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 다하도록
성경본문: 시편 63: 1-8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
오늘이 벌써<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사순절이 시작되어서 부활절 아침까지 우리는 일곱 번의 주일을 맞이하게 되니까 어느덧 <사순절>사순절의 절반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순절>사순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욕구를 충족하여서 만족을 누리려하는 우리이지만, 이 기간만큼은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좀 더 단순한 삶을 추구하면서, 비움 속에 담겨 있는 충만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 참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올해의 <사순절>사순절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서며, 예배 가운데 주님이 준비하여 놓으신 신비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모두가 다른 특색과 분위기가 있습니다. 다양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오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저는 제게 다가왔던 두 가지 물음을 먼저 말씀드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두 구절이 제 마음 속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3절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소중하기에...’라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자신의 생명에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내가 살고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자신의 생명보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4절에 나오는 ‘이 생명 다하도록...’ 이라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시인이 참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다시 말하자면 나의 생명을 다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던지는 삶처럼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구절을 마음속에 두고 여러분과 이 말씀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시’라고 친절하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그가 유다 광야로 간 까닭이 무엇인가요? 도시에서의 생활이 지루하고 답답해서 좀 쉬려고 나갔다든지... 너무 피곤해서 맑은 공기라도 좀 마시고, 쉬려고 광야로 나갔다면... 그것은 참으로 낭만적이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광야로 나간 까닭을 알고 나면 우리의 마음은 안타깝고 착잡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첫 번 째 왕이었던 사울이 그를 죽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달 미갈과 결혼을 하여서 그의 사위이기도 하였는데, 사울은 골리앗을 물리친 후 백성들이 점점 더 다윗을 좋아하고 그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유다의 광야를 전전하게 된 까닭입니다.
유다 지역은 원래 물이 없는 곳인데... 게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무지를 헤매고 있으니 다윗이 겪었던 고통과 어려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의 장래는 또한 얼마나 불투명한 것인가요?
그가 이 황무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광야로 쫓겨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그것은 다윗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한 연약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하갈로서 이집트 출신의 하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들어가서 몸 붙여 살다가, 자기가 원한 일도 아닌데, 자녀가 없는 주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더니,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녀는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고 맙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의 효용가치가 없어지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아들이 안주인에게서 낳은 아들을 괴롭히거나 재산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안주인이 매정하게 그녀와 아들을 쫓아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생겨난 일입니다.
그의 집안에 두 식구가 있을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궁핍한 것도 아닌데... 좁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마음이 그들 모자를 메마른 광야로 내몰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윗이나 하갈의 이야기를 통해서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 어디인지...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곳은 단순한 황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때, 더 이상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의 성취를 위한 목적이나 수단으로 생각할 때,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곳...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이 독점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곳...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베풀어주는 호의나 사랑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미움이나 증오로 그것을 갚으려 하는 곳... 그곳이 바로 광야요 황무지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런 황무지나 황폐한 땅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한데...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빌딩이나 근사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치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다윗처럼... 목이 말라서 꺼져가고 있는 이스마엘을 지켜보는 하갈처럼...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서로 호의를 베풀어주고, 믿고 신뢰하며, 배려해 주고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단절이 생기게 될 때에 찾아오는 현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황무지에서 벗어 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물론 그런 황무지를 벗어나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일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황무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단절이나 소통의 부재... 미움과 갈등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황무지...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잘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직면하게 되는 황무지에서 빠져나온 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v.1)
시인은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황무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입니다.
비록 자기가 직면한 오늘이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그는 이런 고통스런 현실을 통해서 오히려 그의 희망을 여호와께 두고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현실에서 직면하는 고통이 너무 크고 그 상처가 심하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v.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들을 마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견디기 힘든 황무지와 같은 현실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살아 계심을 느끼는 하나님의 성소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봅니다...’(v.2)
이 대목은 우리를 좀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이 사람은 틀림없이 메마른 광야에 있었는데... 언제 성소를 찾아 왔지... 광야에도 성소가 있나? 좀 혼돈스럽습니다.
물론 성소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거룩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폭 넓게 본다면... 이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곳... 그곳을 우리는 성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달파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곳은 어쩌면 복잡한 버스 안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일수도 있고, 거리의 한 복판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하는 교실일 수도 있고, 우리의 가정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 황무지처럼 낯설고 힘든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소가 됩니다.
“여호와를 향한 나의 목마름...”
