기의 전공분야를 공부하면서 졸업 직전에 자기의 논문개요를 발표하는 모임이었다. 연구 모임은 1931년 10월 18일 대정대학大正大學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동맹연구회는 1932·1933년 졸업논문발표회라는 명칭으로 변경·실시되었다. 기관지 『금강저』의 연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들은 간행비 문제로 고충을 겪었다. 간행비는 불교계의 동정으로 충당되었다. 『금강저』의 기자는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영남·경기·호남 등지의 사찰을 순방하여 지원금을 받았다. 주요 활동은 국내의 중요한 불교계 현안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른바 종헌 실행문제는 1932년 2월 7일의 제2회 정기대회에서 종헌에 대한 절대 지지의 성명서를 의결한 후 그 내용을 정리·발송하였다. 교무원 건물과 대지 매매에 대해서는 항의공문을 발송하였다. 이들은 중앙불전의 폐지를 단연코 거부하는 입장을 전 불교계에 강력히 호소했다. 구성원 대부분은 중앙불전 출신이었으나 단순히 모교의 폐지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었다. 한국불교의 생명인 중앙불전은 한국불교도의 의무이자 책임으로 생각했다. 또한 보성고보 경영도 불교계가 지속적으로 담당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렇게 국내 불교계에 현안이 있을 경우는 지체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했다. 일본에 새로 도일하는 불교유학생 환영회와 유학 종료 후 귀국하는 동맹원 송별회도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이 단체는 1934년부터 점차 침체·변질되어 1934년 봄에 완전 히 해소되었다. (4)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의 해소 이후 1936년 9월 20일 창립되어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출범하였다. 註37) 1935년 5월 25일 동경의 김홍수 집에서는 동경유학생 7명과 새로이 유학 온 11명이 발기회를 위한 간담회를 가진 후 단체 명칭을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로 정했다. 회칙 기초위원으로 조명기·문록선·김삼도 등 3명을 정하면서 단체 발기와 창립대회를 준비했다. 1936년 6월 6일에는 동경의 향택대학駒澤大學에서 18명의 ![]()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에서 기관지로 발간한『금강저』 유학생들이 발기대회를 갖고 회칙제정·회관문제·역원선거와 축구원정·하기순회강연 등을 의결하였다. 간담회와 발기대회를 거쳐 1936년 9월 20일 창립대회에서 회칙통과, 『금강저』 속간, 성덕학원, 국내 수해구제, 예산편성, 추기야유회 등을 결의하였다. 주요 활동은 매년 1~2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제반 사항을 토의·결의하고 집행부 역원을 개선하였다. 신입생 환영회·졸업생환송회· 졸업논문발표회 등도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회원들은 야유회와 하기방학을 이용해 국내 불교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들은 국내 불교계 개혁운동에 매진했던 강유문·박성희에 대한 추도회를 개최했다. 중앙불전의 수학여행단이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환영행사를 주관하는 등 긴밀한 유대관계를 조성하였다. 조선불교 교육문제 좌담회, 교계명사 초대 다과회 등도 주관하는 등 불교계 인사와 유대를 도모했다. 2) 천도교청년단체 (1)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동경 천도교청년회는 동경에 거주하는 천도교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註38) 일본에서는 박달성이 동경으로 간 이후 본격적으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1921년 1월 10일 방정환·김상근·이기정·정중섭·박달성 등은 동경지회 설립을 위한 발기회를 가졌다. 이후 이들은 “천도교 청년들은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卷町 302호 대편관大扇館에 모이라”고 광고했다. 이때 방정환·김상근·이기정·정중섭·이태운·박춘섭·김광현·박달성 등 10명이 모였다. 이들은 천도교인으로서 천사天師에게 맹세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며, 교리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시일예식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위해 청년회 본부에도 후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포덕에 대한 방법을 상의하고 하기강연에 관한 문제도 논의하였다. 1921년 4월 5일 오전에 천일기념식을 올리고 오후 3시부터 소석천小石川에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 열렸다. 회장 방정환의 개회 ![]()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 광경(1921년 4월 5일) 사에 뒤이어 내빈으로는 학우회 회장 김종필, 동우회 회장 김봉익, 동아일보 특파원 민태원, 매일신보사 특파원 홍승서, 각 대학동창회 대표, 여자흥학회 회장 유영준, 그리고 10여 명의 축사가 있었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는 국내에서 청년회가 청년당으로 명칭을 변경함에 따라 1926년 10월 3일 천도교청년당 동경부로 개칭했다. 동경부의 사무소는 소석천구小石川區 대총大塚 판하정坂下町 190번지였다. 포덕부장은 박사직, 간의원은 민석현·방정환이었다. 회원수는 50명에 달하였다. 취지 강령은 천도교 종지 선전과 교도의 친목도모 등이었다. 『천도교청년당소사』에 따르면 역대임원은 대표로 최광룡·길윤기·김정주·김형준·이응진·최병서·홍순길, 부대표로 한정호·홍순길·최태훈·최병서·김성육, 상무로 최영식·김병순·이윤삼·김정주·한정호·강호원·장한섭·홍순길·홍인섭·백세철·최천곤·신부교·김상린·함영식·박동일·주황섭·서정권 등이었다. 