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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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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역사바로알기 스크랩 대한민국의 정체성
무한의주인공 추천 1 조회 624 13.08.28 02: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류애는 전 세계의 희망이다. 공산국가도 겉으로는 인류 평화를 내두른다. 자연히 우리나라가 나아갈 꼭짓점이 홍익인간(弘益人間)임을 굳이 구구절절 풀어낼 까닭은 없다. 따라야 할 길은 되비쳐 걸어온 발자취인 역사에 대한 정체성(正體性)이다. 헌법에 교육이념으로 붙박인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우리나라는 전혀 뒷받침을 못하고 있다. 오히려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를 너무 쉽게 거스른다. 사회 각 분야가 촘촘히 이를 맞물리기는커녕 국민을 어렵게 받드는 대통령은 없고 봉건제 군주에 가까우며, 금배지들부터 경찰은 물론 검찰도 그 권력에 빌붙은 간신배와 아첨꾼들이 판치니, 정경유착(政經癒着)으로 골 깊은 기업을 비롯해 방송언론 등 사회의 기둥이 죄다 썩어문드러져 있다. 국정원 사태야말로 나라 망신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제조업부터 유통업을 거쳐 서비스업을 이어서 새로운 고용과 창출을 이루는 창조경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라면 모양새만 다를 뿐 다들 끌어가는 정책인데, 마냥 새롭고 나라를 거둬 먹일 도깨비방망이인 양 요란을 떠는 짓부터 생색내기 전시행정에 지나지 않다. 당장 대기업이 전체 유통구조를 틀어줘 맥이 끊어진다. 그 핵심인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산업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부터 굴려온 문화산업진흥법령에 기댄 채 뭉텅 빠져 있다. 문화산업을 뺀 창조경제란 역시 그 시절에 뜨거웠던 벤처기업(venture business)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뜻부터 첨단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을 일구는 중소기업이다. 경제 민주화조차 고()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을 통해 이루려 했던 서민정책 속에 깃들어 있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리나라의 고질병만 볼썽사납다.

나날이 커지는 국민의 촛불을 거스른 유신의 망령은 더 섬뜩하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지냈으며, 199214대 대선(大選)에 지역감정을 불어넣으려 했던 초원복집사건의 주인공인 김기춘(金淇春)을 행정부의 비서실장으로 들여앉혔다. 유신헌법을 기워냈던 박정희 독재의 주범이기도 했다. 신군부(新軍部)가 갈아탄 민정당(民主正義黨)을 만들었고, 전두환을 본보기로 삼을 만큼 낯짝이 두꺼운 육사 출신의 강창희(姜昌熙)가 입법부를 주무르는 국회의장이다. 민정당에서 원내총무를 지냈던 현경대(玄敬大)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맡아 대통령 자문회의를 이끈다. 새누리당 상임고문인 김용환(金龍煥)은 박정희의 경제수석과 재무부장관을 거쳤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병렬(崔秉烈) 역시 한나라당대표로 2004년에 탄핵정국을 지휘했다. 그밖에 김용갑(金容甲)과 안병훈(安秉?)까지 박근혜가 정치를 귀동냥하는 이른바 7인회 맴버들이 모두 그 아비의 사람들이다. 당장 남북대화에 상대성이라곤 없다. 김관진(金寬鎭) 국방부장관과 남재준(南在俊) 국정원장이며 김장수(金章洙) 국가안보실장으로 채워진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안보강화를 위한 군부출신이라지만, 다른 요직마저 보수 강경파만 우글거린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줄 인물들이 절대 아니다. 노인네들만이 아니라 박정희 키드(Kid)’라는 신조어가 나올 만큼 그 측근의 2세들마다 너도나도 공직(公職)에 몰려들고 있다. 군대야말로 강해야 한다. 현재 앞다퉈 해군력을 키우는 인도와 중국에 일본을 바다와 하늘에서 맞서야 하고, 북한도 항상 달래기만 할 수는 없다. 때론 어를 만큼 강한 국방력으로 떡을 줘야 감지덕지한 법이다. 국가수호의 신성한 임무를 우러러주며 되도록 정치에 군사문화가 파고들지 않도록 떨어뜨려야 좋다. 미처 그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은 처지다.

그 인사(人事)는 곧 자신의 울을 돌아볼 줄 모르는 역사관이다.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거듭 보듬어 우려내야 할 밑천이기에 역사가 바로 선 나라일수록 전통(傳統)을 오늘로 되살린 문화예술이 우람하다. 이는 국민을 하나로 잇는 의식과 정서를 가꾸며 정치로부터 경제며 교육 등 각 분야를 알차게 살피는 열린사회로 투명성을 한껏 키운다. 너르고 고른 문화예술이 생각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 사상의 자유는 자연스레 사람의 기본 권리인 인권(人權)을 드높인다.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었던 1789년 대혁명 사상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내려 받은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 프랑스를 다스린다. 물론 식민지지배와 문화재수탈에 나섰던 제국주의를 마냥 얼버무리진 못한다. 알제리 출신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연금이 까마득히 뒤늦은 2006년에 영화 영광의 날들(Indigenes)’이 선보였을 때 시라크(Jacques Chirac) 대통령이 나서서 건네질 만큼 1954년부터 8년간 끌었던 그들의 독립전쟁을 둘러싼 차별과 앙금은 크나큰 응어리였다. 나치 협력자들을 깡그리 걸러냈던 도덕성치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역사 속에서 오랜 경쟁관계였던 영국은 그 닮은꼴이다. 언론 통제를 휘두르는 이탈리아조차 국민의 삶은 세계 8위를 차지할 만큼 질이 높다. 핀란드야말로 사회가 알차다. 독일과 베네룩스3국이며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뒤를 따른다. 그들은 스위스와 더불어 저만의 생활문화 위에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추슬렀고, 지난 2008년에 세계를 뒤흔든 금융위기도 굳건히 버텨냈던 나라살림이 몹시 튼실하다. 상대성은 당연히 있는 법이다. 국가지원의 의료서비스와 돈으로 삶을 즐기길 바라는 개개인의 욕구만족은 뒤쳐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야 한마디로 공산국가다. 대만과 일본을 아울러 우리나라는 우선 창피한 정치 후진국이다.

 

 

미국은 북유럽과 반대다. 현대 순수예술과 상업주의 대중문화의 중심지답게 일방주의(一方主義)에 빠진 자본주의의가 민간의료보험에서 드러나듯 국민의 기본권조차 내리누른다. 이익단체들의 로비(obbying)로 돌아가는 정치판부터 돈지랄이다. 비록 자기과시(自己誇示)를 버린 오버마(Barack Obama) 정부가 다양성으로 국제관계를 살린다지만, 세계인권위원회에서 손꼽는 인종차별에 앞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북아메리카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인간사냥부터 어그러진 개척정신이자 아메리칸드림의 뿌리였다. 목사들조차 인종말살을 하나님의 뜻으로 총질을 일삼았다. 성경 어느 구절에도 사람이 목숨을 앗을 권리라곤 없다. 심판은 오직 조물주(造物主)의 몫으로 피조물(被造物)의 몸을 빌었던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끝내 인간을 용서했듯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역시 신의 창조물인 자연을 품는 인디언 같은 공동체의식을 풀어가야 한다. 믿음 자체가 신()과 함께 함인데, 갈수록 돈에 놀아나며 교회의 첨탑만 바벨탑처럼 높디높다. 알카에다(al-Qa’idah)가 아프간에서 소련에 맞서 미국이 키워준 전사조직이었고, 토테미즘(totemism)으로 불거져 오래된 신사(神社)일수록 문물(文物)을 전해준 하늘의 나라인 한반도를 받들었듯 종교란 시류(時流)를 따라 풀이하는 어리석은 보신주의(補身主義)로 허우적거리기 십상이다. 유사(類似)종교와 사이비들의 기본 틀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인종차별과 민족주의를 넘어 순혈주의(純血主義)조차 보채니, 그것이 어느 신()의 시험일지언정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이, 인간을 재물로 삼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다. 그 눈 먼 욕심이 역사의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은 황금을 쫓아 미조우리강 서쪽 편 사우스다코타(State of South Dakota)지역을 수족((Sioux·Lakota)에게 내어줬던 1868년 제2차 라라미 요새조약을 홀라당 깨뜨렸다. 훗날 한반도와 베트남을 거쳐 중동도 비껴가지 않았다. 바로 그 남서부 쪽 블랙힐스(Black Hills) 산지에 러시모어(Rushmore) 바위산이 있다. 1927년에 국립공원으로 들여앉히기 전부터 1829미터 높이 화강암은 오늘날까지 인디언들이 우러르는 성지(聖地). 더불어 18901229일 제7기병대가 최후의 저항에서 패해 오마하(Omaha)로 강제이주에 내몰린 아이와 부녀자들이 부지기수인 300여명의 수족을 호치키스(Hotchkiss) 기관총으로 학살한 채 20개의 더러운 명예훈장을 매달았던 운디드니(Wounded) 전투의 핏물도 흥건하다. 구덩이에 묻힌 그들을 4인의 역대 대통령이 굽어보는 얼굴조각부터 짜깁기 역사관이다. 1980년에 연방 대법원이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역사라며 1877년 당시의 땅값 1550만 달러와 매년 5퍼센트씩 물가상승률을 덧붙인 뭉칫돈을 선뜻 갈라줬지만, 대지를 인간의 어머니로 섬기는 수족은 배상금을 뿌리친 채 자연을 따르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조상의 땅을 돌려받기만 다그치고 있다. 미해결로 남은 그 소송만큼 미국의 오늘은 승자(勝者)의 사탕발림일 뿐이다.

인디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뿌리의식에서 차이가 크다. 똑같이 인간사냥을 당하긴 했어도 조상의 얼이 숨 쉬는 세거지지(世居之地)에서 밀려난 북아메리카원주민의 골 깊은 한()은 대대로 백인사회를 겉돌았지만, 아프리카계는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를 쫓아야 했던 새로운 땅이다. 미국의 처지 역시 다르다. 인디언에게 힘을 실어주면 당장 지도부터 갈아치워야 하고, 잇달아 일어날 남부연합의 망령과 무정부주의단체들까지 골칫거리라 싸구려 위스키에 비렁뱅이 중독자들로 떨쳐냈던 서부시대처럼 인디언보호구역 카지노사업권을 통해 돈맛을 꼬드기곤 한다. 제 발이 저린 도둑질이기도 하다. 영화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에서 드러나듯 말과 마차를 내달려 깃발을 꽂는 대로 땅따먹기를 해대곤 우세를 떨어왔으니, 지금껏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무장단체들이 차고 넘친다. 안으로 곪은 일그러진 영웅심이다. 그만큼 어느 나라나 역사왜곡은 자긍심(自矜心)을 곧추세우기 위한 꿍꿍이가 구질구질하다. 짓조른 애국심이 아니라 스스로 자랑스레 떠벌이는 개개인의 자기만족이다. 주체성(主體性)을 두텁게 다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닌 역사를 통한 상대성이 자라나지만, 미국은 하나님을 앞세운 오만한 개척정신의 늪이 깊디깊다. ()의 이름을 함부로 팔아먹는 만큼 절대 강자요, 항상 옳다는 자만심(自慢心)은 곧 독선이다. 옛 소련이 집어삼키려했던 핀란드가 공산당을 막아낸 이후 미국이 내지른 반공이념을 보채기는커녕 사회민주주의로 자본주의가 나아갈 앞길을 성큼 다져놓은 배경엔 1155년 이래 스웨덴과 러시아의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 신세였던 민족의 설움이 큰 몫을 차지한다.

 

 

민족주의 역시 지나치면 종교와 똑같다. 컴퓨터 음성인식 기호체계로 한글을 유네스코 학자들이 감지덕지(感之德之) 받아쓰자 심술이 뒤틀려 전생에 자신이 한반도로 건너와 가르쳐줬다는 노망 난 할머니까지 떠받드는 극우(極右) 골통들을 빨아주더니, 이제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는 그 장점을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가벼움이라며 그때그때 말을 바꾸는 고젠카(吳善花, ごぜんか)를 굳이 우리 이름으로 부를 까닭이 없다. 문화의 상대성을 짓뭉갠 제 얼굴에 똥칠이다. 한글이 부러워 2010년에 조선족을 빌미로 저희 말이라고 짓졸랐던 중국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강산이 거덜 나고도 전국 방방곡곡에 널린 패총(貝塚)과 세계 고인돌 중 무려 70퍼센트가 몰린 구석기 유물을 배 아파하는 일본에게 해산물을, 조개조차 한국인들은 먹지 않았다고 구슬린 거짓말쟁이였다. 1990년대 초부터 가팔라졌던 역사왜곡을 타고 덜떨어진 출판사가 유령작가를 통해 책을 내줬다. 다이토 문화대학교 영문과 학비를 대준 동거남에 대동학교 동문들과 출판사 편집장도 그때까지 엽서 한 장 쓰지 못하는 일본어 까막눈이었음을 한 목소리로 거드니, 뒤가 구릴수록 말장난만 배배 꼬기 마련이다. 일부러 귀화 한국인이란 꼬리표로 부모의 나라를 깎아내려 자신을 띄우니, 우에노(上野)에 붙박인 한국클럽에서 술손님들에게 몸을 내맡겼던 때와 다를 바가 없다. 구석기 유적부터 한반도가 부러운 그들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이 약 27만년 전인데 비해 일본은 기껏 27000년 전에 그친다.

