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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이파크 팬카페 BIFC 원문보기 글쓴이: 문현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은 돌아온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겨울을 참지 못하고 결국 봄의 기운을 만끽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차디찬 겨울의 칼바람을 다 맞선 뒤, 환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한동안 유망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이가 순식간에 팬들의 모습에서 사라졌고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부산의 새로운 해결사로 급부상하면서. 7년 전, 그 모습보다 더 나아진 실력으로 팬들 앞에 찾아와 미소 짓게 만드는 부산아이파크의 한정화를 클럽하우스에서 만나보았다.
지금은 축구선수 한정화로 당당히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단다. 대부분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시작한 시기는 초등학교 4 ~ 5학년. 하지만 그는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늦은 시기, 중학교 1학년 때 축구화를 신었다. 빠른 발을 가진 그가 부모님의 반대에 무릎 쓰고 육상이 아닌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필연 같은 축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서 축구 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각 초등학교에 축구부라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6학년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오히려 그 때는 제가 달리기가 빠르다보니깐 주위에서 육상을 하라는 권유가 많았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공부를 하길 원하셨거든요. 그래서 육상 시합만 나가곤 했었죠. 그러다가 광명중으로 갔는데, 그 때 코치님에게 축구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특히 어머님이 운동이 힘들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더더욱 반대를 하셨죠. 그냥 또래 아이들처럼 공부했으면 하셨는데, 제가 워낙 하고 싶어 해서 결국은 허락해 주셨죠.”
또래 친구들은 이미 합숙생활에 적응이 되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에게는 축구부의 생활은 낯선 환경이었다. 또래에 비해 조금 늦은 출발이었지만, 모든 일에 어디 시기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욱이 기간의 차이를 줄이기 위한 그의 크나큰 노력이 있었기에 늦은 출발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숙소생활을 했지만 저는 숙소생활이 처음이라 솔직히 조금 답답했어요. 집에도 가고 싶고, 부모님도 뵙고 싶었죠. 그리고 그때는 선배들에게 혼나는 것도 힘들었어요. 한 번은 집에 가고 싶어서 몰래 운적도 있었어요.(웃음)”
“중학교 1, 2학년 때는 제가 친구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기본기 같은 부분에서 저에게 부족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니깐 굉장히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 때부터 볼을 찰 때, 컨트롤할 때 자세나 동작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썼어요. 머릿속으로 생각도 많이 했어요. 친구들에 비해 늦었으니깐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었죠. 지금은 뭐 늦게 시작했다는 것이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그렇지는 않아요.”
그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는 16세 청소년 대표에서도 이름을 올리며 큰 활약을 했다. 그의 장기인 빠른 스피드를 앞세워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활약보다 주변의 도움 덕분이라며 공을 돌린다. “당시에 멤버들이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고 무서우셨던 기영옥 감독님 덕분에 정신 바짝 차리고(웃음) 더 좋은 기량을 펼칠 수 있었어요.” 라며 그는 지난 시절을 짧게나마 회상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시기. 16세 청소년 대표팀에서 그의 활약이 큰 만큼 많은 고등학교 축구팀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다.
“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로 그냥 이민을 가버리자 하실 정도로 스카우트 제의가 여기저기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에 풍생고, 안양공고, 수원공고, 정명고 등등 경기도에서는 알아주는 고교축구부에서 제의가 오다보니 고민도 많이 했었어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제의가 왔었는데, 서울까지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안양공고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 안양공고에서 안양LG로 가는 연고지명이 있었거든요. 어차피 프로로 가게 될 거니깐 안양공고를 선택하게 되었죠.”
화려한 프로 데뷔
안양공고 시절, 그는 한국축구를 이끌어 갈 고교 최고의 유망주로 성장했다. 2000년도에는 18세 이하 아시아 학생대표를 지냈고 추계중고연맹전에서는 7골을 몰아치며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가능성은 모든 이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 당시, 파격적으로 그는 대학이 아닌 프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또래 친구들이 다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 프로로 입단하는 경우였어요. 그런데 저는 대학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크게 없었어요. 목표는 프로에 오는 거였고 프로에 오기 위해서 안양공고를 선택하기도 했으니깐요. 프로가 제가 성장하는 부분에 있어서 더 이점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딱 한번 군대 갔을 때, 대학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해 본적이 있어요. 내가 만약에 대학을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한번 말고는 지금껏 대학에 별 미련이 없었어요.”
완벽하지 않으면서 조금 서투름이 느껴지는 젊음의 나이 스무 살.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프로로서 ‘한정화’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승부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는 스무 살에 자기 자신을 축구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프로 첫 해는 신인왕 후보에도 이름이 자주 거론될 만큼 좋은 출발이었다.