주요 활동은 강연대를 조직하여 국내 강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여름철을 이용하여 유학생들로 3개 반을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천도교 진리의 선전과 현대사상의 고취를 위해 강연회를 개최했다. 1924년 3월 1일 오후 2시 학우회·조선노동맹회·북성회·무산청년회·형설회·여자학흥회의 주최로 일중선청년회관日中鮮靑年會館에서 3·1운동기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모임에 박사직은 한위건·한재겸·김송은·서상국·변희용·강훈·이옥·백무·박형병·조근영·박명련 등과 함께 참석했다. 계획은 백무 등 7명이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설의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중간에 일제 경관에 의하여 중지당하고 말았다. 1927년 6월 집행위원회는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하계 사회강좌 개최를 결정했다. 과목은 합병사, 일본의 경제적 지위, 일본의 신도, 현 사회제도에 대하여, 정치경제에서 본 조선의 장래, 일본무산운동의 현상에 관하여, 극동의 정국 등이었다. 강사는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맡았다. 같은 해 11월 1일 ‘포덕의 날’을 맞아 기념식을 열고 포덕회를 조직하여 선전포스터를 살포했다. 이처럼 동경부는 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첫째, 내외의 정세 연구를 위한 특종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으로 한국은 김형준, 일본은 이응진, 중국은 김병순, 러시아는 김정주, 구미는 최광룡을 각각 선정했다. 둘째, 웅변부를 조직하여 위원으로 승관하·이석복·유동섭 3인을 선정하였다. 셋째, 『동학지광』의 발행을 특별 취급하기로 하고, 전임위원으로 강호원·최병호·김형준, 동학지광사의 전임기자는 이학인·장원준·최광룡 등을 임명했다. 넷째로 학생부 신임간부를 대표 현을균, 서무부 김창모·최정익, 재무부 이길선, 포덕부 김병순·채이룡, 교양부 백낙경을 선임하였다. 일상적인 활동으로 하기강습이 1929년 7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동경종리원에서 열렸다. 과목과 강사는 당 의식은 김정주, 교리는 박사직, 중국 국민당의 현상은 민석현, 한글은 한정호·장한섭, 이조사는 박사직, 세계정세와 조선은 김형준, 구미는 최광룡, 러시아는 김정주 등이 각각 맡았다. 사업 중에 대외적인 이미지 제고에 성공한 것은 강연대를 통한 강연회였다. (2) 천도교 동경청년동맹 이는 구파에 의해 조직된 재일본한인 천도교 청년단체이다. 註39) 구파는 1929년 2월 17일 오후 6시 10분에 동경에서 천도교 동경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동치후의 사회로 김호섭·민은기의 취지 설명이 있은 후에 우병조의 축사가 있었다. 선출된 임원은 대표위원 민은기, 상무위원 김호섭·김기종, 포덕부위원 신부경·변광석·김현길, 서무부위원 동치후·류창표·김낙운, 경리부위원 박내철·이봉기·이창용, 검찰위원 이덕호·송기휴·김두낙·송동훈 등이었다. 조직은 정기대회를 통해 정기적인 개편을 계속하였다. 1929년 11월 24일 정기대회는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여 신부경 대표위원체제로 재편하였다. 주요 구성원은 상무위원 동치후·장기철, 서무부위원 동치후·유창동, 포덕부위원 김호섭·박기준·주영순·이윤조·류창표·송동훈·이석윤, 경리부위원 송기휴·함수강, 검찰위원 이창룡·이덕호·송동일, 고문 변광석·이봉기·김현길·박내철·김현길·서정순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종리원 설치의 건, 포덕에 관한 건, 유지방침에 관한 건, 강습 토론에 관한 건 등을 논의했다. 1930년 6월 1일 임시대회는 동치후의 사회로 주요 내용을 결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포덕의 건, 세 확장의 건, 소풍 개최의 건, 하기강습회 개최의 건, 중성衆聲지사의 건 등 이었다. 천도교 구파는 1929년 2월 동경에 천도교 동경청년동맹을 창립하였지만 신파에 압도당하여 교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2월 16일 서울에서 신·구파가 합동한 이후 천도교 총부의 명령에 의하여 1931년 2월 23일 신파 청년당 동경부와 합동하여 천도교청우당 동경부를 조직했다. 천도교청우당 동경부는 청년당 동경부에서 발행하였던 『동학지광』을 계속하여 격월로 발간하였다. 또한 하기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포교의 이름을 빌어 민족의식 앙양에 열성적이었다. 3) 동경조선인기독교청년회 민족주의계열의 종교세력 가운데 기독교 단체는 동경조선인기독교청년회를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1906년 8월 동경에 온 초대 총무 김정식에 의하여 11월 설립되었다. 초기 기독교청년회는 세계기독교회의 방을 빌려 근거지로 삼았다. 註40) 조직 체제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조직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사사부·의사부·종교부·교육부·체육부·친접부·사천부 등의 위원회와 집행부서인 총무·부총무·서기 체제는 이를 반증한다. 1910년 이후 국내 기독교는 민족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재일본한인 사회에서도 동경조선인기독교청년회는 무시할 수 없는 단체로서 주목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한 당한 이후 동경기독교청년회관은 재일본한인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註41) 7. 의열투쟁 1) 양근환의거 일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적지에서 의열활동은 일제당국자를 크게 긴장시키는 등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본 현지 의열투쟁 선구는 1921년 민원식을 처단한 양근환梁槿煥의거였다. 