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5 - 공야장(公冶長) - ⑱ |
1 |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장이 묻기를, “영윤 자문이 세 번이나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이나 그만두었는데도 불만스런 기색이 없었으며, 영윤의 직무를 반드시 새로 임명된 영윤에게 알려주었으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충성스런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자장이 또 묻기를, “인자한 사람입니까?”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찌 인자한 사람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 令尹, 官名, 楚上卿執政者也. 子文, 姓鬪, 名穀於菟. 영윤은 관직명이고, 초나라 상경으로 집정자다. 자문은 성이 투요, 이름은 누오도(穀於菟)다. 穀(奴口反) 於(音烏) 菟(音徒)
左傳宣公四年初 若敖娶於鄆(音云)生鬪伯比 若敖卒 從其母畜於鄆 淫於鄆子之女(伯比私淫之) 生子文焉 鄆夫人使棄諸夢中(夢音蒙 又如字 澤名也) 虎乳之 鄆子田見之 懼而歸 夫人以告(言其女私通伯比所生) 遂使收之 楚人謂乳穀 謂虎於菟 故命之曰 鬪穀於菟 以其女妻伯比 實爲令尹子文 좌전 선공 4년 초에, 약오가 운 땅에서 처를 얻어 투백비를 낳았다고 한다. 약오가 죽자, 투백비는 그 어미를 따라 운 땅에서 길러졌는데, 운자의 딸과 음사를 벌여(백비가 그녀와 사통한 것이다) 자문을 낳았다. 운부인이 자문을 몽중(夢은 음이 蒙인데, 또한 원래대로 夢으로 하기도 하니, 연못 이름이다.)에 버리도록 하였더니,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 운자가 사냥하다가 이를 보고서, 두려워서 돌아갔다. 운부인이 사실을 말하자(그 딸이 백비와 사통하여 낳은 것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자문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穀(누)라고 말하고, 호랑이를 일컬어 於菟(오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를 이름지어 말하길, 투누오도라고 하였다. 그 딸로써 백비를 사위로 삼은 것은 사실 영윤 자문 때문이었다. |
2 | ○ 其爲人也, 喜怒不形, 物我無閒,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 其忠盛矣, 故子張疑其仁. 然其所以三仕三已而告新令尹者, 未知其皆出於天理而無人欲之私也. 是以夫子但許其忠, 而未許其仁也. 그의 사람됨은 기쁨과 성냄을 드러내지 않고, 외물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으며, 그 나라가 있음을 알 뿐 제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그 충성됨은 성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장이 그가 어진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 번 벼슬하였다가 세 번 그만두면서도 새 영윤에게 고한 것으로는 그것이 모두 天理에서 나와서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단지 그의 충성스러움만 인정하였을 뿐, 그가 어질다고는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勉齋黃氏曰 喜怒不形 釋三仕三已無喜慍 物我無間 釋舊政告新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 通釋上兩節 면재황씨가 말하길, “즐거움과 성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세 번 벼슬하고 세 번 물러나도 기뻐하거나 화냄이 없었다는 것을 풀이한 것이고, 외물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다는 것은 옛 정사를 새 영윤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 풀이한 것이며, 그 나라가 있음을 알 뿐 제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위의 두 절을 통합하여 풀이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或問令尹子文忠矣 孔子不許其仁 何也 程子曰 此只是忠 不可謂之仁 若比干之忠 見得時便是仁也 혹자가 묻기를, “영윤 자문이 충성스러웠지만, 공자께서 그에게 仁하다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정자가 말하길, “이것은 그저 충일 뿐이니,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비간의 忠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때라야, 곧바로 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令尹子文之忠 若其果無私意出於至誠惻怛 便可謂之仁否 朱子曰 固是 然不消泥他事上說 須看他三仕三已 還是當否 以舊政告新令尹 又須看他告得是否 只緣他大體旣不是了 故其小節有不足取 如管仲之三歸反坫 聖人却與其仁之功者 以其立義 正也 故管仲是天下之大義 子文是一人之私行耳 누군가 묻기를, “영윤 자문의 忠이 만약 과연 사사로운 뜻이 없고 至誠과 惻怛에서 나온 것이라면, 곧바로 이를 일컬어 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본래는 그렇다. 그러나 그가 일 위에서 말한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반드시 그가 세 번 벼슬하고 세 번 그만둔 것이 역시 합당한 것이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옛 정사를 새 영윤에게 알려준 것도 또한 반드시 그가 알려준 것이 옳았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저 그의 大體가 이미 옳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은 마디를 취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관중의 三歸와 反坫의 경우에, 성인께서 도리어 그 仁한 공효를 인정해 주셨던 것은 그가 의를 세운 것이 바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관중은 천하의 대의였지만, 자문은 한 사람의 사사로운 행실이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
3 |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을 40필이나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에 도착했는데,
곧 말하기를, “여기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고 말하고 그 곳을 떠나 또 다른 나라에 가서 말하기를, “여기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고 말하고 그 곳을 떠나갔으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자장이 묻기를, “어진 사람입니까?”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찌 어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 崔子, 齊大夫, 名杼. 齊君, 莊公, 名光. 陳文子, 亦齊大夫, 名須無. 十乘, 四十匹也. 違, 去也. 최자는 제나라 대부로서 이름은 저다. 제나라 군주는 장공이고, 이름은 광이다. 진문자는 역시 제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수무다. 10승은 40필이다. 違는 떠난다는 말이다.
