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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아들 여창은 뜻밖에 전사한 부왕을 이어 554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써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557년에야 왕자 여창이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어찌 된 일일까? 신라본기 553년을 보면 “7월에 백제 동북방을 공취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10월에 왕은 백제의 왕녀를 아내로 맞아 소비로 삼았다. 554년 7월 백제가 관산성(옥천)으로 쳐들어 왔다. 관산성 군주 각간 무덕과 이찬 탐리가 마주나가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이에 신주의 군주 무력이 고을 군사를 이끌고 싸웠는데 부장인 삼년산군(보은)의 고간 도도가 급히 적을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고 적고 있다.
한편 이 관산성 전투 사정을 백제 본기는 “550년 정월에 성왕은 장군 달사를 보내 군사 일 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뺐었다. 3월에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에워쌌다. 553년 7월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동북변을 빼앗고 신주를 차렸다. 10월에는 왕녀를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554년 7월에 왕은 신라를 치고자 친히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으나 신라의 복병을 만나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왕은 해를 입고 돌아갔다. 시호를 성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일본서기 551년(긴메이 12년) 대목을 보면 “성왕은 백제, 신라, 가라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고 가나구루(한성) 일대의 여섯 고을을 되찾았다.”고 써 있다. 그 후 신라가 백제를 배반하고 한성을 차지하자 백제는 격분한 나머지 신라를 치기 위한 복수전 준비에 들어간다. 우선 왜에게 원병을 청하기 시작한다. 553년 1월 상부 덕솔 시나노 시슈, 간솔 모구라 속돈을 왜에 보내 원병을 청하고, 6월에는 왜가 우찌노오미를 백제에 사절로 보내면서 좋은 말 두 필과 배 두척, 활 50개, 화살 2500개를 보내면서 원군을 왕 뜻대로 보내겠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 554년 12월 기사를 보면 성명왕이 아라의 왜인과 가라 간기들과 더불어 신라 토벌에 쓰일 원군이 도착했고 12월 9일에는 간무레 사시(관산성)를 치기 시작한바 저녁에는 성을 불태우고 이를 무찔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관산성 전투의 앞뒤 소식을 상세히 적고 있다. “왕자 여창이 간무레 사시(관산성)를 치자고 할 때 원로 신하들은 말렸다. 드디어 신라에 쳐들어가 구다무라에 진지를 폈다. 부왕 성명왕은 걱정하면서 아들이 침식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아비로서 딱하고 위로를 하고자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이때 신라는 사찌 마을의 마부고도로 하여금 임금을 치게 했다. 이윽고 임금이 잡혀 예절을 다한 다음에 벤 목은 제 나라 궁 북쪽 섬돌 밑에 묻고 몸만 백제로 보냈다고 한다.
한편 왕자 여창도 적군에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활을 잘 쏘는 쓰꾸시 고을님이 나아가 말 탄 신라 장수를 쏴서 떨어트린 다음에 빗발같이 활을 쏴대자 포위군이 주춤할 때 여창과 군사는 샛길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듬 해 555년 봄 2월에 백제 왕자 여창은 아우 혜를 왜로 보내 ‘성왕이 적의 손에 돌아가셨다’고 전해왔다. 이에 왜왕은 깊이 슬퍼하며 사절을 나니와에서 맞이하고 위로했다. 556년 봄 1월에 백제 왕자 혜가 귀국길에 오르자 여러 대신들이 쓰꾸시의 군선을 이끌고 호위했고 쓰꾸시 히노구니 고을님은 일천명을 이끌고 미데 까지 배웅했다.
이상에서 백제, 신라, 왜가 전하는 관산성 전투를 알아봤으며 백제로서는 온 나라의 힘을 기울인 복수전이었으나 임금을 잃으면서 3만이라는 전사자를 내는 대참패였던 것이다. 다섯 번이나 왜의 원군을 청하면서 전력을 가다듬고 백제가 감행한 이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관산성은 어디일까? 관산성은 간 무라노 사시로 일본서기에 적힌다. 무라는 뫼의 또 다른 말, 사시는 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백제 말이다. 흔히 충남 양수리와 군서면 월전리 사이의 삼성산(속칭 재건상 꼭대기) 높이 303m에 지은 삼태기 꼴 산성인 것이다.
