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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젠가 올렸던 글을 몇 군데 보강해서 올립니다.
실토하자면 제가 당시에 고고학 논문집을 오독한 탓에, 사로국이 고고학적으로 유의미하게 결집되는
시기를 2세기 후반이 아닌 2세기 중반으로 잘못 기재했었습니다.
저 또한 내심 삼국사기 초기 기년이 조금이라도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그 외 몇 가지 부분도-삼국사기 초기 기년 오류 부분 근거-을 추가하여 재업합니다.
이전 글은 제가 나아가는자 님께 답변 드린 몇몇 중요한 댓글이 있어 삭제하진 못하고, 해당 댓글만
제가 추려서 별도의 글을 만들게 되면 그때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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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명심해야 할 기본 사항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문서 DB같은 공문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삼국사기 기년은 곧이곧대로 옳다는 꽤 강박증적
증세로 집착하는, 문해력 부족한 역덕들이 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이들의 생각이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https://blog.naver.com/hopeater/222859913150
물론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은 왜곡 없이 최대한 곡필 없게 객관적 서술로 일관하였으나,
그가 수집한 자료 자체에 삼국인들 자신의 왜곡이 있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1. 신라: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중반에 서라벌에 낙랑인 집단이 처음 등장하고, 이들이 2세기 후반에 그때까지 서라벌 내에서 서로 팽팽하게 견제 중이던 고조선인 집단 세 부류(=1. 진개의 정벌 당시 남하한 고조선인들, 2. 위만조선 성립 시기에 내려온 부류[[역계경 집단이 유력함]], 3. 위만조선 멸망 후 내려온 유민들)등에 강력한 위계 체제를 관철하여 한 집단으로 규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있습니다.
네......바로 낙랑인 집단은 누가 봐도 박혁거세 집단이며, 고조선인 집단 세 부류는 사로 6부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고구려보다 건국 기년이 늦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신라측이 고구려 건국년도보다 건국 기년을 인위적으로 앞당긴 걸로 보입니다.
1-1. 단, 그럼에도 준왕의 기원전 194년 마한 건마국 건국보다는 연도가 늦습니다. 이는 사로국 진한왕이 적어도 의전적 서열은 보다 높은 마한왕과 교류한 내부 전승이 너무나도 확고했기에,
아무리 올려잡았어도 준왕 마한 건국보다 올려잡을 수는 없었을 개연성이 강합니다.
즉 신라가 인위적으로 기년을 조정했어도 나름대로 내부 기준에 따라 했다는 것으로 이는 오히려 신라본기가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신라본기도 일본서기마냥 철두철미하게 왜곡질 했다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그냥 헛소리임을 명심해야 하겠으나, 여하튼 왜곡이 있었다는 그들의 지적이 옳음은 이 대목에서 다시 경청해야 할 사항입니다.
모 아니면 도니까 식민사학자들이 하는 얘긴 다 무시해야 한다고 악 쓰는 바보들 계시는데.....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이런 인간들이 있으면 한국인들 전반의 지적 수준이 일본 사학계에게 저평가될 수 있기에 어쩌는 수가 없네요. 때문에 구태여 다시 짚고 넘어갑니다.
1-2. 여전히 삼국사기 초기 연대에 대한 맹신이 가득한 이상, 여기서 다시 한 번 금관가야를 비롯한 진변한 일대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를 가져와야 겠습니다. 한국 군사사 제1권 송호정 교수님 기고분 121쪽 사항입니다.
김해 양동리, 창원 도계동, 부산 노포동, 울산 하대, 대구 팔달동 등에서는
2세기 후엽에 장검과 대도가 출현하여 3세기 대에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3세기 경 살상력이 보다 높은 유경식 철촉이 등장하여 부장이 급증하며 철모의 부장량은 낙랑보다도 많았던 걸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무기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군사조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장검, 대도, 화살촉, 철모 등은 2세기 후반~3세기 초에 진변한 일대에서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며, 물론 이는 사로국 건국과 금관가야 건국 등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사항입니다.이는 사로국 일대에 2세기 후반부터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발굴 결과와 또 다시 일치하는 사항이기도 하고요.
이는 김태식 교수님 저서인 4국 시대의 가야사 연구에서도 재확인됩니다.