그는 1921년 동경의 호텔에서 참정권운동을 위해 온 민원식을 단도로 처단했다. 1921년 국민협회國民協會 회장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참의인 민원식은 중의원선거법 시행청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왔다. 양근환은 이를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지 상태를 고착하려는 의도라고 보았다. 그는 유학생동우회 이기령李基寧이라는 가명으로 민원식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동경 철도호텔로 민원식을 방문한 양근환은 참정권운동의 허구성과 친일매국행위를 준엄하게 질책한 후 단도로 살해하였다. 註42) 거사에 성공한 그는 상해로 탈출하고자 이튿날 횡빈에서 노동자로 변장한 후 기선에 승선하여 22일 장기에 도착했다. 그는 수상경찰 취조에 유창한 일본어로 목수업에 종사하는 길전정부吉田政夫라고 대답하여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23일 오후 4시에 기선에 승선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출발하기 2시간 전 수상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구속과 함께 유학생 신현성과 동경천도교 전도실장 방정환 등 많은 인사들도 연루자로 검속되었다. 양근환은 6월 30일 동경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22년 5월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그는 동경감옥에서 복역한 1933년 2월 11일에 출옥했다. 양근환의거는 참정권운동으로 상징되는 친일논리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쾌거였다. 물론 일본에서는 한때 재일한인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등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재일본한인 사회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지속적인 민족운동은 추동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는 친일세력 발호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나 다름없었다. 2) 박열의 일왕폭살사건 이와 함께 일본 전역을 전율하게 한 사건은 잘 알려진 박열의 일왕폭살사건이었다. 註43) 그는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지하신문을 발행하여 격문을 살포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하여 1919년 10월 도일하였다. 동경에 도착한 그는 신문배달·우체부·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며 정칙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1921년 정태성·김천해 등과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가하는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박열은 다른 유학생과 함께 일본인 아나키스트 대삼영大杉榮·암좌작태랑와 접촉하면서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그는 한인학생과 노동자조직을 분리시키려는 반민족행위자를 응징하기 위하여 혈거단血擧團을 조직했다. 또한 김판권·정태성·조봉암 등과 흑도회를 조직하는 등 무정부주의운동에 나섰다. 그는 흑우회를 결성한 후 기관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불령선인이란 원래 일제 경찰이 민족운동가를 모욕하기 위하여 사용한 일반화된 경멸적인 용어였다. 1922년 4월에는 김약수 등과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행동단체임을 표방한 『조선일보』에 「전국 노동자제군에게 격檄함」에 연서 ![]() 일본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양근환(왼쪽)과 박열 했다. 7월에는 신석현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한인노동자 100여 명이 살해당하는 집단학살사건이 발생하자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진상조사활동을 벌이는 한편 동경·대판 등지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는 아나키즘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불령사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2년 9월 서울에서 신석현 한인노동자학살사건을 보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그는 김한을 만났다. 김한은 상해 의열단원으로 당시 30여 개에 달하는 폭탄을 단동에 숨겨두고 있었다. 마침 김상옥金相玉의거가 일어나는 바람에 두 사람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23년 5월 불령사에 김한중이 가입하자 박열은 가을 일본황태자 결혼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폭탄 구하는 일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김중한과 박열 사이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이러한 사실이 일본 공안당국에 알려졌다. 8월 28일 박열 검거를 필두로 홍육균·최규종·서성동·정태성·홍진우·하일 등 불령사 회원 16명이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예심이 종결되면서 박열과 일본인 부인 김자문자金子文子만 대역죄·폭발물취체규칙위반죄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김중한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방면되었다. 박열이 검거되자 장상중과 정태성은 물품을 차입하는 동시에 삼월회·일월회·학우회 등 재일한인단체와 함께 기부금 모금에 나섰다. 