文子潔身去亂, 可謂淸矣, 然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 而能脫然無所累乎? 抑不得已於利害之私, 而猶未免於怨悔也. 故夫子特許其淸, 而不許其仁. 진문자가 제 몸을 깨끗이 하고 난을 피해 떠났으니,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과연 의리를 당연함을 보고서 훌훌 털어버리고 연루되는 바가 없게 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이해의 사사로움에 부득이하여 원망과 후회를 면하지 못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단지 그 깨끗함만을 인정해주었을 뿐이고 그가 어질다고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不使弑逆之惡得汚其身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하는 죄악이 자기 몸을 더럽힐 수 있도록 만들지 않는다.
春秋襄公二十五年夏五月乙亥 齊崔杼弑其君光 左傳齊棠公(棠邑大夫)之妻 東郭偃之姊也 東郭偃臣崔武子 棠公死 偃御武子以弔焉 見棠姜而美 遂取之 莊公通焉 驟如崔氏以崔子之冠賜人 侍者曰 不可 公曰 不爲其無冠乎(言雖不爲崔子猶自應有冠) 崔子因是 又以其間伐晉也(間晉之亂而伐之) 曰晉必將報 欲弑公以說於晉而不獲間 公鞭侍人賈擧 而又近之乃爲崔子間公(使公間隙) 五月莒子朝于齊 甲戌饗諸北郭崔子稱疾不視事 欲使公來 乙亥 公問崔子遂從姜氏 姜氏入于室與崔子 自側戶出 公拊楹而歌(歌以命姜) 侍人賈擧止衆從者 而入閉門甲興 公登臺而請弗許 請盟弗許 請自刃於廟弗許 皆曰 君之臣杼疾病 不能聽命 近於公宮(謂崔子宮 近公宮 或淫者詐稱公) 陪臣干(胡旦反) 掫(將侯反)有淫者不知二命(干掫行夜行夜得淫人 受崔子命討之 不知他命) 公踰牆又射之中股反隊(與墜同) 遂弑之 춘추에 이르길, 노나라 양공 25년 여름 오월 을해일에, 제나라 최저가 자기 임금 광(齊莊公)을 시해하였다고 한다. 춘추 좌씨전에 이르길, 제나라 棠公(당읍의 대부)의 처는 동곽언의 누나였다고 한다. 동곽언이 최무자(최저)의 신하가 되었는데, 당공이 죽자 동곽언이 최무자를 수레에 태워 모시고 조문을 갔다. 최무자는 당강을 보고 예쁘다고 여겨 마침내 그녀를 취했다. 제장공이 당강과 사통하면서, 최저의 집으로 자주 달려갔다. 제장공이 최저의 관을 남에게 주니, 시종이 말하길, 안 된다고 하였다. 제장공이 말하길, 不爲其無冠乎?(비록 최자가 되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그는 마땅히 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저가 이 때문에, 또한 제장공이 진나라를 치려고 틈을 엿보았기 때문에(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정벌하고자 하였다), 진나라가 반드시 장차 보복하려 할 것이니, 장공을 시해하여 진나라에 잘 보이겠다고 말하였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다. 공은 시종 가거(賈擧)를 매질하고서 또한 그를 가까이하자, 그는 마침내 최자를 위하여 장공의 틈을 엿보았다(장공으로 하여금 틈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5월에 莒子(거나라의 임금)가 제나라에 조회하였는데, 갑술일에 북곽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최저는 병을 칭하고 일을 보지 않았으니, 장공으로 하여금 제 집에 오도록 한 것이다.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에게 병문안 왔다가, 마침내 맹강을 뒤따랐다. 맹강은 내실에 들어간 후 최저와 함께 옆문으로 나왔다. 장공은 기둥을 부여잡고 노래를 불렀다(노래로 맹강에게 명한 것이다). 시종 가거는 여러 수행원들을 제지하고서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갑병이 일어나자, 장공은 臺에 올라 살려달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맹세를 하겠다고 요청해도 불허하였으며, 종묘에서 자결하기를 청해도 불허하였다. 