“ 정말 프로 첫 해에는 제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요. 첫 데뷔전을 수원이랑 했었는데, 솔직히 그 경기 빼고는 다른 경기들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상대 팀도 안보였어요. 더 심한 건, 우리 팀마저 안보이더라고요. 그냥 딱 저만 보였어요. 여기저기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어요.(웃음) 감독님께서 기회도 많이 주셨는데, 그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한 거 같아요. 요즘 가끔 드는 생각인데, ‘다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2001년, 그의 데뷔는 화려했다. 학창시절 그의 플레이를 기억하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언론 역시 ‘안양의 앙팡테리블’ ‘한국의 오언’ 이라는 수식어로 그를 축구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런 관심은 오히려 그에게 부담감이 되지 않았을까.
“조광래 감독님이 너무 저를 뛰어주셔서……. (웃음) 언론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정신이 없었다는 말이 맞아요. 데뷔전이 수원과의 홈경기였거든요. 후반전에 교체로 들어갔는데, 그 때 후반 중반에 슈팅을 한번 한 것이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왔었어요. 그 때 그 한 장면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많은 기자 분들이 갑자기 저를 둘러싸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 때는 정말 어리둥절했어요. 그런 적이 처음인데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정말 당황했었죠.”
축구를 시작한 이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였기에 아테네 올림픽 소집 명단에도 줄곧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정작 최종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없었다.
“제가 한번 피로 골절이라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어요. 그 때가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1, 2차 명단이 발표되었을 시기였어요. 회복하는 시점인지라 조광래 감독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몸이 최고의 수준이 아닌데 괜히 가서 더 나빠지거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저에게 더 안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그냥 팀에 남아서 회복훈련을 하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결국은 가지 않았죠.”
“그러고 나서 또 명단에 이름이 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울산에 소집되어서 훈련을 했는데, 제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아쉽게 중도에 하차하고 돌아오게 되었죠. 그 때도 감독님께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운 거예요. 그래서 팀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짜 '팀으로 복귀하지 말고 집으로 갈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마음을 추스르고 팀으로 돌아갔죠.”
그는 이야기 내내 그를 안양LG로 이끌어 준 조광래 감독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났다. 어린 나이였던 그가 믿고 의지한 사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조광래 감독님이 어린 선수들에게 애정이 많으셨어요. 저 뿐만 아니라 최태욱, 김동진, 최원권 등등 어린 선수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시고 자기 관리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죠. 감독님이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던 만큼 잘 했어야 했는데, 죄송하죠. 감독님은 제가 상무에 있을 때도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불안해하지 말고 상무에서 몸 관리 잘해서 돌아오라고 전화도 주시고 하셨어요. 아직도 감독님께 안부 전화는 드리는 편이에요.”
그라운드를 달리고 싶다
프로 3년차에 접어든 2003년 말, 그는 돌연 광주 상무 행을 택했다. 부상으로 잠시 흔들렸던 자신을 다잡기 위한 방법이었다.
“안양 LG에서 친구였던 (박)성호가 갑자기 군대를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저도 군대를 갔다가 와야 하니깐 지금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냥 그 시기가 적절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팀에게 많은 보탬이 되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깐요. 가서 마음을 잡고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조광래 감독님께 말씀을 드렸고 덕분에 광주 상무로 갈 수 있었어요.”
“광주 상무가 아무래도 군대다 보니깐 편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어요. 첫 해에는 많이 답답했죠. 형들이랑 나이차도 제법 나기도 했고…….하지만 제가 광주 상무에 이수철 코치님하고 친해졌어요. 마음이 잘 맞았다고나 할까. 코치님이 제가 어리다보니깐 많이 챙겨주시고 신경써주셨어요. 저도 더 코치님을 따르다보니 2년차 되면서 편하게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선택한 광주 상무 행.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한동안 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2년 동안 단 2경기에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마음은 벌써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지만 그의 발은 묶여 있었다.
“광주에서 처음 몇 경기는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다가 언제부턴가 대기명단에서도 제 이름이 빠지게 되었어요. 광주 상무도 K-리그의 한 팀이잖아요. 그런데 출전기회를 계속 잡지를 못하니깐 속상하더라고요. 내가 프로에 데뷔해서 K-리그에 무엇을 보여줬나 싶기도 하고…….”
“FC서울에 있을 때도 저는 부상도 아니었고 컨디션 저하도 아니었어요. 무엇이 부족한지 가르쳐 주시면 고치고 보완해 나갈 텐데 저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어요.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강조 감독님과 이장수 감독님 경기 스타일에 제가 맞지 않았나 봐요.”