2세기 중후반에 김해 양동리 일대에 낙랑인들이 나타나며, 3세기 후반에 김해 중심 세력이 양동리로부터 대성동 고분군으로 넘어가는데, 김해 대성동이 변한-가야 일대에서 가장 막강했고 실력차도 분명한 걸로 봐서 이는 다름아닌 금관가야 김수로왕 세력인 걸로 해석이 유력합니다. 김태식 교수는 이 시점에서 가야 일대가 보다 독점적으로 영도되기 시작한다고 지적합니다. 한편 양동리는 금관가야 건국 이전 변한 일대 세력 중 하나로 유력합니다.
해서 탈해~지마 이사금 삼국사기 기년 77~116년조 기사들은 가야와 신라가 서로의 영역 근처에서 독점적 리더가 되어 다투던 3세기 후반부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탈해-지마 당시 백제와의 충돌 기사들 또한 충청도 일대 백제 고고학적 증거로 봐선 절대로 3세기 중반 이전이 될 수 없는 사항과 또 다시 일맥상통하는 현상입니다.
2. 백제: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중후반에야 연천 일대에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서울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계 고분들의 최상한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3세기 중반이고요. 그 이전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은 낙랑, 동북한계(옥저) 주민과 토돈분구묘인들으로서 고구려, 부여와 아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고로 고대국가 백제의 건국은 3세기 중반이며, 온조-비류 집단의 남하로 국가의 시기를 올려잡아도 2세기 중반이 한계가 되겠습니다.
사실 연천 일대 고구려 유민 군집 유적도 이견의 여지가 그나마 없는 건 2세기 후반이며 2세기 중반은 상당한 논란이 있음을 여기서 명심해야 겠습니다.
풍납토성 축조 고고학적 최대 상한은 3세기 4/4분기며, 시료 분석 결과는 294년 중간값으로 +-52년으로서 고고학적 유물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몽촌토성 축조 고고학적 최대 하한은 그나마 3세기 중반이지만 몽촌토성 안 그전 고분군은 토돈분구묘계 세력으로서 백제 건국 사화(비류니 온조니)와 아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전 기원전 1세기 무렵 축조된 3중 환호 목책 구조가 있으나 이는 백제 지배층과 전혀 무관한 중도유형문화계 동북한 옥저계 주민들이 건설한 것으로서 역시 우리가 아는 백제 지배층과 무관함은 물론 고구려, 부여 등과 직접적 관련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또 아직 무덤이 발굴안되었단 말이에욥! 이라고 주장하는
말 안통하는 양반들 계시는데. (하아.....)
https://blog.naver.com/hopeater/222657901011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출신인 자기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본인들은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의 일파라고 억지 주장하였음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몽 집단 직후에 갈라져 나온 걸로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마저 어쨌든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의 선조 온조가 주몽 아들이라는 사실만은 결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다. 정말로 올려잡고 싶었으면 주몽의 선대로 올려잡는 게 더 유리했을텐데도 끝내 이 전승만은 부정하지 못했다는 건데요.
초고-근초고왕 계열 왕가가 정말로 주몽 후손들임은 따라서 부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고고학만 갖고는 역사 해석이 어렵다는 걸 우리는 다시 명심해야 겠고 저도 명심해야겠습니다.
3. 고구려: 신라가 고구려측 기록을 보고 기년을 올려잡았을 정도로 원래는 고구려측 전승이 원조로 보입니다. 그나마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거의 딱딱 잘 들어맞고 있습니다. 한국고대사에서 이렇게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연도 불일치 없이 들어맞는 사례는 적어도 익산 마한 건마국 외엔 거의 없지요.
그러나 고구려본기라고 왜곡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고구려측은 흡사 백제가 고구려에게 그러했듯, 본인들이 부여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본인들은 부여에서 나오지 않았고, 부여의 뿌리인 북부여(=탁리국)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고구려는 북부여(백금보-망해둔 문명권)과 1도 관계 없는 게 드러납니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부여와 관계가 1도 없음과 일맥상통합니다.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는 그냥 대소와 금와의 그 부여하고만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백제 또한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하고만 관계가 있음과 또 다시 일맥상통합니다.
고로 이는 고구려인들 자신의 왜곡입니다.
이러다보니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A.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계보가 정확하지만 5세기 중반 눌지 마립간 전 기사들은 기년(=연도)을 믿을 수 없다.
