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69)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have come to believe, We are convinced that you are God’s holy one .”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누워 있는 애네아스를 일으켜 세우고, 병이 들어 죽은 여제자 타비타도 살렸다. 이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에 군중은 거부감을 드러냈고,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떠나 버렸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주님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 후배가 제게 전자 우편(이메일)을 보내며 답장을 부탁했는데, 답장이 없다고 화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다고 해명하였습니다. 그러자 후배는 전자 우편에는 수신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수신 확인’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거기에는 제가 읽었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랬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지낸 세월이 있다. 그동안 나를 겪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냥 내 말과 인격을 신뢰해 줄 수는 없느냐?” 그 후배는 저의 이 말에 화를 가라앉혔습니다. ‘수신 확인’으로는 제가 읽은 것이 맞겠지만, 그것보다도 저와 후배 사이의 돈독한 관계, 저에 대한 인격을 신뢰하며 읽지 않은 것으로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제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군중과 몇몇 제자들이 거부감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가르침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겪어 온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도 베드로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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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갑니다.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다고 외칩니다. 그 말씀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살과 피’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답이 없습니다. 당신과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앞의 승복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만 따르고 싶었습니다. 기적에 놀라고, 가르침에 만족하면서, 새 세상이 오면 적당히 편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확실한 선택을 명하십니다.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사람들은 망설이다 떠나갑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떠나겠느냐고 하십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확신으로 답합니다. 사람들은 어정쩡했지만, 베드로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운명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든 풀은 약이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혹서와 혹한을 견딘 풀들은 약발이 셉니다. 그러기에 집에서 키운 약재보다 자연의 약재가 훨씬 비쌉니다. 양식한 생선보다 자연산 생선을 선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충 살면 결과 역시 대충입니다. 확실하게 살면, 삶은 고달프지만, 많은 것이 확실해집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스승은 열두 제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가 대표로 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줄인 말이 ‘영생’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인류의 숙원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외친 종교는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최근에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장담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이비였습니다. 비슷하게 보였지만 가짜였습니다. 영생은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끝없이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죽음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느님 안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분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리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신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그들은 비판의 눈길로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알아듣습니다. 애정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면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만, 비판으로 다가가면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창
-김대열 신부-
우리는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창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창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셨을 때엔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창이었다.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를 보라. 하지만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이가 내 엄마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관계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 관계를 맺는 성장 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상처도 입는다. 물든 창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물든 세상이 된다. 상처를 입고 보는 세상은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지만 얼룩진 마음으로 보이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아니면 그 무엇인가에 의해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재단을 한다. 그분의 말씀이 힘을 잃고 그분의 행동이 어리석어 보이기 시작한다.
그분께 가치를 느끼더라도 유혹을 물리칠 만큼, 목숨을 걸고 따를 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창을 닦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치유와 용서의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해 각자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만 한다.
영과 육
- 반명순 수녀-
삶 안에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달라진 방향은 영과 육,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놓기도 합니다. 환자 방문을 하여 대세를 권유할 때마다 흔히 있는 대화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세례를 받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면, “죽어봐야 알지,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느냐??”, “지금 죽을 지경인데 그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영보다 육에 몰두해 있는 탓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6,?60ㄱ)도 예수님의 표징을 보았고?(6,?2), 기적의 빵을 먹었으며?(6,?12), 가르침을 받았지만?(6,?22???59), 투덜거리며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빵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매력적인 것은 생명의 빵이 아니라 육신을 위한 빵이었고, 더 믿고 싶은 것은 생명의 말씀보다 확고부동한 육신의 안일을 보장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은혜를 부여받지만, 자신이 지닌 가치와 척도에 따라 신앙생활을 달리하듯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뜻과 원하는 방식이 달랐기에 불평을 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제가 기쁨에 차서 예수님 곁에 머물고, 때로는 그분과의 관계를 소원(疎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나의 욕심이 그분의 표징을 흐리게 하고, 세속적 가치에 묶여 하늘의 가치를 외면하며, 육신의 빵에 매달려 생명의 빵을 도외시하지는 않는지?…. 오늘도 그분은 제게 물으십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주님 앞에 서서 자신 있게 응답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따뜻한 기운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자주 나갑니다. 그런데 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갈 때 반드시 복장을 갖춰서 나갑니다. 물론 동네를 돌아다닐 때에 굳이 복장을 갖추지 않지만, 60Km 이상을 타야 할 때에는 꼭 복장을 갖춰서 나가지요. 왜냐하면 자전거 복장을 해야 눈에 잘 띄어서 안전하고, 또한 자전거 타기에도 무척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를 본 본당 신자들은 이 자전거 복장이 무척이나 어색하신가 봅니다. 물론 겉으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너무 멋있어요.”
그러나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십니다. 몸에 쫙 달라붙는 쫄쫄이 옷을 무척 민망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저런 옷을 입나 라는 표정을 지으시지요.
사실 저 역시 처음에는 몸에 쫙 달라붙는 이 자전거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던 갑곶성지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려는 순간, 성지 마당에 누군가가 있으면 자전거 옷이 아닌 평상시에 입던 체육복을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체육복의 밑단은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그 여유 있던 밑단이 달리던 자전거 체인에 끼인 것입니다. 다행히 체육복이 체인에 의해서 찢어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지요.
이 자리를 빌려서 말하지만 저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렇게 꽉 달라붙는 옷을 입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의 몸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더욱 더 입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눈치도 내가 있은 다음에 따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잠깐의 체면을 위해서 큰 모험을 감수하는 어리석음은 당연히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주님 곁을 떠납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흔들 수 있는 좋은 방법도 많지 않습니까?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좋은 말씀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든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십자가의 죽음도 당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그리고 사람들의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었기에,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굳이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주님 곁에 남은 제자의 고백을 우리 역시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시작할 시간을 찾지 못하는 것은 굶주리고 건강을 해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을 미루는 것과 같다(존 틸로트슨).
영원한 생명의 말씀
- 박민서 신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기뻐하며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안에 영원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말, 실망을 주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불신의 말, 절망의 말…. 이런 말들은 내 안에 희망을 꺾게 하고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은 남에게도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칭찬과 격려, 기쁨, 밝고, 맑음이 담겨 있고 나 자신도 소중하듯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 말씀은 남을 살리는 생명이 넘치는 샘입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말씀을 우리도 일상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의 메신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감수성
-김찬선신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오간 말씀입니다.