게다가 그리 콧대를 세우는 가라테의 본고장 오키나와(沖?) 지식인들은 여전히 류큐국(琉球國)을 섬기는 데다, 13세기 말에 신석기 움집에서 성까지 쌓은 중세 철기문명으로 껑충 건너뛰었던 세계사의 수수께끼도 섬 전체가 융단폭격을 당했던 태평양전쟁 잔해 속 지하를 뒤지며 술술 풀려나왔다. 1982년에 어골문(魚骨紋)기와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와장(瓦匠) 그대로 빚어낸 방법부터 제주도에 흔하디흔한 진도(珍島) 수막새기와 모양까지 그곳에는 고려가 있었다. 그 시기인 12734월에 여몽연합군이 제주도에서 기어이 삼별초(三別抄)를 무너뜨렸다. 해류를 타면 영화 콘 티키(Kon-Tiki)’처럼 자연스레 일본 서쪽 끝인 오키나와 군도(群島)로 흘러든다. 오죽하면 유적에 사기를 쳤던 얼뜨기도 있다. 파내는 대로 유물을 찾아내 신의 손으로 불리며 70만년 전까지 선사시대를 끌어올렸던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1974년부터 2000년까지 꼬박 26년 동안 180여 곳 가운데 162 군데 구석기 유적에 자신이 미리 만든 석기(石器)를 숨긴 채 보물찾기를 즐겼다. 정말이지 신의 손이었다. 유적지 주변 돌과 전혀 다르고, 깎아 다듬은 방법이 옛것이 절대 아닌 데다, 그 부스러기는커녕 동시대의 생활 흔적이라곤 없었다. 심지어 세계에 이름을 날릴 해외학자들의 공동연구 요청을 죄다 마다했다. 이를 꼬집으면 저마다 매국노로 내몰았던 우익단체들도 공범이다. 섬나라 학계도 마찬가지다. 늘 우세를 떠는 출판계조차 망신살이 뻗쳐서 거대 출판사 고단샤(講談社)’는 그의 저서를 전부 없앤 뒤 편집이사가 물러나야 했는데, “20만년, 30만년 전 유물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기대에 응한 것 같다하는 넋두리만큼이나 전체주의(全體主義)가 떼를 썼던 나라 자체의 정신병이다. 끝이 아니었다. 그 당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하는 의문을 남겼던 벳푸대학교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 명예교수도 의심을 받던 끝에 목숨을 끊었다. 세계의 비웃음에 토라진 철부지들에겐 가까운 근현대사(近現代史)가 만만한 장난감이다. 고젠카는 교수랍시고 앉혀놓은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단물만 날름 빼먹는 꽃뱀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1등 공신은 단연코 미국이다. 나치와 무솔리니 정권은 연합국이 전후 처리에 각자 입을 맞췄고, 패전국이 나라 구실이나마 하려면 유럽대륙의 도움이 절실했던 만큼 정부와 기업은 물론 관계조차 없는 중소기업과 종교단체들도 기금을 모아 피해보상을 이끌지만, 미국이 제 입맛대로 구워삶았던 일본은 전혀 다르다. 함께 피를 흘린 혈맹(血盟)도 어디까지나 한반도를 통해 일본이며 동남아를 내리눌러 태평양을 휘저을 소련을 막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참전용사 개개인들에겐 당연히 갚지 못할 인생과 목숨 빚이 무겁다. 역사만큼 국제관계를 바르게 받아들일 때 어렵사리 통일로 나아갈 길라잡이가 들어서고, 면면이 지켜온 겨레의 얼에 목숨을 드리운 호국영령(護國英靈)들에게 떳떳할 수 있다. 미군정은 그 연구 자료를 넘겨받는 대가로 생체실험을 벌였던 세균전부대 책임자들을 전범재판에도 세우지 않았는데, 전체 군대 중 유일하게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칙령(勅令)으로 꾸려졌을 만큼 이름값이 걸쭉한 인물들이 많았다. 통칭 731부대로 알려져 있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194181일에 만주 제731부대로 이름을 바꾼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하얼빈(哈爾濱) 가까이 핑팡취(平房區)를 차지한 채 창춘(長春) 언저리 멍자둔에는 군마방역국인 제100부대가, 일명 에이로 일컬었던 제1644부대는 난징(南京), 나미라는 속칭의 제8605부대는 광둥(廣東)에서 집단살인을 저질렀다. 따로 떨어진 싱가포르에도 1개 부대가 더 있었다. 1932년부터 일제의 꼭두각시인 만주국(滿洲國) 베이인허전(二背蔭河鎭)에 머물렀던 방역급수부가 굳이 북쪽으로 70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간 이유 역시 대도시 가까이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손쉽게 구할 요령이었다. 칙령을 끌어냈던 냉혈 파시스트(fascist)731부대 초대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石井四?)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일본 정부는 옛 부대원들의 양심선언조차 세세히 짚어주지 않았고, 1939년부터 6년 동안 우리나라 항일투사 6인까지 총 1467명만 신원(身元)이 드러났지만, 중국은 3000여명이 죽고 세균전 피해자도 30만 명으로 기념관을 세워뒀다. 곧 세계문화유산으로 아우슈비츠(Auschwitz)처럼 유네스코가 받아들일 끔찍한 역사다. 하얼빈부터 눙안(農安)을 거쳐 퉁랴오(通遼) 등지에서 떼죽음을 몰고 왔던 흑사병도 그 하나다. 장티푸스균 90킬로그램, 흑사병균 400킬로그램, 콜레라균 1000킬로그램을 다달이 골라서 생산했다. 임산부의 배를 가를 때조차 마취는 없었다. 인공혈액 실험으로 사람 몸에 동물의 피를 넣었고, 탱탱 얼린 팔다리를 망치로 깨거나 겨우 세 살 배기가 표본실의 개구리였던 그들의 만행은 중국영화 흑태양(黑太陽) 731’에 생생히 담겨 있다. 너무 지나친 사실 장면이 실제라고 믿기지 않는 악마의 모습이다.

194589일부터 13일까지 공병대가 급히 본부건물을 뺀 모든 시설물을 폭파시켰고, 이때 400여명의 포로들도 독가스로 죽여 불을 지르거나 마대자루에 담아 쑹화장(松花江)을 통해 병균을 퍼뜨렸다. 간간이 영국과 미군에 소련군 포로들도 있었다. 다시 3대 부대장에 올랐던 이시이 시로는 3천 톤짜리 화물선 여러 척에 산더미 같은 세균전 자료를 나눠싣고 부대원 3000여명과 부산항에서 825일 야마구치현(山口縣) 센자키(仙崎) 항구에 다다랐다. 도쿄(東京)시내의 육군군의학교에 그 미치광이가 1931년에 세웠던 방역연구실은 전쟁 막바지로 접어들자 이미 수많은 인체표본(人體標本)들을 땅속 깊이 묻은 뒤였다. 그 가장자리에서만 지난 1989년에 토야마(戶山) 연구청사 공사 도중 100여기의 유골이 나왔다. 41년간 동경 제1병원 간호사였던 이시이 토요(石井十世)2006년에 미군이 알 수 없도록 세 곳에 나누어 묻는 걸 도왔다하고 가와사키 지로(川崎二?) 후생성(厚生省)장관에게 밝혔으니, 억울하게 나뒹구는 넋을 어림짐작하기도 어렵다. 신주쿠(新宿區) 구청의 신원확인 요청부터 번번이 뭉개졌다. 후생성은 조사를 마다한 채 빠른 소각처리만 졸라댔고, 야마모토(山本克忠) 구청장이 국립과학박물관에 성 마리아나 대학이며 자혜회의과대학 등으로 보냈던 공문마다 된서리만 맞았다. 때마침 국립과학박물관의 인류연구부장 사쿠라 사쿠(佐倉朔) 교수가 사립인 삿포로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구청에 전한 감정보고서를 통해 1992422일 기자회견에서 인체실험으로 사지(四肢)를 마디마디 잘라낸 온통 중국과 한국인임이 알려졌지만,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19939월부터 장장 7년간 시민단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였다. 끝끝내 인골 소각처분만 우겨대는 후생성에게 맞선 주민소송은 20001219일에 최고재판소에서 731부대의 반인륜범죄를 풀어갈 실마리로 거들어줬지만, 나날이 극우들이 날뛰어대니, 일본 시민단체만 바라볼 수 없는 우리와 중국이 나설 나랏일이다.

역사교과서에 단 한 줄 실리지 않았듯 일본우익들은 731부대 자체를 아예 모르쇠다. 1997년에 중국인 피해자와 가족들 180명이 일본 정부에게 사과와 배상(賠償)을 위한 소송을 걸었지만, 20028월 도쿄지방법원은 731부대와 그 생체실험만 인정한 채 1972929일자 중화인민공화국 대() 일본정부의 연합성명으로 배상은 내쳐버렸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1982년에 선보였던 악마의 포식도 읽어볼 만하다. 열도(列島)를 발칵 뒤집었던 기록소설이다. 그 전범자들은 한국전쟁 때 유행성 출열혈(流行性出血熱)로 골머리를 앓던 미군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반도를 밟았다. 이시이 시로와 똘마니로 제2대 대장이었던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가 그 전염병 전문가였다. 이때부터 앞서 나간 작은 악마는 대가리의 오른팔이던 나이또 료이치(?藤良一)를 끌어들여 그의 건저혈액기술로 인공혈액을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치워 막대한 부를 챙기며 혈액은행을 열었다. 과거에 대해선 상관 뒤로 꽁무니를 숨긴 졸장부이기도 했다. 이어서 미도리쥬지(綠十字), 즉 녹십자(APAM)가 일본 최대의 제약회사로 솟구치자 이시이 시로에게 따라붙는 제 이름이 목에 가시였던 살모사는 대장이 죽어야 한다, 가족들도 같이 죽이고 죽어라, 그래야 증거가 없어진다하며 할복(割腹)을 구걸했다고 큰딸 하루미(治巳)가 증언했다.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지냈던 우두머리는 195967세로 세상을 떴다. 이후 2인자 짐승이 이끈 부대원 모임이 버젓이 주둔지에서 따온 평방회(平房會)’였으니 반성이라곤 몰랐고, 결핵을 도맡았던 후다끼 히데오(二木英朗)도 녹십자 공동설립자로 배를 불렸다. 기상학회 회장에 오른 요시무라 히사토(吉村?人)는 동상실험 담당이었다. 병균을 옮길 벼룩을 길렀던 타나카 히데오(田中英雄)는 오사카대학교 의학부장을, 병리담당이었던 이시까와 다이마루(石川大丸) 역시 가나가와대학교 의과학장을 지냈다. 또 다른 결핵균 전문가 야나기사와 마코토(柳??)는 예방백신인 비씨지(BCG)를 내놓아 아사히상(朝日賞)을 받았다. 고바야시 로쿠조(小林鹿茸)는 방역담당이었으며 국립예방연구회 초대회장을 거쳤다. 고지마 사부로(監督三?)가 뒤를 이은 2대회장이었고, 일본 의사협회 회장에 이른 다미야 다께오(田宮赳夫)와 함께 동경대학교 출신의 731부대 촉탁교수였다. 나머지도 후생성 등 정부 고위관직을 두루 꿰차곤 천수(天壽)를 누렸다.