모두들 말하길, 임금의 신하 최저는 병이 나서 명을 들을 수 없고, 公宮(임금의 궁궐)에서 가깝기에(최자의 집이 임금의 궁궐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음탕한 자가 거짓으로 임금을 사칭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 신하들은 음탕한 자가 있는지 야간순찰를 하고 있을 뿐, 다른 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干掫는 行夜이니, 야간순찰을 하다가 음탕한 짓을 하는 자를 붙잡아서, 최자의 명을 받아 그 자를 토벌하는 것일 뿐, 다른 명령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장공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 하였지만, 활을 쏘아 허벅지에 맞추자 거꾸로 떨어졌고(隊: 墜와 같다), 마침내 그를 시해하였다. |
4 | ○ 愚聞之師曰: “當理而無私心, 則仁矣. 今以是而觀二子之事, 雖其制行之高若不可及, 然皆未有以見其必當於理, 而眞無私心也. 子張未識仁體, 而悅於苟難, 遂以小者信其大者, 夫子之不許也宜哉.” 나는 스승에게서 이렇게 들었다. “이치에 합당하고 사심이 없다면, 어진 것이다. 지금 이것으로써 두 분의 일을 살펴보건대, 비록 그 행동의 절제함이 고상하여 미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러나 모두 그것이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고 참으로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 자장은 인의 體를 미처 알지 못하고서, 구차하고 어려운 일을 대단한 것인양 기뻐하며, 마침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믿었으니, 공자께서 인정해주지 아니한 것은 마땅하였다.”
朱子曰 有人事當於理而未必無私心 有人無私心而處事又未必當於理 惟仁者內無私心而外之處事又當於理 須表裏心事一 皆純乎天理而無一毫之私乃可 주자가 말하길, “일은 이치에 합당하지만, 반드시 사심이 없는 것은 아닌 사람도 있고, 사심은 없지만, 처사가 또한 반드시 이치에 합당한 것이 아닌 사람도 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심이 없으면서도, 밖에서의 처사도 또한 이치에 합당한 법이니, 반드시 겉과 속, 마음과 일이 하나여서, 모두 天理에 순수하고 터럭 하나만큼의 사사로움이라도 없어야만 마침내 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荀子不苟篇曰 君子行不貴苟難 唯其當之爲貴 註當謂合禮義也 순자 불구편에 이르길, “군자는 행함에 있어, 구차하게 어려운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그 합당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고, 주석에서는 當이란 예의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
5 | 讀者於此, 更以上章“不知其仁”, 後篇“仁則吾不知”之語幷與三仁ㆍ夷齊之事觀之, 則彼此交盡, 而仁之爲義可識矣. 今以他書考之, 子文之相楚, 所謀者無非僭王猾夏之事. 文子之仕齊, 旣失正君討賊之義, 又不數歲而復反於齊焉, 則其不仁亦可見矣. 독자가 여기에서, 다시 윗 장의 ‘그가 어진지 알지 못한다’와 뒷편의 ‘인이라면 나는 알지 못한다’의 말과 ‘三仁, 夷齊의 일’과 나란히 더불어서 살펴본다면, 피차 서로 극진히 하여 인이 의로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다른 책으로 고찰한다면, 자문이 초나라 재상 노릇을 할 적에 도모한 것은 왕을 참칭하고 중원을 침범(僭王猾夏)하는 일이 아님이 없었다. 진문자가 제나라에서 벼슬을 할 적에, 이미 임금을 바르게 하고 도적을 토벌하는 의로움을 잃었으면서도, 또다시 해를 세지 않고서 다시 제나라로 돌아갔으니, 그가 어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不知其仁: 雍也仁而不佞 及孟武伯問子路仁乎 공야장 제4장 ‘염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좋지 않다’는 장과 공야장 제7장 ‘맹무백이 자로가 어진지 물었다’는 장이다.
