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그대(요동도사)가 상주하기를, 고려가 예정대로 공물을 바쳤다고 하였다. (당시) 경의 처치는 매우 적절하였다. 고려의 간신인 이인(임)이 그의 주인을 시해하고, 신민들은 그의 당세력을 두려워하여 복종한 것이,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다.....이인 (임) 은 비록 자신이 약속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그의 신절(신하의 절의)는 아직 알 수 없으며,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니, 경과 제장들은 이를 조심해야 한다. 고려가 공물을 바칠 때, 약속과 다른 물품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을 국경에서 되돌려 보내고, 국경을 확고히 지켜, 그들의 술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명태조실록卷一百四十 洪武十四年 十二月 十五日
예전에 그 나라 국왕 량회(懐良親王)이 표문을 받들어 공물을 바치니, 짐은 그를 일본의 정당한 군주로 여겨, 사신을 보내 그 뜻에 답하였다. 어찌 사신이 그곳에 도착하고 이년 동안 구금되었다가, 올해 5월에야 배를 타고 돌아올 것을 알았겠는가. 그가 본국의 상황을 자세히 전하면서, 그곳 군주와 신하들의 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니,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린 군주 (懐良親王) 가 권좌에 있고, 신하(足利義満)가 국권을 농단하며 오만무례하여 친족까지 삼키고, 섬 사람들이 도적이 되어, 안으로는 선량한 이들을 해치고, 밖으로는 무고한 이들을 약탈하고 있다......지금 일본은 예법을 무시하고, 우리 사신을 무례하게 대하며, 혼란을 자초하고 있으니, 어찌 오래가겠는가?
명태조실록卷九十 洪武七年 六月 一日
명실록의 위 두 기사는 홍무제의 고려와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당하고, 명나라 사신 임밀 채빈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홍무제는 고려와의 관계를 끊어버렸고, 이후 고려는 약 11년동안 명나라와의 국교회복을 위해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홍무제는 고려에 대해서 "이인임이 국정을 농단하는 국가"라고 보았으며, 그런 고려를 믿을 수 없다고 보았기때문에 번번히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다가 1385년에 가서야 국교를 회복시킵니다.
한편 홍무제는 1369년 부터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1371년에 가서야 일본 규슈에 자리를 잡은 남조의 懐良親王과 교섭이 성사되어 그를 일본국왕에 임명하고 책봉사를 파견합니다만, 명나라 책봉사가 규슈북부 하카타에 도착 했을 당시에는 懐良親王은 이미 규슈 남쪽으로 도주한 뒤였고, 규슈북부는 북조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들은 구류되었다가 쿄토로 가서 북조와 교섭하고 난 뒤 다시 명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대략 2년 정도걸렸고, 이를 들은 홍무제는 일본의 실권이 국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권신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일본과의 조공관계를 끊어버리고서는 자신의 치세동안에 두번다시 일본과의 국교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홍무제의 대외관계 - 특히 고려에 대한 태도 - 를 보면서, 승질 드러운 홍무제가 약소국을 조공으로 괴롭힌다고 단순히 인식을 하곤 합니다.
근데 사실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관료국가를 지향하던 홍무제입장에서는 고려 및 일본등의 정치상황을 보면서 그 두나라가 "정상적이지 않은 국가"로 보였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을 겁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현재 미국(혹은 우리나라)가 독재 혹은 정치가 혼란하여 내전 중인 제3세계 국가를 보는 시각과 비슷했다는 겁니다(뭐 솔직히 당시 고려나 일본이 그런 상황이기도 했고....).
다만 외교를 할 때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일정부분 상대방에 맞추는 것도 필요한 법인데, 홍무제는 이를 경시했고, 그 결과 그의 제위기간 내내 고려-조선 및 일본은 명나라의 우호국이 되지 않았지요(ex 조선 정도전의 요동정벌 구상, 일본 조공관계 단절 및 왜구의 침략 지속).
첫댓글 폰이 블랙바탕인데 하나도 안보이네요
아무것도 안하고 글만 썼는데….;;
컴맹이라 어떻게 해야할런지 잘 모르겠네요 ㅜㅜ
@배달의 민족 아고 라이트모드 옵션찾아서 글 잘 봤습니다 ㅎ 제가 기능을 더 익혀야할듯
@흑태자 에드워드 해결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잘 보고 갑니다
옙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