미국은 줄기차게 731부대원들을 어르고 달래서 알짜배기 자료를 채갔다. 전범재판이 한창 치닫던 194756일에 맥아더 사령관은 대놓고 워싱턴으로 생체실험과 세균병기 정보를 얻어낼 면책권을 요구했다. 소련에게 넘어갈까 조바심을 낸 탓도 있었다. 공격용 세균무기만 털어놓곤 19459월에 샌더스 보고서에서 일본은 생체실험을 끝까지 입막음했다. 2톰슨 보고서19463월에 나왔다. 이때 미국은 세균폭탄 설계도를 받아냈고, 마침내 로버트 펠(Robert Fell)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즉시 소련에 넘기겠다며 윽박지른 194743펠 보고서에서 이시이 시로는 생체실험을 뱉어냈다. 그 뒤론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잇달아 같은 해 12월 에드윈 힐(Edwin Hill)4힐 보고서를 통해 인체에 세균이 파고들어 세포가 변하는 과정을 등 만 9년간 다뤄진 생체실험과 그 표본자료를 낱낱이 끌어 모은 채 미군정은 19484, “우리는 모든 정보를 얻었다. 결과는 만족스럽다하고 워싱턴에 알렸다. 한국전쟁 때 이미 북한에서 생균무기를 쓰기도 했다. 731부대의 간판격인 도자기 폭탄은 베트남전에서 써먹은 파인애플탄(집속탄)’을 낳았는데, 일명 모자(母子)탄으로도 불렸듯 큰 폭탄이 터지는 순간 작다란 새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연달아 폭발했던 대량살상무기다. 냉전시대 수많은 생화학무기가 그 악마들의 거래로 얻어졌던 밑천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안한 척, 모른 척하며 영웅심만 부풀리는 덩치 큰 가재나 서구열강에 맞선 동아시아 해방전쟁 운운하는 군국주의(軍國主義) 게는 닮은꼴이 당연하다. 일일이 꼽자면 평생을 매달려도 끝이 없다. 342000여명의 난징대학살과 6661명의 관동대학살만이 아니라 싱가포르에서도 약 25000명이, 말레이시아 역시 10만여 명의 화교(華僑)가 몰살당했다.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공화당의 부통령후보로 선거유세 중인 1900828일에 미국주재 독일대사 슈테른 부르크(Stern Burg)에게 나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길 바란다. 그들이 러시아를 견제할 것이고, 지금까지 일본의 행위를 봤을 때 한국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하는 편지를 썼다. 19019월에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대통령의 암살로 그 자리를 잇기 1년 전이었다. 그 무렵부터 대한제국은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으며, 그에 대해 미국이 책임을 지지 않도록 선을 긋고, 일본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서 좋은 정부를 수립해 유능하게 통치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안성맞춤이다하는 맹신(盲信)을 내둘렀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가려졌던 색안경이다. 대공황을 넘은 미국 기업들이 전에 없는 성장세를 이어갔고, 쿠바 산티아고 항 바깥에서 스페인 함대를 크게 무찔러 푸에르토리코를 거머쥔 뒤 필리핀에서 마닐라도 손에 넣었을 때다. 국민들부터 제국주의를 서부개척인 양 반겼다. 1898년부터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에 떡하니 20만 명의 병사를 몰아넣어 1902년까지 43천여 명이 전사한 끝에 스페인을 쫓아냈고, 곧장 괌도 집어삼켰다. 한반도까지 넘보기 버거웠고, 일본이 동남아에 눈독을 들이지 않게 미리 손을 썼던 것이다. 반대가 없지는 않았다. 윌리엄 브라이언( William Jennings Bryan)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제국주의를 드세게 비난하자 매킨리 대통령은 먹거리로 가득 찬 도시락 통에 빗대 경제 번영을 뜻하는 '풀 디너 페일(Full Dinner Fail)’을 마다할 바보는 없다고 코웃음만 흘렀다. 그가 무정부주의자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달아오른 국민정서부터 팽창주의를 띄우는 날개였다.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다른 국가의 영토로 정치와 경제의 지배권을 넓히는 제국주의에겐 국민의 행복지수(幸福指數)가 높은 남태평양의 바누아투(Vanuatu)도 자원을 놀린 채 무지몽매하게 헐벗은 섬일 뿐이다. 군대가 없으니 주인조차 있지 않다. 당시 국무성(國務省) 극동문제 고문(顧問)으로 아시아 정책을 세웠던 록크힐(W.W.Rockhill) 역시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03년에 알렌(Horace Newton Allen) 공사(公使)에게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을 지지해야 하고, 그것이 제정 러시아에게 만주를 내주지 않을 발판이다하는 말을 루스벨트가 직접 전했다고 한다. 대한제국과 한국인에게 유난히 편견이 심했던 제국주의 신봉자다. 1905아우트 루크(Out look)()’한국, 퇴폐한 나라라는 논문을 조지 케난(T.G.Kennan)이 올렸는데, 대한제국의 부패와 무력함을 넘어 일본 그늘로 들어가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외눈박이 관점이 오늘날까지 일본이 짜깁기해대는 빌미 그대로 루스벨트가 침이 마르게 칭찬한 글이었다. 물론 힘을 키우지 못한 우리나라가 스스로 채운 족쇄이기도 했다. 1592년부터 7년 임진왜란 동안 열에 하나가 죽어나가고도 버리지 못한 성리학의 명분주의(名分主義)는 심지어 영조(英祖) 때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으니, 권력을 위한 이간질과 부정부패가 그만큼 깊디깊었다. 분단으로 바꿨을 뿐 명분 다툼은 지금도 구실을 잡는 기회주의로 주체성을 잃어버린 자기애(自己愛). 그만큼 국민도 소비욕구충족을 위한 이기심만 널을 뛴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책을 꿋꿋이 반대했던 알렌 공사를 1905321일에 잘라버리고,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해댄 모건(Edwia.V.Morgan)을 한반도로 보냈다. 그해 7월에는 다음 대통령 자리를 이은 심복으로 현재 국무성의 전신(前身)인 육군성장관 윌리엄 테프트(William.H.Taft)가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내각총리대신 겸 외상인 카츠라 다로(桂太郞)를 만난 729일에 밀약을 맺었다. 조약 형식을 취하지 않은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이긴 했지만, 비밀에 붙이기 위한 요령이었다. 그 각서에는 러·일 전쟁 후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눈감아주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에서 미국이 거느린 모든 이권(利權)을 넘보지 않으며, 미국의 영유지(領有地)’인 필리핀을 침범하지 않을 것 등 철저히 저희들 잇속만 챙겼다. 테프트는 대한제국의 단독 외교권을 박탈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갖는 것은 현 전쟁의 필연적인 결과요, 오래도록 변함없는 극동 평화를 직접 이끄는 것이다하고 카츠라를 거들었다. 보고를 받자마자 루스벨트는 카츠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내용을 내가 추인(追認)한다는 뜻을 카츠라에게 전해주기 바란다하는 전문(電文)을 보냈다. 나중에 밀약 내용이 미국정부의 공식입장임을 꼼꼼하게 대통령 승인(承認)으로 확인도 해줬다. 일본이 역사왜곡을 에두르는 모든 구실이 루스벨트의 관점과 그 관계에 맞춰져 있다. 간간이 미국 상·하의원이나 지방정부의 발의(發議)만 나올 뿐 국무성과 중앙정부에서 그들의 우경화를 따끔하게 꾸짖지 못하는 속앓이도 같은 배경이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제의로 러·일 강화회의를 주재(主宰)하기도 했다. 190595일에 나온 포츠머드 강화조약의 제1조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월권을 인정함을 못질했다. 2조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경제상 이익에 우선권을 가지며,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함을 거듭 짚어줬다. 한반도 지배에 대한 확고한 지지였다. 이는 도둑질에 앞서 1882년에 ·미수호조약으로 맺었던 거중조정(居中調整 mediation), 즉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분쟁을 국제기구나 국가 또는 개인 등 제3자의 권고로 평화롭게 해결하자는 법적의무를 따르지 않은 범죄였다. 막바로 927일에 제2차 영·일동맹 회의를 통해 영국의 지지 역시 재차 확인했다. 1차 동맹은 일본이 청국과 조선에서, 영국이 청국에서 상호 권익을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기로 1902212일에 맺어져 있었다. 아시아에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이 한반도에 흥미를 잃은 탓이었다. 얼토당토않게 이듬해 루스벨트는 동양평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까지 탔다. 그의 무지와 편견이 불러온 독단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인 듯 꼭 36년 뒤인 1941128일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에서 10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쳤다. 식민지로 한반도를 떠안긴 미국이 한글금지부터 창씨개명이며 징용에 정신대 등 민족말살을 상대성으로 살펴줄 리 없었다. 오히려 감싸기에 나선 맥아더(Douglas MacArthur) 아래 미군정 인사들마다 그들을 문화민족으로 추키는 또 다른 골통 루스벨트들이었다. 일본 군부(軍部)에 대한 몰이해부터 역사를 되풀이하는 우국주의의 불씨를 키웠다.

그들은 중학생 나이부터 곳곳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서 전쟁기계로 길러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끌어냈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해 불태운 과격파를 잇는 마지막 사무라이라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사로잡혀 있었다. 곧 쇼와유신(昭和維新)을 부르짖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가팔랐던 일본 정치와 경제의 침체가 일왕을 잘못 받드는 원로들부터 측근 중신을 비롯해 재벌과 정당 등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이 원인이라며 이들을 무너뜨려 군부로 강력한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두 파벌(派閥)로 갈려 벌건 대낮에 상관에게 칼을 휘두르곤 했지만, 이념 차이는 크지 않았다. 육군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중심인 통제파(統制派)가 육군대신을 통해 그 요구를 풀어가며 고도국방국가(高度?防?家)’ 건설로 수단을 바꿨을 뿐 전쟁을 쫓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도파(皇道派)는 육군대신이었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일본군을 황군(皇軍)’이라고 부른 데서 붙여졌다. 그 영관급(領官級) 장교들이 19313월과 10월에 연이어 쿠데타를 시도했고, 그 사이 9182230분에는 관동군이 봉천 북부 유조호(柳條湖)에서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 군대의 짓으로 덮어씌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에도 미쓰이 (三井) 재벌 간부 등 사회 주요인물을 암살한 혈맹당(血盟團)’ 사건이 이어졌다. 그해 ‘5·15사건때는 만주사변을 승인하지 않던 이누카이츠 요시(犬養毅) 수상이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사살 당했고, 마지막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閣)가 조선총독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추천하며 8년간의 정당 내각은 끝을 맞았다. 이후 일본 군부는 정부조직 위에 들어선 조직폭력배나 다름없었다. 위관급(尉官級) 20대 장교들이 4개 연대를 끌고 총리대신 오카다(岡田 啓介)와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 등을 살해한 ‘2·26쿠데타1936년 새벽에 3일천하로 세계를 들쑤셨다.

관동군 참모인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정부의 명령조차 없이 저질러 내각(內閣)은 물론 일왕의 반대에도 한반도에 머물던 일본군까지 몰려간 만주사변이 장학량 부대의 교전회피 속에 만주국 건국이라는 뜻밖의 콩고물을 떨구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군사작전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일왕의 반대조차 민간 지배층의 속임수라는 맹신이었다. 1882년에 세계 각국의 헌법을 둘러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안을 맡긴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 등 법제국 관료들은 민주주의 성문법 속에 일왕을 자리매김 시키기 위해 기원전 660년이었던 초대 진무(神武王)로부터 당시 메이지까지 끊이지 않은 혈통을 부풀렸다. 헌법조차 역사왜곡이었다. 즉위년인 기원전 660년도 그해에 혁명이 있었다는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을 따랐고, 그 결과 일본서기의 기년(紀年)은 연대가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지도 않았던 몇몇 왕을 꾸며 넣고 말았다. ‘대일본제국 헌법은 그 이듬해 나왔다. 만세일계(萬世一系)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는 제1조로 들어가 11조에서는 천황이 육해군의 통수권자임을 우겨넣었다. 반면에 4조에서는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總攬)하고, 헌법의 조문(條文)에 의해 이를 시행한다고 정해 일본이 그 개인이 아닌 법률을 따르는 입헌군주국가임을 내세웠다. 이후로 일본 우경화가 증명하듯 절대권에 대한 법률은 모순이었다. 헌법 1조와 11조에서 하늘이라는 일왕조차 4조에서는 법에 따라야 한다며 1925년부터 25세 이상의 남성을 대상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등 겉은 민주주의 제도를 갖춰갔다.

 

 

아슬아슬한 통수권 줄타기는 ‘1930년 런던해군조약(Treaty for the Limitation and Reduction of Naval Armament)’을 둘러싸고 팽팽하던 가닥이 툭 끊어졌다. ‘대항해시대이래 해군력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군사력의 뼈대였다. 장장 3개월간 11개국이 모여앉아 그해 1231일부터 발효(發效)된 전체 23개조로 ‘1922년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서 마무르지 못했던 보조함인 순양함·구축함·잠수함의 수를 묶었다. 일본 우익들은 일왕의 군통수권을 정부가 침범했다며 거세게 끓어올랐다. 책임자였던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가 우익 청년의 총에 맞아 1년 뒤 사망했다. 결국 일왕의 통수권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합법적인 명분이었다. 우익의 바탕엔 1910년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로 일왕이 곧 일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천황주권설을 주장했던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愼吉)가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직접 혈맹단 사건도 일으켰다. 그 동료로 일왕 역시 국가의 여러 기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천황기관설로 메이지 헌법에 가장 민주주의 관점을 지키며 우에스기를 궁지로 몰았던 국가법인설(國家法人說)’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1935년부터 책조차 출판금지를 당하더니, 19362월엔 우익들의 저격대상으로 떠올랐다. 야스쿠니 사상까지 일왕 절대주의에서 나왔다. 그들은 죽어서 야스쿠니의 신이 되어 만나자하며 젊은이들을 자살공격에 내몰았고, 연합군에게 넘어가는 태평양의 섬마다 집단 자결이 이어졌다. 곧 신사 자체가 전쟁 도구였다. 하늘의 군대라는 허튼 믿음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밀어붙인 일본 군부는 이미 군인이 아닌 광신도 집단이었다. 부대원들은 살인자이자 강간범에 지나지 않았다. 뒤를 받쳤던 정치·경제계 우익인사들도 적지 않았으니, 보다 철저한 전범재판으로 그 환자들을 걸려내야 했지만, 오랜 전쟁의 수렁에서 전리품을 챙길 명분만 눈독들이긴 소련이나 미국이 똑같았다.

19452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에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 열렸다. 58일 독일의 항복에 앞서 미··소 수뇌부들이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가른 38선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를 통해 미군과 소련군이 나눠먹었다. 미국은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이 참전하길 바랐다. 훗날 대숙청과 강제이주에서 생생히 드러나듯 슬라브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스탈린(Joseph Stalin)은 대가로 1904년 러·일전쟁 때 잃어버렸던 극동이권을 돌려받고자 독일 항복 2, 3개월 후 참전을 약속했지만, 중국 땅 일부를 뚝 떼어줘야 하니 장개석(蔣介石)이 당연히 뿌리쳤다. 뒤를 이은 포츠담협정(Potsdam Agreement)726일에 있었다. 스탈린도 하루 늦게 나타나 88일에야 대일선전포고를 꺼내들었다. 미국이 716일에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했던 탓이다. 그 눈치싸움만큼 포츠담협정은 승리의 화합(和合)이 아닌 밥그릇 다툼이었는데, 소련이 참전하지 않으리라 믿으며 스탈린을 중재자로 여겼을 만큼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를 비롯한 일본의 눈과 귀는 꽁꽁 닫혀 있었다. 히틀러(Adolf Hitler)도 미친 전쟁광이었지만, 독일은 그 짜임새부터 남달랐다. 군부가 제멋대로 쑤셔놓은 전선에 일본 정부는 쩔쩔매는 처지였는데, 19395월과 7월에 벌어졌던 노몬한(Nomonhan incident)전투가 딱 그 짝이었다. 만주국을 세워 눈이 뒤집힌 관동군 23사단이 호롱바일 초원을 넘보며 몽골군의 국경활동을 불법월경(不法越境)이라고 쳐들어갔다가 게오르기 주코프(Georgii Konstantinovich Zhukov)의 제57기계화군단에게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부대 자체가 사라졌다. 정부의 확전반대에도 만주 항공대에 전차대까지 밀어붙이다 혼쭐이 났던 것이다. 그리곤 미국과 영국에게 맞서는 남방정책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듯 계획조차 없이 그때그때 기회를 틈탄 망상(妄想)만 설쳤다. 자연히 준비 없는 전쟁의 병참기지로 한반도만 송두리째 거덜이 났다. 모조리 빼앗겨 주린 배를 채우던 가축사료인 깻묵은커녕 산과 들에 초근목피(草根木皮)조차 남아나질 않았다. 방한복을 만든 가죽으로 동경이에 삽사리 같은 토종개조차 씨를 말렸다.