仁則吾不知: 憲問克伐怨欲不行 헌문 제2장에서, 원헌이 묻기를, 이기기를 좋아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원망하고 욕심을 부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仁이라고 여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장이다.
三仁: 微子箕子比干 미자, 기자, 비간
夷齊之事: 求仁得仁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問陳文子之淸 令尹子文之忠 使聖人爲之則是仁否 程子曰 不然 聖人爲之亦只是淸忠 누군가 묻기를, “진문자의 깨끗함과 영윤자문의 충성스러움을 만약 성인께서 그것을 행하신다면 그것이 仁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자가 말하길, “그렇지 않다. 성인께서 그것을 행하신다고 해도, 역시 그저 淸과 忠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仁者心之德 聖人所以不許二子者 正以其事雖可觀而其本心或有不然也 子文三仕三已略無喜慍 盡以舊政告之新尹 文子有馬十乘棄之如敝屣然 此豈是易事 後人因孔子不許之以仁 便以二子之事爲未足道 此却不可 須當思二子所爲如此高絶 而聖人不許之以仁者 因如何 便見得二子不可易及 仁之體段 實是如何 切不可容易看 주자가 말하길, “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다. 성인께서 두 분을 인정하지 않으신 까닭은, 바로 그 일들이 비록 볼만한 것일지언정, 그 본심에 간혹 그러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윤 자문이 세 번 벼슬하다 세 번 물러나고도 조금도 기뻐하거나 성내는 바가 없었고, 옛날 정사를 모조리 새로운 영윤에게 알려준 일과 진문자가 말이 40마리가 있었지만 이를 헌신짝처럼 버린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후세사람들이 공자님께서 두 분을 仁으로 인정해주지 않으셨다는 것으로 인해, 곧바로 두 분의 일을 말할만한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도리어 안 될 일이다. 마땅히 두 분이 행하신 바가 이처럼 고상하고 대단한 것이었음에도, 성인께서 그것을 仁으로 인정해주지 아니한 것은 과연 어떤 것으로 인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곧바로 두 분에 미치기가 쉽지 않음과 仁의 體段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 결코 쉽게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二子忠淸只就事上說 若比干夷齊之忠淸 是就心上說 比干夷齊是有本底忠淸 忠淸裏有仁 二子之忠淸 只喚做忠淸 두 분의 忠淸은 그저 일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고, 비간이나 백이숙제의 忠淸 같은 경우는 바로 마음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다. 비간이나 백이숙제는 근본적인 忠淸을 갖고 있어서 忠淸 안에 仁이 들어 있었지만, 두 분의 忠淸은 그저 忠淸으로 부를 수 있을 따름이다.