얼마 전 고심 끝에 충고를 하였는데 벽에다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반발이 느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하다 분명 사랑으로 얘기를 하고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려면 오지도 마라는 식입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영이 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感受性. 느끼고 받아들이는 성질. 그러니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느끼려 해도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질입니다. 사랑의 불감증, 영적 통교의 단절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까?
사랑하다 상처를 입은 사람, 그래서 사랑에 몸 도사리는 사람이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 특히 남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자신 안에 부정이 늘 터주 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사람도 사랑의 감수성이 없습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감각 세계에 머문 사람은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계획 등, 자기에게 사로 잡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해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교만으로 신비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도 영적 감수성이 없습니다. 사랑의 자유가 없는 사람도 영적인 감수성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런 사랑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고,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과 육과 성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하며 그분을 떠나서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면 그것을 이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사도들에게도 당신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이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를 반석으로 세운 교회를 나타냅니다. 베드로를 기초로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오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바로 가톨릭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세우시는 교회와 성사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갈 많은 형제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 아우구스띠노회 수사 신부였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성체성사도 고해성사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머리로는 교회가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버리고 합리적인 것들만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이 당신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마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시며 당신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이해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가 진리이기에,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 외에 다르게 말씀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사도들 앞에서 변화시켜주시고 당신을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이에 교회는 사도들의 이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사도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실 때 이것을 완전히 이해해서 남아있겠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해가 된다면 더 이상 믿음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영이고 생명이다.”
개신교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이면 많은 경우에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이 세상에서도 많은 복을 받고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시고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면 영적인 말씀이 이해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라는 동네에서 한 장님을 치유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치유를 해 주었더니 사람이 나무처럼 보인다고 하고 두 번째 치유를 하니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은 영적인 눈을 띄어주신 것입니다. 그 장님을 다시 베싸이다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시 죄를 지어 영적인 눈을 잃게 될까봐 그런 것입니다.
육체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사람이 나무로 보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생명나무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눈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하는 많은 것들이 이해가 안 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초대 교회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사람을 잡아먹는 예식을 한다는 소문까지 들어가면서 이 예식을 행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성체를 바라보는 마지막 눈이 바로 영적인 눈이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란치아노의 성체 성혈 기적을 조사하던 과학자는 처음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이고 살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 이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몇 시간만 지나도 피가 응고되어 분석이 불가능해짐에도 바로 흘린 피처럼, 바로 심장에서 잘라낸 살처럼 유지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진정 사람의 살과 피임을 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며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무조건 포기하고 나간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 첫 교황께서 하신 말씀처럼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당신께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지니고 계시니 우리는 당신 안에, 즉 교회 안에 머물겠습니다.”라고 항상 고백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이태리의 유명한 성체기적이 일어난 곳은 란치아노와 볼쎄노입니다. 두 곳 다 신부님들이 미사를 하다가 ‘밀떡이 정말 예수님의 피가 되고, 포도주가 정말 예수님의 몸이 될까?’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심이 비록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부터 시작하여 아주 길게 성체성혈의 신비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다 들은 군중들은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열두 제자’들은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교회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을 때처럼 ‘베드로’가 ‘대표’로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을 꼭 써 넣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교회는 성체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완전한 성모님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참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찬의 신비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많은 이들이 당신을 떠나갈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마리아를 등지고 성체를 등짐으로써 결국 매 순간 육화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떠나간다고 하여 교회는 이 신약의 ‘한 몸이 되는 핵심 신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교회의 불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 이 완전한 육화의 신비가 재현되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또한 오늘 마지막 복음은 바로 마리아를 포함하는 가톨릭교회만이 끝까지 이 성찬의 신비 안에서 머물 것임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로 시작하여 교회로 끝맺는 성찬의 신비는 가톨릭 믿음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신비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바로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모인 사람들’ 뿐입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양승국신부-
<시어머님 안에 계시는 예수님>
미국에 사는 한 어머니의 소중한 체험입니다.
"아이들 셋이 다 겨울 코트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살 돈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신문을 읽다가 할인 매장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저는 좋은 기회다 싶어 얼른 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시어머님이 전화를 하셔서 저희 집에 와도 좋은지 물으셨습니다. 보통은 그런 전화를 하지 않으시기에 저는 즉시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돈을 절약해서 아이들 코트를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잃으면서 시어머님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해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약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크게 먹고 아이들 코트를 사는 대신 시어머님의 코트를 한 벌 샀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오시는 시어머님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신 코트 세 벌이 들어있었습니다."(그물, 2003년 5월호 참조)
보십시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을 보십시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좀 손해본다는 느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좀 손해본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마음 크게 먹고 양보하고 물러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때로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쫀쫀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어도 양보하지 않고 세상이 두 쪽 나도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목숨걸지 않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기에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보너스는 또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매일 자신을 덜어내는 사람이기에 매일을 아주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행동거지가 떳떳하며 매사에 자신이 있습니다. 내면이 늘 자유롭고 평화롭지요.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내면이 자유롭고 평화롭기 때문에 소화도 혈액순환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따로 피부관리나 모발관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내면에 충실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수용합니다. 자신의 외모가 어떠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며 살기에 그의 세상은 온통 장밋빛입니다.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 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이 부인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지요.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이미 죽어서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허구한 날 남편을 구박하기는 했지만, 막상 남편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지요.
이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천을 내리며 말합니다.
“여보, 사실 나 아직 안 죽었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보려고 연극을 했던 것이지.”
그러자 깜작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잘 듣고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면서, 보이는 사람의 말은 왜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바로 나만이 옳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윗자리에 서야 한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한 착각과 이기심 때문에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까지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 또한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만을 강조했었고, 윗자리에 올라갈 생각만 했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각종 핑계를 대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내 뜻과 내 생각만을 주장한다면 또한 나를 높여서 윗자리에만 서려는 욕심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또한 윗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 드러난 사소한 것들이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 준다.(존 로크)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 서동원 신부-
예수님과 유다인 사이에 벌어진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한 논쟁 이후에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수군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분 곁을 떠납니다(66절).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당신의 열두 제자를 향해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만일 너희가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당신들만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기”(요한 15,5) 때문입니다. 당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베드로 사도가 제자들을 대표해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16,68)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며 건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록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이 귀에 거슬리기에(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처럼),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예수님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분 안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어,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누구를?