810일에야 천황제만 지켜달라는 조건부 항복의사를 일본은 밝혔다. 통치권은 연합군최고지휘관에게 넘어간 뒤 국민 의사에 따라야 함을 제임스 번스(James Francis Byrnes) 미국 국무장관이 물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군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을 여느 공습피해로 숨겼다. 언제 머리 위로 원자폭탄이 떨어질지 몰라 바들바들 떨던 일왕 히로히토가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고집해 814일에야 포츠담선언문(Potsdam Declaration)을 그대로 따랐다. 자연히 남북분단도 카츠라 테프트 밀약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서 불거졌던 것이다. 818일에 미국 전략첩보국(OSS:Office of Straegic Service) 부대원 18명과 함께 여의도에 비행기를 내린 이범석(李範奭) 지대장 휘하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노능서(魯能瑞) 등 광복군 정진대(挺進隊)가 다음날 끝내 중국으로 돌아간 까닭도 임시정부가 포츠담협정국이 아니라며 일본군이 막아섰던 데 있다. 그만큼 역사는 꼬리에 꼬리를 잇는 실타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主席)815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하며 애끓는 한()을 백범일지(白凡日誌)에 낱낱이 옮겼다. 겨우 일주일 전이었다. 선생은 87일 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과 지대장들을 이끌고 미국의 전략정보국 작전회의에서 윌리엄 도노번(William Donovan) 소장에게서 오늘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을 시작한다하는 다짐을 받았다. 미국 육군성의 지원을 받은 국내진공작전이었다. 첫째는 중국 산동(山東)에서 잠수함을 타고 침투해, 둘째로 통신시설 및 군사거점을 파괴한 뒤 대민첩보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혼란을 주며, 셋째는 비행기로 무기를 공수(空輸) 받아 후방을 공격하는 교란작전이었다.

 

 

당시 장준하 대위는 강원도반 반장이었다. 194477일에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 쓰카다(塚田)부대를 탈출해 중국군을 거쳐 충칭까지 6000리를 걸어서 광복군을 찾아갔던 그는 통신장비부터 무기와 식량에 휴대품을 모두 갖추어 놓았으며, 일본 국민복은 물론, 일본 종이와 활자로 찍은 신분증까지 지닌 채 공작금으론 금괴(金塊)가 마련되어 있었다. 출발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하고 당시를 돌이켰다. 비행기 낙하반도 따로 있었다. 지리산에 낙하할 계획이었던 이재현(李在賢) 본부요원은 만약 내렸다면 1개 사단 병력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하고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에서 안타까워했다. 자칭 천하무적이라는 관동군이 변변히 저항조차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소련군에게 길만 터줬다. 자칫 한반도 전체가 넘어갈 지경이었다. 미군 전략정책단 정책과 과장으로 일본군의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가운데 한반도와 극동 지역에 대한 초안을 작성했던 딘 러스크((David Dean Rusk)소련이 38도선을 승낙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나는 그들이 더 남쪽 선을 주장하리라고 생각했다하는 미국무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유는 원자폭탄 때문이다. 굳이 미국의 심기를 건들기엔 동유럽에 차려진 밥상이 널려 있기도 했다. 이미 827일에 이승만(李承晩)공동점령이나 신탁에는 반대한다.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군만의 단독점령을 환영한다하는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냈다. 그리고 1012일에 일본으로 들어가서 도쿄까지 불러낸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을 만났다. 하지가 중립에 선 편이긴 했지만, 그때 이미 맥아더가 미군정에게 이승만을 잇는 삼자관계를 다져줬다. 9월말에 국무부가 요청한 여느 재미한인들의 귀국신청은 모조리 되돌린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1016일에 이승만만 미리 들여보내줬고, 귀국이 차일피일 미뤄진 김구 주석 일행은 1123일에야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한도 처지가 비슷했다. 중국군과 함께 타이항산맥(太行山脈)을 누비며 무장독립운동을 펼쳐온 연안파(延安派)인 조선의용군은 팔로군(八路軍) 포병사령관 출신의 김무정(金武亭)이 해방 후 김호(金浩)와 김강(金剛) 등에게 선견종대(先遣從隊) 1000여 명을 맡겨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19451012일에 신의주 동()중학교로 모여든 그들에겐 소련군의 강제무장해제만 기다리고 있었다. 빨치산파인 김일성(金日成)은 목단강(牡丹江)에 머물다 부대원을 끌고 소련군함 푸카초프호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919일 원산항에 발을 디뎠다. 그해 826일 평양에 들어왔던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Chistiakov.I)는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인 국내파 조만식을 최고지도자로 삼아 통일전선을 꾸린 뒤 점차 그 세력을 숙청할 계획이었지만,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해 11월에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반공노선으로 반탁운동을 이끌다 고려호텔에 갇혀 온갖 협박과 회유는 물론 제자들이 간청하는 월남마저 내치다 한국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게 살해당했다. 김일성을 임시위원장으로 그 조선민주당을 집어삼킨 소련파가 1946년부터 이른바 철도보안대와 전술·포병·사격·통신을 가르치는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창설에 나서는 등 북한정부를 수립한 중심이었다. 그 거두가 허가이(許哥而)였다. 모스크바의 로모노소프대학을 졸업해 우즈베크공화국의 수도인 타슈켄트 당비서까지 지낸 그를 젖혀두고 굳이 김일성을 내세웠으니, 결국 소련은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채 공산당 간부가 즐비했던 까레이스키들을 옥죄려는 속셈이었다. 마냥 그들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라는 김일성의 숙청방법에 맞춰 소련파의 2인자인 박창욱(朴昌玉)에게 밀려난 허가이가 자살했고, 남조선노동당계인 이승엽(李承燁)과 박헌영(朴憲永) 등의 숙청에도 큰 역할을 한 그 역시 1956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김일성운동을 펴다가 반종파투쟁으로 연안파에 이어 목숨을 잃었다. 소위 8월 종파사건이었다.

 

 

서슬 퍼렇게 외세가 판치는 그 남북분단 속에서 김구 선생은 1948419일에 38선을 넘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부여잡으려 했던 걸음은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은 현실정치의 패자이기에 앞서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인정할 수 없다하는 다짐만큼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빤히 알면서도 의연한 마지막 독립운동이었다. 장장 반만년을 면면이 이어온 나라다. 그 땅이 두 동강이로 잘리는 마당에 오직 현실 정치만 따랐다면 지금 우리에게 통일을 위한 민족의 사명감도 헛될 따름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선생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당시 행동대원인 육군소위 오병순(吳炳順)이 친구인 김정진(金禎鎭) 포병소령에게 양심고백을 하자 그가 자신의 스승인 박동엽(朴東燁) 대광고등학교 교감에게 알려 당신에게도 전해졌다. 평생 동지인 조소앙(趙素昻) 역시, 아들까지 나서서 저승사자를 피하라고 매달렸지만, 그토록 사랑한 조국에 기꺼이 자신을 재물로 바쳤다. 항상 떠나보낸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등 젊은 한인애국단 동지들에게 죄스러워했던 선생이었다. 1946426일에는 남도 순회 길에 예산(禮山)의 윤봉길 의사 생가를 찾아가 부인에게 큰절을 올리며 자신이 죽고 젊은 그들이 살아 돌아와야 했노라 사죄까지 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죽음이 그렇듯 안두희(安斗熙)의 총부리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심장을 대주며, 꽃다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외세에 짓밟힌 민족혼을 살리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물론 민족주의는 나라를 바르게 일으키는 한때의 방법이지 절대 대안(代案)일 수 없다. 선생도 흠집 하나 없는 성인(聖人)은 아니다. 유교를 뿌리로 불교와 기독교를 두루 겪은 사상의 너울부터 민족의 격동기에 온몸을 던졌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연히 민족 앞에서 이념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안태훈(安泰勳)의 그늘에서 머문 19세 때 성리학자인 해서거유(海西巨儒) 고능선(高能善)에게 받은 가르침을 평생 떠올리며 뻣뻣하게 의협(義俠)을 따른 의병(義兵)에 가까웠다. 그만큼 워낙 대쪽인 구닥다리였다.

전통이 다 낡아빠진 구습은 아니다. 이어 갈 바람직한 사상과 관습은 거듭 대물려야 한다. 기본과 원칙을 다그치는 그 불호령이 사분오열(四分五裂)로 갈린 임시정부를 꼿꼿이 일으킬 수 있었다. 갖가지 거사(擧事)로 세계에 한반도의 독립의지를 알렸을 뿐 아니라 장개석(蔣介石)을 통해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으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특별조항을 끌어냈으며, 누누이 계획만 번드레했지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광복군을 기어코 엮어냈다. 중국 국민당과 군사협력 관계에서 공산당에게 손을 내밀긴 어려웠다. 게다가 선생이 일부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云謂)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하고 쏘아붙인 꾸지람대로 소련은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조국을 자처하는 한편, 철저히 자국의 이익 속에서 스탈린 개인에 대한 충성만 몰아갔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당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을 곧추세우는 신념이 고집불통 이상주의자라면 현재 통일을 꿈꾸는 국민은 누구나 몽상가일 수밖에 없다. 역사청산조차 이루지 못할 꿈이다. 당연히 따를 정도(正道)였기에 선생은 영원히 살아있는 민족혼으로 우리를 지켜본다. 미국도 일본이 그렇듯 테러리스트로 둘러씌웠고, 국내 몇몇 학자들 역시 한인애국단에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분명히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랐으니, 정부가 벌인 특수공작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역에서 민간인들끼리 벌인 무력저항조차 전쟁영웅으로 기리는데, 한인애국단을 거스르면 임정의 법통을 잇는 대한민국까지 끌어내리는 매국노다. 미국의 일방주의 속에서 극렬 반공주의자로 둔갑한 친일파 장은산(張殷山), 김창룡(金昌龍), 채병덕(蔡秉德), 전봉덕(田鳳德), 원용덕(元容德)이 들어앉은 일명 88구락부(俱樂部), 행동대원인 오병순(吳炳順), 한경일(韓京一), 이춘익(李春翼), 한국영(韓國榮), 홍종만(洪鍾萬) 등이 안두희 뒤에 있었다.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模)88구락부의 수장으로 그 총알을 재었다. 국방부 헌병 고문에 올라 미군 군정청을 드나드는 관동군 정보원이었던 정치브로커 김지웅(金志雄)이 어김없이 행동대원들을 끌어 모았다.

그 미꾸라지의 이름은 또 다른 암살사건에서도 나타났다. 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이끌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947719일에 19세 한지근(韓智根)에게 암살당했다. 공소시효(公訴時效)가 끝나자 1974년에는 유필순,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 서울지검에 공범이라고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월남 청년과 학생들이 194511월경에 서울에서 꾸린 극우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 소속이었다. 백의사와 친일파가 즐비했던 경찰의 유대관계는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 배경은 더 밝혀지지 않았고, 몽양 선생의 동생 여운홍(呂運弘)은 좌파를, 둘째딸 여연구(呂?九)는 경쟁자였던 박헌영(朴憲永) 쪽을 암살범으로 이야기했다. 또 다른 증언도 있었다.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南朝鮮勞動黨)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는 박갑동(朴甲東)이 밝히길 한때 여운형과 손잡아 박헌영을 내치려던 김일성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몽양 선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이때 김지웅이 나섰다는 것이다. 그해 122일에는 정치논객 장덕수(張德秀)가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裵熙範)을 비롯한 6인에게 총알받이로 쓰러졌다. 범인들은 모두 김구 선생을 총재로 받들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에 속해 있었다. 이어서 배후인물로 김석황(金錫璜)이 잡히자마자 임정요인들로 꾸려진 한독당(韓國獨立黨) 당원인 그들 뒤에 김구가 있다는 영문진정서를 미군 군정청이 받았다고 한다. 선생이 모택동(毛澤東)을 등에 업어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로 행동대원들에게 반공주의를 불러일으켰던 김지웅의 짓이다. 때문에 김구 선생이 군정청 재판정으로 불려나갔다. 일부러 경무대(景武臺)를 찾아갔던 조소앙도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한다면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가만히 두고만 있지 않을 게야하는 이승만의 경고를 듣고 선생에게 몸조심을 간곡히 당부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고위인사 암살을 시도했을 만큼 섞일 수 없었던 공산당이다. 자유중국의 장개석은 친분조차 두터웠던 사이다.

 

 

미국 방첩부대(CIC) 역시 어느 우파인사가 쿠데타를 노린다며 19481019일 국군 제14연대의 여순반란사건까지 그 흐름의 하나로 꼽았다. 좌파는 고사하고 김구 선생의 측근마저 뜬소문조차 알지 못했다. 대통령 귀에도 들어간 소식이 2001년에야 찾아낸 방첩부대 비밀문서에 주인공 이름이 올라 있지 않으니, 암살을 위해 적절한 선에서 아귀를 맞춘 설정(設定)’만 의심스러웠다. 이승만 정부에 견줄 수 있었던 유일한 지도자는 선생뿐이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를 두들길 수 없는 터라 함께 거들 국내 세력이 있어야 했는데, 쿠데타에 대한 수사는 흉내였을 뿐 안두희를 다룬 재판에서 그 설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암살이 일어나자마자 달려온 이하성(李夏成) 서대문경찰서장은 사건현장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최대교 서울지검장 역시 발이 묶였다. 비록 일제 시절 검사장까지 올랐지만, 조선인 절도피의자를 고문치사 했던 일본인 순사는 물론, 1948528일 보권선거 때 뿌려댄 돈을 갚기 위해 사기를 저지르고 뇌물을 받아먹은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훗날 3·15부정선거사범과 4 ·19혁명 발포책임자를 모조리 기소하며,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었다하는 가르침을 남긴 그가 맡아야 했을 사건이었다. 수사는 대간첩 업무와 그에 따른 범죄를 다루는 특무대(特務臺)에게 돌아갔다. 사건 직후 특무대장은 공모자인 김창룡으로 갈렸고, 재판장도 원용덕이었다. 오죽하면 안두희가 재판정에서 방청권을 직접 나눠줬다. 재판정은 애국지사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구호로 떠들썩했으니, 너무 앞서가서 각본이 훤히 드러나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만으로도 버거운데, 중국을 불러들이면 나라가 공산당에게 넘어갔다. 민족주의자의 쿠데타를 중국으로 짜깁기해댄 까닭도 지인들이 많아 서신왕래가 잦은 탓이었다.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 노통을 두 번 죽이는 지금의 정국과 너무나 닮은꼴이다. 국정원이 인터넷 게시판 댓글로 여론몰이를 했던 생트집도 비슷하다.