B.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오히려 3세기 후반 책계왕 이전 기사들까지만 기년이 틀려 있다. 책계왕 이후 기사는 기년을 신뢰할 수 있다. 적어도 기년 자체는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다. 단, 계보 자체는 그야말로 기본적 사항들 외엔 엉망이다. https://blog.naver.com/hopeater/222872706331
C.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적어도 모본왕 사후 ~ 태조왕 즉위 때 외엔 기년 오류는 없다. 그러나 계보 자체는 백제 본기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양호하지만 최소한 주몽 ~ 신대왕 이전까진 상당히 뒤죽박죽 엉터리다. 이는 적어도 계보 자체는 모두 사실임이 높음이 논증되고 있는 신라본기만 못한 부분이다.
AB. 고로 백제-신라 관계 기사는 신라측 국왕 기록에 맞춰 신라쪽 수정기년으로 끌어내려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백제신라 갈등 기사에서 근초고왕-나물 이사금 기사는 실제로는
침류 혹은 진사왕 - 나물 이사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백제와 신라의 제대로 된 외교적 첫 접촉은 비류왕-흘해로 나와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근초고왕-흘해가 더 자연스럽다고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사 시리즈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와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고로 삼국사기 초기 백제-신라 교전 사항은 일부는 기사를 후대로 끌어내려서 봐야 하겠습니다.
AC. 고구려-신라 관계 기사도 석우로가 맞서 싸운 고구려측 임금은
엉터리인 삼국사기 신라 초기 기년상 해당 임금 동천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대 임금이 되겠습니다.
요약: 계보신뢰도 신라 > 고구려 > 백제
기년신뢰도 고구려 > 백제 > 신라
건국 순서 고구려 > 신라 ≥ 백제
[건국 순서 보충: 상술했듯 백제 건국 집단이 임진강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연대 중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2세기 후반입니다. 2세기 중반은 고고학계 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습니다.
반면 신라는 여하튼 2세기 중반에 사로국을 건국하게 되는 집단 전체가 상하층 모두 빠짐 없이 있었음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일원적 집단으로 규합된 게 2세기 후반이었을 뿐이지요. 고로 사로국의 건국은 백제국의 건국보다 무조건 같거나 빠르게 됩니다.
만약 백제국 건국을 일명 미추홀 비류 세력으로 상정되는 해양 세력(=토돈분구묘)과의 연합으로 강제해야 한다면 건국 연대는 무려 3세기 중반으로까지 내려오게 되는데 솔직히 제가 삼국사기 초기 기사 기년 맹신론에 학을
떼긴 합니다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첫댓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논의는 단정적으로 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관련 연구를 올려보겠습니다. 다만 제의견이 아니라 공감이 가는 연구입니다. 전 역사연구자가 아니라 관심있는 사람 정도라 그저 공감이 가는 연구를 소개할 뿐입니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그저 새로운 시각을 전달할 뿐입니다
죄송한데 저는 '단정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야말로 본인들 견해에서 상당히 '단정적'인 것을 수십 년 동안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연구에 대해서는 '공감'이 아니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같이 실수를 하게 되고 말죠.
어떤 근거나 견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함부로 남에게 '단정적'으로 '단정적' 운운하시면 안 됩니다.
@마법의활 아! 제가 말하는 단정적이라함은 이기록은 틀렸다 옳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맞을수 있겠지만 하도 오래전이라 새로 해석할 여지가 있을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제 보니 님께서는 유사역사학자 우실하 선생의 견해에 대해 상당히 동조적이셨고, 아하스페르쯔님이 SDHZ에게 꽤 억울한 모함을 당하고 있을 때도 새로운 시각 운운 하셨지요.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님의 정치적 견해에 제가 평소 탄복하고 동의했던 것과 별개로 이 부분은 대단히 실망스럽습니다. 그런건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유사역사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고고학적 논의로 다 규명되는 건 아닙니다만 역사적 주장을 할 때 고고학적 근거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료만 끄집어내서 전문적이지 못한 독해와 꿰어맞추기로 고고학적 근거 및 전문 사학자의 해석을 무시하는 그런 견해에 대해서는 제가 본문에 링크를 남겨놓았으니 그걸로 갈음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의활 하도 고대사에 소위 말하는 환뽕들이 많아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다른 곳에서 하도 공격을 받아서 아예 언급을 안하다가) 이해부탁드립니다.
@울티마 '이 기록은 틀렸다 옳다'는 역사학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서 사적 관계에서는 단정적 어투를 피할 수 있습니다만 그건 처세술이지 학문에까지 적용될 사항이 아닙니다.
죄송한데 만약 우실하 류라면 저는 해당 연구에 대해선 거의 준환빠로 보고 대응할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법의활 유사역사학에 관심없습니다. 전 학계의 비주류의견에 관심있습니다. 정통적인 논문이 아니라면 관심없습니다.