이 기금은 재판공판 비용에 충당되었다. 변론은 맡은 포시진치布施辰治는 공판에 필요한 각종 경비를 자담하였다. 박열은 1926년 2월 첫 공판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들 부부는 21회에 걸친 예심재판 기간 동안 조서를 찢고 단식투쟁을 병행하는 등 검사와 일전을 불사하였다. 1925년 9월 일본대심원 특별법정 공판에 앞서 박열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로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이므로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의를 입는 것을 허락할 것, 둘째로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규탄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니 법정에 서는 취지를 스스로 선언하도록 할 것, 셋째로 조선어를 사용할 것이니 통역을 준비할 것, 마지막으로 박열은 피고와 다른 사람이니 좌석을 일본인 판사와 동등하게 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대심원 판사부는 첫째와 둘째 조건을 수용했다. 박열의거는 폭탄 준비과정에서 차질을 빚어 정보가 누설됨으로써 사전에 발각된 의거계획이었다. 일제는 관동대지진의 와중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역사건으로 포장하였다. 그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 중 8·15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3) 김지섭의거 1920년대 일본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은 김지섭金祉燮의거이다. 그는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고려공산당과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3년 가을 만주·일본·국내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 인 폭탄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자금난과 기밀누설 등으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당시 단원들이 착안한 방안은 일제 제국의회회의장 급습이었다. 일본 정관계 요인을 일시에 몰살시킨다면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동포의 원혼을 달래며, 세계적인 이목과 여론을 한국독립 문제로 집중시킬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註44) 이에 김지섭은 단독결행을 자원하고 나섰다. 의열단은 그에게 최소한의 경비와 폭탄을 지급했다. 일본까지 가는 여정은 일본 사회주의자 소림개小林開의 형인 소림관일小林貫一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아편밀수업자로 위장하여 석탄창고에 몸을 숨기고 1923년 12월 20일 상해를 출발하여 12월 31일 복강福崗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경을 향하던 중 제국의회가 휴회 중임을 알았고 대신 황궁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심하였다. 1월 5일 동경에 도착한 그는 석양 무렵에 궁성 앞으로 나아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경비병이 자신을 검문하려 하자, 그는 세 개의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일제는 긴급 각의를 개최하여 보도금지령을 내리고 경시총감·경무부장·궁성경찰서장을 즉시 면직시켰다. 김지섭은 재판과정에서 일제의 한국강점 죄악상과 경제적인 수탈 등을 꾸짖었다. 그는 “한국인은 한국독립을 절대로 요구하며, 최후의 일인이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임”을 외쳤다. 일본인 변호사 포시진치와 등창藤倉도 “김지섭은 한민족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라고 변론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폭탄이 불발하였으니 그는 불능범으로서 무죄라고 주장했다. 김지섭도 “법률의 정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함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나는 한국민중의 생명·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러한 행동을 취한 것”이라면서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구 행하였다. 註45) 김지섭은 복역 중 1928년 2월 의문의 죽음으로 순국했다. 김지섭의거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민족의식·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였다. 8. 관동대지진과 한국인학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사망은 지진으로 인한 재해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1923년 9월 1일 정오에 일본의 중심부 동경일대에 지진이 일어났다. 동경·횡빈 일대를 혼란에 빠뜨린 지진은 강도 7.9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관동지방에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10만 명의 사망자와 100억 원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註46) 동경에는 많은 이재민들이 생겼다. 이들은 상야上野공원·일비곡日比谷공원·황궁 앞·정국靖國신사 등으로 모여들었다. 