그만큼 그들 세 사람의 암살은 아주 치밀한 정치술수를 깔고 있다. 북쪽에 조만식이 있었다면 남쪽에서는 여운형 선생이 대중에게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지도자다.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초기 정국을 이끌었는데, 일제 강점기 지주(地主)와 예속(?屬) 자본가며 친일관료에 언론인 등이 일으킨 한민당(韓國民主黨)은 기울어진 무게를 얹기 위해 더한층 미군정에게 기대며 국내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을 밀어줬다. 미국에서 얇은 정치 꽁수만 주름살마다 층층이 새겨온 노인네였다. 자기 세력이 없으면 한민당에게 끌려 다녀야 할 처지에 친일파들이 정치자금을 대주며 떠받드니, 주는 대로 받아먹을 개들로 보였지만, 도리어 자신이 먹잇감임을 몰랐을 만큼 흐리멍덩했다. 장덕수는 더 꼬여 있었다. 이승만 노선을 따르는 대신 김구 선생의 국민의회를 중심으로 뭉치고자 했던 우파 단결이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반탁운동과 임정 법통계승 운동, 그리고 우익진영 통합은 선생이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바람이었다. 안재홍(安在鴻)의 조선국민당과 권동진(權東鎭)의 신한민족당이 각각 한독당에 통합을 하려다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놓고 충돌한 끝에 갈라서버렸다. 때문에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은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조완구(趙琬九), 조경한(趙擎韓) 등과 함께 한독당 내 국내파의 반대를 무릅쓰며 1947226일에 3.1절까지 합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생이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겠노라 외통수를 두기도 했다. 그 전까지 두 인물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던 허정(許政) 역시 백의사와 한독당의 당원들에게 장덕수가 숨을 거두자 뜻을 거둬버렸다.

반공주의와 애국심으로 돌돌 뭉친 야생마들이 넘쳤던 시절이다. 한민당이 친일파의 눈가림인 반면에 한독당은 임시정부의 전통성을 내세운 만큼 한인애국단과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우러르는 열혈당원이 많았다. 일제에게 손발을 비벼온 개아들들이 그 순수한 열정을 부채질하기는 무척 쉬웠다. 한편으로 안두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하고 범행동기를 내둘렀으니, 당장 김구 선생의 아들로 육군항공대 김신(金信) 소령부터 수사대상이었지만, 역시 쇼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불만이 들끓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보란 듯이 지배층으로 올라선 친일파들에 대한 불만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각본대로 끌어갈 바람잡이 김지웅을 내세운 채 들러리를 섰던 정치군인들은 199241차 겉핥기 증언을 안두희가 같은 해 924일로 다잡은 동아일보 단독 인터뷰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드러났다. 때마다 말을 바꾼 거짓말쟁이였으니, 다 믿을 순 없다. 그동안 한사코 모르쇠였던 이승만을, 암살 6일 전인 1949620일에 경무대로 불려가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하며 아는 척을, 뒤에 대통령이 있다는 암시를 받았던 만남을 굳이 들출 까닭은 없었을 듯하다. 만나러 가는 과정부터 이후 두 차례 실패까지 진술이 꽤나 세세했다. 사전에 알았거나 공모 또는 주도를 했을 미국의 역할이야말로 수수께끼다.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鄭秉峻) 박사와 재미(在美)사학자 방선주(方善柱)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의 기록물에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라는 육군 정보국 문서를 통해 안두희가 미군 방첩부대 정식요원이자 백의사(白衣社)의 비밀 암살단원이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미군 방첩요원이 살인을 했다. 미국이 벌인 짓이 아니라면 첩보요원들의 군기강화를 위해서라도 뒤를 캘 수밖에 없는 신분을 범인이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도 사건을 서둘러 덮어버렸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안두희의 신분이 알려져 반미감정이 커지든, 진짜 배후가 알려지든 미군정과 한민당의 끈끈한 유대관계에 흠이 잡혀 국무성의 공식입장인 이승만 지지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다.

 

 

안두희는 증거로 비()자가 찍힌 한독당 당원증을 내밀며, 자신이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그만큼 김구 선생을 가깝게 대했노라 지껄였지만,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밀정과 위기를 치렀던 임정요인들이 신출내기인 포병 소위를 믿을 턱이 없었다. 비밀당원이 있더라도 티를 남길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 거짓 증거의 모티브였을 한인애국단원들이 미리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위장해 거사를 이루어냈으니, 지나친 설정이 작위적(作爲的)이기만 했다. 한민당도 이승만에겐 쓰다 버리는 설정이었다. 조각인선(組閣人選)부터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고, 마무리만 남았던 내각제 헌법을 갑자기 대통령중심제로 바꿔버리며 대립을 벌였다. 친일파에겐 언제 목을 칠 줄 모르는 칼이 몽양과 백범 선생이었다. 안두희가 군납업체를 굴릴 만큼 뒤가 든든했던 1공화국을 거쳐 19604·19혁명이 일어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진상조사가 수풀을 건드리자마자 김지웅은 느닷없이 일본으로 밀항해 망명신청까지 해서 몸을 꽁꽁 숨겼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내세워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죗값을 치를 재판보다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역사청산에 나설 수 없는 친일파의 허물이었다. 건국과정에서 이승만을 파벌과 분열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 즉 목적달성으로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걱정했던 시대의 등불이 있었다. 미군정 경무부 소속 일석(一石) 최능진(崔能鎭) 수사국장이었다. 두 형을 독립운동으로 잃고 중국을 거쳐 미국에서 체육학을 전공해 워싱턴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간사로 일하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흥사단(興士團) 운동에도 나섰던 그는 외교로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이미 제국주의 열강을 끌어들였던 과거의 수레바퀴로 보았다. 광복은 평양에서 맞았다. 소련군이 들어와 조만식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맡았던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그만둔 뒤 붉은 군대를 속여 트럭에 40여 명의 청년들을 태우고 서울로 내려왔다. 본래는 정치활동에 나설 마음이었다. 신문을 통해 친일파들이 남쪽의 치안을 꿰차고 있음을 알았던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경찰로 길을 틀었다.

처음엔 경찰관 강습소장을 지내다 19451021일에 경무국(警務局)이 들어서자 최능진은 수사국장으로 옮겨갔다. 초대 경무국장인 조병욱(趙炳玉)은 흥사단 동료로 중·일 전쟁 이후 민족운동을 짓밟기 위해 일제가 그 자매단체에 꼬투리를 잡았던 1937628일 수양동우회사건 때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옥살이를 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이미 가는 길이 다름을 그는 몰랐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한민당 살붙이였고, 창당자의 한 명인 조병옥은 독립운동가 고문기술자였던 노덕술(盧德述)조차 걸러내지 않은 채 친일파들을 함부로 경찰에 받아들였다.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명분에 지나지 않다.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조만식 선생을 축으로 북쪽은 민간인치안대만으로도 남쪽보다 더 가지런히 잘 돌아갔다는 자료가 또렷이 남아 있다. 광복군 출신은 대개 국방경비대에 들어가기는 했다. 역사 이래 면면이 빛나는 의병의 전통이 굵직해 기본 소양교육을 갖춘 흥사단 단원들을 비롯한 청년들로 치안유지는 해낼 만했다. 틀조차 잡히지 않은 나라에서 무력은 권력의 어머니였다. 살기 위한 기회주의로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절대충성은 덤이었다. 그 가짜 애국자들을 내치기 위해 수없이 갈등을 빚다가 1946101‘10월 항쟁을 조병옥이 대구 폭동으로 둔갑시켰던 데 대해 조·미공동회담에서 파면이 불거지며 눈엣가시로 찍혔다. 수사국장은 현장에서 피의자들을 일일이 만났다. 뻔뻔하게 경찰로 나대는 일제 고등계형사들에 대한 원성이었고, 그의 보고가 낳은 결의안이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전해졌다. 군정청은 친일파는 즉시 파면하고, 민주주의 경찰로 모범을 보이지 않는 자()들도 점차 골라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조병옥 파면은 그예 묻히고 말았다. 오히려 122일에 부하인 수사국장에게 사직을 강요했다. 경찰의 화합과 사기는 물론 명령을 그르친다는 꾸며낸 죄였다. 그뿐이 아니라 최능진과 가까운 간부들을 전부 지방으로 보내버렸는데, 함께 월남해 친일청산에 뜻을 모았던 나병덕(羅炳德) 특무과장, 김세준(金世駿) 총무과장, 이종호(李宗昊) 정보과장은 치를 떨며 사직서를 냈다. 조병옥의 무리수는 끝이 없었다. 그 특무과장 자리를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에게 물려줬으니, 콜롬비아대학교 철학박사학위는 그저 장식품이었다. 제복은 벗겨졌지만, 일석은 한 달 가까이 친일경찰과 부정경찰이 물러나라는 성명서로 그 별호(別號)만큼 우직하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온갖 모함과 박해로 시달리는 나날이었다. 최능진은 물러서지 않고 1948510일 대한민국 첫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서울시 동대문 갑구에 이승만의 상대로 혼자 나섰다. 선거서류 강탈과 받아줄 직원이 사라지는 등 방해공작이 이어졌다. 기간 안에 후보등록을 못해 제3대 군정청장관인 딘(Dean,W.F.) 소장이 손을 써주고도 두 차례나 더 연기하다 421일에야 어렵사리 후보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정작 선거는 치르지 못했다. 장택상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승만 박사를 당선시키라는 명령을 받을 만큼 민심이 기울자 동대문경찰서 서장 윤기병(尹箕炳)이 사찰계장 최병용((崔秉用)을 내세워 후보추천인 202명을 일일이 심문하는 으름장을 부려 50여 명이 부정서명이라는 자백을 받아내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대법관 노진설(盧鎭卨)에게 직접 등록을 무효로 만들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오르자마자 크나큰 공을 세운 최병용은 계장에서 서울시내 경찰서장으로 길이 트였다. 그때는 정당만 48개였다. 반면에 달랑 1인이 국회의원후보로 나선 정당도 26개일 만큼 우후죽순 들어선 정치단체에 좌우 흑색선전이 판쳤으니, 맞상대조차 없이 무투표당선을 이룬 신익희 같은 열두 명 거물들은 이름값이 그만큼 컸다. 이승만이 이화장(梨花莊)으로 조병옥을 불러들여 맞설 후보 자체에 불쾌해할 만했다. 그 노여움의 대가는 민주주의가 아닌 봉건제 군주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101일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들이닥쳐 독립운동가 서세충(徐世忠), 광복군 출신인 여수 14연대장 소령 오동기(吳東起) 등과 공모해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하는 내란음모죄로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을 덮어씌웠다. 김구 선생에게 엉겨 붙인 트집과 같았다. 이틀 뒤에 여순반란사건이 터져 그 죄까지 몽땅 뒤집어썼다.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을 때도 전쟁을 중지해서 유엔의 도움을 받아 통일조국을 이루자는 즉시 정전·평화통일운동을 벌인 강심장이었다. 1950928일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10월초에 합동수사본부의 친일파 김창룡에게 체포당했다. 3개월 뒤인 이듬해 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내란혐의로 총살형을 받아 그 뜨거운 시대의 등불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한국전쟁 속 억울한 죽음은 켜켜이 산이었다. 1949626일에 온 국민을 울렸던 네 발의 총성은 내 동포가 나를 해칠 리 없다하는 김구 선생의 민족에 대한 사랑을 거스른 채 꼭 1년 뒤 일어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복선(伏線)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병참기지로 패전국 일본 경제에 지름길만 터주며, 이념의 낭떠러지로 오늘날까지 민족을 떠밀었다. 포성만 사라졌을 따름이다. 1961516일 쿠데타로 장갑차와 무장군인들이 서울 시내를 에워쌌고, 담당검사들의 불기소를 뒤집은 19641차 인혁당사건은 잔인한 고문을, 1967년 동백림 사건은 부정선거로 들끓는 시위를 누르기 위한 군바리들의 같잖은 글짓기로, 노동청조차 근로기준법에 콧방귀만 뀌는 경제개발 속에서 1970년 전태일(全泰壹) 열사가 온몸을 불길로 살랐으며, 1973년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판결 뒤 단 18시간 만에 사형시켜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 지금껏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낙인이 찍힌 197549일 민청학련사건(2차 인혁당)까지 몇몇 큼직한 덩어리만으로 전국 방방곡곡이 울음바다다.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으로 봄이 오는 가 싶더니, 12·12군사반란이 터졌다. 찢어죽일 전두환(全斗煥)과 노태우(盧泰愚)를 앞세운 신군부세력이 수사방향을 섬기던 독재자에게 맞추고, 그에 맞는 군인사권을 휘두르기 위해 대통령의 재가(裁可)도 없이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이며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등을 체포했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도 역사의 죄인이다. 12·12로부터 5·18이며 대통령하야에 걸쳐 전직 대통령이 증언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하고 입을 다물었는데,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한 그 본을 보여야 할 기본의무조차 팽개친 어깃장이 대한민국의 이중성이다.