군대를 제대한 뒤, 그가 돌아온 곳은 FC서울. 그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정작 팀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롭게 변한 팀에서 그 역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그라운드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저에게 단 5분이라도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라고 말을 하던 그는 기회가 배고픈 사람이었다. 축구 선수가 축구를 하지 못한 채 그저 동료들의 경기만 지켜보고 있으니 그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 터. 오랫동안 씁쓸함과 안타까움에 쓰러져 가면서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오랫동안 함께해 온 축구화를 벗을 생각도 해봤다고 한다.
“솔직하게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겠죠. 아버지가 축구를 그만두라는 말씀도 하실 정도였어요. 저 역시 한 동안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로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느 순간 무덤덤해지더라고요. 너무 자주 그래서인가? (웃음) 그냥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항상 그래왔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작년 말에 다른 팀들에게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더라고요. 축구를 그만 둘 필요가 없어진 거죠.(웃음) 그 때 느꼈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팀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거죠.”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긴 슬럼프의 시간동안 그도 가슴앓이를 했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 역시 편치는 않았을 터. 자식의 상처투성이인 마음을 대신 아파줄 수 없는 부모님의 마음은 더더욱 찢어졌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많이 속상해하셨어요. 아무래도 학창 시절에는 잘 뛰어다니던 애가 경기를 오랫동안 못 뛰고 있으니……. 그저 지켜보시는 것이 더 마음 아프셨겠죠. 한번은 아버지가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K-리그에서 제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단 한 경기라도 좋으니 뛰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었어요.”
누구에게나 가족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그에게도 가족은 그의 축구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원자이자 팬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때로는 엄하게 또 때로는 자상하게 그의 축구 인생을 뒷받침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대화도 많이 했고 유난히 제가 아버지를 잘 따랐어요. 아버지는 저를 위해서 뭐든지 해주시는 분이시거든요. 정말 제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최대한 다 해주시려고 하셨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고 계세요.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저 뒷바라지 하신다고 사업을 제대로 하시지를 못했어요. 거의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관리해주셨어요. 오죽 하셨으면 요즘 저 보시면서 우스갯소리로 ‘너 때문에 손해 본 돈이 억은 되겠다.’라고 말씀하세요.”
“지금도 부산까지 경기장을 자주 찾아오셔서 제 경기를 보세요. 못 오실 때는 인터넷으로도 중계를 보시고 제가 못한 부분, 부족한 부분 다 지적해주세요. 경기가 끝나고 전화가 오시는데, 가끔 전화 받기 무서울 때도 있어요. 제가 부산으로 온 뒤로 경기도 뛰고 골도 넣으니깐 좋아하시기는 하는데, 아직 아버지 눈에는 제가 많이 부족해 보이나 봐요.”
“지금 여자친구와 7년 째 연애중이에요. 제가 워낙 여자 친구 이야기를 많이 해서 웬만한 분들은 다 제 여지친구를 알아요. 7년이란 시간 동안 항상 함께 해줬어요. 참 고맙고 대단해요. 군대도 다 기다려주었고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도 항상 곁에 있어줬어요. 주위에서 저보고 결혼 안하면 나쁜 놈이래요.(웃음) 이제 저도 결혼을 할 때가 되었죠. 주위 친구들도 다 하나 둘 씩 결혼을 하니깐요. 저도 내년에는 결혼을 해야겠죠.”
“축구선수 여자 친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바로 자주 보지 못하는 거겠죠. 처음엔 제 여자 친구도 자주 만나지 못하니깐 많이 아쉬워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젠 자기 일도 있고 바쁘다 보니깐 스스로 피곤해해요(웃음)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자주 못 만나는 거에 아쉬워하는 것도 덜한 것 같아요. 이제는 운동선수의 생활을 더 없이 잘 알기 때문에 이해를 잘 해줘요.”
부산에서 비상하다
승부를 지을 때는 삼세판이라고 했다. 벌써 다시 재개할 기회가 두 번이나 날아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부산아이파크에 오게 되었다.
“원래는 대전으로 갈려고 했었어요. 그 때, 최윤겸 감독님이 오든 안 오든 빨리 확답을 줬으면 하셨어요. 그래야 신인 드래프트 때 보강할 공격수를 뽑는다고. 그러다가 부산의 연락을 받게 되었어요. 지금 김판곤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때부터 저를 지켜보셨다고 하셨어요. 전체적인 클럽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고향이 부산 동래에요. 이런저런 점에서 부산이 마음에 들었고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오게 되었죠.”
