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하여 전국의 무수한 산들에서도 그랬거니와 10대로를 걷는 동안
벌렁 누워 잠시나마 마음껏 휴식을 취한 곳이 대(臺), 각(閣), 정(亭), 루(樓) 등이다.
얼핏 보아도 풍류객들이 즐겨 찾을 듯한 분위기인데다 이름에도 제각기 그럴싸한 내력이
담겨 있는데 풍류도 모르는 늙은 나그네에게는 오아시스에 다름 아니었다.
피로를 풀고 따가운 볕과 비를 피했음은 물론 때로는 편안한 야영장이 되기도 했으니까.
8각이건 6각이건 모두 지붕이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이같은 고정관념이 깨졌다.
명월대가 그러한 것 처럼 여기 월대(月臺:아래 그림1)도 지붕이 없다.
제주의 옛 시인 묵객들의 취향은 특이했던가.
비가 많기로 이름난 지방인데 비를 맞는 것도 풍류의 하나였던가.
비석 '月臺'(월대) 천변에는 수백 살의 소나무와 팽나무들이 수면 위로 휘늘어져 뛰어난
경치를 연출한다.(아래 그림3)
명월대와 사뭇 대조된다.
재래시장들의 시설, 환경, 상품 등이 전국적으로 하나같이 크게 업그레이드 되어 예전과
달리 드나들만 한데도 소위 젊은 하이칼라들의 취향은 백화점과 대형 마켓이다.
따라서, 5일장마당은 그 지역 현실의 축소판이고 민심을 가늠하는데 최고의 장(場)이며
전통세대의 토속적 정취를 느끼려면 바글거리는 5일장이라야 한다.
장마당이야 말로 경조사를 비롯하여 강아지 해산에 이르기까지 온갖 애환을 나누고 어루
만지며 주름살을 헤아리는 농어산촌 민초들에게 최고로 절실한 공간이다.
개장때부터 파장때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상심(商心)은 시간만 허용된다면 짚어볼
만한 내용 중 하나다.
한데, 구좌읍 세화민속5일장에서 이틀이 어긋나더니(5,10일이 장날인데 8일 통과했으니)
계속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제주도의 북적대는 5일장마당을 구경하지 못했다.
뭍의 대로들에서는 가는 족족 장날로 이어져 행운이라 여겼는데.
마지막날 제주민속5일장(아래 그림1~3)을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비록 외곽이긴 해도 제주특별자치도의 메인(main) 도시인데 아직도 5일장이 선다는 것이
신기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팔려가기를 고대하는 상품의 특징은 역시 섬 시장답게 각종 해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긴, 겨우 호떡 2개 사들고 나온 내게는 모두가 그림의 떡이지만.
제주향교는 정의, 대정과 함께 제주의 세 향교중 하나로 제주도유형문화재제2호다.
공자를 비롯해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강학하는 명륜당 등은 전국 모든 향교가 하나같다.
한데, 이태조 원년(1392년)에 교동(校洞)에 창건하였으나 대정향교처럼 이사수가 많았던가.
4번이나 이전 끝에 순조때(1827년) 현 위치(용담1동)에 뿌리를 내렸다니까.(아래 그림1.2)
제주향교측은 다른 향교와 다른 점을 강조한다.
계성사(啓聖祠)가 있다는 것.
그런데,오성(五聖: 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 등)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는 계성사는
특별한 곳인가.
출입을 막고 있으니.(특별하다 해서 사진 한 장 찍으려 했건만)
관덕정(觀德亭)은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尙武道場)으로 세종(4대) 30년(1448년)에 창건되어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 하나란다.
'관덕정' 이름은 射者所以觀盛德也(禮記 射義第四十六)에서 '射以觀德'의 뜻으로 따왔단다.
'1번지'는 중심지, 번화가를 뜻하는데 관덕정을 탐라1번지라 하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의 중심지인
것이 분명한 듯.
보물제322호로 지정된 관덕정은 창건 후 여러 번 중수했다는데 또 무슨 공사가 진행중인가.
유감스럽게도 온 몸이 가려지고 접근 금지(2009년 3월 12일 현재)중이다.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는 이조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탐라국(耽羅國) 때부터 주요 관아시설(星主廳 등)이 있었다고 추정된단다.
그런데, 일제는 왜 관아의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훼철(毁撤)했을까.
그런 중에도 관덕정만은 왜 남겨두었을까.
"제주백성들은 서울의 관리보다 바다에서 자주 만나는 일본사람과 친했을 수도 있으며 늘
북쪽만 바라보고 왕이 다시 불러주기만 바라며 수탈만 일삼는 관리보다 바다에서 만나는
일본 어민들(그들이 왜구라도)과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일본인데.
"민족과 국가는 근대 역사가 만들어낸 굴레일 뿐이며 제주인들에게 민족은 없다" 는데도
관아의 복원에 소요되는 기와(5만장) 전량을 헌와(獻瓦)한 제주시민은 또 누구인가.
"삼별초의 영웅적 항쟁이 제주인에게는 재앙"이라는 시각에서 보는 제주역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무튼 제주목관아지 일대가 대한민국 국가사적(제380호)이 되었고 복원도 이루어졌다.
관아의 관문이던 외대문(外大門: 아래 그림1鎭海樓, 2진해루 우측은 回廊, 뒤는 觀德亭),
연회장소였던 우련당(友蓮堂:아래 그림4), 절제사가 사무보던 홍화각(弘化閣), 군관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瀛州協堂), 목사가 집무하던 연희각(延曦閣:아래 그림3), 목사의 휴게
공간 귤림당(橘林堂), 임금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예를 올리던 망경루(望京樓:아래 그림5),
연못, 중대문 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