최종길(崔鍾吉) 교수, 한총련 김준배(金俊培) 사건 등 29건은 의문사로 인정받았지만, 장준하(張俊河), 이내창(李來昌) 실족사 등 30여 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다. 197910월에 터졌던 남민전(南民戰)사건도 미심쩍었다. 윤이상(尹伊桑)과 이응로(李應魯)를 엮었다 독일이며 프랑스에게 몰매를 맞더니, 그 동백림사건만 빼고 독재를 반대했던 모든 사건의 동조세력으로 사회 각 분야 지식인과 운동권학생들을 사그리 집어내곤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들췄다. 1987114일에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하는 돼먹잖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초등학생조차 못 믿을 말장난은 저희들 세상이라는 안하무인(眼下無人)만 내비쳤다. 이윽고 시위를 벌이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이한열(李韓烈) 사망사건이 뒤를 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피맺힌 반공주의는 널리 헤아리고도 남는다. 반대로 4·3제주사건은 대구의 10월 항쟁처럼 친일파 경찰이 누런 떡잎이었는데, 당시 미군정조차 문서에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도민의 70퍼센트를 좌익 동조자로 낙인을 찍었다. 친일파들에게 빨갱이라는 한마디는 생명줄이자 피해자들의 재산을 가로채 부를 쌓을 명분이었다. 박정희가, 전두환이 툭하면 긴급조치에 간첩단사건으로 소위 용공불순세력을 연출해 마녀사냥을 이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4·3사건의 판박이였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이야말로 그 이념사냥의 실체를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1948922일에 법률 제3호로 나와 이듬해 18일부터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奸商輩)를 잡아들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가 차려졌던 194885일만 해도 친일파들은 눈치싸움에 바빴다. 시대의 바람을 반대할 구실부터 마땅찮았다. 위원회가 갓 들어서서 처벌대상과 방법이 정해지기 전까지 숨을 죽인 면도 있었다. 제헌국회가 처리할 일이 나라 곳곳 터진 봇물이었으니, 친일청산 역시 떠내려가길 바랄 법했다. 817일 제42차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안이 다뤄졌다. 3일 뒤에는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본회의에서 김인식(金仁湜) 의원이 내놓자 드디어 찔끔찔끔 입질이 왔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하는 말로, 한민당도 친일파의 범위를 확대하고 과도하게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하고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한민당은 겨우 22석이었다. 이승만의 안방인 독촉국민회48석인데 비해 무소속이 103석인 제헌국회에서 국회 내 친일파 숙청안건을 막을 순 없었다. 위원장에 김인식 의원이 오른 국회특별조사위원회가 번듯한 모양새를 갖췄다. 속기록을 살펴보면 특위법안을 옹골차게 끌어주는 의원들은 협박장에 시달리다 못해 집 주변과 시내 곳곳에 반민족행위자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공산당 주구다! 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안을 철회하라!”하는 불온전단이 뿌려졌다. 심지어 국회 본회의장 역시 전단지로 덮였다. 친일 기업인들이 대주는 거액의 자본으로 한민당지도부는 반민법 반대조직인 일명 대지구락부(大地俱樂部)를 끌어갔다. 이승만은 담화문으로 반민법을 제정해도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다하고 입법부를 통해 사법부에서 다룰 삼권분립의 권한을 행정부의 수반이 미리 쥐어짜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후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에게 대책을 찾으라는 이승만의 급한 다그침이 떨어졌다. 그 사이 국회특위는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 교통부장관 민희식(閔熙植), 상공부차관 임문항(任文恒)을 친일파로 밝혀냈다. 민희식과 임문항은 스스로 자리를 떨치고 나갔다. 글쟁이로 이름값에 목을 걸었는지 이승만을 언덕 삼아 유진오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독촉국민회가 연일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며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공산당이 정부 파괴공작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반민법을 제정하는 것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이적행위이며,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주권을 공고히 세운 후에 해야 한다하고 이승만의 주장에 색깔을 입혔다. 제 발이 저린 검찰도 움직였다. 검사들이 공동성명을 통해 집단 사퇴를 을러댔고, 악질 친일파들이 바글바글 들어찬 경찰이야말로 독이 올라 있었다. 이범석 국무총리가 공무원들을 다독일 만큼 뒤숭숭했다. 수없는 억지소리에도 반민법은 194897일 제59차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위법을 만드는 동안 국회 의정활동을 방해하고 의원 개인에게 으름장을 늘어놓다 위원회가 준비과정에 들어가자 거리시위로 맞서서 전단지를 뿌릴 때까지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어용신문(御用新聞)인 대한일보의 이종형(李鍾滎)이 그 간판 격이었다. 의열단(義烈團)에 위장 가입해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직접 살해하거나 잡아 넘겼던 관동군 밀정으로 눈치 빠르게 나는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선 애국지사다하고 악을 쓴 쓰레기였다. 반민법이 나온 뒤 공포로 눌린 행정부 공무원들을 달래기 위해 정부 각 부처 간부들을 끌어 모은 914일에 이승만은 지금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할 시기가 아니다하고 국무원의 거부권을 앞서 내세워줬다.

제헌국회 당시의 국무원(國務院)은 현재 국무회의 같은 심의기관이 아니었다. 합의체 의결기관(議決機關)의 성격을 지닌 꽤나 강한 기구였던 그들은 넘겨받은 반민법안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유는 첫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특별재판부의 구성원에 국회의원을 포함하는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된다. 둘째, 국회에서 특별재판관을 선출하도록 한 것은 법관의 자격을 법률로 정하도록 한 헌법 규정에 위반된다. 셋째, 일제하에서 특정 직책에 있었음을 이유로 처벌(반민법 제2·4·5)하는 것은 ‘8·15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행위를 처벌한다는 헌법 제101조에 위반된다, 하는 것이었다.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거부결정에도 정부는 부득이 반민법을 받아들이기는 했다. 그대로 튕겼다간 국회가 양곡수매법을 부결시킬지 모른다는 울며 겨자 먹기였다. 다음날인 923일에 대한일보와 민중신문의 후원을 받아 이종형이 단장으로 나대는 한국반공단이 주최하는 반공구국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실제 목적은 반민법 반대집회였다. 이승만이 축하 메시지를 챙겼고, 국무총리 이범석을 보내 격려사까지 읊어댄 대회장에는 반민법은 일제시대 동장이나 반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어 온 국민을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다하며,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것은 국회 내 공산당 프락치들이고, 김일성 앞잡이들을 숙청해야 한다하는 거짓 전단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으려는 이간질이었다. 자체 경찰인 특경대를 거느리고 반민특위가 검거에 들어가자 협박과 공포도 글이나 말로 그치지 않았다. 친일경찰 간부들은 특위위원들을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수도청 수사과장 최난수(崔蘭洙),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洪宅喜), 전 수사과장 노덕술(盧德述) 등이 10월 하순에 수사과장실에서 백민태(白民泰)에게 일처리를 맡겼다. 우선 강경파 15명이 제거대상이었다. 그 중엔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의 무료 인권변호사로 생계가 빠듯한 그들에게 집을 내어주고 선대의 유산을 팔아 식비를 대줬으며 이승만에겐 된서리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킨 가인(街人) 김병로 대법원장이, 그밖에 특별검사부장인 권승렬(權承烈) 검찰총장과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도 들어 있었다. 백민태가 자수해 모두 잡아들였지만, 노덕술과 전 중부서장 박경림(朴京林)은 풀려났다.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는데, 어차피 최난수와 홍택희도 겨우 2년형만 받는 데 그쳤다.

 

 

이승만은 입법부와 사법부에게 너그럽게 넘어가자며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하는 담화문을 들이댔다. 역사청산에 대한 보수우익들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기초부실과 도덕성 결여로 나라 곳곳이 이중성에 찌든 부정부패가 판치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대는 앵무새들에게 사람구실을 바라진 못한다. 기자회견을 연 김상돈(金相敦) 특위 부위원장은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는 노인네를 잘근잘근 씹어주고 검거활동에 힘을 쏟았다. 첫 검거는 화신기업(和信企業)의 총수 박흥식(朴興植)이었다. ·일전쟁이 터지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며 일본이 밀어주는 돈벌이로 회사를 불렸고, 1942년에는 일왕을 만나서 대동아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했던 데다, 일제에게 비행기와 탄약 나부랭이를 대준 군수공장을 굴렸다. 두 번째는 어용 언론인 이종형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변절자 최린(崔麟), 친일 변호사 이승우(李承九), 일본귀족 이풍한(李豊漢)과 이기용(李琦鎔), 일찌감치 일제 경찰로 들어가 1900년대 의병부터 1920년대 무장독립군의 씨를 말려 평북 고등계과장을 거쳐 충남도지사에,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까지 해먹었던 이성근(李聖根), 또 노덕술도 잡아들였다. 거침없는 검거에 헐레벌떡 도망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일부는 일본으로 밀항을 갔고, 조선총독부의 어용 자문기관이었던 중추원(中樞院) 참의 방의석(方義錫)과 전 수도청 부청장 이구범(李九範)은 그 직전에 부산항에서 체포했다. 군대야말로 도망친 친일파들의 소굴이었다. 경찰 최고위급인 경시(警視)로 지금의 총경(總警)을 지냈던 전봉덕이 낙하산을 태워준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통해 헌병사령관에 올라 있었다. 분단 현실에 배를 두들기는 똥배짱이었다. 참모총장 채병덕도 일본군 중좌 출신이었고, 기어든 떨거지들을 줄줄이 영관급으로 받아줘서 군대에 경찰을 거느린 친일파 행정부와 반민특위를 품은 국회의 민족진영으로 국가권력이 나눠져 있었다. 친일파들에게 공권력(公權力)이 송두리째 몰렸던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이 내지른 어처구니없었던 대한민국이다.

그나마 경찰제복을 믿었던 친일파는 30여 명을 붙잡았다. 일본 군국주의 전쟁을 띄워댔던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정국은(鄭國殷)과 문인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도 반민특위에 끌려오자 친일파들이 맞불을 피워댔다. 19492월초였다. 경무대 국무회의에서 반민법을 솜방망이로 꺾을 반민족행위처벌법 일부 개정의 건이 속전속결로 기워졌다. 215일에는 이승만이 특별담화문을 주워섬겼다. 개정안을 두둔하며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사람을 구금(拘禁)해 고문한다는 보도가 있어 삼권분립을 해치기 때문이다하고 억지를 부렸다. 꼭 집어서 경찰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떠벌였다. 반민특위가 강하게 맞섰고,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도 그 활동은 전혀 불법이 아니니 정부가 협조하라며 받아쳤다. 가람 선생과 신익희 국회의장을 한 자리로 불러낸 이승만의 허술한 설득 역시 먹힐 리 없었고, 국회는 223일 제239차 본회의에서 반민법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그 무렵 반민특위는 정부 내 친일파 조사를 이승만에게 요청했다. 처음엔 순순히 받아들이더니, 갑자기 말을 바꿔 김상덕(金尙德)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노덕술조차 석방하라고 앙앙거렸다. 당연히 김칫국만 들이켰다. 그때는 또 담화문으로 반민특위 활동에 신중을 기하라하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행정부의 발길질에 차이며 2개월여 만에 특별재판부는 빠르게 기운이 빠졌다. 처벌은 그야말로 사랑의 매였고, 34일에 이광수가, 이윽고 최남선도 풀려났다. 삼권분립을 멋대로 주무르는 행정부와 입법부 중간에 끼어서 갈팡질팡 헤맸던 사법부가 돌아섰음을 뜻한다. 자금부터 정보며 조직력에서 반민특위를 껑충 앞섰던 친일파다. 3월초에 서울시경국장 김태선과 사찰과장 최운하가 반민특위를 짓찢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리곤 특위위원 전원을 내사에 들어갔다. 미국유학파 언론인 출신으로 특위활동이 가장 뛰어나고 이승만의 허울을 요목조목 벗겨내는 김상돈 부위원장이 본때를 보여줄 인물로 꼽혔다. 친일파로 몰아붙일 트집거리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미국에서 돌아와 농촌교화사업을 벌이며 지금으로 치면 이장인 총대(總代)를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에게 즉시 건너간 보고는 319일에 국회에서 긴급파면 동의안으로 튀어나왔고, 김상돈 의원을 몰아내진 못했지만, 친일에는 친일로 계속 맞불을 붙였다. 테러도 있었다. 319일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김우종(金宇鍾) 조사부장이 호위경찰에게 총을 맞았다. 범인과 경찰은 오발이라고 둘러댔지만, 친일파에게 받은 명령문이 증거로 드러났다.

때마침 친일파들의 주장대로 국회 프락치(fraktsiya)사건이 터졌다. 소장파인 이문원(李文源), 최태규(崔泰圭), 이구수(李龜洙), 황윤로(황윤호·黃潤鎬) 의원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로 미군과 소련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남조선노동당 공작원이라고 덜미를 잡힌 게 520일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북한 공산당과 같기는 했다. 월북한 박헌영과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모두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면 정치에 흑백논리만 있을 뿐 좌파와 우파며 민족진영을 고르게 살필 중도(中道)가 자랄 수 없다. 반공주의만 내지르면 상대성을 잃어버린 독선이다. 미국에서도 19502월에 위스콘신(Wisconsin)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래이먼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가 진보주의 민주당 행정부를 궁지로 몰기 위해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하는 일명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암흑기를 불렀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미국인들의 절대 지지를 얻은 탓이었다. 외교정책은 물론, 지식 활동과 문화예술을 막아섰던 그는 육군인사들을 건드렸다가 군대와 의회에게 195412월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나라에도 엇비슷했던 인물이 있다. 이승만의 든든한 뒷받침 속에 특무대장으로 상관을 우습게 알고 날뛰었던 인간백정 김창룡이다. 물론 당시 북한은 이미 전쟁준비가 한창이었다. 남북연석회의에 나섰던 김구 선생도 끝내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했다. 그만큼 대화를 하는 척하며 정보를 캐냈어야 하는 상대성과 유동성(流動性)조차 없이 국가보안법으로 일방주의만 내질렀다. 국회프락치사건을 맡은 합동수사대부터 친일파의 알짜배기 몸통인 경찰과 검찰은 물론 헌병대가 나섰다. 3월부터 두 달간 전체 국회의원에 대한 내사가 이루어졌다. 서울 시내는 “국회 내 빨갱이를 몰아내자하는 시위로 들썩였고, 5월 23일에 구속 의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8895로 발목이 잡혔다. 화살은 거침없이 찬성표 88명에게 날아갔다. 531일에 탑골공원에서 국민계몽회라는 유령단체가 국회 내 빨갱이 88 의원을 잡아내라하고 외쳐댔다. 3·1운동의 성지인 탑골공원의 의로움으로 대중의 눈을 가린 수작질이었다. 물론 종로가 사회문화의 중심지이긴 했지만, 앞장 선 몇몇만 친일파로 모여든 군중은 무지렁이 서민들이었다. 600여 명이 국회로 몰려간 62일에는 특위위원들을 죄인인 양 헐뜯으며 친일파를 풀어주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날 김상덕 위원장은 다음날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다는 정보를 얻고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에게 경비를 의뢰했지만, 그는 이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에게 귀띔을 받은 뒤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겁니다하는 말만 남겼다. 다음날, 특경대(特警隊)는 사무실 안으로 들이치는 무리에게 공포를 쏴서 겨우 막아냈다. 그때서야 중부서 경찰들이 들이닥쳐 군중을 해산시켰는데, 특경대에게 붙들린 20여 명의 주동자 중엔 국민계몽회 회장 김정한(金正翰)만이 아니라 그 최운하도,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까지 있었다. 친일경찰들은 각 서()에서 사찰과 소속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꺼내들었다. 한편으론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서울시경 경찰 9000여 명 전원이 사직서를 들이밀었다.