나의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곳이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여러분이 삶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여러분이 삶에 대해서 아파하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곳...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바라보는 성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성소에서 만난 주님... 그 분은 나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먹을 것이 많고 풍성해도...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설혹 빵 한조각과 물 한 잔만 놓고서 식사를 하더라도 그것처럼 풍성하고 배 부르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v.5)
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리게 된 풍성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과 갈등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는 깊은 밤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이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v.6)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에 어느덧 그를 힘들게 하던 황무지는 사라지고 자기는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그늘 아래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기에 나 이제 주님의 날게 그날 아래에서 즐거이 노래하렵니다...’(v.7) 이제는 그 마음 가운데 기쁨이 생겨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소중한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살게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자기는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아...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시는 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황무지를 헤매고 있을 텐데... 하나님의 사랑이 황무지를 생명이 충만한 곳으로 바꾸어 주시는 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내 생명보다도 소중하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참된 생명에 눈을 뜨는 순간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을 힘입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것...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보내는 <사순절>이야 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의 삶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느끼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말씀은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유행가 같은 데서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려하는 사람의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생명 다하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식의 표현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주간의 어느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통속적이고 계산적인 느낌을 넘어서서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참 멋진 말이다...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 나의 생명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 그것을 지금 알고 있고... 그것을 향하여 지금 달려가고 있는 사람... 이 생명 다하도록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향하여 온전히 자신을 던진다는 것... 그것처럼 멋지고 가치 있는 일이 있는가? 너는 언제 한 번 ‘이 생명 다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가치 있고, 소중한 일에 생명과 모든 것을 던져본 일이 있는가?
그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말 가운데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멋질 수 있는가?
얼마나 가치 있고 숭고할 수 있는가?...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 생명 다하도록’ 베풀어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우리로서는 감히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들은 전혀 기억할만한 가치도 없는 작고 덧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이 생명 다하도록’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혼신의 사랑 덕택에 우리는 비록 물이 없고 메마른 세상을 살고 있지만... 새 생명의 신비함과 기쁨을 누리며 오늘을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말은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삶의 자세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정말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 특별히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 생명 다하도록’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생명을 위하여’라고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과는 반대되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요즈음 우리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삶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쏠려 있습니다.
외모를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른바 웰빙 열풍이 불어 닥치면서 자신의 생명을 좀 더 잘 가꾸고 다듬는 일이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건강과 외모를 잘 가꾸어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관심사는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삶의 목적...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할 일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줍니다.
자신을 잘 가꾸고 관리하고... 건강과 젊음을 유지해 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그것을 고민하고... 그래서 그런 일을 찾아서 행하는 일... 그것이 그래도 우리의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드릴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너 내가 너에게 맡겨주었던 생명 가지고 무엇을 하다 왔느냐?’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관리했을 뿐입니다.
내가 정말 뜻을 두고 몸 바쳐 한 일이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전한 것일까요?
<사순절>에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의 십자가... 그 십자가가 결국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해답이고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16:24) ‘이 생명 다하도록’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심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저마다의 십자가가 주어져 있다고 하십니다.
그 십자가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다 바쳐서 ‘이 생명 다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만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잘 관리할까?
이제 우리는 이런 물음을 넘어 서야 하겠습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내가 할 소중한 일은 무엇일까?
이것을 물으며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길을 찾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성경본문 : 시편 63: 1-8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늘 예배를 함께 드리는 우리들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한 젊은이가 그 길을 나섰다가 그만 너무 일찍 돈이 바닥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급한 김에 그는 광대의 길로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흰 장갑과 분장용 크림만 있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는 낮에는 순례의 길을 걷고... 도착하는 곳에서는 자리를 펴고 광대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순례자들이나 사람들이 동전을 두고 가는데 그 수입이 괜찮아서. 여행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명한 <부르고스 성당> 앞에서 참 인상 깊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당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여관에 풀자마자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특유의 광대연기를 합니다. 마치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호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눈치를 살피다가 동전을 놓고 가면 그제서야 움직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아주 간단한 연기였습니다. 적잖은 이들이 그에게 동전을 놓고 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혹시라도 단속하는 경찰들에게 걸릴까...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돈벌이에 열중하다가 자신의 맞은편에서 열심히 연주를 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악사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며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내가 저 사람의 수입을 지금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따질만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쯤 지난 후에 그 악사가 연주를 멈추더니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돈을 전부 빼앗아 가면 어쩌지?’