-김찬선신부-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을 주시는 빵과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4장 6절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빵과 말씀이시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즉 나는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나는 생명을 주는 존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나는 곧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없고 나는 생명을 지닌 존재라 얘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생명을 잃으면 우리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명이 아니기에 생명을 받아야만 생명을 지니는 존재이고 생명을 받아야만 지니는 존재이니 누군가 생명을 주어야 받아 지니는데 그분이 바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Life giving Bread)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말씀(Life giving Word)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생명을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지 않고 썩어 없어질 빵에서 얻으려 합니다. 이 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의 육신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육신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썩어 없어질 빵은 그렇게 애써 얻으려 하면서도 영적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피둥피둥 살이 쪄도 영은 시들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찾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얻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위로와 격려를 얻고자 합니다. 물론 사람의 위로와 격려도 필요하고 우리도 힘들고 지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위로와 격려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와서 부쩍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에부터 아는 분이 오시는 경우도 있지만 아는 분을 통해서 처음 찾아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인생 상담하러 오시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는 저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딱한 처지의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 이분들이 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양승국신부-
<U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갓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던 왕초보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정말 운전이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경리 수사님에게 "정말 아무 일 없을 것이니 봉고차 키 좀 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저는 어느 주일 오후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잘 알면서도 몰래 키를 꺼내들고 봉고차에 시동을 건 다음 무작정 몰고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운전연수제도가 없었던 터라 제겐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문을 통과한 뒤로 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차를 안양방면으로 향하는 시흥대로로 몰고 갔습니다.
시흥대로로 접어든 순간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제 이마로, 등뒤로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습니다. 백미러나 사이드 미러는 전혀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옆 차선으로 지나다니는 차들은 또 얼마나 쌩쌩 빠르게들 달리는지요. 안양을 지나면서 "이제 되돌아가야 할텐데"하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차선변경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기도 시간은 다 되어가고 빨리 U턴을 해야되는데..." 하는 순간 봉고차는 안양을 지나 의왕 나자로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왜 그 아픈 기억을 소개해 드리는가 하면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베드로 사도가 외치는 말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 그 이후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한 고되고 오랜 신앙여정을 걸어온 베드로 사도가 마침내 장엄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이러한 고백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삶 안에 드디어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회개-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삶, 그리고 스승 예수님께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를 끝냈습니다. 자신이 갈곳은 오직 예수님 그분뿐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알게 된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U턴"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방향이 올바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빨리 U턴 지점을 찾아서 가던 길의 방향을 되돌리는 노력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지난날, 연기처럼 덧없는 것들을 진리처럼 여겼던 삶,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바쳤던 지난날의 그릇된 생각들을 접고 어떻게 해서라도 진정한 사랑,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실한 사랑이신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는 삶이 바로 회개입니다.
변화무쌍하고 예측할 수 없는, 한결같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께만 최종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결단이 바로 회개입니다.
언제나 거듭 태어나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궤도를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일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적극적인 추구입니다. 회개는 다시 한번 하느님 안에 우리의 도성을 구축하고 새 출발하는 일, 온갖 집착과 타성의 집에서 미련 없이 털고 빈손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의 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형제님이 무척 아픈 것 같습니다. 새빨갛게 변하였고 끊임없이 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요. 지나가면서 이 형제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형제님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먹는가 싶어서 유심히 쳐다보았지요. 그것은 바로 그렇게 맵다는 ‘청량고추’였습니다. 쉬지 않고 ‘청량고추’를 먹어대고 있으니 얼굴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고통스러워 한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스로 매운 청량고추를 먹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형제님에게 물었지요. “아니, 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청량고추를 먹습니까?”
그런데 이 형제님의 답이 가관입니다. “혹시 달콤한 청량고추가 있을까 싶어서요.”
그러한 고추가 있을까요? 요즘 개량된 고추 중에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량고추 중에서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지요. 만약 달콤한 청량고추를 찾는다면, 지금 당장 입에 넣고 있는 청량고추를 그 자리에 내려놓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일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엉뚱한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많은 물질적인 것들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데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 안에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하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은 만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늘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달콤한 청량고추를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처럼, 이 세상의 것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를 자청하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주님의 말씀만을 원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달콤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었을 때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십자가를 질 수 없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곧바로 답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우리들의 진심어린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만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의 삶은 늘 피곤에 찌들기 마련입니다. ‘노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노란색이지요. 부정적 사고의 소유자들은 ‘삐딱함’이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다 삐딱하게 보이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누가 활짝 웃고 있으면, 나를 비웃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사람이 오순도순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으면 자기를 씹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부정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은 실패한 한 가지 일을 전반적으로 확대시키는 ‘과잉일반화’(overgeneralization) 경향이 많습니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무한한 가능성, 그 탁월한 장점들은 지나치게 평가절하하고 하찮게 여기면서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은 극대화시키며 자신을 쓸데없는 인간으로 몰고 갑니다.
또 재미있는 것 한 가지는 이런 사람이 또 완벽주의 경향을 많이 지닙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완벽하길 바랍니다. 절대로, 단 한치도 실수하면 안 된다, 늘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이민규, ‘긍정적 심리학’ 원엔원북스 참조).
이러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나겠습니까?
반면에 긍정적 사고를 지니고 살아가시는 분들의 삶은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단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관대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극도로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유롭습니다.