부모가 죽거나 가족과 헤어지고 집이 불타 잘 곳도 없는 그야말로 살아남은 것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루어 먹을 것을 요구하며 극도로 혼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는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내무대신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 내무성 경보국장 후등문부後藤文夫, 경시총감 적지농赤池濃 등은 치안유지 대책을 세웠다. 수야연태랑은 1919년 3·1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적지농은 경무국장을 역임하였다. 註47) 경보국장은 상황을 살펴보고, 비상수단으로 ‘조선인 내습’이라는 명분 하에 9월 2일 오후 6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는 한국인에 대한 학 ![]()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당한 재일한인들 살로 이어졌다. 한국인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된 것은 9월 4일을 전후해서였다. 동경에서 가장 학살이 심했던 곳은 구호龜戶경찰서로 하루 저녁에 312명이나 학살되었다. 또한 횡빈·천엽千葉·기옥埼玉·군마현群馬縣 등지에서 수천 명이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되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학살되었다. 이유는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학살은 뒤늦게 국내에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9월 5일 재경 일본유학생들은 유학생 생사 확인을 위한 집회를 가졌고 재일동포친족회는 실태 조사를 결의하는 대회를 열었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각 경찰서를 통해 엄격히 감시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신문에 대한 보도도 통제했다. 또한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일제 경찰은 경계와 단속을 강화하였다. 9월 7일 유언비어 단속에 관한 공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로써 9·10월 두 달 동안에 불온언동으로 단속된 사람이 1,317명, 법규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은 122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학살에 대한 동요나 문책론이 등장하자 일본 은 무마책 일환으로 ‘조선인을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인수용소를 설치하는 등 생존자 구조에도 나섰다. 결국 습지야習志野·목흑目墨경마장·상애회와 총독부 유학생감독부 등에 한국인 약 7,500명이 수용되었다. 일본정부는 학살진상을 모호하게 은폐하면서 유언 발설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진상을 조사하려는 자유법조단 등의 단체 활동을 방해했다. 학살사건 이후 총독 재등실은 일본의 각 신문에 당시 관동지방에서 살고 있던 한국인은 노동자 3,000명과 학생 3,000명 등 모두 6,000명이었고, 이중 조사 결과 살해당한 자는 2명뿐이라고 축소·발표했다. 사실 은폐는 일본정부의 발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정부는 1923년 11월 15일 현재 피살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으로 발표했다. 당시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일본정부에 강력히 요구한 길야작조吉野作造는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에서 2,613명이라고 수치를 밝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6,661명이었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도 6,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 관동지역 인구 통계에서는 한국인 1만 명 이상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정부는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학살사건 이외에도 구호龜戶사건, 대삼영大杉榮사건을 만들어 냈다. 관동대지진으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될 때 일본 국내는 대중운동의 고양기였다. 쌀소동 이후 대중운동은 성장하여 1922년 7월 일본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일본공산당은 일본 운동의 전위임을 자임하며 러시아 간섭 반대 대중운동을 조직하여 3대악법반대투쟁을 주도했다. 특히 일본 내 활동가들은 재일한국인과 불충분하나마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조·일 연대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이 상황은 발생하자 달라졌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일부터 사회주의자들은 자경단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취지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한국인 학살을 방관하였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재일한국인은 소실을 면한 천도교청년회의 사무실에 집합했다. 회합에 참석한 한위건·최승만·박사직·왕시진·김은송·김낙영 등은 각종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한 이후 10월에 가서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를 결성하여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註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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