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공주
세조에게는 한 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어질고 성품도 덕스러웠다. 친조카인 단종을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려할 때에 이의 옳지 못함을 직간하던 사람 중의 한 분 바로 세조의 공주였다. 공주는 부왕에게 단종을 유배하는 것은 왕가의 폐도라 왕좌를 보존시킴이 하늘이 바라는 순리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크게 노하여 한낱 아녀자인 공주가 주제넘게 국사에 관여하여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고 죽이려 하였다. 공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절제 김종서가 사육신 및 충의를 지키려는 신하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려다가 순절하고, 그 가족들이 다 죽임을 당하는데 이르는 것을 보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밥도 먹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어머니(현덕왕비)인 소능이 참변을 당 할 때는 울면서 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세조는 크게 노하였으며 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왕비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알고, 남의 이목을 피하여 노비와 함께 많은 금자를 내주어 야간도주케 하며 이르기를 "공주는 이제 왕실의 자손이 아니니, 어느 곳에 가서 살던지 신분을 숨기고 평민이 되어 부디 몸조심하며 편히 잘 살아라" 하였으며 왕에게는 공주가 夭折한 것으로 알렸다. 공주가 눈물로 하직하고 성문을 빠져 나오니 그저 암담할 뿐으로 달리 묘책이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공주가 송림이 울창한 심산유곡인 지금의 옥양동(보은)에 이르자 마침내 날이 저물어 숙소를 찾게 되었다. 마침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보니 보굴암 입구의 초막에서 나온 불빛이었다. 하룻밤만 유하려고 주인을 찾으니 초막에서 나온 주인이 엄두리 총각이라 공주는 차마 말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여러 날의 노독을 이야기하였다. 총각도 처음에는 낯선 閨秀의 유숙을 거절하다가 딱한 공주의 사정을 듣고서는 자기 방을 비워 주었다. 공주는 총각이 부엌에서 잠을 자겠다는 소리에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노비와 의논하여 총각과 평생가약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튿날 공주는 총각에게 피차 팔자가 기박한 사람끼리 이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성혼하여 부부가 됨이 어떠하냐고 의중을 물었다. 총각 역시 공주의 언행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는 마음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분을 속이고 평민이 된 공주는 보굴암 밑 초막에서 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장남이 출생하게 되자, 공주는 농 밑 깊숙이 넣어 두었던 금자를 꺼내 놓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신분과 그동안 감춰야만 했던 내력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원수를 다리 위에서 만나 자식까지 낳았으니 이일을 어찌 하리요 하며 탄식하였다. 그는 바로 김종서의 친손자로서 환란 당시 구사일생으로 집을 빠져나와 이 심산궁곡에서 은신 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은신하여 살던 그 부부는 가진 돈을 생자로 하여 보은 내속리면 사내리로 이사하여 수년을 살던 중 마침 세조께서 득병하여 속리산에 요양차 입산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후 세조왕의 행차가 지나감을 보고,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하였다. 세조가 지나다 보니 웬 아낙이 길가에 엎드려 슬피 우는지라, 가까이 불러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아낙은 몇 해 전 자신이 죽이려 했던 세희공주 임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되었던 세조는 늘 공주의 일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몹시 기뻐하며 공주의 결혼생활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종서의 후손은 끊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금계필담(錦溪筆談) : 저자 서유영, 정조 25년(1801)에 출생, 철종 4년 (1953) 경상도 의령 수령을 지냄, 고종 10년(1873) 금계(금산)에서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