그 유명한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습니다. 혹독한 중복장애로 인한 그녀의 삶이 온통 가시밭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다. 나에게 어떤 것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는 부정적 사고방식 소유자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 늘 분개했습니다. 자신과 동족이 처한 비참한 운명이 늘 슬펐습니다. 예수님의 급격한 쇠락과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 한 가지를 더 했습니다. 극심한 자책감에 빠져 비관을 거듭하다가 삶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삶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긍정적, 낙관적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의 삶이 한때 인간적 나약함으로 인해 심하게 요동쳤지만,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었기에, 낙관적이었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 역시 수시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때로 우리의 죄가 진홍빛보다 더 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처럼 다시 한 번 주님께 돌아서길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외치기 바랍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머무르시는···
- 김연희 수녀-
오래전 판공성사 면담 때 본당 신부님이 ‘남매는 용감하다!’라는 말로 고교생 오빠와 여중생인 나를 맞아주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은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영성체 후 기도는 일생을 통해 꼭 들어주신다는 대모님의 권고대로 세 가지 기도를 했는데 모두 이루어졌다. 몇 년 후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고, 오빠는 신학교에, 나는 수녀원에 입회했다. 뒤늦은 신앙이었지만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며 가족 모두 우리의 봉헌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이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은 것처럼(66절) 오빠는 부제품 전에 스스로 신학교를 떠나 신앙생활을 등지고 쉬는 교우가 되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선뜻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 묵상에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던 예수님을 만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주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모두 떠나갔다. 나 또한 그럴듯한 고백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겪거나 자신의 뜻과 다른 일이 생기면 주님으로부터 저만치 도망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 무엇이 진정한 머무름인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건네시며 친히 다가오셨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연약한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늘 머물러 계신다.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품으로 달아들어 진심 어린 오롯한 봉헌을 할 수 있는 복된 그날을 그려본다.
예수의 제자
-오상선신부-
오늘날 한 사람의 수도자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한 사람의 사제가 나오기까지, 최소6년에서 10년정도 걸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 양성기간을 3년으로 잡으신 것 같다. 지원기 1년, 수련기 1년, 유기서약기 1년 그렇게 3년과정으로 당신 제자를 양성시키고자 하였다고 보자.
처음에는 지원자가 그렇게도 많았다. 5천명이 넘는 군중이 떼거리로 몰려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중에 대부분은 병을 고친다거나 무언가 기적을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중 일부만이 <그래 이분의 제자가 되자> 하고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원기 1년을 보낸 후 아마도 72명의 제자단이 남게 된 것같다.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또 여럿이 떠나게 되고 유기서약 때까지만 해도 꽤 많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제 종신서약을 앞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중요한 가르침을 전수하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그 빵을 추구해야 한다고... 썪어 없어질 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제자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 빵은 다름아닌 당신 자신이라고... 그러니 당신 자신을 뜯어 먹어야만 한다고... 제자들은 여전히 현세적인 관심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이 영적인 말씀을 못알아듣고 하나 둘씩 떠나버린다.
이제 열두제자만이 남아 있다. 예수님은 남은 열두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어떻게 하겠는냐? 너희도 떠나 가겠는냐?> 고 물으신다. 그분은 남아 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으신다.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오직 결단하기를 촉구하신다. 왜냐하면 신앙은 본인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때에만 생생하고 새로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 5년마다 통계청에서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때문에 시끌벌적 했던 때가 있었다. 가톨릭 신자수가 500만을 넘었고 최근 10년간 그 증가세가 불교와 개신교에 비교해서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이상했던 것은 우리 교회에서 냉담자까지 포함해서 교적상의 통계보다도 더 많은 수가 가톨릭 신자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어떤가? 주일미사 참석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교구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평균 25% 정도 된다고 한다. 400만 신자라고 한다면 주일 미사 참석하는 신자가 100만 정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 100만 중에서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는 얼마나 될까?
앞으로 통계청의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예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라고...
오늘 세례서약과 수도서약을 통해 그분의 제자로 불림받은 우리 모두는 다시한번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 촉구의 질문을 받게 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진정 나의 제자가 되겠느냐?>
베드로처럼 그분만이 유일한 나의 스승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신 분임을 확신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서약은 또다른 사치가 되고만다.
오늘 더욱 겸허하게 "나를 당신 제자로 받아주소서!" 하고 청하는 영혼을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신다.
-김찬선신부-
우리는 지난 한 주일 생명의 빵에 대해 지루하다싶을 정도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답게-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너절하게-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은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6장의 마지막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드디어 도대체 뭔 얘기냐고 투덜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투덜거리니 주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이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많은 제자들은 아예 떠나가 버립니다. 눈에 보이고 배를 부르게 하는 빵을 달라고 하니 생명의 빵을 얘기하시고 알아듣게 해달라니 생명의 말씀에 대해 얘기하시니 이런 엇박자도 없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엇박자는 주님께서는 영적인 빵과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적인 빵과 말을 듣고자 하니 어쩔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그때 제자들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도 알아듣기 어렵지만 생명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 영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생명과 생명을 사는 것, 죽음과 죽음을 사는 것. 살지만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고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건, 없건 숨을 쉬고 있으면 그래서 살아있다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만 생명은 유지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아 생명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고, 밖에서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숨은 생명의 들이킴입니다.
창세기의 주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으심으로 존재를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이 아담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숨으로 성령이 제자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담의 숨으로 하느님의 숨을 들이키고 제자들의 숨으로 예수님의 숨을 들이킵니다.
숨과 숨이 통함으로, 숨이 숨을 들이킴으로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숨이 막히면, 숨이 숨을 들이키지 않으면 생명은 단절되고 죽습니다.
같은 이치로 곡기를 끊으면 죽는 것처럼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존재가 생명을 지닙니다. 生命은 生기라는 命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도 없고, 존재한다 하여도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걱정도 팔자
-정병덕 신부-
교구청에 있다 보니 미사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본당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 문 앞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군요. ‘문을 꼭 닫아주세요.’ 비록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사답게 문을 꼭 닫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본 뒤에 나오려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난처했지요. 초조한 마음에 문을 세게 두드리며 외쳤지요. “여기 화장실에 갇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런데 몇 번을 이렇게 외친 뒤, 문득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핸드폰이 있었으니까요. 성당 사무실에 연락하면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보며 열두 사도들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의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 않습니다.
독서 : 주님과 하나 되어 기적을 행하는 베드로 - 경규봉 신부-
교회는 유대인과의 마찰이 어느 정도 해소됨으로써 안정을 찾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리따에서 8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있던 에네아를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시킨다. 또한 요빠에서 죽었던 여신도 다비타를 소생시킨다. 베드로가 보인 치유와 죽은 이를 소생시킨 기적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징표이며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을 믿는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을 보면, 에네아의 중풍을 고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를 치유한다. 그런데 다비타를 소생시킬 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여 소생시킨다.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실 때처럼(마르 5,40) 사람들을 방에서 다 내보낸 후, 예수님께서 “소녀야, 어서 일어나라.”(마르 5,41)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한다. 베드로가 깨어난 다비타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킬 때와 비슷하다(마르 5,41).