問子文文子之事 程子謂聖人爲之 亦只是淸忠 夫聖人無一事之非仁 而乃云爾者 何也 南軒張氏曰 程子之意 大要以爲此事 只得謂之淸忠 然在二子爲之曰忠曰淸而止矣 仁則未知也 在聖人事或有類此者 以其事言亦只得謂之忠淸 然而所以然者 則亦不妨其爲仁也 如伯夷之事雖以淸目之 亦何害其爲仁乎 누군가 묻기를, “영윤 자문과 진문자의 일은 정자가 말하길, 성인이 그것을 한다고 해도, 역시 그저 忠과 淸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무릇 성인께서는 일 하나라도 仁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면서도, 도리어 이렇게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남헌장씨가 말하길, “정자의 뜻은 이 일을 크게 요약하자면, 그저 淸과 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두 분이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忠이라 말하고 淸이라 말함에 그치는 것이지, 仁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인에게 있어서도, 일에 간혹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역시 그저 忠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된 이유는 곧 또한 그것이 仁이 되기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백이의 일은 비록 淸으로써 지목하지만, 또한 그가 仁이 되는 것에 무슨 해가 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胡氏曰 不知其仁 謂非全體不息者 不足以當之也 仁則吾不知 謂仁則天理渾然 自無克伐怨欲之累 不行不足以言之也 殷有三仁 謂三人同出於至誠惻怛之意 故不咈乎愛之理 而有以全其心之德也 夷齊之仁 謂皆求合乎天理之正 而卽乎人心之安也 夫全體者 無虧欠也 不息者 無間斷也 至於外若無虧欠間斷 而中之私意根萌 猶在焉亦不得謂之仁 必其見於事者 皆當於理 而發於心者 皆無所私 然後可以謂之仁也 호씨가 말하길, “그가 어진지 모르겠다는 것은 (仁道의) 體를 온전히 하여 행하기를 쉬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그것(仁)에 해당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다. 어진지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다는 것은 仁이란 天理의 혼연함이니 저절로 이기기를 좋아하고 자랑하거나 원망하거나 욕심부리는 것에 얽매임이 없어서,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은나라에 세 어진 분이 계셨다는 것은 세 분이 至誠惻怛의 뜻에서 똑같이 나오셨기 때문에, 사랑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고도, 그 마음의 덕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백이숙제의 仁은 모두 天理의 올바름에 부합하기를 구하면서도, 사람 마음의 편안함에 나아간 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體를 온전히 한다는 것은 이지러짐과 부족함이 없는 것이요, 쉬지 않는다는 것은 중간에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다. 밖에 이르러서는 마치 이지러지거나 부족함이 없고, 중간에 끊어짐이 없는 것 같다가도, 마음속의 사사로운 뜻이 오히려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면, 또한 이를 가리켜 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일에 드러난 것이 이치에 합당해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서 발현된 것도 모두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게 된 연후에, 이를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論語言仁 有以德言者 有以事言者 如雍也仁而不佞 問子路仁乎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難 皆是以德言 子文文子未知 焉得仁 夷齊求仁得仁 殷有三仁 皆是以事言 以德言 非全體而不息不足以當之 以事言 則須當理而無私心 乃可以當之 顔子於仁 可言全體 仲弓便不可謂之全體 顔子三月不違庶幾久而不息 日月至焉 能至而不能久 不可謂之不息 夷齊三仁事當理而心無私心 故皆可謂之仁 子文文子之事 非特心未能無私而事亦不當理 何以得爲仁乎 쌍봉요씨가 말하길, “논어에서 仁을 말한 것에는, 덕으로써 말한 것도 있고, 일로써 말한 것도 있다. 예컨대, ‘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다’는 것이나, ‘자로가 어진지 물었다’는 것이나, ‘원헌이 이기기 좋아하거나 자랑하거나 원망하거나 욕심부리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모두 덕으로써 말한 것이다. ‘영윤자문과 진문자에 대하여 모르겠다! 