그런데 악사가 자기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그날 자신이 번 모든 돈을 그에게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꼭 껴안더니 ‘뷰엔 카미노-당신의 카미노 여행에 행운이 있기를 빈다...’고 말하고는 돌아 서서 가는 것입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누군가의 행운을 빌며 소중한 것을 모두 건네 본 적이 있는가?’ 그날 그 복잡한 성당 광장에서 만났던 이름 없는 악사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물기가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 오늘 시인이 자기가 서 있다고 고백한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어떻게 하다가 그곳은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요?
이게... 단지 우리가 사진에서 접할 수 있는 곳...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선 아주 멀리 떨어진 황무지나 사막이라면... 우린 거기에 가지 않으면 구지 이런 힘든 고생을 할 까닭은 없겠지요.
그런데요. 문제는 만일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이렇게 물기가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라면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가정이 이렇다면. 내가 다니는 직장이 이렇게 황무지처럼 느껴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도저히 살만한 느낌이나 기분을 주지 못하는 황무지라면... 우린 도대체 어떻게 이런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걸까요?
오늘 말씀엔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랍니다.
다윗이 유다 광야로 나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도시 생활이 지루하고 권태로워서... 전혀 낯설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재충전을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랬다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괴롭히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가 모셨던 이스라엘의 왕이자 개인적으로는 그의 장인인 사울 임금입니다.
다윗은 아무런 욕심이나 야망도 없이 사울 왕을 정성껏 보필하였지만,사울은 다윗을 경쟁자로 생각하였고 한 번 질투심이 생기고 의심이 일어나자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은 이미 황무지를 경험하였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자기를 좋은 협조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경쟁자로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 그는 황무지를 경험하였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우리에겐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이 아닐까요?
소설가 조정래씨가 중국을 무대로 활약하는 우리의 젊은 상사 직원들의 이야기를 썼는데요.
그 제목이 ‘정글만리’였습니다. 정글이라는 말이 이젠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참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떻게 정글일까? 조금만 방심하고 마음을 놓고 있으면 언제 적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지도 모르는 곳...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항상 일어나는 곳이 바로 정글이 아닐까요?
이렇게 본다면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란 한참을 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아주 먼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황무지처럼 살기에 힘들고 정글처럼 치열한 다툼과 경쟁이 있는 곳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가정도 천국이 아니라 황무지가 될 수 있습니다.
작년이던가요? ‘사도’라는 영화가 상영될 때였는데요.
한 기자의 칼럼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도’를 많이 본 사람들 중에 자녀 교육에 극성맞은 이른바 강남 엄마들이 많았는데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사도세자>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영화의 교훈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을 해서 자녀들에게 주입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감상은 달랐습니다.
<사도세자>가 갇혀 있던 뒤주를 본받은 현대판 뒤주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걸 이른바 스터디 룸이라고 하는데요...
<사도세자>를 본 아이들이 뒤주를 보면서 그것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1.1미터에다가 0.8미터이고요... 높이가 2.1미터인 밀폐된 사각형의 공간입니다.
아이들을 그 안에 집어넣는 것이지요. 그러면 집중이 잘 된다나요? 그리고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카메라 장치를 통해서나 종소리를 통해서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러고도 가정이 화목하고 천국 같은 가정이 되길 바랄 수가 있을까요?
스터디 룸에 갇혀서 피 끓는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과연 자유와 꿈을 지닌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해서 다행히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들... 그가 과연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잘 할 수가 있을까요?
혹시라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래서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사람들이 살기 힘든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그가 직면한 메마르고 황폐한 곳이란 다름 아닌 이런 곳을 말합니다.
그곳은 인간성이 사라져 버린 곳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할 수 없고... 단지 경쟁의 상대로만 생각하는 곳을 말합니다.
더불어 살면서 누리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내가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누려야 하고... 만일 모든 것을 혼자서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커다란 행복을 누리는 곳... 안타깝게도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이렇게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진 황무지입니다.
그래서 더욱 견디기가 힘들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우린 도대체 어떻게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갈 수가 있을까요?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봅니다.’(v.2)
이게 시인에겐 삶이 달라지고 황무지를 극복하는 전환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어느 샌가 성소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다시 느끼기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도대체 성소는 어디일까요?
오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윗이라면 어떻게 그는 적들의 삼엄한 감시를 물리치고 성소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물론 아직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이니까요... 꼭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지요.