이를 통하여 우리는 베드로가 시간이 흐를수록 주님과 더욱더 하나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을 때까지는 악령 하나도 제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마르 9,18).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지 않고 믿음이 부족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다(마르 9,29; 마태 17,20). 예수님의 으뜸 제자이며,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는 겁 많고 나약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과 멀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온전히 변하였다. 자기들을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물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사도 5,41).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치유한다. 베드로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베드로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베드로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함으로써 다비타를 소생시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할 수 있을 만큼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안에서 사시고,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안에서 행하시는 삶을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주님과 하나가 된 천국의 삶을 지상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락방에서부터 함께 기도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며, 주님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도와 믿음은 이처럼 사람을 겁 많고 나약하며 비겁한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능력 없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주님과 먼 사람을 주님과 하나 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기도와 믿음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의 능력을 행하며, 주님을 선포하는 신앙인이 되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 박근범 신부-
참으로 우리 사회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한없는 욕심과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현실을 볼 때마다 매우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서인지 몰라도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반면, 자신들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자신과 집단의 이익과 권리만을 찾기 위해 소중한 일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데 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병자를 남겨 둔 채 떠나지를 않나,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의 노동자를 거리로 내쫓아 하루아침에 온통 집안을 풍비박살을 만들지 않나, 치매 걸린 불쌍한 노부모와 장애를 가진 가련한 어린아이를 버리지를 않나,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빈번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심각한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불행한 세상으로 점점 타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언제쯤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실현될 날이 올지, 정말 미래와 희망은 있는지 모두들 근심과 우려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위기 상황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날 모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참고 견디던 인내와 성실성은 온데간데없고 조금만 귀찮고 힘들고 어려우면 그냥 도망쳐 버리려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타인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 주기를 원하면서, 왜 자신은 타인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합니까? 희생과 인내가 따르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반드시 있어야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에 따른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참된 자유로움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질줄 아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제자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줄 몰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는 눈앞의 사리사욕에 빠져 그만 유혹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똑 같이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명의 말씀
-김유철 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안 들자 사람들은 이해하기를 멈춥니다. 듣기 거북하다는 표현을 하며 떠나갑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왔던 이 사람들은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기적의 빵을 먹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듣고 치유의 기적도 보곤 하였지만 그들 각각은 다 이방인이었고 남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남남이 아닌 한 가족임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나누어준 빵을 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나의 가족과 같은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의미가 나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서로 나눔을 하여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하는 가운데 일체감이 싹트고 기쁨과 평화가 흐릅니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형성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예표인 것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받았지만 빵이라는 육적인 것에 그것을 빼앗기기도 하고, 왕으로 세워 로마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에 빼앗기기도 하는 등 빛보다는 어둠에 사로잡히게 되자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열두 제자는 남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
다양성 안의 일치
-이세영 수녀-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친 다리를 끌고 어느 절에 들어가니 대웅전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안내자에게 질문을 했더니 함께 간 보좌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수녀님,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고, 웃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기쁜 일이 있는 건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잠시 후 안내자가 그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이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 미리 울어주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웃는 것은 집안의 어느 분이 돌아가셔서 이 세상의 고통이 끝났으니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시길 비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표현이지만 공통점은 둘 다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겉모양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을 깨뜨려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장난 섞인 질문을 한 것이 의외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도 베드로처럼 성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지만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작 주님께서 영원한 말씀을 지녔다는 중요한 사실은 망각하고 고정된 시각으로 표현 방법에 중점을 두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표현하든지 상관없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드는 것. 그것은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영성생활의 최종적 지향점, 관상>
-양승국신부-
신앙생활, 기도생활, 영성생활을 바탕으로 한 하느님 체험은 지극히 개별적인 체험이기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이 지극히 다양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 중에 자주 환시를 보기도 합니다. 은혜롭게도 어떤 분에게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며 말씀을 건네기도 하신답니다. 어떤 분들은 관상 기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묵주기도 중에 성모님께서 바로 옆에 앉으셔서 함께 기도하시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 체험,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은 사람마다 그 정도나 강도가 지극히 상이하기에 그런 체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비체험, 영적체험 앞에 우리는 보다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이 근질근질 해져서 함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발설하다가는 ‘약간 맛이 간 사람’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걸린 사람’으로 오해 받거나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도저히 혼자 간직하기 부담스러울 때는 현명한 영적지도자를 찾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왜냐하면 천상적 신비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 본격적인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특별한 체험은 거북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시기심을 발동하게 만듭니다. 투덜거리게 만듭니다.
속상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도대체 뭐냐’는 식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신비로운 말씀 앞에 많은 제자들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사실 관상입니다.
기도 가운데 나란 존재가 사라지고 하느님만의 충만한 현존만이 내 안에 남게 됩니다.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 그분께서 함께 해주시니 나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황홀합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관상이 아니겠습니까?
한 대 영성가는 관상기도 중에 황홀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자주 체험하곤 했었는데, 하루 온 종일 그런 상태에 머물러있을 수 있나요?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관상기도에서 현실생활로 빠져나와야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감미로운 하느님 현존 체험 상태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천상적 말씀, 영적 말씀에 거북해하고, 귀를 막았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거룩한 천상적 말씀, 영적인 말씀들은 대체로 설득력을 상실합니다.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에 속한 천상의 시민이기 때문에 꾸준히 지상생활을 넘어서고 극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상적 삶의 양식에 대한 비아냥거림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마음먹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관상기도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묵상기도를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묵상기도는 우리 인간 측의 의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묵상할 것인가? 제일 좋은 것은 그 날 그 날 복음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파고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한 관상 기도 전문가의 증언입니다.
관상기도 멀고도 먼 과제, 내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숙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복음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쓰고 또 썼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해서를 찾아보기도 하고, 말씀봉사자나 신부님들께 여쭤보기도 하면서 계속 파고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날 그 날 성경말씀과 내 삶을 연결시켜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의지적인 노력을 계속했더니, 말씀에 맛이 점점 들어갔습니다.