내무차관 장경근(張暻根)과 치안국장 이호(李皓)는 뻔뻔하게 64일에 최운하를 풀어주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설쳐댔다. 특위는 쓴웃음만 삼켰다. 다음날 모여 앉은 시경국장 김태선,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尹明運), 보안과장 이계무(李啓武) 등은 우선 특경대를 엮어 들이기로 했다. 무력(武力)을 잃은 특위는 깐깐한 책상물림들뿐이었다. 감싸주겠다는 이승만을 대신해 조무래기인 내무차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중부서 경찰 40명을 끌고 윤기병은 다음날 아침 7시에 반민특위본부를 습격했다. 그들이 특경대원 24, 특위직원 및 경호원 9명을 체포해 수사서류와 집기까지 가로채는 동안 지방에서도 각 특위지부들을 친일경찰들이 동시에 휩쓸었다. 개개인의 집 역시 거쳐 갔다. 국회는 89 59로 가결(可決)한 내각퇴진 결의안으로 맞섰다. 친일경찰들과 특경대원들을 교환해 석방시키는 이승만의 물 타기에 어정쩡히 넘어가나 싶더니, 잇따른 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노일환(盧鎰煥), 서용길(徐容吉) 특위위원을 옭아맸다. 김약수(金若水) 국회 부의장도 죄인으로 묶였다. 그들은 미군 철수와 남북정치회의 개최 따위로 소통을 내세운 소장파의원들이었고, 항의 끝에 최국현(崔國鉉), 김장열(金長烈) 특별재판관도 물러났다. 두 차례에 걸친 프락치사건은 민족을 위한 중용(中庸)의 이치조차 없이 반대파를 몰아내는 수단으로 조여들었다. 매국노들을 체포하기는커녕 국가기관이 거꾸로 친일파들에게 끌려들어갔다. 그리곤 반민법 개정안이 나왔다. 공소시효를 1950620일에서 1949831일로 뚝 분질러버린 채 반대표는 고작 아홉 명에 그쳤다. 한마디로 면죄부였다. 갖은 방해로 두 달 남짓만 버티면 법 뒤로 숨을 수 있었으니, 특위위원과 특별검찰관들은 다음날 전원이 사표를 냈다. 곧장 김구 선생의 암살이 마침표를 찍었다. 온 국민의 애끓는 통곡이 잦아들지도 않은 77일에 반민특위를 결사반대했던 이인(李仁)이 위원장을 맡아 특경대를 해체하고, “더 이상 반민족행위자 체포는 없다하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이름을 스스로 더럽혔다. 이승만의 반대에도 가인 선생을 대법원장으로 끌어줬던 그는 광복 후엔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갈대나 다름없었다. 잇따라 1949822일에 반민특위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추리고 추렸던 골수 친일파만 7000여 명이었다. 실제로 체포해서 다룬 건수는 682건 뿐이었고, 재판에 넘어간 40건 중에도 감방에 갇힌 수는 고작 14명이 전부였다. 사형집행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죄수들조차 곧바로 풀려났고, 현실을 둘러보지도 못하는 노인네를 앞세운 친일파들은 온갖 부정부패를 내질렀다. 이승만은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할 위선자다. 아랫것들이 부정으로 독재를 낳았다는 변명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인 사람을 바르게 쓰지 못해 친일파의 장단에 놀아난 허수아비였음만 분명하게 짚어준다. 그 허튼짓이 그대로 옮아간 참모총장 채병덕은 영락없는 원균(元均)이었다. 일본군이었을 때도 병기창에서 잔뼈가 굵어 야전 경험이 전혀 없었던 얼뜨기가 작전 지휘권을 틀어쥐곤 명령만 떨어지면 단숨에 인민군을 까부시겠다고 목청을 키워댔다. 이승만부터 평양까지 밀어붙이는 데 3일 운운하며 서로 죽이 착착 맞았다. 북한의 군사력을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감조차 잡지 못한 채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남침정보가 연이어 흘러들었을 때다. 채병덕은 195051일부터 내려졌던 전군비상계엄을 623일에 풀어주더니, 하루 앞을 모르는 시기에 그 다음날 전방 지휘관들을 싹 갈아치워서 국군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민군의 탱크보다 갈피를 못 잡아 힘없이 무너졌다. 일본군과 그 떨거지인 만주군 출신들은 우왕좌왕 도망치기만 바빴다. 전방부대 중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후퇴한 부대는 백선엽(白善燁)1사단과 김종오(金鍾五) 대령 아래 6사단뿐이었다. 백선엽은 분명히 골수 친일파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9기로 독립군을 토벌했던 소위 간도특설대의 야전 경험이 한국전쟁에서 우러났던 것이다. 그를 전쟁영웅으로 추키는 우리의 자화상만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가 살려줬던 박정희(朴正熙) 감싸기이기도 하다. 같은 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썼다는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御奉公)’이라는 혈서(血書)와 편지가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시대의 유행이었더라도 이미 한 차례 나이제한에 걸린 채 다시 시험을 치를 만큼 간절히 일본군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까지 했다.

만주군 보병 제8사단 소좌로 토벌 대상인 열하성(熱河省) 지역 팔로군(八路軍)에 동포 독립투사들이 없었더라도 박정희가 일본을 위해 싸웠음은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중국인들에게 박근혜는 전범의 딸이다. 보통학교 5학년 때 충무공(忠武公) 전기를 읽고 깊이 존경했다며 두고두고 성웅(聖雄)의 민족애와 국가관을 자신에게 둘러씌웠는데, 정작 1963년에 펴낸 자서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히틀러를 무척 쓸 만한 인물로 추어올렸다. 처음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이기주의로 내모는 집단 전체주의인 파시스트였다. 숭배까지 했다는 나폴레옹(Napol?on Bonaparte)조차 나치 도살자에게 밀릴 만큼 목적만 밀어붙였다는 뜻이다. 남의 침략으로 피눈물을 흘린 민족애 속에 그 동맹국 전쟁광을 품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만큼 끼워 맞춰진 우상이 아닐 수 없다. 국가를 위한 헌신을 몰라주는 배신감이 유신독재를 불렀다는 소설도 어이없는 찬양가의 한 구절이다. 그가 아니면 오늘날 컴퓨터조차 쓰지 못한다는 우격다짐은 만약이라는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는 역사의 울에 스스로 갇혀버린다. 한반도를 도와줬다는 일본의 억지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제 앞가림을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설핏 챙겼을 뿐이다. 도리어 2005년에 드러난 1965년 한일협정문서에서 19631015일 제5대 대선(大選) 때 이미 일본의 어업협상 마지노선을 알고도 어민들의 생활고를 돕기 위해 40마일(mile)까지 전관수역(專管水域)으로 배타적(排他的) 특권을 따내겠다고 표를 얻었다. 협상에 나서자마자 급히 12마일로 일본에게 맞춰버린 이중성이었다. 국가의 대일청구권만이 아니라 개인청구권 역시 팽개쳐서 피해자들을 나라 없는 유민(遺民)으로 내돌렸고, 조상의 얼이 깃든 문화재까지 등을 돌렸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역사든, 경제든 국민의 뼛골을 빼먹었던 피맺힌 대가다.

 

 

같은 일본군 출신이지만, 김종오 대령은 징집 당했던 학도병이었다. 계엄령이 풀렸음에도 오직 그만이 6사단의 외출을 허락지 않고 7연대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해 인민군 24000명의 기습공격 속에서도 40퍼센트를 해치우며 춘천과 홍천을 향해 내려오는 적을 닷새나 묶어뒀다. 독립운동가였던 김홍일(金弘壹) 장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던진 도시락 폭탄을 만들었던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전쟁을 맞았다. 무장독립군부터 중국군과 광복군을 두루 거쳤던 52세의 노병답게 경기도 시흥에 세운 전투사령부로 도망가는 병력을 끌어 모아 일주일을 버터서 미군이 들어올 시간을 벌어줬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전설은 김영옥(金永玉) 대령이다. 미국 포털사이트인 엠에스앤닷컴(msn.com)’2011년 현충일을 맞아 미국 역사상 가장 우러를 전쟁영웅으로 꼽은 16인 중에 유색인종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던 아름다운 군인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아끼는 바른 양심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100대대로 불렸던 일본계 2세들로 차려진 442연대전투단 소속 1대대를 이끌고 유럽전선에서 다른 미군부대들이 피해가는 작전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길 주저치 않았다. 한국인 상관을 꺼렸던 부대원들로부터 불사신 영(Young)’으로 받들리며,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연합군사령관조차 내 휘하에 있던 50만 병사 중 최고였다하고 돌이킬 만큼 값진 전공(戰功)이 넘쳐났다. 빨래방인 코인 런드리(coin laundry)’를 최초로 세워 돈을 긁어모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기복무를 박차고 나왔던 군대로 돌아갔다. 통역장교로 뽑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국어 시험에 떨어져 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서 중공군을 막아냈고, 구만산 탑골과 금병산 전투에서는 빗발치는 폭탄 세례 속을 뛰어다니며 번번이 승리를 일군 유색인종 최초의 미군 대대장이기도 했다.

미국은 당연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걸어준 최고훈장들도 그의 용기와 희생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고아원을 세워 우리 아이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전쟁에 지친 부하들이 그들을 찾아 마음의 상처를 서로 돌보도록 살펴줬으며, 전쟁 뒤에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시안 여성들을 위해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한인건강정보센터등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을 펼쳤다. 군사고문으로 다시 아버지의 나라를 돕기 위해 장군 진급조차 걷어찼다. 유색인종으로 취업이 어려워 군대를 택했던 만큼 평생 인종차별을 꾸짖는 대찬 마음가짐은 로스앤젤레스의 리틀 도쿄442부대 추모비를 세울 때 비문(碑文)을 쓴 옛 부하 벤 타마시로(Ben Tamashiro)가 자문을 구하자 미국 정부에 의해 일본인들이 억류(interment)’ 받았다는 단어를 나치가 유태인에게 저질렀듯 집단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꾸길 망설이지 않았다. 2007년에 미국 하원에서 내놓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결의안(H.RES.121)’의 숨은 도우미이기도 했다. 그 결의안을 꺼내놓은 캘리포니아(Californian)의 일본인 3세 혼다(Mike Honda) 의원이 교포사회의 벽에 부딪혔을 때 김영옥 대령을 찾았다. 어기차게 반대하는 옛 부하들과 함께였다. 전우들에게 우리가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하고 대령은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되물었고,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던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머리를 조아린 끝에 찬성 의사를 밝혔다. 말년에는 노근리(老斤里) 양민학살을 다룬 조사관으로 보냈다. 미군이 집단학살했던 양민 400여 명의 죽음에 대해 사과를 끌어냈는데, 한인 2세이긴 하지만, 드레진 군인정신과 인류애를 섬긴 미국 정부의 믿음이었다. 백선엽은 영웅이랍시고 본받을 인격조차 없다.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긴 즐기면서 조선 독립을 위해 내가 싸운다고 독립이 빨리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을 토벌하는 일이 조선을 안정시킨다고 생각했다하며, 빨치산 토벌 때는 지리산 4개 도(), 9개 군() 지역에 있는 주민 20만 명도 이 안에 있으면 다 적이다하고 지껄인 그는 조국이나 인류애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싸운 보신주의자였을 뿐이다.

5·16쿠데타도 그 기회주의에서 자랐다. 끊임없이 구실을 만들고 명분을 짓조른 장기 독재가 똘마니들로 12·12까지 이어졌으며, 지난 세월 내내 역사와 추징금에 얽힌 전두환의 말본새 역시 앵무새였다. 노태우야 군말이 필요 없는 공범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구()정치세력을 등진 채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비리로 발목을 잡은 행정부의 측근들부터 암살 같은 탄핵(彈劾)을 휘둘렀던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사법부는 물론, 언론을 앞세운 기업도 모자라 국정원 정치군인들까지 반민특위를 무너뜨린 친일파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노통의 뜻을 따른 공권력이라곤 없었다. 65년 내내 그 미래타령으로 힘겨운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들조차 독재의 단물을 빨아댄 성공신화에 홀려 사기꾼 이명박에게 서울시장을 내어줬을 때부터 4대강이, 그 뒤를 따를 박근혜가 빤히 보이더니, 친일파 이종형처럼 빨갱이네, 종북(從北)이네 하는 새로운 반민자들만 득시글거린다.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 전두환을, 4대강을 닦달하는 게 절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도덕성 무덤을 덮는 박근혜의 삽질일 따름이다. 일본에게는 과거를 돌아보라면서 저 자신은 역사청산을 캐물었을 때마다 과거에 매여 사시네요하고 비웃음만 흘렸던 두 얼굴이 역겹기 그지없다. 김대중 정부는 국가부도로 내몰린 나라살림을 먼저 돌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추징금만이 아니라 부정부패의 축인 기업과 언론이며 검찰부터 바로 잡아 대를 물려서 전체를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함을 알았던 노무현 대통령이다. 일본과 중국만 역사왜곡을 해대지 않는다. 우리나라야말로 통계자료를 속이고, 나라의 생명줄인 4대강 환경평가서를 짜깁기해서 하늘의 이치인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리곤 책임은커녕 떠넘기기만 바쁘다. 치르지 못한 역사청산이 이중성과 도덕불감증을 부풀려 후손들에게 빌려온 한반도조차 골골거린다.