이 곳은 부여 동쪽으로 50km되고, 서울 광주부터 약 50km, 경주로부터 150km되는 지점이다. 대전에서 동쪽으로 10km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 곳 바로 옆을 경부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추풍령 너머 대구, 경주, 부산으로 통하며 백제 수도 위례가 있던 곳 고골이나 광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 이 산성이 있었기에 성왕의 백제는 554년에 이곳을 차지하고 광주의 신라군을 치며 경주를 옥죄는 길목에 있는 이곳을 차지하려 한듯하다. 가야, 왜, 백제의 3만대군은 뜻하지 않던 성왕의 전사와 김무력의 신라원군의 출병으로 이 곳에서 크게 진다.
백제 본기에는 성왕이 재위 32년 되는 554년에 돌아가자 여창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에는 위덕왕(여창)이 557년에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558년 8월 기사를 보면, 여창은 신하들에게 이제 부왕을 위해 출가하여 수도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신하들은 ‘지금 임금님이 수도하는 것은 참 가르침을 받드는 일이 아닙니다. 분별이 없는 짓으로서 나라에 큰 어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 신라는 앞 다투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출가를 하신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인지 앞뒤를 잘 헤아려 주십시오. 몸소 출가하는 대신에 백성 몇 명을 출가토록 하시면 좋겠습니다.’ 여창이 가로되, ‘옳은 말씀이오.’ 라면서 신하와 의논하여 백 명을 출가시키고 많은 비단 깃발 갓을 만드는 등 갖가지 공덕을 쌓았다고 적고 있다.
위덕왕은 554년과 557년 둘 가운데 어느 해에 왕위에 오른 것일까? 일본서기에서 보듯이 여창은 3만이라는 대군을 잃으면서 전쟁에서 패배하고 부왕마저 잃은 자책과 자괴, 비통과 허탈, 절망으로 암담한 나날을 오랫동안 보냈다. 한참동안 왕위에 오를 것을 주저했던 것이다. 돌아간 아버님과 3만이라는 백성의 넋을 달래는 길로 위덕왕은 출가를 고집했고 부처에서 위안과 자비를 간절히 바랬고 이 불심을 일생동안 그는 보듬어 갔던 것이다.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했는데 그는 그 많은 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위덕왕은 고민과 고민 끝에 왕위에 오를 것을 결심했을 것이고 상당한 동안 왕위는 비어 있던 것 같다.
그런데 1995년 10월에 능산리 능사를 발굴 조사하던 가운데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긴 스무 글자에서 위덕왕 즉위 연도가 밝혀졌다.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누이 형공주가 바친 사리”라는 것이다. 이 정해년은 바로 555년이며 삼국사기 기록보다 1년 뒤, 일본서기 557년보다는 두해 앞선 해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에 이곳 능산리에 묻혔을 임금을 위해 이 절이 지어졌다고 볼 때 이곳에는 성왕이 묻혔을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 능사 사리함이 묻힌 형식과 방식으로 왕흥사터의 목탑터에서도 사리함이 나왔으며 이 방식은 그대로 왜로 전수되는 것이다. 또한 사리 함 윗부분은 시울지고 있는데 능산리 널방의 천장이 시울진 것이 있었는데 송산리 무령왕릉의 널방 천장도 마찬가지이며 백제에서 유행하던 솜씨임을 알 수가 있다.
관산성 싸움에서 크게 진 위덕왕은 전쟁에 진저리가 났을 듯하다. 이 때문일까 삼국사기에는 그 재위 기간에 다시는 큰 전쟁 기사가 없다. 두어 번 신라 변방을 쳤으나 번번이 지고 있다. 그 대신 많은 불사를 일으키고 있다. 왕흥사의 건립이 그 하나다. 2000년에 시작한 백제 문화원 주요 유적지를 학술 발굴조사를 하던 가운데 2007년 말에 왕흥사 터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탑터의 크기와 지은 솜씨가 밝혀지고 그 심초석 맡에서 사리함이 들어있는 사리 그릇이 나온 것이다. 함 겉에 적힌 글을 읽고 왕흥사의 건립시기와 봉안과정이 밝혀진 것이다.
사리함은 심초석 남쪽 가운데 끝에 마련된 사리 구멍에 안치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 사리함 겉에 스물 아홉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577년 2월 15일에 백제임금 창이 잃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운바. 이로서 600년에 왕흥사를 짓기 비롯해 634년에 끝났다는 삼국기사와는 달리 서기 577년 2월에 이 절을 짓기 비롯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여기서 나온 사리함에는 세 겹으로 사리병이 들어 있었고 이와 더불어 곁에서 나온 갖가지 보물은 당시의 공예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거둔 사리 공양구는 수가 팔천이 넘는다. 이들 공양품은 대부분이 장신구로 금, 은, 구리, 옥, 유리, 쇠붙이 등 각가지 재료로 만든 것이다.