그런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하던 어느 순간, 이런 한 가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내 노력은 줄어들면서 주님께서 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의지, 내 노력, 내 생각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그저 주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나 감정, 생각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활동하시는 기도이기에 그 맛이 각별합니다. 황홀합니다. 신비롭습니다. 감미롭습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거기에 그렇게 머무르려고 해서는 망합니다. 관상은 반드시 일상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 현실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관상기도를 잘 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늘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성당에서만 죽치고 있다면 절대로 관상기도 잘 한 사람 아닙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었다면 그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삶을 더 열심히 살았다면 그는 분명 잘 하고 있는 관상기도자입니다.
성당에서 관상기도 확실히 제대로 한번 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는 완전히 돌변해서 며느리 쥐 잡듯이 잡는다면 그 관상기도는 헛것입니다. 관상기도는 특별히 친교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박삼일 동안 관상기도 열심히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 멱살 잡고 흔든다면 그 관상기도는 완전히 실패입니다.
"오직 하나, 부활하신 주님뿐!"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열두제자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니,
주님의 처지가 참 외롭습니다.
무정한 인간 세태를 반영합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의 믿음을, 신의를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지조(志操)니
절개(節槪)니
충성(忠誠)이니
신의(信義)니 하는 말이 사라져가는 오늘 날,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주님의 절박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바로 우리 모두의 대답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일편단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 곳은 오직 하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을 떠나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얼마 전 써놓은, '아무데도 없구나!’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 아무데도 없구나!
찾아 갈 곳, 쉴 곳, 있을 곳, 말할 곳, 만날 이라곤
오직 하나 지금 여기 계신 부활하신 주님뿐!
이 세상 아무데도 없구나!
이래서 누구나의 근원적 외로움입니다.
주님이 아니곤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
우리의 실존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 안에 뿌리를 둘 때
비로소 해결되는 외로움이요 영육(靈肉)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영(靈)과 생명(生命)으로 충만케 합니다.
이런 주님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기에
허무만 가슴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부활하신 주님만이 활력의 원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중풍에 걸려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애네아스를 한 말씀으로 치유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시오.”
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죽은 타비타를 살리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베드로입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를 영육의 질병에서 일으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김동원 신부
◆육체에 관한 일은 누구나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을 초월하는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 말하면 추상적으로 들려 그런지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도록 주겠다는 말씀에 대해서 많은 제자들은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황당무계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역시 그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내주겠다고 하신 약속은 당신이 장차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는 섬뜩한 말씀이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요한 6,63-64).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적 음식이 되셨고, 진정한 생명을 움트게 하는 영혼의 양식으로 변화되는, 부활의 신비가 우리 안에서도 실현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을 새롭게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를 새롭게 체험하고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이상일 신부-
생명체들은 어디에서 그 생명력을 얻는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어서 살아가며 어떤 생명체이든 생명력을 얻는 그 곳이 그 생명체의 존재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를 보면 떡잎이 나고,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해서 이뤄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에 있어서는 뿌리가 그 나무의 존재의 뿌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뿌리는 흙으로부터 그 힘을 얻고 흙은 하늘로부터 그 힘을 얻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존재의 뿌리는 하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의 뿌리는 무엇이며 나아가 이 뿌리는 어디로부터 힘과 생명력을 얻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사람은 다른 동식물과 달리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말씀이시겠지요? 사람의 존재의 뿌리는 영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영에 생명을 주신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는 애네아스의 중풍을 고쳐주고 죽었던 타비타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 넣어 살려냅니다. 움츠려 들었던 다른 제자들처럼 베드로가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생명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알아듣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명을 줄 수 없는 육적인 것에 존재의 뿌리를 더 이상 두지 않고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거북해 하던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그들에게 생명력이 없다고 그들은 판단했기 때문에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만 각자 스스로가 어디에 존재의 뿌리를 두고 살려고 하는지에 따라서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두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으려고 세상적인 것을 취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어떤 말이나 상황의 결과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들어 와야 하고 자신의 마음에도 들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에 존재의 뿌리를 두어서 영원한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완전하거나 영원하지 못함을 우선적으로 알기에 완전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부족한 자신의 힘이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생명이 주어지기를 청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세상의 풍요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려고 응답하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신 물음을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 한 적도 있었지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한 베드로처럼 결국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떠난 자와 머문 자 -박상대 신부-
지난 부활 제2주간 금요일부터 평일복음으로 듣기 시작한 요한복음 6장을 종결하는 부분이 오늘 복음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요한복음 3장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지어 결말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신의 살과 피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난 자들(요한 3,5)을 위한 음식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당장은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하늘로부터 내려 온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사람들 대열에 드는 것이다. 아들은 이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려 아버지께 이끌어 갈 것이다.
누누이 밝혀 두지만 복음서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러므로 복음서에 담겨있는 말씀은 그 목적상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는 복음말씀이 예수님 당대(當代)의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복음말씀이 예수님 후대(後代)의 사람들에게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상황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그분을 실제로 대면(對面)하였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는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아들이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빵의 기적'을 통하여 육신을 배불렸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심을 믿고,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가 영생을 위한 양식이요 음료임을 믿는다면, 십자가상 예수의 한쪽에 달려있던 죄수의 경우와 같이 "오늘 너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는 말씀은 바로 그들을 향한 말씀이 되는 셈이다.
복음서의 독자와 우리들을 포함한 예수님 후대의 사람들은 복음서의 기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보게 된다. 이 경우에는 복음서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는 공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음은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육적인 양식보다는 영적인 양식인 예수님의 살과 피(성체성사)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안에 사시는 예수님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키워가게 된다. 결국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비록 육신의 삶을 마친다 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아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믿고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요한 20,29)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대의 사람에게나 후대의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거나 그분의 말씀을 듣게되는 어떤 경우에든 그 자리에서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의구심을 가졌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고 12제자들도 포함된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나(66절), 12제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베드로의 단호한 신앙고백 덕분에(68절) 예수님 곁에 남게 된다. 그러나 두고 볼 일이다. 믿음이란 한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는 영적(靈的)인 삶을 추구하는 자는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있겠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육적(肉的)인 삶을 추구하는 자는 어려울 것이다.(63절)...◆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
지난 부활 제2주간 금요일부터 오늘(부활 제3주간 토요일)에 이르기까지(부활 제2주일을 제외하고) 8일째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대화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핵심내용은 다음의 말입니다.“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입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뭘 하는 사람인가? “나는 하느님의 길로 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나는 오늘도 목적하는 바와는 달리 일상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에 빠져 ‘하느님의 길’을 자주 잊곤 합니다.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기적 욕망에 눈이 먼 생활이 아니었나 반성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묵상한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 연장선에 있는 내용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肉,flesh)이다(요한 6,51)라고...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ㅇ말을 들은 군중들과 제자들은 난망한 대화로 수군거립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무 어렵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이런 투의 말이며 분위기입니다.