 

 

일본의 정치 흐름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왕은 미군정 밑에서 194611일 관보(官報)에 실렸던 인간선언으로 더는 신이 아니다. 그해 113일에 나온 새 헌법 제1조는 일본을 통치하는 국가원수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그 위치는 국민의 전체의사를 따라 결정하는 존재로 바뀐 채 오늘에 이른다. 지금은 군부 대신 일왕과 우익을 야스쿠니신사가 잇는다. 그 역할을 짓졸랐던 장본인도 에이(A)급 전범인 카야 오키노리(賀屋興宜). 대장성(大藏省) 대신을 지낸 그가 일본유족회장으로 정부가 직접 야스쿠니신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야스쿠니신사 국가 호지(護持) 요강을 내놓은 데 그치지 않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를 요구하는 운동을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가족을 기리는 유족들의 소박한 정서에 태평양전쟁은 올바른 전쟁이었다, 하는 우익들의 세계관이 맞물려 눈물을 짜댔다. 어긋난 영웅심을 부추기긴 미국과 똑같다. 게다가 자민당은 부지기수인 유족들에게 다양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주며 표를 얻었고, 유족은 후생성에서 받는 돈의 일부를 야스쿠니신사에 내서 우경화를 북돋는 거대한 공동체로 굴러간다. 일본의 82, 83대 총리를 지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도 후생장관과 유족회장을 거쳤다. 87대 이후 연거푸 3선 총리를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역시 후생장관을 두 차례나 지내며 유족회와 가까웠고, 매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때 떠벌인 마음의 자유보다는 아예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듯 지지율이 실제 이유였다. 200419일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까지 늘어놓았다. 자민당 의원들이 이듬해 1018일에 집단 참배를 했고, 2006815일 종전기념일마저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찾자 아시아를 넘어 호주도 분노로 한껏 끓어올랐다. 뒤를 이어 아베 신조(安倍晋三)와 아소 다로(麻生太郞)를 앞세운 자민당은 20098월 총선에서 어이없이 주저앉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외톨이 외교가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지핀 탓이 컸다. 본래 대만 땅인 조어도(釣魚島)를 차지한 중국에게 맞서온 일본의 우울증에 민주당의 역사 반성은 화를 키웠고, 경제는 숫제 바닥을 쳤다. 그 옆구리를 간질여서 아베가 다시 돌아왔다. 헌법을 뜯어고쳐 중국에게 겨룰 군대를 키우려고 한다. 독도도 넘볼 기세다. 항상 극과 극은 공존하기 마련이고, 지나친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일본 역시 작지 않다. 우리나라가 그렇듯 골통 우익은 따로 있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대한민국이 3·1 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대물림한다고 밝힌다. 자연히 국군의 전통성도 광복군이다. 그에 비해 1대부터 16대까지 육군참모총장 13명 가운데 최영희(崔榮喜) 장군을 뺀 12명은 몽땅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해군과 공군과는 걸어온 길이 사뭇 달랐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孫元一)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원장을 지낸 손정도(孫正道) 목사의 아들이었고,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崔用德) 장군은 중국공군사령관까지 지내며 광복군의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다. 1공화국 때 전국 경찰간부 1157명 가운데 82퍼센트인 949명이 친일파였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기업인도 55명으로 현재 우리나라 기득권층의 56퍼센트를 차지한 그들의 후손과 길러낸 얼뜨기들이 정경유착 속에서 일본 골통 우익들처럼 역사왜곡을 내지른다. 오죽하면 소설을 쓴다. ‘M16’ 소총으로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쏘고, 다시 왼쪽 가슴을 쏜 다음, 끝내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는 허원근(許元根) 일병은 영락없는 슈퍼맨이다. 유전자를 연구해 북한이 제풀에 무너질 막강 한국군을 기를 수 있다. 어느새 34조를 넘긴 국방비 예산을 크게 줄이고, 통일비나 사회복지며 4대강 복구로 돌려서 나라의 숨통을 터줄 귀한 유전자다. 말 그대로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서글픈 대한민국이다. 국가기밀도 30년이면 비공개에서 풀리는데, 박정희가 이중성으로 내내 콤플렉스를 앓았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기록은 자그마치 70년간 묶여 있다. 그만큼 강한 부정은 긍정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 헌법에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하는 민족의 사명이 있다. 또 제663항은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하고 행정수반의 필수임무를 거듭 짚어준다. 지금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반해 헌법부터 가없는 이상주의다. 마땅히 지켜야 할 정도인 까닭인데, 대중의 자의식(自意識)은 아주 생뚱맞다. 피해보상은커녕 우리 근대사를 스스로 내팽개쳐 애걸복걸 매달려 얻어왔던 한일협정 차관(借款)으로 저마다 허리를 바짝 졸라맨 국민이, 월남파병 속에 벌어들인 목숨 값이, 짓밟힌 인권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냈는데, 오늘날까지 박정희를 우러르는 역사인식 자체가 영락없이 나라님을 들먹이는 봉건주의다. 전체주의 군사문화에 찌든 일본을 비꼴 염치조차 없. 당파싸움 같은 명분에 매인 정치판도, 돈이 학벌을 낳아 다시 부를 쌓으며 신분을 대물림하는 허튼 계급주의도, 새로운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갈려 사람을 밟아대는 사회문화도 전부 조선시대나 다름없다. 국민이 스스로 일으킨 나라살림이다. 시름겨웠던 그 희생을 보잘것없이 깎아내리니, 턱없이 떨어진 주인의식이야말로 꺼풀뿐인 민주주의다. 표심(票心)이 그 꼴이니 제헌국회 때나 지금이나 정치가 달라질 리 없다. 자원봉사로 들어섰던 기초의원들도 해마다 활동비에 거품을 키우더니, 작년엔 여론조사까지 짜깁기해서 연봉만 올린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10년 전에 그들 중 무려 72퍼센트가 전과자 출신이었다. 지역 유지(有志)랍시고 사기와 부동산투기며 환경법 위반 등등 돈에 팔아넘긴 양심들이 바글거렸다. 정치가 돈벌이로 나대는 한 경제민주화는 통일만큼 어렵다. 병역의무조차 19대 국회는 18.6퍼센트가, 고위공직자 아들들은 네 명 중 한 명이, 재벌들은 셋 중에 하나 꼴로 면제를 받는다. 일반인보다 10퍼센트 가까이 많다. 군대를 가더라도 단기사병을 비롯한 보충역이 22퍼센트를 웃돌고, 현역은 60퍼센트에 불과하다. 일명 육개장들도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아들이 혜택을 보자마자 1992년 말에 폐지했던 6개월짜리 석사장교였다.

 

 

먹고사느라 힘들다지만, 기우뚱한 나라를 떠받치느라 국민의 피땀은 몇 곱절씩 더 빠져나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람쥐 쳇바퀴 신세다. 5공화국 비리청산으로 부정부패를 걸러낸 새마을운동이 1973년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그라민 은행(Grameen Bank)’ 같은 무상소액대출제도를 덧붙여 가난한 여러 개도국(開途國)을 이끌고 있지만, 우리는 켜켜이 쌓인 앙금이 아직도 수북하다. 농어촌에 길을 닦고 지붕을 얹은 돈이 집집마다 져야 했던 은행 빚이다. 지역별 작물조차 나누질 않은 일방주의 군사문화가 고추부터 밤에 깨 파동을 불렀으며, 연대보증으로 옭아맨 공공연한 사채업 속에서 농협과 수협이 갖은 비리를 저질렀다. 도시 위주의 발전도 저임금 노동자들을 먹여 살린 생산단가조차 맞지 않은 밥상물가였다. 추곡수매(秋穀收買)로 갚고 봄에 다시 빚을 내면 도시의 자식들이 이자를 대는 나라 자체가 식민지 수탈 같은 꼬락서니였다. 부동산 거품과 투기는 자본주의의 생리이긴 하지만, 기득권층의 이중성만큼 가파른 지역 간 불균형 속에서 전체 유통구조가 재벌들에게 넘어가며 소득차이가 부른 물질만능이 지하경제만 키우는 밑거름을 깔아줬다. 1980년대엔 인신매매 납치사건까지 매일 뉴스를 뒤덮었다. 자연환경이야말로 난도질을 당했다. 무수한 저수지와 댐은 물론 도로 어디에도 동물이 이동할 길목은 없었다. 지리산이며 한라산 중턱까지 함부로 아스팔트길을 뚫어 일제의 쇠말뚝만큼이나 민족의 정기(精氣)가 흐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끊어버렸다. 하천 생태계는 이젠 되돌리지도 못한다. 값싼 고기거리이자 소득증대 양식용으로 들여왔던 미국산 농어인 배스(Bass)와 블루길(Blue Gill)에 황소개구리는 제 구실도 못한 채 퇴치사업으로 지자체(地自體)의 예산만 축내는 물귀신이다. 먹고살기가 빠듯했던 만큼 나라살림을 귀히 여겨야 했을 기본 도리가 너무나 아쉽다. 앞선 선진국을 살펴 멀리 내다보는 찬찬한 관점이 아니라 밀어붙이기 군사독재는 빽빽하게 덮여 있지만, 경제 가치라곤 쥐꼬리인 아카시아나무만큼 뿌리가 질기다. 반만년 민족의 젖줄인 녹조라떼’ 4대강이 그 막장 드라마다.

창조경제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21세기는 생활 속에 수없이 떠도는 온갖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해서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낳는 정보화 시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줄곧 걸어온 길이었고, 한류도 그 하나다. 반면에 상업주의 영상미디어로 들뜬 사이 국정원이 정치개입이나 해댄 채 민생은 바닥을 뒹굴며 촛불을 밝혀든 국민에게 등을 돌린 공영방송과 박근혜 정부다. 지키지 않는 공약만큼 거짓 희망만 나불거려온 그들이다. 일찍이 19181월부터 5월까지 짧은 이념전쟁 속에서 수만 명이 피를 흘렸던 핀란드는 연립정부가 사민당(社民黨)을 온전히 끌어안았고, 소련침공에 맞선 1939겨울전쟁을 치르며 국민이 하나로 뭉치긴 했지만, 저만의 정치외교부터 두드러졌다.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댄 처지를 상대성으로 살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명 마셜 플랜(Marshall Plan)으로 일컫는 미국의 유럽부흥계획(ERP, European Recovery Program)’을 돌려세우곤 1948년에 소련과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FCMA, The Treaty of Friendship, Cooperation and Mutual Assistance)’을 맺어 냉전시대 내내 중립을 지켰다. 초기 정부구성과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소련이 입김을 끼얹기는 했다. 쉽고 빠른 미국의 돈줄을 잡았다면 동유럽 전체가 위성국가로 넘어갔듯 스웨덴과 노르웨이까지 소련연방으로 떨어질 처지였다. 그만큼 불안했던 정치도 좌파인 사회주의 노동당과 사민당이 합쳐져 중도좌파(中道左派)로 장기집권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른 복지국가에 이르렀다. 그 바탕은 핀란드는 핀란드인의 손으로를 부르짖은 민족주의였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꾸며대는 위선자들에게 민족이 있을 리 없다. 온몸으로 갖은 정성을 기울여 깨우친 김구 선생의 드레진 나라사랑을 평생의 흐름과 제헌국회의 사회 혼란 속에서 살피지 않고 인생 말미로 뚝 분질러 떨구는 허깨비들에겐 지식이 시시때때 따로따로 얻어지는 떡고물인 모양이다.

20세기 동서냉전이 내지른 분단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에게 짓밟혔던 19세기조차 간추리지 못한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나라답게 상대성으로 솎아낼 중용을 취함이 바람직하다. 경제민주화도 치우친 자본주의를 걷어낼 중도에 길이 있다. 째고 가르자면 명분은 끝이 없고, 권력을 위한 보신주의로 치우침을 겉돌았던 우리 역사가 새록새록 알려준다. 공산주의자라 한들 독립운동에 목숨을 드리웠다면 그 뜻은 받들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민족을 짓찢으면 외세의 잘못을 덮어줄 구실만 건네기 마련이다. 미국에게 대한민국은 참 쉬운 나라다. 외교조약을 팔아넘긴 덤터기를 나라를 지켜줬던 은혜만으로 떠받들다 못해 쿠데타나 일으켜 그때마다 빌빌거리며 품에 기어들더니, 이젠 독재자의 딸조차 대통령을 해먹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콧방귀나 뀌어댈 뿐이다. 사대주의자와 친일파들이 지배층으로 들어차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침을 발라가며 제 밥그릇을 지키느라 스스로 쪽박만 깨기 일쑤다. 말 그대로 지배. 더불어 나누는 나라살림이 아니라 저희들이 베푼다는 선민의식이 골수에 박혀 있으니, 어느 구석에도 다스려 가르칠 재세이화(在世理化)를 위한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밝은 빛과 이도여치(以道與治)의 도리가 자라지 못한다. 지배에 치인 피해의식이 이기심을 부추겨 이념만 불러낸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문화이념인 홍익인간이야말로 아직도 제국주의가 들쑤신 상처로 피를 흘리는 국제사회에 사람이 살아갈 흥()을 피워 올릴 중도의 길이다. 그 철학이 담긴 교육과 사상의 자유로 국민의식을, 사회문화를 키워서 닫힌 정치를 열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저마다 떳떳한 주인으로 살아가야 할 민주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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