@마법의활 님관점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그저 다른 시각으로 볼수도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려했을뿐입니다. 그만할게요.
@마법의활 우실하류가 뭔지는 모릅니다. 전 삼국사기초기기록의 해석과 진위판단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도 오래전이니까요.
@울티마 "학계의 비주류 의견"이라 함은 대부분은 유사역사학의 영역에 있고 이덕일류, 우실하류, 윤내현류 등등도 거기 들어갑니다. '정통적 논문'이라고 예외가 되는 건 아닙니다.
관점차 자체가 주장의 시시비비를 가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님께서는 남에게 '단정적'으로 '단정적'운운했고 해당 표현을 철회한 바도 없기에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제 관점에 대해선 전혀 존중이 없으신 겁니다.
고로 님은 지금 상황에서는 남의 주장에 대한 실질적 존중이 대단히 부족한 사람이라는 제 평가를 수용하셔야 하고, 님께서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에 대해 저 또한 상응하는 태도로 일관할 것 또한 감수해야 합니다.
님은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된다는 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울티마 삼국사기 시대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닙니다. 주몽은 헤롯 대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고 사로국과 백제국이 건국되는 시기가 유력한 2세기 후반은 로마 제국 5현제 시대 말기며 중국은 동한 시대고 이 두곳은 대단히 기록 자료가 풍부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도 제가 본문에서 얘기했듯 추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없는 건 아니며, 고고학적 자료들도 상당히 많아서 원삼국사는 물론 님이 '하도 오래전'이라고 말하는 고구려 초기 기원전 1세기보다도 수백 년 전인 그 고조선사 초기조차 기원전 7세기부터는 서서히 그 베일을 벗고 있고 이미 기원전 15세기부터 이동 양상이 논해지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님께서 '하도 오래 전'이라고 말씀하시는 시대보다 거의 육백 년에서 천오백 년 전 시기입니다.
울티마님께서는 좀 너무나도 최근 연구에 대해 아시는 게 없다는 인상이 듭니다. 그런건 넷상 논문 검색이나 어설픈 발표 외에, 정규 학계의 연구 성과나 대중 교양서를 통해 접근하셔야 합니다.
@마법의활 예 전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서 그저 관심있는 분야 소개하고 의견들으려했던 것 뿐입니다. 댓긋 감사드리며 여기까지만 쓸게요
요러케 흘러나오는(?) 학계 최신 동향(??)은 참 맛있습니다요 ㅎㅎㅎ
그러나, 저는 분명코 말하건대 아하스페르쯔님보다 지식도 인품도 부족합니다. 때문에 지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중입니다. 생각보다 힘드네요.
@마법의활 그분은 그분 나름의 존재감이 있는 거고, 마활님은 마활님 나름의 존재감이 있는 거지요.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한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_Arondite_ 굳이 말하면 제 열등감보다는, 울티마님에 대한 답답함 때문입니다. 아하스페르쯔님은 내공이 있으셔서 더한 개드립도 여유 있게 잘 상대하십니다만, 저는 상당히 인격이 모자라서인지 화부터 치미는 걸 느낍니다. -_-;
@마법의활 화가 나지 않을수는 없겠지요. 마활님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매우 명확한 분이시니 더욱 그러실 겁니다. 게다가 제가 몸담은 공학분야와는 달리 마활님이 전공하시는 역사분야는 뭣도 모르는 것들이 많이 나대는 영역이니 때로는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래도 화를 너무 자주 내면 건강에도 안좋으니 한번 화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제 경우에는 회의할 때나 전화받을 때 화나는 순간에 한 5초쯤 심호흡하고 물한모금 마시고 나면 조절이 조금은 되더라고요.
@_Arondite_ 네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나마 토탈워 카페는 이런 문제에서 클린하여 제가 잘 이용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마저 이런 어려움을 보니 더욱 걱정스런 생각도 있습니다.
고대사는 복잡하군요... ㄷㄷ
잘 읽었습니다.
마활님 덕분에 한국고대사에 대한 제식견이 정리되는것 같아요.
김부식:사료가 부족하다...괴로워...
다행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한국 역사학자들이 고고학과 DB 나노 단위 분해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들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지금도 교양서를 내고 있고 박물관 통해 인터넷 공개도 합니다만 어쩐 일인지 잘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DB검색질과 논문 검색질이 더 편해서겠죠. (.....)
저 같이 읽고도 오독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