그러면서 제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분 곁을 떠나갔으며, 예수께서는 당신에게서 떠나가는 그들을 향하여 당신이 이미 하신 말씀에 대하여 구차(苟且)한 설명(해설)을 더 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떠나게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는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떠나는 편입니까, 아니면 베드로편입니까? 당연히 베드로편이라고 대답은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의 신앙생활도 그러한지는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떠났느냐?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설명이 어려워서 그럴까요, 아니면 듣든 자들의 영적 눈과 마음이 닫혀져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생명의 빵에 대한)의 뜻을 그저 머리로 생각하여 알아듣고 이해(攄得<터득>)하는 습관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성(지식,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주님의 삶의 길을 가능한 가깝게 체득(體得)함으로써 영적으로 받아들일 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의 교리에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히 분석해 보면, 현재의 가톨릭 교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천주교회(가톨릭)의 중심 사조는 여전히 이성(理性,ratio)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의 가르침(敎理)이 전하고 있는 까닭에, 여기에 익숙해진 교우들 역시 암암리에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적지 않은 이들에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관한 담론(談論)도 여전히 인간 이성으로 알아들으려 애쓰는 경향이 농후(濃厚)해 보입니다. 인간 이성을 통하여 인식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인간 이성으로는 불가해(不可解)한 신비의 영역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복음의 주제인 '생명의 뻥'을 우리 교우(敎友)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체성사(聖體聖事,미사)'와 관련하여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미사를 중국어로는 '감은제(感恩祭)'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 感恩祭)의 본뜻을 그대로 잘 드러낸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으로 분류되는 마태오와 마르코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에 관하여 전해주는 공통된 전승(傳承)이 있는데, 이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Missa)의 원형(原形)으로 감사제(Eucharistia)로 불리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빵'의 의미는 미사에 대한 상잉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는 것으로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둘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성찬의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오늘 복음은 말씀의 전례에 관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언론매체, 대중매체에서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 중에는 진리를 거역하고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거짓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는 드라마나 대담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육적인 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좀더 편리하게 살고, 삶을 좀더 윤택하게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살찌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은연중에 세상의 지식들은 돈이 최고라고, 건강이 최고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육적인 지식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즘 <다빈치 코드> 같은 반그리스도교 서적들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짓종교로 몰아세우는 뉴 에이지 계통의 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가 팔렸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들도 접하고 나서 반신반의한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거짓된 말씀에 속아 넘어가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적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논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복음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는 사람들입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믿음으로 듣는 말씀은 용서를 가능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며, 내적 평화와 사랑이 넘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게 이끌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실천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데 어찌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생애를 압축(壓縮)하여 전해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입니다"(요한 6,35 과 요한6,48)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요한 6,51). 요한복음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을 주는 음식이라고 하시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지내던 시절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먹었던 만나(manna)와, 그 밖에 우리가 먹는 그 흔한 빵과 다르다고 선을 분명히 그은 것입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대화 가운데 있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中略)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요한 6, 53- 56)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곧 '믿는 이(信者)'들이 성체성사(感恩祭,미사)에서 그 분의 살(몸)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 분과 일치( 一致)하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찬례(미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고 그 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은 단지 특정 사건(최후 만찬)을 기억하고 거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포함하여 예수께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보여준 그 삶, 그 사랑을 공유(共有)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미사)에 참여(參與)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믿는 이(信者)'들, 바로 우리를 하나가 되는 관계(一致)를 이루어내는 성스러운 사건(聖事)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보면, 쉽게 타성(惰性)에 젖기도 하고, 일상에 안주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 한심(寒心)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부족하고 못난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성체성사(미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그 분의 조건 없는 사랑의 삶에 조금이나마 부응(符應)하도록 마음을 다져야겠습니다.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그 분의 무한한 사랑을 거듭 상기(想起)하며, 그 사랑이 내 삶에 배어들고 스며들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아멘)....◆
-두올묵상팀 / 양재오 보나벤뚜라, 김영훈 미카엘 신부-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 † (오늘 묵상글은 지난 8일간의 복음인 요한복음 6장(생명의 빵)에 대해서 함께 묶어서 묵상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주님께서 말씀(복음)과 빵(성찬)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교훈과 비젼을 동시에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선 복음을 성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 내용대로 라면 구원을 받는 길은 간단합니다. 썩어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구하는데 힘쓰고, 주님을 믿으면 됩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는 없으니다만 연결된 요한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상을 살면서 가장 갖고 싶고 마음을 두고 싶은 것은 무었입니까? 현명한 아내와 자식, 돈, 호화아파트, 자가용, 보석, 애인....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서 초라하게 죽으셨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들으면 고개를 그떡이겠지만, 비신자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아멘한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라고 빈정대면서 세상에서 도피하려는 예수쟁이, 천주쟁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엣날 여의도광장에 가면 초라한 모습의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그 초라한 비행기의 역사가 지금부터 10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비행기에 비하면 초기의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행기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학습과 연구개발과 비전 창출을 통하여 지금의 우주선이 탄생되었고, 또 지구촌 전 영공에는 인공위성이 떠 있습니다. 학습과 연구개발 그리고 비전 설정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복음과 연결 성구에서 우리들에게 비젼을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 6,32-40)
일전에 공부방에서 나와 내려오는데 계단에 식빵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공부방에서 간식으로 준 것인데 아이들이 먹다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배고플 아이들을 위해 어려워도 매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있는데 그 간식을 귀한 줄 모르고 이렇게 버리다니.............! 마음이 멈추자 발걸음도 멈추어 버려진 빵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버려진 빵’은 쓸모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빵 주위에는 많은 개미들이 몰려 있었고, 사람에게 버려진 빵은 개미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적 같은 축복으로 귀한 양식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교육장에 버려진 빵처럼 세상에서 버려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옹기쟁이 주님 손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축복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빵을 하찮게 여겨 버렸지만, 개미들은 그 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빵을 대하는 개미들의 모습이 아주 다양하였습니다. 첫째. 그저 부산하게 움직이기만 하는 개미, 둘째. 빵 위에 올라 가만히 있는 개미, 세 번째. 전혀 다른 곳에서 빵을 찾고 있는 개미, 네 번째. 아주 조금이지만 빵 조각을 물고 집으로 열심히 가는 개미 등...그런데 네 번째에 속한 개미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곧 소나기를 퍼부을 기세인데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버리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반드시 큰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버리지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거룩한 생명의 빵인 성체로서 영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세상 구원을 위한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시어 당신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 성사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단계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기적의 빵 → 생명의 빵 → 성체 성사입니다. …
1. 기적의 빵(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가 9,10-17; 요한 6,1-14).