우리는 성소를 어떤 공간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만나려 하는 곳인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는 간절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요한4:21)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나 공간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4:24)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간절함으로 다가갈 때... 오늘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v.1) 이런 시인의 간절함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진지하고 간절해 질 때, 오직 주님뿐임을 고백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 놓으려 할 때,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경험하고 새롭게 되는 성소가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황무지 같은 현실이 낙원으로 바뀌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간절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그 황무지에서 성소를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가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발붙이고 서 있기가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의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나 절박함도 그만큼 더 간절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럴 때 우리는 문득 어렵고 힘든 우리의 현실이 평소와 다르게 내게 다가오고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보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v.3) 시인은 이렇게 그가 성소에서 발견한 은혜를 우리에게 고백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종하기에...’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인지요... 그의 통찰력은 경이롭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라니요...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지금 그는 사방으로 적들에게 둘러싸였고...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절박한 형편인데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게 결국 성소를 찾았을 때... 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소중한 은총인 거죠.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셔... 이제껏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그냥 내버려 두신 적이 없었어. 생각해 보면 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난 이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 발붙일 수가 없었을 거야... 지금도 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덕택에 살고 있어...’ 문득 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신영복 선생이 계십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20년을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내셨는데요... 오히려 그가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을 우리들이 어려운 현실을 이기는 데 소중한 자신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그에겐 감옥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된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이런 마음이 복 받은 마음이고 황무지를 낙원으로 바꾸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신문지 크기 밖에는 안 되는 작은 햇볕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요? 그렇지만 그는 그 작은 햇살 속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작고 여리긴 해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따스하게 감싸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그게 충분한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신문지만한 작은 햇볕 속에서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담겨 있고... 그 사랑이 오늘도 생명을 생명답게 살게 하는 힘이 된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결국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황무지에서도 감옥에서도 느낄 수 있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주변을 바라보니 세상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닙니다. 그는 물기가 없어서 메마르고 황폐한 세상에서도 삶의 찬가를 부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 내가 기쁨에 가득한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v.50)
만족하다는 말을 그는 합니다.
만족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요?
가지면 가질수록 더 허전하고 비어가는 게 우리의 마음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된 그가 느끼는 풍성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문득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v.6)
정말 그는 이제 더 이상 황무지를 전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항상 그의 곁에 계시니까요.
밤낮으로 자기를 지켜 주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지내는 일처럼 행복하고 마음 편할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기에 나 이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거이 노래하렵니다.’(v.7)
그는 이제 항상 주님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뜨거운 햇볕이나 차가운 바람을 그 날개도 막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니... 그에겐 이제 어떤 두려움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몸이 주님께 매달리니, 주님의 오른 손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십니다.’(v.8)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를 붙잡으려고 사람들이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더욱 주님을 붙잡고 매달릴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주님의 오른 손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십니다.
그냥 붙잡아 주시는 게 아니라 꼭 붙잡아 주신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고백이라기 보단 자랑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난 이렇게 주님이 꼭 붙잡아 주시는 사람입니다. 난 이렇게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날 건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보십시오. 나를 꼭 붙잡아주시는 주님이 계시니 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게 없습니다.’
황무지가 오히려 그가 가진 믿음을 더 단단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욱 깊은 친밀함을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전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낙원을 선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황무지를 전전하던 다윗이 그를 괴롭히던 사울에게 했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에겐 사울에게 복수 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 왔습니다. 한 번은 그가 동굴 속에 숨었는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서 경호원도 없이 동굴에 들어 왔습니다. 다윗에겐 그를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단지 그의 옷자락만을 베었을 뿐입니다. 한 밤중에... 사울의 일행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그 때에도 기회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사울을 죽일 테니까... 다윗은 그냥 할 테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해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 때에도 다윗은 단지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돌아섰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황무지의 한 가운데서 낙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지는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일... 너를 죽여서 내가 살고... 너를 이겨서 내가 잘 되고... 이런 식의 삶을 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절박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를 살려주고 너에게 다시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서로가 화해하고 상생할 수 있는 길을 황무지에서도 모색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사람들이 살만한 낙원으로 만들어 가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2월 17일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그는 불과 28년밖엔 세상을 살지 못했고... 그나마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태어나서 평양과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에 유학했다가 감옥에 갇혔고... 끝내는 해방도 보지 못하고 타국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마 황무지도 이런 황무지는 없었겠지요.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28년이란 짧은 생을 사는 동안에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가 남긴 시를 읽어보면... 어떤 삶에 대한 분노나 원망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주어진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을까?
항상 그런 것으로 고민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시 중에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가 서시에서 밝힌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데요...
우린 그런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을 이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은 그에겐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요 목적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내가 처한 형편이 황무지 같은 오늘이라고 하여도... 나를 꼭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희망 속에 살게 하며...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경축하며 살게 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낙원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고 나누려 하는 작은 사랑을 통해서... 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든 황무지를 낙원으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십자가라는 걸 우리는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