백제 본기 589년 대목에는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할 때 한 전선이 다모라로 표류하다가 다시 귀국할 때 백제를 거쳐 감에 백제 임금은 물자를 보내 후대하고 아울러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진나라 평정을 축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다모라는 제주도가 아니라 대만이다. 그렇다면 대만인 담모라 섬도 한 때 백제의 다모라가 있던 곳이며 우리 관심을 끄는 대목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역시 598년 대목에서 적기를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는 소문을 듣고 백제는 군도 곧 공격군 길잡이를 자청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이 글귀는 말 그대로 길잡이로서 고구려로 요동을 치고 들어갈 길은 백제는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고 군대를 그곳에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곧 백제는 요서에 군대를 가진 다무로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때 수나라는 사양을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분개한 나머지 기마병을 보내 백제를 치고 든 것이다. 한강 일대를 차지하고 지키던 신라 전선을 따돌리고 그 남쪽 백제 무자리로 급히 쳐들어 온 것이다. 이 해 12월에 위덕왕은 돌아갔으므로 그 바로 직전의 전란이었던 것이다.
태자 아사도 왜에 가 있었으며 침입한 고구려군을 막아낸 장수는 왕제 혜왕의 아들 효순 왕자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효순 왕자의 위세는 충천했을 것이다. 효순 왕자는 위덕왕의 조카였으며 왕위 계승은 아사 태자, 왕제 혜왕 다음이었던 것이다. 왜에 가있는 태자 대신에 그는 아버지 혜왕을 임금으로 밀고 받든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 왕위 계승을 놓고 암투가 있었으나 군 실권을 가졌고 고구려 침입을 막아낸 공로로 위세가 높았던 효순 왕자의 입김은 막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늙은 혜왕은 다음해에 죽고 효순 태자는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법왕이 됐으나 그마저 두 해만에 죽었다.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아사 태자는 그 뒤에 어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위덕왕에는 또 다른 왕자 임성 또는 린쇼 왕자가 있었으며 아사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자 애쓰다가 왜로 망명한 것 같다. 일본에 남은 임성가문의 후손들은 오늘까지도 일본에서 대를 잇고 있는 것 같다. 오오우찌 집안의 족보 기록에 따르면 린쇼 왕자는 위덕왕의 아들이었고 6세기 말 왜로 건너 간듯하나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여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그는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왜로 망명한 듯 하다. 그는 이재에 밝았으며 현 야마구지시 일대에 자리 잡고 살면서 백제와 왜를 잇는 길목에 있으면서 무역을 통해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이 집안은 오오우찌로 알려져 있고 14세기까지 혼슈의 서부와 규슈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대영주였다.
일본 나가노시에는 선광사라는 절이 있다. 해마다 7.8백만명이나 관광객이 몰린다. 그 까닭은 이곳에 모신 아미타 여래 불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1450여 년 전에 백제로부터 금동불상이 처음으로 전수되어 이절에서 모시고 있다. 이보다도 더 우리 관심을 끄는 백제 불상이 있다. 세예초라는 문서를 보면 위덕왕이 아버님 성왕을 그리면서 만들어 왜에 전수한 아미타여래금동상이다. 현재 호류지 절안 유메도노 불전에 모셔있는데 봄가을 두 차례만 공개되는 백제불상이다. 이곳 사적기에 따르면 1500년 전 백제 위덕왕이 보내온 부처님으로 키가 178.8cm인데 머리카락이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고 콧수염까지 있으며 녹나무로 만들고 금박을 한 모습으로 마치 성왕을 닮은 듯 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성왕은 구세 관음 부처로 다시 우리 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왕의 아들 여창은 피 끓는 굳센 젊은이였다. 가까스로 되찾은 옛 한강일대를 신라가 가로채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나구루(한성)와 신라 금성으로 가는 길목인 옥천에 있던 신라 관산성을 3만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554년 봄, 왜군 및 가야군의 지원을 받으며 감행한 전투였지만 광주지방에서 올라 온 신라군에 의해 부왕 성왕이 전사하면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빠진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그는 신라가 보내온 목 없는 부왕 시체 앞에 통곡의 나날을 지냈다. 그는 왕위 계승을 고사하면서 출가할 것을 결심했지만 끈질긴 신하들 간청으로 555년에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뼈저린 패전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3만 군사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불교가 필요했다. 그의 불심은 갖가지 불사와 전쟁 아닌 외교 위주의 시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찬란한 대향로나 공예품에서 당시의 높은 예술의 경지를 볼 수 있고, 일본에 남아있는 옛 절의 목탑이나 건축물에서 백제의 높은 문화를 알아 기릴 따름이다. (김영덕/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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