“부산에 친구도 많고 아는 형들도 많았어요. 상무에서 (심)재원이 형, (정)유석이형, (전)우근이형도 다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부산에 (박)성호, (김)태민, (이)여성이 등등 제 또래 친구들도 많았고요. 그래서 모임도 자주 갖고 생활하는 게 재밌죠. 제가 또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해요. 방이 2인 1실인데, 저 혼자 쓰거든요. 혼자 노래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도 하고 자고 싶을 때 편하게 자고 남의 간섭 안 받고 이렇게 생활하는 게 편해요.”
올 시즌, 부산에서 24번을 달고 종행무진 활약을 한 그. 부산에서 24번은 영구결번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24번을 당당히 달고 모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등번호를 정할 때, 제가 원하는 번호는 이미 다 차있었고 뒤 번호들만 남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33번을 달라고 했더니 에글리 감독님께서 이 번호를 원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없고 뒤 번호들만 남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었죠. 그런데 감독님께서 16번을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제가 이전에 한번 16번이 김주성 선배님 번호로 영구결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은 모르셨나 봐요. 감독님이 주신다고 하시니 그냥 선뜻 감사하다고 대답했어요. 나중에 감독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나시고는 미안하다며 24번은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24번도 송종국 선수 번호로 영구결번이었는데, '내가 클럽과 싸워서 24번을 주었다'며 그 번호를 저에게 주셨어요. 감사했죠. 감독님과 팀이 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용기도 많이 주셨거든요.”
점차 교체로 출전시간을 늘리던 그는 어느새 주전으로 그 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까지 기록하면서 부산 승리의 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부산 팬들에겐 기대감을 그리고 상대팀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면서 ‘한정화의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에요. 더 잘해야죠. 지금 보다 더 큰 활약을 해서 팀에 보탬이 되어야죠.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이 항상 ‘경기에 들어가는 것이 그냥 무의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뭐 하나를 해 주기를 바라고 너를 들여보내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다짐을 하죠. ‘찬스가 오면 꼭 성공을 시켜야겠다. 어시스트를 해야겠다.’ 등등. 이렇게 들어가기 전에 각오를 하면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는 자신감도 많이 생기게 되었어요. 부산이 저에게 기회를 많이 주시고 기대도 하시는데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해야죠.”
“ <삼성하우젠컵 2007> 대전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었어요. 그 골이 들어갔을 때, 기분이야 말로 표현을 못하죠. 그 때 어시스트를 해 준 (이)여성이도 프로에서 첫 어시스트라고 하더라고요. 둘에게 의미 있는 골이 된 셈이죠. 아무래도 K-리그에서 골을 넣은 기억이 참 오래 돼서 말이에요. 2003년 이후로 처음으로 골을 넣은 거라 ‘이게 골 맛이구나.’ 싶기도 하고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나의 부활은 이제 시작이다
올 시즌, 유난히 부산은 많은 일을 겪었다. 거기다 팀이 장기간 부진에 빠지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성적표를 받은 채 한 해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참 많이 패했죠? (웃음) 조금만 강팀이랑 붙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팀 전체 분위기가 많이 가라 앉아 있었어요. 제 생각에는 김판곤 선생님이 에글리 감독님과 박성화 감독님의 좋은 점만 가지고 그것을 섞으려다 보니깐 선수들이 받아들이면서 많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손발이 안 맞고 패하는 경기가 많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은 선생님이 전체적인 기반을 잡으신 상태에서 팀을 이끌고 계세요. 선수들의 생각도 바뀌었고 훈련을 해보면 전체적인 패턴과 김판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축구가 이번 시즌이랑 많이 달라 진 것 같아요. 분명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나아질 거예요. 선생님이 원하고 바라는 축구를 저희가 잘 받아들여서 올 시즌 성적은 안 좋았지만 내년에는 6강 플레이오프에 꼭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긴긴 겨울의 터널을 걸어오면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겨울이 끝나면 그토록 원하던 봄이 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이제야 그 봄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는 아직 만족하지 않는단다. 그동안 너무 매서운 바람을 맞았기 때문일까. 더 따사로운 햇볕을 쬐기 위해 오늘도 그는 꿈이 있는 그 곳을 위한 출발선에 서 있다.
“물론 이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관중, 팬들이에요. 관중 분들이 없으면 K-리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희를 응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팬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이기기 위해 거칠게 몸싸움을 하거나 좋지 못한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아요. 축구를 더 재밌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서로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겠죠.”
K-리그 명예기자 한지원
첫댓글 98~2002 본 모습으로 돌아와 주세요.
내이름이랑 비슷해서 알게된선수..솔직히 잘은모르지만 내년엔 활약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