어찌 仁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나, ‘백이숙제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거나, ‘은나라에는 세 어진 분이 계셨다’는 것은 모두 일로써 말한 것이다. 덕으로 말하자면, 체를 온전히 하여 쉬지 않고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 해당하기에 부족한 것이고, 일로써 말하자면,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면서 사심이 없어야만 마침내 그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안자는 인에 있어서 體를 온전히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궁은 곧 그를 일컬어 體를 온전히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안자는 3개월 동안이나 벗어남이 없었으니. 거의 오래되어도 쉬지 않는 것이고, 날이나 달에 한 번 이른다는 것은 능히 仁에 이를 수는 있지만,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쉬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이숙제와 은나라 세 어진 사람의 일은 이치에 합당하면서도 마음에는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일컬어 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윤자문과 진문자의 일은 단지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기가 미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일 또한 이치에 합당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仁이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左傳莊公三十年 楚殺令尹子元以鬪穀於菟爲令尹 僖公二十三年 楚成得臣伐陳 取焦夷 子文以爲功 使子玉爲令尹 子文爲令尹凡二十八年 註杜氏曰 按莊公三十年 楚成王立九年矣 僖公二十三年卽成王之三十六年也 楚自武王三十七年 僭稱王 魯桓公之八年也 武王五十一年卒 子文王立文王十三年卒 子堵敖立 堵敖五年卒 弟成王立 僖公元年 楚成王之十四年也 楚伐鄭 鄭卽齊 故也 五年楚鬪穀於菟滅弦 六年楚子圍許 許男面縛銜璧 乃釋之 十二年 楚人滅黃 十五年楚人伐隨 二十年 隨以漢東諸後叛楚 楚鬪穀於菟帥師伐隨取成而還 二十一年宋人以爲鹿上之盟 以求諸侯於楚 楚人許之 諸侯會 宋公于盟 楚執宋公以伐宋 已而釋之 二十二年 楚人伐宋 宋公及 楚人戰于泓 宋師敗績 公傷股 明年宋襄公死 二十三年 楚師伐陳 討其貳於宋也 此僭王猾夏之事也 춘추좌전 장공 30년에, 초나라는 영윤 자원을 죽이고 투누오도를 영윤으로 삼았다고 한다. 노희공 23년에, 초나라 성득신이 陳나라를 쳐서 焦와 夷 땅을 취하였는데, 자문이 공으로 삼아 자옥(성득신)으로 하여금 영윤이 되도록 하였다. 자문은 영윤 벼슬을 28년 동안 하였다. 주석에서 두씨가 말하길, 살피건대, 노장공 30년은 초성왕 즉위 9년이었다. 노희공 23년은 곧 성왕 36년이다. 초나라는 무왕 37년부터 왕을 참칭하였으니, 노환공 8년이다. 초나라 무왕이 즉위 51년만에 죽고, 아들 문왕이 즉위하였으며, 문왕은 즉위 13년에 죽었다. 아들 도오가 즉위하였는데, 도오도 5년만에 죽었고, 동생 초성왕이 즉위하였다. 희공 원년은 초성왕 14년이다. 초나라는 정나라를 쳤는데, 정나라가 제나라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희공 5년에 초나라 투누오도가 현나라를 쳐서 멸했고, 희공 6년에는 楚子(초나라 임금, 즉 초성왕)가 허나라를 포위하였는데, 허나라 남작(임금)은 面縛銜璧(앞으로 손을 묶고 입에 구슬을 물다, 죽은 사람 염하는 것을 흉내내어 항복하는 일)을 하니, 마침내 풀어주었다. 노희공 12년에 초나라 사람들은 황나라를 멸했고, 15년에 초나라 사람들이 수나라를 쳤으며, 20년에 수나라가 한수 동쪽의 제후들과 연합하여 초나라를 배반하였지만, 초나라 투누오도가 군사를 인솔하고 수나라를 쳐서 成 땅을 취하고 돌아왔다. 21년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녹상의 맹약을 한다는 이유로 제후들을 초나라 땅에 모이기를 구하자, 초나라 사람들이 이를 허락하였다. 제후들이 모이자, 송나라 임금(송양공)도 회맹에 참석하였다. 초나라는 송양공을 붙잡아 이로써 송나라를 쳤으나, 이윽고 풀어주었다. 22년에 초나라 사람들이 송나라를 치자, 송양공이 나와서 대적하였고, 초나라 사람들은 泓 땅에서 싸워서, 송나라 군대는 대패(敗績)하였다. 송양공도 허벅지에 부상을 당하였고, 다음 해 송양공이 죽었다. 23년에 초나라 군대가 陳나라를 쳤으니, 그들이 배신하고 송나라와 내통하는 것(貳於宋)을 성토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왕을 참칭하고 중원을 어지럽힌 일들이다.
上不能規正莊公次不能討杼弑逆 위로 장공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다음으로 최저의 시해와 반역을 성토하지 못하였다.