기적의 빵 이야기는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 다 언급되고 있고 내용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은 거의 다 일치하여 전해 줍니다. 즉 중심 내용으로는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시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르침을 전하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저녁때가 되었지만 외딴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고,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었다는 기적의 빵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네 복음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공통 요소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온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고(마르 6,34),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며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입니다. 공관 복음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기적의 빵' 이야기 다음에 '생명의 빵' 이야기가 연결되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푼 의도는 결국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 51)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으로 강조됩니다다.
2. 생명의 빵(요한 6,22-71)
1)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다시 찾아왔던 군중들에게 예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 27)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하며 자기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하셨습니다(요한 6,32). 그들이 다시 그 빵을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며 이 빵을 먹어야 영원히 산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께서 생명의 빵으로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과정에 대한 것을 성부와의 관계와 관련지어 가르쳐 주는 중요한 계시적 말씀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미 말했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시는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35-40)
2)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행한 이 가르침을 듣고 웅성거리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하하지 않았다(요한 6,41-42).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44)라고 하신 후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6,47-51).
3)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확고한 소신
예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며, 그 빵을 먹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신 가르침은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소신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기까지 예수님을 따라왔던 유다인들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으나 예수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열두 제자에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7,6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8-69)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통해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빵으로서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오시는 구체적 방식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세우신 성체 성사를 통해 제시됩니다.
3. 성체 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
1) 생명의 빵을 모시는 성체 성사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 그것을 가장 구체적인 방법과 제도로 만들어 주신 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성체 성사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법으로 주시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이며 최고의 걸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결국 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성체로서 모시는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베풀고, 빵의 기적을 행하시고 결국 사람들을 깨닫게 해주시고자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몸을 성체 성사 안에서 내어 주어 그것을 영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며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체 성사는 모든 성사들 중에 핵심이 되는 성사입니다.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여 교회 내의 다른 성사들을 수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결국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 이웃들과 일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체성사 생활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유는 성체를 영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성체를 타당하게 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고 성체를 모시는 생활이 지속된다면 그는 자신의 착한 행실과 믿음을 통해 구원에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성체 성사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적인 자신의 살과 피에 대해 완고한 유다인들에게 소신을 갖고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53-59).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힘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성체 성사를 통해 지속되며 그 가르침이 제도로 결실을 맺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을 기념하는 성체 성사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 때 성체 성사를 세우시며 이것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서 거행하고 당신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는 마태오 복음 26장 17절-30절, 마르코 복음 14장 12절-25절, 루가 복음 22장 7절-20절, 요한 복음 13장 26절-30절, 고린토 전서 11장 23절-25절에서 전해 줍니다. 이 중에서 고린토 전서에 나오는 바오로의 증언이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 23-25).
사도 바오로는 성체 성사를 통해 주님의 죽으심과 재림을 기억하고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하여 영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고린 11, 27-28).
이렇게 우리가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하면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성체 성사 안에서 영하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복음과 연결된 복음의 묵상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마무리 묵상을 하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착각 중에 하나가 『외적인 성공이 행복을 보증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착각에 의해 인간은 지금 현재 행복하지 못한 것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상상합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이 외부적인 어떤 것의 부족이기에 만약 나에게 더 좋은 집과 차, 혹은 멋진 직장이 있다면, 그리고 로또 복권에 몇 백억이 당첨된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보듯이,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성공은 행복을 보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외적인 성공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의 감정을 증폭시킨다고 말입니다.
즉, 돈이나 승진, 그리고 복권 당첨 등 겉으로 보이는 성공은 현재의 감정을 부풀립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에서의 외면적인 성공은 마음을 더욱 평온하게 하여 행복한 생활을 가져오지만, 이와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외면적인 성공은 오히려 이러한 상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즉, 행복을 이루어 놓지 않는 상태에서 많이 가지는 것은 삶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한 예가 도박이나 복권으로 일확천금을 누린 사람들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현재 행복을 누리는 사람만이 돈 등 외적 성공이 행복을 더 크게 할 수 있기에 우리가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외면적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적 정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무엇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고, 더 많은 성공을 원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인간들의 속성이 자그만 소원이라도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 행복했던 순간은 금방 사라지고 이보다 더 많은 무엇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또 다른 환상을 찾아 나서는 것도 이 같은 인간의 근본 욕구와 관련이 있고 이 같은 욕구를 가지기에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성공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은 외적인 조건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적인 조건을 개선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변화 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에 군중들은 열광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다만 예수님은 자리를 피합니다. 그러나 군중은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의 감흥이 너무 컸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선교 본부인 가파르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아마 이 당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으면서 생각했던 점은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과 같은 무엇, 영광스럽고 우리가 만질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무엇, 노력하지 않고도 주어지는 횡재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 삶에 의미를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냉담합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면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썩어 없어질 양식」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이 비교 되는데 여기서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존재 자신과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질 성체와 성혈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폭넓게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시 군중들이 가졌던 마음,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마음에 대한 비판입니다. 서두의 말씀과 비교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 삶의 의미를 주고 행복을 주고 생명을 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무엇, 29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일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과 같은 내적인 정신이 바로 하느님의 일을 위한 우리의 행위요, 썩어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기 위해 힘쓰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적 보화를 준비하는 일상의 삶이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두올- |
첫댓글 감사합니다...
촉촉한 봄비가 대지에 내립니다. 오늘도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