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의 바깥은 현실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 (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보드리야르의 주저 중 하나인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1981)은 디즈니랜드에 관한 언급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디즈니랜드란 온갖 시뮬라크르들로 뒤덮인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원래 이러한 시뮬라크르란 ‘모사물’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말하는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모사물이 아닌 하이퍼리얼리즘의 이미지처럼 현실세계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를 뜻한다.
그리고 시뮬라시옹이란 이렇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 이미지들로 현실세계가 채워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디즈니랜드는 한눈에 보더라도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가상적 이미지의 세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영화 혹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항상 접해오던 많은 캐릭터들뿐만 아니라 이들이 등장하였던 배경도 디즈니랜드에서는 실제로 존재한다.
백설공주나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뿐만 아니라 〈백설공주〉에 등장하였던 성이나 신데렐라가 타던 마차도 그대로 존재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시뮬라크르들이며, 디즈니랜드의 세계는 바로 이런 시뮬라크르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이다.
물론 디즈니랜드는 어린이에게만 진정성 있는 현실의 세계로 보일 뿐, 어른들까지 그곳을 현실세계로 여기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던 캐릭터나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어린이들은 흥분하겠지만 어른들에게 디즈니랜드란 그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말하자면 어른들에게 디즈니랜드라는 공간은 그럴듯한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한갓 가상공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논의는 디즈니랜드가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가상공간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즈니랜드란 시뮬라크르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이다.’라는 결론처럼 보이는 이 주장이 그의 논의가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결론이야말로 디즈니랜드가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를 방문한 사람들은 디즈니랜드라는 가상적 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 디즈니랜드의 문을 나서면서 이제 가상의 공간에서 나와 다시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
디즈니랜드의 진정한 효과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의 문을 나서는 순간 이제 가상의 세계, 즉 시뮬라크르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디즈니랜드의 바깥에 있는 세상, 즉 로스앤젤레스 시나 주택가 혹은 거리는 디즈니랜드가 아닌 현실의 세계라고 믿게 된다는 뜻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의 바깥 세계 또한 온갖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하이퍼리얼한 세계라고 본다.
디즈니랜드의 세계는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는 그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즈니랜드라는 눈에 보이는 가상의 세계는 디즈니랜드 바깥의 세계가 현실세계라고 믿게 만드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디즈니랜드라는 가상의 공간이나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믿는 디즈니랜드 바깥의 공간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미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믿는 모든 세계가 가상적인 시뮬라크르의 세계, 즉 하이퍼리얼한 세계일 따름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피부로 절감할 수 있다.
가령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거스키(Andreas Gursky, 1955~)의 작품 〈99센트〉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할인마트의 실내를 촬영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마트를 어렵지 않게 접해보았을 터이므로 이 이미지가 비현실적이거나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전품목 99센트’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할인마트의 광경을 직접 사진에 담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수개월 동안이나 수정 작업을 하였다.
말하자면 이 이미지는 변형된 것, 흔히 말하는 합성 이미지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이미지를 보고 어떠한 부분이 변형되었는지 결코 식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이미지 속에서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부분도 우리는 골라낼 수가 없다.
수정 작업을 통해서 매우 정교하게 합성되었기 때문에 상품의 정렬이나 색상의 배열이 매우 조화롭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미지에 우리가 익숙해질 경우 오히려 동네 마트에 가서 흐트러진 상품의 배열을 보면서 무엇인가 어색하고도 낯선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이퍼리얼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게 된다는 주장이 결코 과한 것만은 아니다.
거스키, 〈99센트〉 99cent, 1999
이 작품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할인마트의 실내를 촬영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수 개월 동안이나 수정 작업을 하였다. 말하자면 이 이미지는 변형된 것, 흔히 말하는 합성 이미지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이미지를 보고 어떠한 부분이 변형되었는지 결코 식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믿는 모든 세계가 가상적인 시뮬라크르의 세계, 즉 하이퍼리얼한 세계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가상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따라 그와 대칭의 쌍을 이루는 현실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매체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1953~)는 《가상의 역사》(Eine kurzze Geschichte des Scehins, 1991)라는 저서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가령 서양 사회에서 고대에는 ‘가상’을 말 그대로 거짓된 상, 즉 가짜로 인식하였다.
가상이란 거짓으로서 참인 것과 대립을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가장 참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였다.
이에 반해서 디지털 기술의 시대에 이르러서 가상은 참된 것과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은 단순히 현실을 은폐하거나 조작하는 거짓이 아닌 우리의 현실세계를 이루고 있는 불가피한 요소로 간주된다.
가령 한 연예인의 이미지가 매체에 의해서 조작된 거짓 이미지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이미지에 열광하고 그 이미지를 소비한다면 이는 거짓이 아닌 현실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가상이란 현실성을 획득한 범주가 된다.
이렇게 볼 때 현실은 더 이상 가상과 절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디즈니랜드 바깥에 진정한 현실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에 대한 과거의 통념에 불과한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