左傳襄公二十七年 宋向戌欲弭諸侯之兵以爲名(欲獲息民之名)如晉告趙孟 晉人許之 如楚楚亦許之 如齊齊人難之 陳文子曰 晉楚許之 我焉已 且人曰 弭兵而我不許 則固携吾民矣 將焉用之 齊人許之 註杜氏曰 按襄公二十五年 崔杼弑齊君 是時 陳文子出齊 二十六年 不經見 二十七年 文子存弭兵之說 則文子自出齊復反於齊凡二年 좌전 양공 27년에, 송나라 향술이 제후들의 병란을 그치게 하고자 함을 명분으로 삼아(백성을 쉬게 했다는 명성을 얻고자 함이다), 진나라에 가서 조맹에게 고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였다. 초나라에 가니 초나라 역시 허락하였다. 제나라에 갔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진문자가 말하길, “진나라와 초나라가 허락하였는데, 우리만 어찌 그만두겠는가? 또한 남들이 병란을 그치게 하자고 말하는데, 우리만 허락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우리 백성들만 끌어들이는 것이다. 장차 어찌 그들을 부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도 허락하였다고 한다. 주석에서 두씨가 말하길, “살펴보건대, 노양공 25년에 최저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였고, 이때 진문자가 제나라를 떠났다. 노양공 26년에는 경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노양공 27년에 진문자가 병란을 그치게 하자는 말을 두었다면, 문자는 제나라를 출국한 때로부터 제나라로 다시 돌아온 때까지는 모두 2년이었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仁者心之德而天之理也 自非至誠盡性通貫全體 如天地一元之氣化育流行 無少間息 不足以名之 今子文仕於蠻荊執其政柄至於再三 旣不能革其僭王之號 又不能止其猾夏之心 至於滅弦伐隨之事至 乃以身爲之 而不知其爲罪 文子立於淫亂之朝 旣不能正君禦亂 又不能先事而潔身 至於簒弑之禍已作 又不能上告天子下請方伯以討其賊 去國三年又無故而自還 復與亂臣共事 此二者 平日之所爲 止於如此 其不得爲仁也 明矣 然聖人之言辭 不迫切而意已獨至 雖不輕許而亦不輕絶也 學者因其言而反以求之 則於仁之理與人之所以得是名者 庶幾其可黙識乎 주자가 말하길, “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자 하늘의 이치다. 저절로 천지의 一元之氣가 化育하고 流行함이 조금이라도 중간에 쉼이 없는 것처럼, 지극히 정성스럽고 본성을 다하여 온전한 體를 두루 관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仁이라고 이름지어 부르기에 부족한 것이다. 지금 영윤 자문은 蠻荊(남쪽 오랑캐)의 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그 정권의 실제를 잡기를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으면서도, 왕(천자)을 참월하는 호칭을 없애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원을 어지럽히려는 마음을 그치게 하지도 못하였고, 현나라를 멸하고 수나라를 정벌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그것을 하고서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진문자는 음란한 조정에 서서, 이미 임금을 바르게 하거나 난리를 제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을 우선시하거나 제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고, 찬탈과 시해의 재앙이 이미 벌어진 지경에 이르러서는, 또한 위로 천자에 고하고 아래로 방백(제후)들에게 청하여 그 도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고, 나라를 떠난 지 3년 만에 다시 연유도 없이 스스로 돌아와서, 다시 난신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하였다. 이 두 사람은 평소에 행하는 바가 이와 같음에 그쳤으니, 그들이 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박절하지 않지만, 뜻은 이미 유독 지극하니, 비록 가볍게 인정해주지도 않지만, 또한 가볍게 끊어버리지도 않는다. 배우는 자들이 성인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돌이켜서 구해본다면, 仁의 이치와 사람들이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을 아마도 묵묵히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子文知有楚而不知有周 以春秋尊王之義責之不仁矣 文子知有己而不知有齊 以春秋討賊之義責之不仁矣 운봉호씨가 말하길, “영윤 자문은 초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주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기에, 춘추의 존왕의 의로움으로써 그를 어질지 못하다고 나무란 것이다. 진문자는 자신이 있음을 알 뿐, 제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춘추의 ‘도적을 토멸하는’ 의로움으로써 그를 어질지 못하다고 나무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論至此 則其事不當理而心之私 可見矣 夫子之言未知焉得仁 而朱子直斷其爲不仁 蓋本章外究竟到底之斷案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논의가 여기에 이른다면, 그 일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사사로움마저 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은 ‘알지 못하지만, 어찌 仁할 수 있겠는가?’인 반면에, 주자는 곧장 그것이 어질지 않다고 단정하였으니, 아마도 본장 밖에서 끝까지 궁구한 단안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